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행복한 삶을 위하여 2 (눅 15:11-32)

  • 잡초 잡초
  • 141
  • 0

첨부 1


행복한 삶을 위하여 2
눅 15:11~32   2010, 05, 23    홍인덕 목사


어떤 아버지가 반에서 맨 날 꼴찌 하는 아들을 두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에게 
“기말고사 때는 꼴찌에서 벗어나라. 그렇지 않으면 부자간의 인연을 끊겠다.”고 말했습니다. 
기말고사가 끝나고 아들이 집에 들어오자 아버지가 물었습니다. 
“시험은 어떻게 되었니?” 
그러자 아들 왈 
“저 … 누구세요?”

낮은 울타리에 실린 어느 분의 간증입니다.
하루 중 차안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은 나는 이 시간을 주로 찬양 테이프를 듣거나 방송설교를 듣는 등으로 할애한다. 활기 찬 찬양을 들으며 새로운 힘을 얻기도 하고 방송설교를 통해 오늘의 생활방향을 결정짓기도 한다. 그러나 서울 같은 대도시에서 운전을 하면서 기쁨과 평안이 유지되기를 바란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그날도 올림픽도로를 타고 잠실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물론 고급차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몇 년을 공들여 모은 자금으로 마련한 것이기에 한껏 행복감에 도취된 요즘이었다. 더구나 어제 세차를 해서 그런지 내가 목욕이라도 한 듯 가뿐한 느낌으로 출근하는 중이었다.
역시 찬양 테이프를 들으면서다. 흘러나오는 찬양을 들으며 흥에 겨워 따라 부르고 있었다.
“찬양하세, 찬양하세, 왕께 소리 높여 찬양 드리세…….”
그런데 갑자기 옆 차선을 달리던 하얀 승용차가 깜빡이등도 켜지 않고 느닷없이 끼어드는 것이 아니가?
“아니, 저 새끼가!”

찬양을 부르던 입에서 순간적으로 욕설이 튀어나왔다.
찬양을 부를 때의 평안함, 기쁨은 온데간데없고, ‘쫓아가서 욕이라도 한마디 퍼부어 줘야지’하고는 뒤를 바짝 쫓아갔다. 도대체 버르장머리가 되어먹지 않은 놈 같았다. 사고를 낼 뻔 했는데도 사과 한마디 없이 태연자약하게 차를 몰고 가다니, 급해서 그랬더라도 손 한번 흔들어주면 덜 약 오를 게 아닌가?
그러나 일 킬로 쯤 쫓아갔을까? 나는 혼자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찬양하세…….” “아니, 저 새끼가!” 
백주의 추적을 포기하고는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찬양 테이프를 껐다.
속도를 줄였다. 왕께 찬양 드리자고 외친 소리를 채 끝맺기도 전에 욕설로 마감해 버린 찬양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비그리스도인들에게 제일 듣기 싫어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냐?’라는 지적입니다. 우리가 한번이라도 그런 지적을 받게 되면 심리적으로 위축이 되고 죄의식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께 죄송하게 느낍니다. 목사의 자녀들이 정서적으로 비뚤어지기 쉬운 이유가 어려서부터 ‘목사의 자식이 왜 그 모양이냐?’ 라는 말을 듣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 말이 그렇게 심리적으로 상처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당황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신앙의 효험에 대해서 의문을 갖습니다. ‘나는 내가 예수님을 믿고 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러나 내가 정말로 달라진 것이냐, 아니면 무늬만 달라진 것이냐, 아니면 내가 내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니냐?’ 이런 고민을 하게 되는데 이런 고민이 유익할 수도 있고 무익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변해야 하는지는 삼척동자라도 압니다. 세상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당연히 착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경건해져야 된다고 생각하고, 예수님을 닮아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건 세상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사람이 예수님을 믿으면 어떻게 달라져야 되느냐를 강조하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으면 무엇이 달라지느냐, 무엇이 이미 달라졌느냐 이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을 공부해야 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게 될 때 본인이 알든 모르든,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본인의 삶 속에 아주 중요한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것은 사람이 일으키는 변화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시는 변화입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의 사랑장을 사도 바울이 젊은 나이에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에요. 사랑에 대해서 젊은이들은 열광은 하지만 사랑에 대한 깨달음은 나이가 들어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때 비로소 사랑이 무엇인가 깨닫게 되고 그리고 그것을 실천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많은 고민들은 우리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저절로 없어질 것들이 많습니다. 마치 무엇과 같으냐하면 발 냄새와 같습니다. 젊은 사람은 발에 땀이 많이 나기 때문에 발에서 냄새가 많이 납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땀이 줄어들기 때문에 저절로 냄새가 없어집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많은 문제들도 우리가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저절로 없어질 것들이 많아요. 부부간에 많이 다투는 부부도 나이가 들고 철이 들면 포기하는 법도 배우고, 또 항복하는 척 하는 법도 배우고, 상대방의 말에 양보하는 법도 배우고, 또 갈등을 피하는 법도 배우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하기 때문에 더 이상 싸울 이유가 적어집니다. 

