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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민족의 시작 (출 2:2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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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시작 (출 2:23-25)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이 있지요. 그런데 마피아는 한 종류만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 영화 대부로 잘 알려진 ‘코사노스트라’는 주로 시칠리섬 출신 사람들로 구성됐고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합니다. ‘알 카포네’로 유명한 시카고의 유명한 마피아는 나폴리 출신의 사람들로 구성됐고 같은 마피아지만 시칠리아 마피아는 시카고 마피아가 하도 사납기 때문에 자기들의 모임에 끼워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탈리아 출신 사람들이 성질이 폭력적이어서 이런 범죄단체를 만든다는 얘기냐. 그건 아니고 마피아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알려면 그들의 과거 역사를 돌아봐야 된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그들의 정부든 그들의 임금이든 지도자가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지도자가 백성을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고 스스로의 배를 채우기 위해서 존재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그들의 도움을 기대할 수 없고 스스로를 보호해야 했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문제 해결의 방법을 찾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보니까 보호해 줄 수 있는 단체를 필요로 하게 되고 그것이 마피아라는 범죄조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화 대부의 서두를 보면 한 이탈리아 이민자가 마피아 보스를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가 미국에 건너와서 열심히 살았습니다. 열심히 돈을 모으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그런데 그만 딸이 불량배들에게 욕을 당합니다. 경찰에 신고해서 그 불량배들이 재판을 받았어요. 그런데 집행유해로 풀려났다는 것입니다. 그때에 그 사람이 미국 사회에 대해서 회의를 느끼고 미국의 정부가 자기를 보호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그래서 마피아의 두목을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서적으로 보면 우리의 조상, 우리 민족과 이탈리아 사람들이 흡사한 면이 있습니다. 소위 민초들이 힘이 없어요.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이 그들을 보호해 주었느냐. 그렇지 않습니다. 민초들은 늘 윗사람들에게 시달렸어요. 그래서 우리나라에 탐관오리라는 말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렇지만 우리의 조상들은 시칠리아 사람들보다는 소극적인 방법으로 대처했던 것 같습니다. 

마음속으로 그것을 품었어요. 그것이 마음속에 한이 되었습니다. 왜 예로부터 우리 조상들은 가장 선호하는 직종이 벼슬이었습니까. 그것은 벼슬이 있는 사람이 제일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권세 있는 자리에 있기 때문이에요. 동시에 우리 민족의 정서에는 반골의식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힘 있는 사람에게 늘 당하면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지도자가 자기들을 도와주리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냐. 아무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것이 가장 불쌍한 사람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를 보면 강도를 만나서 모든 것을 빼앗기고 피 흘리고 있는 사람을 제사장이 보고 지나쳤어요. 서기관이 보고 지나쳤다고 했습니다. 아무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오기 전까지는. 또 탕자의 비유를 보면 탕자가 유산을 탕진하고 가난해지고 아무것도 먹을 것이 없어서 들에 나가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로 배를 채우려고 할 때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또 죄를 짓고 끌려온 여인이 예수님 앞에 끌려 왔을 때 어느 누구도 그 여성을 두둔해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다 그를 탓하고 비난하고 돌을 던지려고 했지 어느 누구도 그를 두둔하거나 변호해 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어떤 특정인을 가리키는 말씀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모습을 말하는 것입니다. 탕자든 강도만난 사람이든 죄를 짓다가 끌려온 사람이든 어떤 특정한 사람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고 모든 인간의 보편적인 상황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강도를 만나든, 모든 유산을 탕진하든, 죄를 지었든 간에 아무도 우리를 두둔해주려고 하지 않고 우리의 상황에 관심을 기울이려고 하지 않고 관심을 갖더라도 도와줄 의사가 없든가 도와줄 능력이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와서 그를 도와주고 그 탕자가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고 그리고 죄지은 여인을 예수님이 사람들이 던지는 돌로부터 지켜주신 것처럼 결국 사람을 궁극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분은 한분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자든 가난한 자든 권세가 있든 없든 그것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결국 궁극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홀로에요. 자녀들이 수능시험 보러 수험장에 갈 때 누가 가서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수술 받으러 수술실에 들어갈 때 누가 옆에 같이 누워있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마음속에 괴로워하고 밤에 잠들지 못할 때 누가 옆에서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 설 때 누가 곁에 같이 서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결국 인간은 결정적인 순간에 홀로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고 나를 돈도 도와줄 수 없고 힘 있는 사람도 도와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시지만 그 상황에서는 부모님도 나를 도와줄 수 없습니다. 

