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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일되는 사랑 (고전 13: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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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 되는 사랑 (고전 13:1-13)


1.  사랑의 절대 필요성

“(고전13:1-3)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사람의 인격 즉 정적, 지적, 의지적인 모든 것을 초월한 신비, 신앙, 자선의 제일 되는 품성이다. 이 사랑이 없으면 모든 것이 공허하며 무가치해 진다. 

이 사랑은 「아가페」로서 필리아와 대조를 이룬다. 이 두 낱말은 요 21:15-17의 예수님과 베드로의 사랑의 대화에서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예수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말씀은 「아가페」로 물으시고 베드로는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라는 말을 「필레오」로 대답했다. 즉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가페」를 요구하셨으나 베드로는 「필레오」로 밖에 대답을 하지 못했다. 

2.  이 두 말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가페」는 하나님의 사랑의 본질이다. 하나님께서 이 죄악 된 세상을 사랑하신 사랑이요, 거기에 응답해야 하는 성도의 하나님 사랑이요 성도 사랑이다. 
어학 자인 트렌취라는 분은 「아가페」는 “게시 종교의 품안에서 탄생된 낱말이다”라고 했다. 

반면에 「필레오」는 人情이다. 즉 부자, 혈연, 친구간의 자연적인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의 교회를 섬기다 보니 이 두 사랑을 혼돈해 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와 사람의 인정인 「필레오」는 혼돈하다 것이다. 

목사들에게 이런 일로 목회에 고민이 많다. 그러나 이런 고민을 많이 하는 목사가 좋은 목사다.  
즉 가난한 성도들에게 11조를 바치라고 한다든지, 회사 일도 바쁘고 가정 일도 바쁜데 교회를 잘 섬기라 하고 전도를 하라 하고 기도를 하라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인정으로 봐서는 새벽 기도 하라는 말 못한다. 11조 하라 말 못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을 받자 하니 그 말을 해야 한다. 
그래서 목사가 인정머리 없다는 말을 듣는다. 사실 인정머리 없는 목사가 잘하는 목사다. 인정을 베풀다가는 교인들을 망친다. 

우리 교인 가운데 고3짜리 학생을 둔 부모가 있다. 어머니는 아이 보고 새벽 2시에 좀 더 공부하고 자라고 한다. 그러나 인정 많은 아버지는 12시만 되면 아이 보고 자라고 한다. 아버지는 인정 때문에 아이를 망치고 있는 것이다.

목사는 성도들을 가르칠 때 차마 하기 어려운 말도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경우가 많다.  
 
요즈음 연속 방송극에 ‘정 때문에’라는 드라마가 있다. 
「필레오」는 정이다. 정이라는 것은 세상에 좋은 것이다. 그러나 신앙 생활을 정으로 하면 안된다. 정은 「아가페」 보다 질이 낮은 인간의 사랑이다. 교회는 정(필레오)으로 이루어진 공동체가 아니라 사랑(아가페)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다.

부부는 정으로 만난다. 그리고 자식도 정으로 낳는다. 
30-40년 전에 한국 교회를 부흥시킨 아주 훌륭한 목사님이 계셨다. 대 부흥사이시고 은혜가 충만한 목사님은 가정 생활에 원만하지 못했다. 그래서 목사님 부부는 붙으면 싸우고 이혼을 수 백번을 했다. 목사님의 성격이 어찌나 날카롭고 정답지 못했다. 일년 사시장철 부흥회를 다니시는데 모처럼 집에 오신 목사님이 사모님을 정 있게 대하시지 못하신 것이다.
그래서 사모님은 견디다 못해 한 번은 부흥회를 따라 나섰는데 이불 보따리를 가지고 가셨다. 목사님이 설교하실 때 그 얼굴은 천사와 같았다. 그래서 사모님은 집회를 마친 후에 이불을 강단에 깔았다. 그리고 말하기를 
「여기가 천국이네, 나는 여기서 살아야 목사님과 천국에 사는 것 같을 것이네」 하고 들어 누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한갓 재미있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이야기다. 이 목사님 부부는 사랑의 관계를 잘 몰라서 이런 일이 생긴 것이다. 
부부는 「필레오」의 사랑이지 「아가페」의 사랑이 아니다. 그러므로 목사가 가정에서도 목사가 되면 곤란해진다. 가정에 오면 목사는 남편이 되고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목사님이 부흥회만 다니시다 보니 이 점을 소홀히 하게 된 것이고, 사모님은 강단에서 가장이 이루어 질 수 없다는 것을 모르고 강단에 이불을 깐 것이다. 

“Jesus Christ”라는 무지칼이 있다. 이 무지칼은 하도 유명해서 우리 나라에서도 몇 번씩 공연한바가 있다. 그 내용은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은 이상하게 인간적으로 살아 하는데 주님께서 그 사랑을 받아 주지 않아서 고민한다는 내용이다. 주님의 「아가페」를 막달라 마리아의 「필레오」로 격하시킨 연극이다. 만일 주님이 이런 「필레오」를 했다면 마리아 와와 결혼을 했을 것이고 우리 주님이 도실 수 없었을 것이다.   
목사가 가정에서 「아가페」하면 자식을 낳지 못한다. 남편이 아니라 구세주가 되어 버린다. 
그러나 교회에서 여려 성도들에게는 「아가페」의 사랑을 해야 한다.  이 점을 성도들이 이해해야 할 것이다.

교회 생활은 이런 하나님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정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 생활을 「아가페」로 하지 않고 「필레오」로 하기 때문에 시험에 들고 섭섭하고 기분이 나쁘고 속이 상한다. 「아가페」로 하면 절대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그 이유는 「아가페」의 사랑의 특성에서 잘 나타난다.

