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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의 힘 (마 18: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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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의 힘 (마 18:15-22)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의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용서하는 자는 천국을 누리는 자입니다.”

우리가 매주일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은 천국의 비밀에 대해서 아주 상세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식적인 사역을 시작하신 이후 선포하신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주옥같은 산상수훈과 다양한 천국 비유를 통해서는 천국 백성으로서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처럼 천국의 비밀을 구체적으로 펼쳐 보이신 까닭은 우리가 앞으로 영원한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데 있어 예행연습을 시키시기 위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삶이란 단순히 죽음 이후에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 땅에서도 천국 백성으로서 살아가는 것임을 강조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천국 백성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아주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바로 용서의 삶입니다. 그런데 이 용서를 실천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자신이 큰 상처를 받고 고통을 당하면 그에 대한 복수를 하고 싶은 것이 인간의 심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오늘 말씀을 통해 이를 뛰어넘으라고 하십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 자녀 된 자로서, 천국 백성 된 자로서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용서의 메시지를 전하신 까닭은 용서가 주는 놀라운 힘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이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용서의 힘이 무엇인지 사실적으로 발견하고 참된 천국 백성의 영적 정체성을 회복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 생명을 회복시키는 용서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증하게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마 18:15~17) 이 말씀을 그저 교회공동체 안에서 어떤 문제를 일으킨 자를 징계하거나 치리하는 내용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세 번 정도 권면했는데도 듣지 않으면 쫓아내거나, 당시 사람들에게 멸시와 조롱을 받던 이방인 및 세리와 같이 취급하라고 단순히 해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핵심은 교회공동체 안에서 지체가 어떤 실수를 했을 때 흉을 보거나 조롱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끝까지 최선을 다해 도우라는 것입니다. 항상 생명 살리는 관점에서 해석해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가슴이 우리의 가슴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교회공동체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자신과 체질이 맞는 사람도 있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서로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문화가 다르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 속에 있는 것입니다. 사단은 이런 환경을 아주 잘 이용하여 교회공동체가 oneness 되지 못하도록 공격합니다. 본문 15절을 보면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는데 다른 사본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이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즉 용서란 제3자 입장에서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을 때의 경우에 해당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아픔이나 상처를 주는 행동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를 용서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이라도 원수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관계가 불편한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미운 사람을 향해 분노의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은 자기 자신을 먼저 상하게 만듭니다. 분노의 마음을 품으면 품을수록 자신을 죽이는 것입니다. 실제 과학적인 임상실험 결과도 이를 입증하고 있습니다. 원한의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많은 긴장을 유발하여 면역체가 파괴되고 신체에 손상이 온다는 연구 결과가 있습니다.

용서는 창세기 3장 사건으로 인해 뒤틀린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 앞에 범죄한 인간에게 제일 먼저 찾아온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과의 관계도 뒤틀렸습니다. 부부간, 형제간, 부자간에 계속적으로 문제가 찾아온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이러한 문제 속에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는 것이 바로 용서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은 이런 용서의 상징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인간 스스로 씻을 수 없는 죄 문제가 용서된 것입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 자녀 된 우리는 이제 용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판 것을 조건 없이 용서했습니다. 요셉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셨나이다.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라며 놀라운 용서의 고백을 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을 죽이려고 집요하게 따라왔던 사울 왕을 용서했습니다. 다윗이 얼마나 큰 위협과 어려움 속에 있었는지는 시편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분노와 미움을 넘어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사울을 용서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을 향해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라며 기도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한 자의 모습입니다. 이러한 스데반의 모습을 통해 누가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시대적 전도자 바울이 변화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커다란 복음의 확산이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용서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통로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관계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한계를 두지 않는 용서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1~22)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한 교훈을 가르치고 계실 때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 한 마디 말을 했습니다.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당시 랍비들은 어떤 잘못에 대해 세 번까지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베드로는 이러한 당시 율법과 전통을 넘어 자신은 일곱 번까지 용서를 하겠다고 의기양양하게 말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의 예상을 깨는 충격적 답변을 주셨습니다. “일곱 번뿐만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은 용서에 어떤 한계나 제한을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조건 없이 끝까지 용서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라는 말씀입니다.

이어 예수님께서는 23~24절에서 한 가지 비유를 드셨습니다. 어떤 주인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었는데 그는 이 돈을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었습니다. 당시 한 달란트는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약 6천 일, 대략 16년을 꼬박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었습니다. 그러니 만 달란트는 그 사람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금액이었던 것입니다. 이 주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아무런 조건 없이 빚을 탕감하여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나가다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를 만났습니다.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으로 백 데나리온은 백 일치에 해당하는 품삯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이가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을 갚지 않는다고 하여 동료를 감옥에 가둬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본 다른 동료들이 주인에게 가서 고했습니다. 그러자 주인이 크게 노하여 그 종을 다시 감옥에 가두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론을 내리셨습니다.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이는 용서하지 못하는 자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비유에서 일만 달란트는 우리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 즉 원죄를 상징합니다. 그리고 백 데나리온은 우리가 세상에서 받는 상처, 분노, 미움, 억울함 등을 가리킵니다. 이에 얽매여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 뜻에 전혀 맞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복음의 가장 큰 특징은 용서에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이 시간 무조건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용서받고 용서하는 것이 복음입니다.

사도 바울은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고 말했습니다. 또 평신도 신학자 C. S. 루이스는 “크리스천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한다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용서하셨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이 용서의 감격이 사실적으로 누려지는 만큼 용서의 삶을 살게 되어있습니다. 모든 성도 여러분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계와 조건을 두지 않는 용서의 복음 속으로 들어가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론] 

‘게슈탈트 법칙’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습니다. 게슈탈트는 형태, 모습이라는 뜻을 가진 독일어입니다. 이를 쉽게 설명하자면, 사람이 사람을 바라볼 때 어느 정도 거리에서 보느냐, 어느 조명 아래에서 보느냐에 따라 예뻐 보이기도 하고 못나 보이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여성의 경우 달빛 아래에서 보면 더 예뻐 보이는데 이는 단점이 희미한 빛 때문에 가려지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4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바라보면 0.3 정도의 시력으로 보는 것과 같아서 나쁜 점이 가려져 더 예뻐 보인다고 합니다.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그대로, 우리의 생각 그대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조명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관점으로 보아야 자신을 넘어 상대방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이 항상 그리스도 중심의 삶을 살아감으로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용서의 힘을 체험하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아버지 하나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용서의 힘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성도들이 용서할 수 없는 용서하는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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