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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밤중에 찾아온 사람 (요 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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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중에 찾아온 사람 (요 3:1-5) 

     
오늘은 해피데이입니다.
하나님이 행복해 하시는 날입니다. 여기에 모인 모든 분들에게 행복한 날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한 학생이 캠퍼스에서 낮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지나가는  교수님께서 한마디 했습니다. 
“대낮부터 술을 마시는 이유가 무엇인가?”
“전 고민이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술이라도 마셔서 고민과 근심들을 모두 익사시키려고 합니다.”

그러나 교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해는 가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네. 고민이라든지 근심과 같은 녀석들은 최고의 수영선수라서 술에 익사 시킬 수 없다네.”
     
그렇습니다. 술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술로 잠시 잊을 수는 있지만 없앨 수는 없습니다. 술에서 깨어나면 또 근심과 걱정이 몰려 올 것입니다. 나중에는 건강을 걱정하고 알코올 중독을 걱정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데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렇다면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용하는 그것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문제를 해결하려고 사용하는 것들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것의 한계는 무엇입니까?

I. 한계

여기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은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라는 이름의 뜻은 ‘이긴 백성’ 즉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그는 이름에 걸맞은 삶을 살았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 에게 영향력이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공부도 할 만큼 하였습니다. 그는 재산도 있을 만큼 있었습니다. 그는 사회적인 지위도 상당하였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남부럽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흔들어놓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나사렛에서 올라온 한 낯선 사람 때문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행하시는 표적에 대하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 분이 바로 그 분이 아니신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 동안 자신이 걸어온 길이 있었습니다. 혼돈스러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밤에 조용히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니고데모가 살아온 인생은 어떤 것들입니까? 그것이 무엇이기에 무엇이 부족하여 밤에 예수님을 찾아갔습니까?

1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1a그런데 바리새인 중에 니고데모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오늘 성경은 니고데모를 바리새인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바리새파는 당시의 3대 종파 중에 하나입니다. 당시의 3대 종파는 바리새파를 비롯하여 사두개파와 에세네파입니다. 사두개파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당시의 기득권 세력이었습니다. 에세네파는 세상을 등지고 수도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바르게 살려고 애썼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선행에 힘쓰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일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 문제는 아닙니다. 아니, 우리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 교회의 신앙은 보다 더 도덕적이어야 합니다. 힘이 들더라도 그리스도인들은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1. 도덕의 한계가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였던 것은 옳은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이 바르게 산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겉으로 꾸미고 자랑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형식주의를 꾸짖으셨습니다(마23:3).
     
우리의 삶에서 선행은 중요합니다. 선행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힘써야 하는 것들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야 합니다. 교회는 사회에서 선하고 바른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완벽하게 도덕적이지는 못하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문제입니다. 도덕이 사람을 구원하지 못합니다. 이것이 도덕의 한계입니다.

1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1b유대인의 지도자라. 
     
니고데모는 유대 사람의 한 지도자였습니다. 여기에서 지도자란 산헤드린 의원을 가리킵니다. 당시의 산헤드린은 24명의 제사장과 24명의 장로 그리고 22명 서기관 도합 70명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이곳은 법을 만드는 곳이자, 법을 집행하고 거기에다 재판까지 하는 막강한 권력기관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최고 결정기관의 일원이었습니다.
     
힘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의 선한 영향력을 확대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을 자기 개발을 통하여 능력을 발휘하여야 합니다. 그런데 왜 힘이 문제입니까?
     
2. 권력의 한계가 있습니다.
     
권력에 한계가 있다는 것은 누구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권력의 맹점은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것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힘을 가진 사람은 힘으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잊습니다. 권력의 칼이 결국 자신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잊습니다.
     
최상의 부귀와 권세를 누리며 최고의 지혜자라는 명성까지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말년에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 1:2)고 고백한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힘이 있다면 바르게 사용하여야 합니다. 그러나 먼저 힘을 바르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자신에게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근본적인 문제는 권력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을 사용하는 인간의 문제입니다. 