하지만 요즘은 그렇게 되기까지 기다리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자기 입맛대로 모든 것을 맞추려고 하고 그것이 어렵다 싶으면 애당초 포기해 버리고 갈라서고 맙니다. 그런데 세상에 내 입맛에 맞출 수 있는 것이 몇 가지나 되나요? 

우리는 본문을 탕자의 비유라고 해서 두 아들을 탕자라고 비난하고 아버지를 기다리는 아버지로 위대한 사랑으로 가득한 아버지로 묘사를 합니다. 하지만 역지사지라고 입장을 바꾸어놓고 한번쯤 생각할 필요도 있다 싶습니다.

둘째 아들이 집을 떠나고자 했던 이유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우리는 흔히 이 아들이 집을 떠나 허랑방탕하다가 실패하고 다 망가진 데에만 관심이 집중됩니다. 하지만 이 아들이 이렇게 망가지려고 집을 떠난 것은 아닙니다. 둘째가 집을 떠나기까지 그 마음에 아픔이 없었겠습니까? 오히려 그 누구보다도 아픔이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그는 둘째일 뿐입니다. 항상 첫째의 그늘에 가려져 있습니다. 

성격적으로 보아도 첫째는 비교적 신중하고 자기의 마음을 속으로 감추고 있는 그런 사람이라면 둘째는 쉽게 자기를 드러내고 또 인생도 즐길 줄 아는 그런 사람이요 그래서 일도 자주 저지릅니다. 그러니 첫째와 둘째는 언제나 비교가 되었겠죠. 누가 더 상처가 되었을까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집안에서의 위치는 아무리 뭐라 해도 둘째는 둘째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숨이 막혔는지도 모릅니다. 

항상 소심하고 신중한 형과 비교가 되는 것도 싫습니다. 그저 나는 나일뿐인데 매사에 비교가 됩니다. 쉽게 일을 저지른다고 하는 것도 그에게는 그만큼 모험심이 있다는 뜻도 됩니다. 일을 저지른다는 관점에서만 보면 말썽꾸러기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는 진취적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가 아버지를 졸라 집을 떠나 소위 독립하고자 했던 것도 저가 얼마나 지혜롭고 계획적인 사람인가를 잘 보여줍니다. 아버지의 품을 떠나 독립하고자 하는 그 용기가 사실은 그 마음속에 숨겨져 있는 오랫동안 받아온 상처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보십시오. 

아버지는 많은 일꾼들을 거느리고 있는 주인입니다. 아마 상당한 위치에 있는 사람일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이 둘째에게는 항상 아버지는 그런데 너는 왜 그러느냐고 하는 비난이 퍼부어졌을 것입니다. 그만하면 살만한데 뭐가 불만이냐? 내가 너 같으면 불만일게 아무 것도 없겠다. 하지만 아이는 아이일 뿐입니다. 부자인 것도 아버지고 사회 유지인 것도 아버지일 뿐 아이는 그거 아이일 뿐입니다. 그런데 다 같은 일을 했어도 아이에게 주어지는 평가는 다릅니다. 사장 아들 하고 기사 아들하고 싸웠다고 합시다. 그러면 반응은 둘 중 하나입니다. 

어떻게 저런 천한 기사 아들 하고 싸울 수가 있냐고 하거나 어떻게 감히 사장 아들하고 싸울 수가 있냐는 것입니다. 아니 아이들이 서로 싸우는데 거기에 사장 아들이 무슨 상관이고 기사 아들이 무슨 상관입니까? 목사 자녀와 평신도 자녀와 함께 어울리다가 어떤 일이 생겼다고 하면 아니 평신도 자녀라면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어떻게 목사 자녀가 그럴 수가 있냐고 합니다. 그건 중직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가 목사고 중직자고 평신도일 뿐이지 아이들은 그냥 아이들일 뿐입니다. 그런데 비난은 그중의 어느 한 아이에게로 몰릴 뿐입니다. 그건 칭찬도 마찬가지입니다. 칭찬이 고르게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 부모와 관련시켜서 다른 아이에게는 칭찬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어떤 아이에게는 칭찬조차도 사치입니다. 왜 누구는 같은 일을 하고도 칭찬을 받는데 누구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까? 

