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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강림] 똑똑한 바보들 (고전 2: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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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한 바보들 (고전 2:6-16)
  

제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 중에는 똑똑한 분들이 많았습니다. 100여명 중에 소위 명문대 출신만 수십 명이나 되었습니다. 그 중에 어느 한 목사님 이야기를 해 보겠습니다. 그 분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당당하게 합격한 수재였습니다. 그런데 대학 1학년 때 학교에서 전도를 받아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 분은 법학과를 포기하고 종교학과로 옮겼습니다. 집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합격했을 때 판검사가 나올 거라고 경사가 났었는데, 종교학과라니. 종교학과는 출세와는 거리가 먼 학과였습니다. 확실한 출세가 보장된 학과를 버리고 종교학과로 옮긴 것입니다. 그 분은 집안 어른들의 숱한 반대와 핍박을 무릅쓰고 종교학과에서 신학 공부에 필요한 것들을 배운 후 신학대학원에 들어왔고, 지금은 용인 근처에서 목회를 하고 계십니다. 똑똑한 분이 바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본래는 똑똑한 천재였는데, 나중에 바보가 된 사람을 또 만나게 됩니다. 그 분은 다름 아닌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도 본래 천재였습니다. 그는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공부했습니다. 가말리엘은 당시 힐렐 학파의 거두로서 그의 제자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였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당당히 그의 수하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바보가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자신의 생각을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바보라고 비방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지혜를 설파했지만, 사람들은 그것은 지혜가 아니라고 부인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를 바보라고 놀렸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반응이 당연하다고 여겼습니다. 바울도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할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은 정말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무슨 지혜를 말한 것일까요? 그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했습니다. 

6-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그가 말한 것은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었습니다. 통치자들이 주장하는 지혜, 즉 통치 원리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했습니다. 그 지혜는 감추어졌던 것이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부터 정해 놓으신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지혜, 이게 바로 바울이 말한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사람들에게 바보라고 놀림받지 않는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대신에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지혜를 말했다면 사람들의 놀림 대신 존경을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바보라고 놀림을 받고 미움을 받더라도 자신이 깨달은 지혜를 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실 처음엔 바울도 이 지혜를 몰랐습니다. 그도 이 지혜를 말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바보라고 놀렸고, 미워했고, 심지어 핍박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어느 새 바보들이나 믿는 그것을 누구보다 열심히 믿는 바보들의 대장이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바울이 말하는 것, 즉 하나님의 지혜를 들으면서 바보라고 놀리고 미워했을까요? 왜 그들은 바울이 깨달은 하나님의 지혜를 함께 깨닫지 못했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의 지혜, 하나님의 비밀은 사람의 방법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식과 진리를 알아 가는 방법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경험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손으로 만져 보거나, 냄새를 맡아보거나, 귀로 듣거나, 눈으로 보아서 압니다. 이게 경험을 통한 지식입니다. 둘째는 추론하는 것입니다. 논리적으로, 이성적으로 분석하고 종합하면서, 따지고 생각해서 아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경험할 수도 없고, 추론도 불가능한 것들이 많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내용이 하나님의 지혜가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9절을 보십시오. <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두신 것은 눈으로 보지도 못하는 것이고, 귀로 듣지도 못하는 것이며,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경험과 추론으로 알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떻게 알게 됩니까? 본문은 그 비결을 단순하게 말씀합니다. 즉 성령님의 도우심을 통해서 아는 것입니다. 10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고 했습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의 영이시므로, 하나님의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아십니다. 마치 우리 마음에 있는 깊은 비밀을 다른 사람은 모르지만, 우리 영혼이 다 아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우리 마음을 움직여 알게 하시면 하나님의 비밀을 깨닫게 되고 알고 믿게 됩니다. 여러분, 이 사실을 잘 기억하십시오. 기독교의 진리는 오직 성령님을 통해서만 알고 믿게 됩니다. 

그런데 소위 똑똑한 사람들은 자신의 방법으로 알려고 합니다. 경험과 추론으로 알려고 노력합니다. 자신의 지식을 의지합니다. 똑똑한 사람들, 세상의 지혜가 가득한 사람들은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깨달으려고 노력하다가 포기합니다. 그게 문제입니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 중 한 분인 <어거스틴, Augustinus>도 그랬습니다. 그는 당대 유명한 수사학자였습니다. 로마에서도 가르쳤고, 밀라노에서도 가르쳤습니다. 그는 소시 적에 성경을 읽어본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곤 읽을 가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것이라고 던져버렸습니다. 그 때 그는 성경을 수사학적 지식과 철학적 지혜로 읽었습니다. 