2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2 a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니고데모는 바르게 살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최고의 권위와 힘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사회적 신분과 지위 때문에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랍비하고 불렀습니다. 여기에서 랍비는 유대인들의 선생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선생님으로 알았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이 보내신 분으로 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니고데모의 정중한 질문에 예수님은 직설적으로 대답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그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하여 모르고 있었습니다.
     
3. 지식의 한계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공자, 석가모니, 소크라테스와 함께 세계 4대 성인으로 꼽습니다. 예수님에게는 공자나 석가모니나 소크라테스와 마찬가지로 인류의 스승으로 배워야 할 점이 있습니다. 언제라도 배움은 소중합니다. 자원이 부족한 우리나라가 이만큼 잘 살게 된 것도 교육의 힘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아는 것이 힘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아는 것이 병’이라는 말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앎은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잘못된 지식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더욱이 예수님께는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초월성 때문입니다. 맨 눈으로 태양을 바라보면 눈을 버리게 됩니다. 인간의 좁은 지식으로 예수님을 다 헤아려 알 수는 없습니다. 인간이 가지는 지식이 얼마나 적은 것지를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2절 후반절 말씀입니다.
 : 2b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
     
니고데모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오게 된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행하는 표적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셨던 잔치 자리에 손님으로 참석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는 귀신들린 사람을 말씀 한 마디로 고쳐주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수 있습니다. 그는 지체장애인을 고쳐 주시는 것을 멀찍이에서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니고데모의 관심을 자극한 것은 기적이었습니다. 
     
기적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데 충분합니다. 하지만 생명이 잉태되고 자라고 성장하는 것을 보면서 어떤 사람은 경외감을 가지지만 어떤 사람은 무덤덤합니다. 어떤 사람은 생명의 신비를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같은 일이라도 사람들이 느끼고 경험하는 것은 사뭇 다릅니다.
     
4. 경험의 한계가 있습니다.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경험하였다는 것이 때로는 편견을 키울 수도 있습니다. 체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신비한 경험은 신앙의 깊이를 더할 수 있습니다. 기적과 같은 일이 호기심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신앙의 목적은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달을 바라보라고 가리키는 손가락에 불과합니다.
     
자신의 경험을 소중히 여기되 다른 사람의 경험도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그러나 경험 너머에 있는 실체를 더 깊이 알아가야 합니다. 기적은 구원으로 인도할 수는 있지만 구원을 완성할 수는 없습니다.

니고데모에 대한 본문 말씀 이외의 기록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9:39 말씀입니다.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후, 장례를 지내기 위하여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가지고 왔습니다. 이것은 시신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하여 당시 사람들이 사용하던 것이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을 존경하여 자신의 소중한 재물을 내어놓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부활하실 예수님에게는 소용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시신을 위하여 재물을 사용하였습니다. 값진 것을 사용하지만 결국 썩을 육신을 위하여 사용하는 것은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5. 재물의 한계가 있습니다.
     
물질이 가져다주는 안락함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경제의 유용성을 부정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재산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유일한 기준은 아닙니다. 안락함에 영혼이 질식할 수도 있습니다. 번영이 구원을 가져다주지는 못합니다.
     
돈으로 집을 살 순 있지만 가정을 살 순 없습니다. 
돈으로 시계를 살 순 있지만 시간을 살 순 없습니다. 
돈으로 침대를 살 수 있지만 단 잠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책을 살 순 있지만 지식을 살 수 없습니다. 
돈으로 직위는 살 수 있지만 존경까지 살 수 없습니다. 
     
재물은 유용한 것이지만 한계가 있습니다. 이 한계를 알지 못하고 그것이 모든 것인 것처럼 여기다가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날이 있습니다.