누가 누구를 그렇게 했다고 합니까? 하지만 자녀들은 민감합니다. 첫째와 둘째와 셋째가 느끼는 것이 다릅니다. 부모가 자녀들에게 골고루 사랑을 준다고 하지만 이삭과 그 아내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서로 편 들 듯이 그렇게 자녀들을 대하는 태도에 차이가 있습니다. 매사에 너는 첫째니까 너는 둘째니까 너는 셋째니까 너는 막내니까 이럽니다. 물론 첫째가 당연히 나이는 더 많겠지요 그래서 더 대접을 받기도 하고 더 욕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같이 했다면 같이 칭찬을 받아야 하고 야단을 맞으면 같이 야단을 맞아야 하는데 아닙니다. 

한번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건 내 집 아이들만이 아닙니다. 다른 집 아이들과 어울리는 과정에서도 다른 집 아이에게는 보다 칭찬을 많이 하면서도 내 아이는 비난 쪽이 많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다른 집 아이들은 밖에서 보이는 모습뿐이기 때문입니다. 내 집 아이는 사소한 것까지 부모가 다 압니다. 하지만 다른 집 아이는 그 집 안에서 어떤지 모릅니다. 그러니까 드러난 겉모습만 가지고 부모들은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우리 아이는 어떤 데 댁의 아이는 어떻다고 하면서 이야기를 하면 아이들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마음에 상처가 쌓이게 되는 것입니다. 단지 차이가 있다면 여기 둘째는 집을 떠나 독립했다는 것이고 첫째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것도 당연합니다. 그 당시 유대의 법으로는 부모 재산의 절반은 장남 몫입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가지고 남은 자녀들이 나눕니다. 형제가 둘 뿐이면 2/3는 장남 몫이고 둘째 몫은 1/3뿐입니다. 

더군다나 첫째가 하는 말이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었다”고 할 정도로 첫째는 철저히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는 모범생이었지만 둘째는 돌출 행동이 있었을 수도 있고 어쩌면 둘째가 생각하기에 부모의 관심이 온통 첫째에게만 가 있는 것으로 보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둘째가 집에 머물러 있을 수만 있었겠습니까? 아마 집을 떠나고자 결단하기까지 속으로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충동적으로 일을 저지른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 아이는 당당하게 아버지에게 사업 자금을 요구할 정도로 어찌 보면 생각이 있는 아이였습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멀쩡하게 살아계신데 유산을 미리 달라고 할 수 있냐고 그런 불효막심한 녀석이 어디 있느냐고 하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요즘은 안 그런가요? 아버지에게 조금 자금이라도 있다 싶으면 와서 사업 자금을 대달라고 졸라대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아니 집이나 땅 팔아서라도 아니면 저당 잡혀서라도 자금을 대달라고 하지를 않습니까? 오죽하면 떠나고자 했겠습니까?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멀리 떠났다고 하는 것은 요즘 식으로 말하면 투자 이민을 떠난 것입니다. 