그러나 후에 성령께서 그렇게 도도하던 그의 마음을 흔드셨습니다. 당시 그는 깊은 고뇌에 빠져 있었는데, 아무리 부인하려고 애써도 자신이 더러운 존재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사람들 앞에서는 고고했지만. 뒤에서는 온갖 죄악에 사로잡혀 살았습니다. 그의 마음이 혼란할 때 성령님께서 그를 자극하셨습니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아이들의 노래 소리가 들렸습니다. <집어 읽으라, 집어 읽으라(tole lege, tole lege!>라는 말이었습니다. 그는 집안에 달려들어가 아무 책이나 잡히는 대로 펴서 읽었는데, 그 책은 그가 무시했던 성경이었고, 그가 읽은 구절은 로마서 13장 11절 이하였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그 순간 그는 거꾸러졌습니다. 그의 마음이 열렸습니다. 진리에 대하여 서서히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그 후 그는 암브로우스에게 세례를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습니다. 어거스틴으로 하여금 생명의 진리를 깨닫게 한 분, 그를 바보로 만드신 분은 성령님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지혜로 진리를 알 수 없음을 깨닫고 <나는 알기 위하여 믿는다, credo ut intelligam>는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알고 싶으면 인간적인 지혜로 따지지 말고 무조건 믿으라는 것입니다. 

칠십 평생을 명확한 논리와 문학적 상상력으로 도도하게 살아온 이어령 교수께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것도 성령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그 분이 <지성에서 영성으로>라는 책을 써서 자신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알린 이후로 그 분의 지인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이어령 교수도 바보가 되었군>하고 비방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비방을 들으면서 행복을 느낀다고 했습니다. 그 분도 바보가 되었습니다.

여러분, 바보가 되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끄러운 일일까요?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은 바보가 되어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세상에서는 따지지도 않고 무조건 믿으면 바보라고 놀립니다. 똑똑한 사람들은 요모조모로 따져보면서 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위대하고 소중한 것들은 모두 따지는 대상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봅시다. 어린 아이는 엄마가 차려주는 음식을 무조건 잘 먹습니다. <칼로리는 얼마나 될까, 너무 칼로리가 많아서 비만이 되는 건 아닐까, 이 음식 재료는 모두 국내산일까, 오래 묵은 것은 아닐까, 이 속에 독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이런 것을 따지지 않습니다. 왜 따지지 않을까요? 어머니가 차리는 밥상은 위대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똑똑함이 사라집니다. 

아무리 존경받는 석학이라 하더라도 일자 무식의 어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절을 올립니다. <왜 어머니는 무식한가, 왜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이것저것을 해 주지 않았는가>를 따지지 않습니다. 다가오는 주름살 가득한 그 분을 볼 때 <저 분이 내 어머니가 맞는지 유전자 검사를 해 볼까> 이런 생각 따위는 하지 않습니다. 멀리서 그 분의 모습이 보이면 달려가서 <어머니, 엄마>하면서 끌어안습니다. 그 순간 모든 똑똑함은 사라집니다. 오직 사랑과 신뢰만이 있을 뿐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도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위대한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아버지입니다. 성경 말씀은 그 사랑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주신 러브레터입니다. 그 안에 구원의 진리, 삶의 진리, 행복의 비결, 인생을 아름답게 사는 모든 도리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그 말씀을 받을 때 감격할 뿐, 따지지 않습니다. 그냥 그대로 믿습니다. 우리 안에 이런 믿음이 생기는 바로 그 순간은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고 계신 순간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신 것, 그리고 부활하신 것,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것, 성도는 이 세상에서 아름답게 덕을 세우면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 등을 믿게 된 것은 모두 성령님의 도우심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런 은혜를 받았고, 우리도 그렇습니다. 

바울은 12절에서 자신이 성령을 받았다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세상의 영은 똑똑함을 추구하는 영입니다. 이런 영을 받은 사람들은 똑똑한 게 최고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 기준으로 하나님과 성경을 보면서 <믿을 수 없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 즉 성령님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믿게 됩니다. 더 이상 증명하려고 노력하지 않습니다.