고무줄을 당기면 늘어납니다. 또 당기면? 또 늘어납니다. 또, 또 당기면? 또, 또 늘어납니다. 또, 또, 또 당기면? 또, 또, 또 늘어납니다. 계속 당기면 계속 늘어납니까? 아닙니다. 한계가 있습니다. 계속 늘어날 줄로 알고 계속 당기다가는 끊어집니다. 끊어지면 튕기면서 손이나 얼굴에 맞으면 많이(?) 아픕니다.
     
우리의 인생에 필요한 것이 많습니다. 유용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절대적으로 알고 살아가다가는 아픔을 겪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한계를 넘어서 영원한 삶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인간 구원의 소망은 어디에 있는 것입니까?


II. 거듭남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
     
니고데모는 너무나 당황하여 황당한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세상에 어떻게 어머니 뱃속에 들어갔다가 다시 태어나는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다른 말로 어디에 구원이 있습니까?

3절 전반절 말씀입니다.
 : 3a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누구든지 다시 나지 않으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 거듭나야 합니다.
     
거듭난다는 말은 다시 난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위로부터 난다’는 말입니다. 인간의 구원은 개과천선(改過遷善)으로는 부족합니다. 다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모태에 다시 들어갔다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입니다. 전혀 다른 차원에서 새로 태어나야 합니다. 이것은 위로부터 다시 나는 것입니다. 아래로부터 사람에게서 나는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하나님께로부터 나야 합니다. 

거듭난 사람은 무엇을 보는 사람입니까?
3절 말씀입니다.
 : 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것입니다. 땅에서 난 사람은 땅을 보고, 하늘에서 난 사람은 하늘을 봅니다. 거듭난 사람은 
     
2. 하나님 나라를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함께 계셔서 친히 다스리고 인도하시는 것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죽은 후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제한적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경험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서 저 하늘을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여전히 이 땅만 바라보고 사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육체를 입고 있는 동안에는 지식과 경험에 한계가 있습니다. 불완전하기 조차 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거듭난 사람은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산다는 것입니다. 영원을 느끼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바로 거듭난 사람입니다.

어떻게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습니까?
5절 말씀입니다.
 : 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강조하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 거듭나다는 것입니다. 
     
3. 성령으로 나야 합니다.
     
사람이 거듭나서 하나님 나라를 보는 것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멈춥니다. 고작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은 하나님께서 하실 것을 믿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앞으로 몇 주일 동안 계속 이야기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이성과 지성을 부정하는 종교가 아닙니다. 이성과 지성을 넘어서는 것입니다. 저 너머에서 이곳으로 오셔서 사람을 새롭게 하시는 바람이 있습니다. 다시 살게 하시고 하나님을 알게 하시는 하나님의 숨결이 있습니다. 그 분이 우리를 새롭게 나게 하십니다. 
     
여러분 모두의 가슴에 하나님의 숨결이 일어나 하나님을 알게 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한 왕자가 아버지에게 반항을 하여서, 왕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추방당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른 뒤, 왕은 아들의 운명이 가여운 생각이 들어서 전령들에게 아들을 찾게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전령 중 한 사람이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왕자를 찾아냈습니다. 그는 마을 여인숙에서 술 취한 농부들 가운데 찢어진 셔츠를 입고 맨발로 춤을 추고 있었습니다. 전령이 왕자에게 다가가 절하며 말하였습니다. 
     
“폐하께서 왕자님이 원하시는 것을 알아보라고 저를 보내셨습니다. 페하는 왕자님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들어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왕자는 울기 시작했고 “아, 따뜻한 옷과 튼튼한 신발만 있다면!”고 대답했습니다.
     
마르틴 부버는 이 이야기를 하면서 “자, 이것이 바로 지금의 조그만 필요 때문에 우리가 흐느껴 울고 하나님의 영광이 추방되었다는 것을 잊는 방법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자녀의 자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잃어버린 하나님의 영광을 되찾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 사랑에 감격하는 은총이 여러분에게 있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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