일을 저지르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도 없습니다. 일을 저지르게 되면 물론 꽝도 있겠지만 그중에는 결과적으로 성공하는 사람도 있는 것입니다. 한데 둘째는 아버지에게 받은 재산을 정리해서 며칠 만에 멀리 떠날 정도로 계획성도 있고 결단성도 있습니다. 그걸 결코 충동적으로 저지른 일로만 보지 말자는 말입니다. 비록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결과적으로 망가진 모습으로 돌아왔지만 그건 망가진 것이 아닌 귀한 교훈을 얻은 것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가 다시 돌아올 수 있었다 돌이켰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었기 때문이라는 말도 되지만 그만큼 성숙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의 생각과 말투를 보십시오. 단지 한 가지 아쉬움이 있다면 그는 자기의 힘든 것만 생각했고 자기의 진취적인 앞길만 내다보았고 지금 자기가 하고 싶은 것만 생각했지 그 아버지나 어머니가 그에 대해 받게 될 아픔은 헤아리지 못했다는 것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건 누구건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실패하고 망가진 모습으로 거지꼴이 되어 돌아왔지만 반대로 그가 크게 성공을 해서 마치 개선장군처럼 돌아왔다면 어땠을까요? 그래도 여전히 아버지의 마음 한편 구석에는 아픔이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식이 떠나기보다는 먼저 내가 떠나보냈어야 되는 것은 아닌가? 내가 자식의 아픔을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는 그 아픔은 가슴을 칼로 도려내는 듯한 아픔입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입니다. 떠나는 것이 아닌 아버지의 곁에 있을 때 그것이 더 큰 복이라는 사실을 아버지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둘째가 다시 돌아왔을 때 더 이상 아버지가 세상에 계시지 않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버지가 그런 둘째를 가슴에 품고 아파하다가 세상을 떠났다면 그 상처를 무엇으로 달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동구 밖까지 나가 이제나 저제나 하고 기다리고 계신 아버지를 첫째가 몰랐습니까?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무엇 하나 나는 이렇게 하고 싶습니다 하는 말을 하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이것 역시 상처입니다. 아픔입니다.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말을 못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꿈을 접어버린 아픔은 평생 상처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만 너무 속상해서 집에도 안 들어가고 화를 내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둘째가 집을 떠날 때 아버지가 둘째에게만 재산을 나눠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첫째에게도 나눠 주었습니다. “그 둘째가 아버지에게 말하되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하는지라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 그렇다면 뭐가 속상합니까? 둘째의 아픔만 헤아리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는 것입니다. 그저 아버지에게는 둘째 밖에 없구나 하는 생각 때문에 첫째도 힘이 든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아버지에게는 둘째만 생각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린다는 것은 또 다른 말로는 첫째에 대한 신뢰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첫째는 자기의 마음을 한 번도 헤아려주지 않는 아버지가 야속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차라리 말을 하지 그랬냐고 하겠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데 멀리 떠나 망가지고 있는 둘째 소식을 들으면서 아파하는 아버지를 아는데 어떻게 그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신나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해 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오죽하면 지금 작은 아들이 돌아온 이때 속에 담아두었던 마음을 터뜨리고 있겠습니까? 

아버지인들 그런 큰 아들이 안쓰럽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인들 큰 아들에게 “얘 친구들 불러서 함께 좀 노는 시간도 가지려무나. 내가 염소라도 한 마리 잡을 테니 그렇게 하렴” 하고 말하고 싶지 않았겠습니까? 한데 둘째가 눈에 밟히는 걸 어떻게 합니까? 그렇게 친구들과 잔치하는 큰 아들을 보게 되면 더 둘째 생각에 어두운 안색으로 가득할 텐데 억지로 웃어가며 “즐겁게들 놀아라” 한들 그 친구들이 즐길 수 있겠습니까? 

어쨌든 진취적인 둘째가 며칠 만에 모든 재산을 다 모아서 투자 이민을 떠날 때 아버지는 섭섭했겠지만 첫째는 그런 둘째가 부러웠을 것입니다. 첫째라는 책임감 때문에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렇지 못하는 자기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마음으로는 둘째에게 “네가 남아 있어라 내가 나가마” 하고 싶을 마음이 얼마나 굴뚝같았겠습니까? 그런데 자신이 없습니다. 그럴 용기조차 갖지 못하는 자기가 얼마나 미웠겠습니까? 

오히려 며칠 만에 재산을 다 모아서 떠날 정도로 계획성도 있고 준비성도 있고 과감성도 있는 둘째를 부러워만 하고 있었던 자기이기에 둘째가 성공하기만은 더 바랐을 것입니다. “나는 못하지만 그래도 너라도 그렇게 해 봐 꼭 성공해라” 한데 기대와는 달리 나락으로 떨어지는 둘째에 대한 소식을 들으면서 아버지 이상으로 첫째의 마음도 아팠을 것입니다. 그래 더 속상했을 것이고요. “그 녀석 그렇게 떠났으면 잘 돼야지 그게 뭐야” 그래 돌아온 동생 잘 돌아왔다고 맞아주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동생이 실패했다는 그것이 너무 속이 상합니다. 그래 자기도 모르게 심술을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게 본심일까요? 그만큼 동생이 잘 되기를 바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가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습니다. 단지 이런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고자 하는 노력이 아쉬울 뿐입니다. 하지만 그런 네 마음 나도 안단다 하고 이야기를 한들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여기 아버지가 나와서 첫째에게 하는 말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사실은 첫째는 바로 그 말이 듣고 싶었던 것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 한 마디 위로의 말 “내가 네 마음 다 안다 네가 말은 안 해도 얼마나 힘들어 했는지 얼마나 아파했는지 나도 알아” 그게 바로 “예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야” 하는 말입니다. 그래요 마음을 모르는 것이 아닌데 우리는 그 표현에 있어서 서툽니다. 아니 마음만 간절했지 그것을 어떻게 표현할 지를 잘 모릅니다. 오히려 그래서 내 간절한 마음을 전달한다고 하는 것이 오히려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경우도 없지 않습니다. 나는 상대방을 배려한다고 하는데 상대방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아닙니다. 드러나는 표현과 감추어진 표현, 내 마음을 어떤 식으로 드러내야 하는지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가 네가 나고 내가 너다”라는 이 말을 얼마나 우리가 공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그걸 표현해야 하지 않냐고 그런데 왜 그러냐고 이렇게 나오면 거긴 대책이 없습니다. 