3.  사랑의 특성 (고전13:4-7) 

처음 두 구절은 긍정적 말씀이니 오래 참고, 온유하며,
다음 네 구절은 부정적 말씀이니 투기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고, 교만하지 않고, 무례히 행하지 않으며,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으며,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
다음 두 구절은 다시 긍정적 말씀이니 모든 것을 참고, 모든 것을 믿고,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

이런데 누가 누구를 잘못했다고 말할 것이며 누가 누구를 원망할 것이며 누가 누구를 정죄할 것인가?

모세는 위대한 하나님의 종이였다. 그러나 그는 구세주가 아니다. 유대인들은 아직도 그를 그들의 구세주의 모양으로 생각하지만 그는 절대 구세주의 모습을 가지지 못했다. 
모세와 주님 앞에는 원수가 없었다. 그가 생각할 때 하나님 앞에 잘못하는 사람, 그를 반대하는 사람,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 원망하는 사람, 우상을 섬기는 사람은 탐욕스러운 사람들을 여지없이 죽였다. 
10계명 돌 판을 받아 왔을 때, 고라, 아브람, 다난를 처형할 때도 당이 갈라져 그들을 죽인다. 애굽의 바로와 그의 백성들도 모세 앞에는 오직 죽음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의 누나도 미리암도 모세를 비방하다가 문둥이가 되고 말았다. 
모세는 이런 그의 성격과 처신에 대하여 회개도 하고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그런 식으로 쓰셨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는 그렇게 대망 했던 가나안을 들어가지 못했다. 

주님은 모세에 못지 아니한 반대자들과 비방하는 자들과 주님을 핍박하고 죽이는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주님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으셨다. 모두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그들을 포용하셨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죽으셨다.    

이 차이가 무엇인가? 
모세는 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주님은 사랑으로 죄인을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모세는 그가 통치한 40년 광야 시대에 무려 200만 명의 그의 백성이 죽어 가는 꼴을 보아야 했으며 그의 능력과 힘은 그의 시대에 끝이 나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지금까지 죄인을 구원하시고 우리도 구원하셨다. 

그래서 사랑은 영원하다. “(고전13:8-10)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신 「아가페」의 효력이요, 능력이요, 힘이다. 교회는 「아가페」를 하자는 사람들이 모여 주님을 배우는 곳이다. 그런데 아직도 「필레오」를 하면서 섭섭하느니, 잘 했느니, 잘못했느니, 당신 때문이라느니 하면 되는가?  

우리만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를 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도 그랬다. 그는 3번씩이나 천국을 다니면서 예수님에게 특별 과외를 해서 사도가 된 사람이다. 

“(고후12:2-4)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 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그런 그도 주님의 참 사랑을 잘 몰랐다고 했다. 

십년씩이나 주님을 따라 다니면서 배운 베드로도 마지막까지 「아가페」를 잘 이해할 수 없었으며 「아가페」를 할 수가 없어서 필레오라는 말로 대답을 했다. 좋아 한 말이 아니라 그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그렇게 대답을 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들이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오해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 모른다. 그러나 잘한 짓은 아니다. 

바울이 위대한 점은 자기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고치는 그 점이다. 바울은 이런 이야기를 본문에 했다. 

4.  사랑의 효과

“(고전13:11-13)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고전 13장에서 가장 위대하고 감동적인 말씀이 바로 이 말씀들이다. 바울은 말한다. “나는 주님의 「아가페」를 잘 몰랐다. 그럴 때 나는 말하는 것, 깨닫는 것, 생각하는 것들이 어린 아이 수준이 였다. 즉 유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이 였다. 그리니 안다는 것, 한다는 일들이 모두 희미한 거울을 보는 것 같아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잘하는 일인지 잘못하고 있는지 조차 분별이 잘 안 되였고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부분적 밖에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않다. 주님의 사랑을 알고 나서 어른이 되었다. 모든 것이 달라졌다. 얼굴과 얼굴을 보는 것처럼 모든 것이 확실하고 분명해 졌으며 주님께서 나를 알고 사랑하시는 것처럼 나도 주님을 알고 세상의 모든 것을 완전히 알게 되였다. 그렇게 나는 장성했다”라고 말한다.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말씀을 배우고 기도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베드로는 “(벧후1: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라고 하셨고 
바울은 “(고전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하셨다. 

오늘까지 우리는 바울 사도께서 “(엡4:20)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라 말씀하신 데로 바르게 주님을 배웠습니다. 그리고 천국에 갈 때까지 주님을 배워야 한다. 

서두르지 말라.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를 배우는 사람이요 거룩하게 되는 사람이지 거룩한 사람이 아니다. 완전하지 않다. 

바울 사도처럼 우리 다 함께 우리들의 부족을 인정하고 인정이 아닌 사랑으로 교회 생활을 하도록 하자. 그러하면 이해 못하고, 용서 못하고, 사랑 못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  

천국은 사랑으로 용서하고 덮어 주는데서 이루어지는 것이지 따지고 정죄하는 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국은 바로 우리가 있는 이곳에 있는 것이다. 

어느 날 바리세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디 있느냐고 시비를 걸었을 때 “(눅17:20-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하셨다. 이 말씀은 주님을 미워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주님이 계시면 천국이 되고 주님을 믿는 사람 마음도 천국이라 하신 것이다. 

여러분의 교회는 천국입니다. 우리는 다 같이 부족하고 어리석은 죄인이지만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천국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있기 때문에 천국이 되고 저 사람이 있기 때문에 지옥이 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내가 천국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천국을 만드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만드신 천국에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삽시다. 천국 생활을 즐기는 성도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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