만약에 그런 상황에서 아무도 그를 지켜보지 않고 아무도 그를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것처럼 괴롭고 또 절망적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르트르라는 철학자가 출구가 없다는 책을 썼지요. No Exit. 그 줄거리를 보면 주인공이 어떤 어두운 방에서 의식을 찾는데 아무리 벽을 더듬어 봐도 나갈 문이 없더라. 그래서 출구가 없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상실한 현대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생명을 달라고 요청하지 않았지만 태어났습니다. 남자든 여자든 한국 사람이든 선택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생명은 주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황에서 만일 나를 돌아보는 자가 없고 아무도 내가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야말로 홀로 있다는 얘기입니다. 

성경은 히브리 민족의 조상이 애굽의 종 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모든 나라 모든 민족은 자기 민족의 시작을 말할 때 전부 다 신화라든가 그래서 우리는 임금의 후손이라든가 우리 조상들이 어디를 다스렸다든가 이런 식으로 자기 민족의 시조를 말하는데 유일하게 우리 민족의 조상은 남의 나라의 노예출신이었다 라고 말하는 사람은 히브리 민족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기록을 신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누가 일부러 그것을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누가 일부러 우리 조상이 노예출신이라고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게 사실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것이지요. 제가 김해 김 씨 삼현파인데 저희 작은 아버님이 한번은 족보를 연구하는 단체에 가서 우리 가문의 족보를 알아보셨더니 김유신 장군의 후손이래요. 누가 그걸 믿겠습니까. 아니 김해 김 씨가 이렇게 많은데 그럼 이 많은 김 씨가 전부다 김윤신 장군의 후예라는 얘기입니까. 그건 기분 좋으라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걸 누가 실제로 믿겠습니까. 안 그렇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들의 조상이 노예출신이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이 노예들을 건져서 당신의 백성을 만드시고 선민으로 삼으셨습니다. 이게 성경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경은 인간의 상황을 미화한다고 주장하는데 그건 성경을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상황을 결코 미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더 적나라하게 표현합니다. 인간의 죄든 인간의 고독함이든 고통이든 더 적나라하게 그것을 말하지 결코 인간을 미화하지도 않고 인간의 상황을 미화하지도 않고 도덕성을 미화하지도 않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이 위대하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은 죄인이고 병들고 사람에게는 길이 없는데 하나님이 그를 건지신다는 말씀이에요. 성경의 주인공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이 위대할 수 있지만 그들이 주인공이 아니에요. 다윗이 주인공이 아닙니다. 다윗이 주인공이라면 다윗의 범죄를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주인공이었다면 아브라함의 그 많은 실수를 거론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세가 주인공이었다면 모세가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사무엘이 주인공이었다면 사무엘의 아들들이 아비만 하지 못한 것을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인공이었다면 예수님을 부인하고 또 연약한 순간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사람은 사람이에요. 목회자든 선지자든 세리든 사람은 사람이에요. 사람은 자기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습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보니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화와께로서 온다’고 했습니다. 

내 도움이 내 안에서 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족에게서, 아는 사람에게서, 재벌에게서, 대통령에게서, 미국으로부터 도움이 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로서다’ 어떤 방법으로 도움이 올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어디서 오는지는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사람을 통해서 올 수도 있고 친구를 통해서 올 수도 있어요.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도우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돕지 아니하면 우리에게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apart from me you can do nothing’ 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무력하다고 느끼고 뭔가 일이 풀리지 않고 길이 열리지 않고 마음에 평강을 얻지 못하고 일이 안된다 그러면 일이 안되는 것에만 초점을 맞추려고 하지 말고 더 근본적적으로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를 봐야 됩니다.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을 떠났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너희가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예수님을 떠나는 것이 문제에요. 탕자가 아버지를 떠난 것이 문제입니다. 

그 탕자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내가 아버지를 떠나도 아버지에게 받은 유산이 있기 때문에 이 유산이 나를 지켜줄 것이다.’ 이 유산만 있으면 든든하다고 생각했는데 그 유산이 오래가지 못했어요. 재물이 오래가지 못합니다. 재물이 나를 지켜줄 줄 알았는데 그 재물이 오래가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 재물이 남아있지 않았어요. 그 돈이 남아있었다면 탕자가 탕자가 되지 않지요. 그런데 아버지를 떠났더니 그 유산이 오래남아 있지 않았어요. 그냥 다 없어져버렸어요. 근원으로 돌아가야 됩니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나온 것이 민족의 시작이고 민족의 신앙의 시작이고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의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이것을 구속사라고 부릅니다. redemptive history.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신 역사적인 과정 사건을 구속사라고 하는데 구속사의 본격적인 시작은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사건입니다. 그런데 이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의 도움을 보여주는 표상입니다. 여기 몇 가지 성격이 있습니다. 

