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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23) : 변화산 (마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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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23) : 변화산 (마 17:1-8)


만일 누군가에게 목회하면서 가장 힘든 일이 무엇이었느냐는 질문을 받는 다면 저는 서슴없이 “교회에 오래 나오면서도 전혀 변화가 없는 교우들을 지켜보는 일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교회에는 계속 출석하는 분들을 보면 그 자체가 또한 기적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성도들이 어느 날 홀연히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또한 목회의 더할 수 없는 보람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와 같은 성도의 변화 체험은 두 가지 통로를 통해 우리에게 다가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씀 공부하다가 혹은 말씀을 듣다가 마음이 뜨거워지고 확신이 오면서 변하는 경우이고, 또 한 경우는 기도하다가 어떤 특별한 체험을 하는 경우입니다. 놀랍게 기도의 응답을 받았다든가, 아니면 기도 중에 치유나 방언, 환상, 예언 같은 성령의 은사를 체험한 경우입니다. 

이런 체험들을 포괄적으로 우리는 ‘변화산의 체험’이라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를 변화시키도록 말씀의 자리나 기도의 자리에 머물 줄 알아야 합니다. 문제는 말씀의 자리에도 기도의 자리에도 있으려 하지 않는 성도들입니다. 어떻게 이런 분들에게 변화를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의 본문은 오리지널 변화 산의 체험을 보여주는 장면을 기록합니다. 본문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 형제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더니”(1절) 성경학자들은 지금도 이 산이 어떤 산인가라는 논의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많은 성경학자들은 본문 마태복음 17장이 마태복음 16장의 가이사랴 빌립보의 신앙고백에 이어지는 사건이어서 가아사랴 빌립보와 연결된 헬몬 산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그러나 본문의 사건의 시점이 ‘엿새 후’라고 기록된 것으로 미루어 이 산을 헬몬 산으로 반드시 가정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오히려 교회 전승은 이스르엘 골짜기 북동쪽 산, 나사렛 동남쪽 9,6km 지점에 위치한 다볼 산(Tabor,575m)을 변화 산으로 지목합니다. 

다볼 산 정상에는 이미 서기 4세기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326년 콘스탄틴의 모후 헬레나가 교회를 세움)이 있었고 그 터 위에 1924년에 봉헌된 프란치스칸 기념교회와 또 나란히 그리스 정교회가 세운 채플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산에서의 예수님의 제자들의 신앙 체험을 통해 오늘 우리들에게 왜 변화 산의 체험이 필요한 가를 묵상하고자 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변화 산의 체험’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1. 우리의 궁극적인 변화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의 변화 산상의 체험은 어떤 의미에서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기대할 수 있는 신앙체험의 궁극적인 모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 그러면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 산상에서 목격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은 일차적으로 예수님이 영광스럽게 변모하는 것을 본 것입니다. 

2절입니다.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예수님이 이 세상이 오셔서 사시는 동안 어느 정도 그분은 자신의 신성의 영광을 제한하신채로 사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날 산상에서 예수님의 자신의 본래의 영광을 그대로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영광의 상태 안에 머무시며 구약의 영웅인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대화하는 모습을 지켜봄이 얼마나 감격스러웠던지 제자 베드로는 뭐라고 예수님께 요청합니까? 

4절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만일 주께서 원하시면 내가 여기서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님을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리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우리가 예수의 영광을 본다는 것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광을 바라보고 사는 자마다 그의 영광의 형상을 닮게 되리라고 언약합니다. 고후3:18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쉽게 말하면 영광의 예수님을 바라보고 사는 자는 어느 날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예수님처럼 영광스럽게 변화되어 나타나게 될 것이란 약속입니다. 

기독교 교리는 이 체험을 가르쳐 ‘영화의 교리’(Doctrine of glorification)라고 칭합니다. 기독교 구원의 3대 교리는 칭의의 교리-성화의 교리-그리고 영화의 교리입니다. 바울은 롬8:30에서 이 진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 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마침내 주님 닮은 영화로운 모습으로 주님앞에 서게 되는 것-그것이 바로 변화산의 체험이 가져다 줄 궁극적인 우리의 모습, 우리의 기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날마다 하루 하루 주님을 닮아가는 기대로 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변화의 주되신 예수님께 더욱 순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신앙 체험의 또 하나의 궁극적인 열매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께 순종하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변화 산에 올라 주님의 영광스러운 변화를 목격하게 되었다는 것이 그 날의 결론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산에서 이 신기한 체험이후에 한 음성을 듣습니다. 

5절입니다. “말할 때에 홀연히 빛난 구름이 그들을 덮으며 구름속에서 소리가 나서 이르시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이것이 결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로 순종하는 자로 우리가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주님을 온전히 닮아가는 자로 주님 앞에 서게 됨은 우리가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 분을 따르는 순종의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체험은 체험만으로 끝나서는 안됩니다. 우리의 신앙 체험이 얼마나 건강한 것이었는가는 그 결과로 우리가 주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게 되었는가를 보면 됩니다. 어떤 체험이 우리를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하고 주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했다면 그것은 결코 건강한 체험이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수가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날의 체험의 주인공인 사도 베드로도 벧후1:18-19에서 그의 변화산 체험을 소개하며 그러나 체험이 우리를 이끌어 가야 할 자리는 말씀을 붙들고 사는 자가 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들은 것이라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말씀)이 있어 어두운데를 비치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흥미로운 것은 이 날 변화산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8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 오직 예수-이것이 변화산 체험의 결론입니다. 오직 예수 붙들고 오직 예수의 말씀을 붙들고 살도록 이 체험을 주신 것입니다.