그 뿐 아닙니다. 바울은 전도와 사역도 성령님을 통해서 했습니다., 자신의 말재주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무슨 말일까요? 바울은 사람들을 가르칠 때도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했습니다. 자신의 지식이나 지혜로 하지 않았습니다. 저도 지금 이 시간, 제 지식이나 지혜가 아니라, 성령님께서 교우님들의 마음에 함께 하셔서 하나님의 진리를 깨닫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오늘날도 여전히 육적 지혜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적인 일을 무시하거나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분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진리를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교회 안에도 그런 분이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를 인간적 지혜로 들여다봅니다. 이런 분들은 교회를 신앙의 덕으로 섬겨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원리, 예컨대 기업 마인드로 운영하려고 합니다. 지나치게 합리성만 추구합니다.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상처를 받습니다. 교회는 기업이 아닙니다. 기업 정신으로 하면 어렵게 모아 쉽게 나누어주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거라사의 귀신들린 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돼지 이천여 마리를 기꺼이 희생시켰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에는 똑똑한 지혜자보다 사랑이 많은 바보가 필요합니다.

가정도 그렇습니다. 너무 똑똑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그렇지 못한 자녀를 몰아붙입니다. <왜 공부를 못하느냐, 왜 이웃집 아무개 보다 못하냐, 네 밑에 들어간 돈이 얼만데, 겨우 이것 밖에 못하냐>고 경제 원리로 몰아붙입니다. 그 와중에 아이의 영혼과 인생이 시들어 죽어갑니다. 똑똑한 부모들이 저지르기 쉬운 실수입니다. 

이런 똑똑함보다 더 필요한 것은 신앙과 사랑입니다. 하나님께서 아이에게 주신 또 다른 달란트, 또 다른 길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아이가 내 자녀이기 이전에 하나님의 자녀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의 원리로 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아이를 그렇게 키우면 안 된다>고 비웃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보스런 믿음과 사랑의 부모가 똑똑하고 살벌한 부모 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을 키워낼 수 있습니다. 

여러분, 바보가 되어 보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는 여러분들을 바보들의 축제로 초대하고자 합니다. 그 축제는 성령님께서 열어주십니다. 우리 교회가 그 축제의 현장이 되길 원합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바보들을 통해 세워져 왔습니다. 사자굴에 들어갈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한 다니엘은 바보였습니다. 모두가 예수님을 적으로 간주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예수님을 찾아와 영원한 생명의 비밀을 배웠던 니고데모도 바보였습니다. <나를 따르라>는 한 마디 말씀에 배도 그물도 다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간 제자들,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같은 사람들은 바보였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신사참배를 끝까지 거부한 주기철 목사님, 두 아들을 죽인 원수를 아들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님도 바보입니다. 토요일마다 아픈 몸을 가지고 교회 청소를 하시는 봉사자들도 바보입니다. 나 살기도 피곤한데 다른 사람의 집을 찾아가 <예수님을 믿으세요>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바보입니다. 바쁘고 피곤하지만, 이 주일에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모두가 다 바보입니다.

그 뿐입니까? 성령님 안에서 바보가 되면 정말 바보 같은 행동을 하게 됩니다. 자신도 배고프면서도 남을 먹이기도 합니다. <너 바보야? 그래 그 녀석에게 좀 따져 보지 그랬어. 쫌 쏘아 붙여주지, 그냥 왔단 말이냐? 한심하다. 그래 넌 할 말도 못해?> 이런 비난을 들으면서도 <내가 참지>라고 생각합니다. 애써서 벌고, 먹지도 입지도 않고 아껴 모은 돈을 어려운 선교 현장을 위해 바칩니다. 아무리 보아도 바보입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성령님께서는 그 날 다락방에 임하셔서 사람들을 바보로 만드셨습니다. 그 바보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주역이요, 세상을 변화시키는 창조적 소수요, 사람들에게 감동을 안겨주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똑똑한 맛에 사는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길 원하십니다. 성령님 안에서 바보가 되십시오. 인생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리고 한없이 행복할 것입니다. 삶이 성결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 천국에서 똑똑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반면에 세상에서 똑똑하다고 자랑하던 사람들은 마지막날 자신들의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행복한 바보가 되게 하시는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임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모두 누가 더 바보인가를 경쟁하면서, 바보들의 찬가를 부를 수 있길 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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