지금의 세대가 바로 그런 것 같습니다. 항상 함께 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게 느끼는 세상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이 말은 “나의 모든 것이 네 것이다”는 그 다음 말과 연결이 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살림을 나눠주었다는 것 그 살림도 누구 것이었습니까? 아버지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하는 그의 말처럼 없어진 아버지의 살림에 대해서 그가 속상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 아들이 돌아옴으로 살진 송아지를 잡았다면 자기를 위해서는 더 한 것도 잡을 수 있다는 생각은 왜 못합니까? 결국 이 아들은 자기의 입으로 자기의 복을 털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달래주고 있지만 이런 어리석은 자식의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 큰 아들의 마음은 아닙니다. “나도 좀 위로해 주세요. 나도 좀 칭찬해 주세요.”하는 그 마음을 왜 모르겠습니까? 한데 그냥 바로 집으로 들어가 반갑게 둘째를 맞이하면서 “정말 잘 돌아왔다 네가 돌아와 준 것이 너무 고맙다”고 했다면 어땠을까요? 그랬더라면 아버지가 아무 말로 안하고 그냥 넘어갔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네가 항상 나와 함께 있어준 그것만으로도 나는 네가 정말 고맙다. 내 것이 다 네 것인 거 너도 알지?” 그러면서 손을 꼭 잡아 주었을 것입니다. 아니 그러기 전에 잔치를 벌이라고 하면서 아버지가 먼저 밭으로 첫째를 찾아갔으면 어땠을까요? 하지만 사실은 첫째가 그냥 넘겼을 뿐이지 아버지는 알게 모르게 그런 마음을 전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니 아들에게 농사를 다 맡기고 날마다 동구 밖에 나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첫째를 믿는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말없이 조용히 지켜본다는 것만큼 귀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잃고나서야 깨닫습니다. 사단이 벌어지고 나서야 깨닫지만 그때는 이미 늦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누구 말처럼 있을 때 잘하라는 말이 그냥 지나치는 말이 아닙니다. “맞아 그게 바로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그런데 그건 상대방도 똑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정한 의미에서 행복한 삶은 어떻게 누릴 수 있습니까? 바로 상대방에 대한 믿음입니다.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없을 때까지도 믿어주는 것입니다. 항상 함께 있어주는 것입니다. 비록 떠난 아들이라도 다시 돌아오기를 기다려주는 것입니다. 마음은 딴 데 가있다고요? 그러니 그런 일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 계시면 왜 그런 일이 있어요? 하나님 정말 함께 계신 것 맞아요?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 대해서 다른 말씀은 없으십니다. 단지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이것뿐입니다. 

“내가 너와 항상 함께 있다. 나는 네 하나님이다. 그러므로 내 것이 다 네 것이다” 그것을 깨닫고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은 더 이상 하나님의 몫이 아닙니다. 내가 해야 할 몫입니다. 그 믿음으로 상대방을 안아주어야 할 책임도 바로 우리 몫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바 믿음입니다. 이 귀한 은혜가운데 날마다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난센스 퀴즈입니다. 
탕자가 돌아올 때 제일 싫어한 자가 누구입니까? 
살진 송아지. 살진 송아지가 제일 싫어했어요.
오늘 우리가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그렇다면 누가 싫어할까요? 
사촌, 사촌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하지를 않습니까?
그 사촌이 바로 사탄입니다. 사탄은 서로를 믿지 못하게 만듭니다. 어쨌든 사단을 일으킵니다. 온갖 사단을 일으키기에 그래서 사탄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하지만 그래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신뢰의 회복 믿음만큼 귀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만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믿음 없이는 하늘나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도 믿지 못하면서 어떻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믿음에 따라오는 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신뢰, 믿음을 굳게 잡아 그 믿음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