3. 다가 올 삶의 고난을 이길 힘을 얻게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어떤 특별한 신앙 체험을 하면 그날부터 모든 삶의 어려움은 사라지고 하늘 위를 손오공처럼 붕붕 떠다닐 기대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정 반대입니다. 오히려 그런 체험이후에 더 어려운 인생의 고난들을 부딪치게 됩니다. 본문의 제자들이 그러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이 산을 내려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현실은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동료 제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14-20절)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이 사건에 이어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엄청난 다가 올 폭풍을 예고하십니다. 

마태17:22-23절입니다. “갈릴리에 모일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인자가 장차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매우 근심하니라” 

그러면 도대체 왜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변화 산의 체험을 허락하셨을까요? 대답은 명확합니다. 그 변화 산에서 본 영광을 기억하며 오늘의 고난을 승리하기 위해서 인 것입니다. 사실 변화 산의 영광은 우리가 장차 누릴 영광의 궁극적인 모습이라고 말씀하지 않았습니까? 우리의 미래에 그런 영광이 기다리고 있다면 오늘은 좀 힘들어도 오늘은 좀 아파도 견딜 만 하지 않습니까?

롬8:18의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 대조적인 두 쌍의 단어들이 있습니다.

예, <현재와 장차> 그리고 <고난과 영광>입니다. 우리가 현재의 고난에 주저앉지 말아야 할 이유, 장차 예비 된 영광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광의 비전을 바라보고 살줄 아는 사람들에게 고난은 오히려 인생의 디딤돌이 될 수 있습니다. 말틴 루터 킹 목사님이 흑인들의 자유를 위해 일하다가 총탄을 맞고 불과 3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를 아끼는 여러 사람들은 그의 장례식에서 신은 그에게 너무 짧은 시간을 주었다는 조사를 했습니다. 좀더 살아서 그는 흑인들이 자유를 얻고 그가 사는 이 땅에서 인종의 편견을 벗어나 모든 사람들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것을 보았어야 했었다는 안타까운 소감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이 이런 조사를 남겼습니다.(윌리아 페리어)

그는 말틴 루터 킹이 친히 남겼던 말을 인용함으로 조사를 시작했습니다. 

{말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모든 비극중에서 최악의 비극은 젊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일흔 다섯까지 살지만 한번도 진정으로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고 죽는 것, 그것이 가장 큰 비극이라”고. 1929년부터 1968년 까지 말틴이 살았던 39년은 정말이지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자신이 한 일에 결실을 거두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자신을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부모에게 위로를 드리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39년은 자식들이 학교 공부를 마치는 것을 보기에도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39년은 손자를 얻기에도 너무나 짧은 시간입니다. 

그러나 말틴에게 39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인종 차별의 시련을 견디기에는 39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긴 시간이었습니다. 하루에도 마흔 번 씩이나 전화 협박에 시달리는 그에게 39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끊임없는 정치적 압력에 시달리던 그에게 39년은 너무나 긴 시간이었습니다. 조사는 계속됩니다.

말틴에게 39년은 긴 시간이었을 뿐 아니라,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자신을 위협하고 폭탄을 던지는 이들을 위해 기도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정의와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웃들을 깨우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15세에 대학에 들어가 네 개의 학위를 받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결혼하여 네 아이의 행복한 아버지가 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수만 명의 사람들을 모아놓고 수백 번도 넘는 감동의 연설을 남길 만큼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그를 따르는 20만 명을 이끌고 미국의 수도를 행해 자유와 평화의 행진을 이끌 만큼 충분이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그로 하여금 평화와 사랑의 가치를 인류에게 깨우쳐 노벨 평화상을 받게 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그가 노벨 평화상으로 받은 5만 4천 달러를 인류의 평화를 위해 사용하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39년은 그로 하여금 산의 정상에 올라가 인류 평화의 꿈을 꾸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마침내 꿈꾸던 영광의 산, 자유의 산 그 정상에 도달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1963년 8월 28일 워싱턴 메모리얼 광장 100만의 인파 앞에서 그는 “오늘 나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모든 골짜기들이 솟아오르고 모든 언덕과 산들이 낮아지며 울퉁불퉁한 곳이 편편하게 되며 굽은 곳들이 바르게 되고 주의 영광이 밝히 들어나 모든 사람들이 다같이 그것을 볼 수 있는 그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39년은 그 꿈을 꾸기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께서 자신을 믿는 자들을 위해 예비하신 그런 앞날의 영광의 비전을 바라보며 현재의 고난을 잘 승리하고 계십니까? 고난에도 불구하고 꿈을 버리지 않는 인생, 오직 예수님만 붙들고, 그가 보여주는 영광의 내일을 향해 걷는 삶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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