첫째는 이것이 혁명이나 반란을 통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에요. 이스라엘이 바로에게 대들지 않았고 애굽 사람들과 싸우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았습니다. 성경 어디에서 이스라엘이 그들을 종으로 부렸던 애굽 사람들을 미워했다는 구절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이것은 폭력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폭력을 행한 사람은 한 사람뿐입니다. 모세가 사십년 전에 애굽 사람을 죽인 것, 그것이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이것은 빽을 통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한국 전쟁 때 빽이 없는 사람은 전쟁터에 끌려가고 빽이 있는 사람은 안 끌려가서 전쟁에서 죽을 때 ‘빽’하고 죽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 백성이 빽을 통해서 구원받은 게 아닙니다. 그들을 알던 바로는 이미 죽었어요. 그들을 기억하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사람이 도와줄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죽고 나니 이스라엘을 모르는 사람이 왕이 되더라는 것입니다. 전혀 다른 생각을 갖더라는 것입니다. 

네 번째로 민족주의 적인 방법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이 민족은 민족이지만 민족주의 적으로 모인 게 아니고 그들의 구심점은 공동의 신앙이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공동의 신앙이 구심점이 된 것이지 그들의 혈통이나 전통이나 가문이나 이런 것, 공동의 과거의 경험이 구심점이 된 것이 아닙니다. 

다섯 번째는 신앙으로 구원을 받은 것도 아니고 다시 말하면 신앙의 힘이 아니고 하나님의 역사로 구원받은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열심히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을 받은 게 아니고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로 그들을 건져낸 것입니다. 여기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의 정성과 열심에 초점을 맞추려고 합니다. 내가 열심히 믿기만 하면 잘 되겠지. 그렇지요. 그러나 결국은 하나님이 허락하셔야지 내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그게 되는 게 아닙니다. 

주도권은 하나님이 쥐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보내시고 하나님이 홍해를 가르시고 하나님이 바로를 물리치셔야지 내 종교적인 열심으로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걸 알아야 됩니다. 만약 우리의 종교적인 열심이 관건이라면 그건 또 하나의 율법이 되는 것이고 공로가 되는 것이고 내 의로움이 되는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나를 구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의지로 되는 것이지 내 노력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한 건 뭐냐. 그들의 고난 중에 부르짖은 것뿐입니다. 유념할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고 그냥 부르짖었다고 했습니다. 23절에 ‘이스라엘 자손은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하나님께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냥 부르짖었는데 그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여기에만 그렇게 말한 것이 아니고 3장 7절에도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에게 부르짖었다고 하지 않았지만 그냥 부르짖었어요.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그들이 부르짖었는데 그것이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걸 들으셨어요. 백성들의 부르짖는 탄식하는 소리를 하나님이 들으신 것입니다. 

가장 불쌍한 사람은 부르짖어도 아무도 들어주지도 않고 고생을 해도 아무도 봐주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절대적인 고독이고 그것이야말로 불쌍한 인생입니다. 만일 그것이 이제껏 모든 인간의 경험이었다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한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누가 굳이 하나님 믿지 말라고 말하지 않아도, 누가 굳이 신앙을 핍박하지 않아도 이제껏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 중에 부르짖었는데 아무도 들어주지 않고 아무도 봐주지 않았다면, 그게 모든 사람의 공통적인 경험이었다면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사라져버렸을 것입니다. 

이건 누가 강조하고 누가 가르치고 설득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여전히 박해나 핍박이나 무신론이나 어떤 것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용수철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처럼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하고 그 기도에 효험이 있는 것을 믿는 이유는 부르짖었을 때 누군가가 대답했기 때문입니다. 이 강도만난 사람이 제사장이 지나가고 또 서기관이 지나가고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이 찾아왔어요. 그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또 탕자가 아무도 그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지만 돌아갈 집이 있었어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아버지가 있었어요. 또 죄짓다가 끌려온 여인이 아무도 그를 두둔해주지 않고 모두가 그를 비판하고 돌을 던지려고 했을 때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셨어요. 예수님이 그 여성을 두둔하지는 않았어요. 두둔할 수 있는 건 없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정죄로부터 뿐만이 아니고 사람들의 돌로부터 그 여성을 지켜주신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 중에는 나는 연줄도 있고 나는 재물도 있고 나는 친구도 많고 나는 기댈 데가 많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계실 수 있지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여러분의 친구가 도와줄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재물이 그때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유일하게 우리의 대언자가 되고 우리를 대신해 주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선한 이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가 돌아갈 집이고 예수님이 심판과 사람들의 던지는 돌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실 유일한 방패요 산성이요 유일한 피난처가 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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