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세 가지 반성 (요삼 1:11-12)

  • 잡초 잡초
  • 288
  • 0

첨부 1


세 가지 반성 (요삼 1:11-12)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입니다. 데메드리오는 모든 사람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고, 또 바로 그 진실한 삶으로 그러한 평을 받았습니다. 우리도 또한 그렇게 평합니다. 그대는 우리의 증언이 옳다는 것을 압니다.]

•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이고, 또 존 웨슬리 목사의 회심 272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우리는 교회가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강림 사건을 통해 탄생했음을 알고 있습니다. 성령은 사람들 사이에 가로놓여 있던 문화, 인종, 신분, 나라 사이의 장벽을 일시에 허무는 바람이었습니다. 성령을 체험한 이들은 차이를 넘어 하나가 된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격스럽고 놀라운 일인지를 경험했습니다. 지배와 독점이 아니라 섬김과 나눔이 더 근본적인 기쁨을 준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뒤집힘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저녁 8시 45분 경, 존 웨슬리는 올더스게이트라는 작은 거리에서 가슴이 뜨거워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로 자기 죄가 용서되었다는 사실이 마음으로 믿어진 것입니다. 이론을 眞이라 하고, 마음을 情이라 한다면, 이 둘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웨슬리의 회심이란 그가 진정의 사람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진정의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사람입니다.

회심이란 우리 마음이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찾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것은 세상에 팔렸던 우리 마음을 되찾아 주인이신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영적인 변화는 마음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의 때와 하나님의 때가 딱 만날 때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런 순간은 예기치 않은 때, 예기치 않은 방식으로 찾아옵니다. 회심을 경험한 사람들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까닭은 그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회심을 경험했다고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삶의 지향은 바뀌었지만 여전히 옛 삶의 인력은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도 말했듯이 옛 삶은 회심한 이들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우리를 두고 가려는가’ 하고 묻습니다. 성도의 인내와 믿음이 요구되는 순간입니다. 자꾸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비끌어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저는 영국 감리교회의 공동예식서에 나오는 <하루를 시작하는 기도>를 참 좋아합니다.

사랑하올 스승님, 오늘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 마음을 거처로 삼아주십시오. 종일토록 우리 안에 머무시어 잘못과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 않도록 우리를 지켜주십시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시고, 선한 일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우리를 도우시어 주님과 더불어, 그리고 이웃들과 더불어 깊은 사랑의 친교 속에 머물게 해주십시오.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주십시오. 우리로 하여금 주님이 지극히 사랑하시는 이 세상에 희망의 징표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아멘.

저는 ‘우리를 주님의 거처로 삼아달라’는 기도와 ‘오늘 우리가 다른 이들이 주님께 바치는 기도의 응답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에 방점을 찍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살기 위해서는 중간에 나오는 세 가지의 기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1)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2) 선한 일을 행하게 해주십시오. 3) 주님과의 사랑의 친교 가운데 머물게 해주십시오. 이런 기도가 왜 중요한지를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 해를 끼치지 말라

‘해를 끼치지 않게 해달라’는 것은 매우 소극적인 간구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조차 지키지 못하고 삽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무심코 하는 말과 행동이 가까운 이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드리우게 할 때가 많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 삶은 그 자체로 창조 세계에 큰 부담을 주고 있습니다. 

마하트마 간디를 통해 잘 알려진 자이나교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아힘사ahimsa가 그것인데 사람들은 이것을 불살생不殺生이라고 번역합니다. 생명을 죽이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혹시 텔레비전을 통해 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자이나교 수도자들 가운데는 나체로 사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우물에서 물을 길어올린 후 거름망에 걸러서 먹습니다. 행여 살아있는 생명을 삼킬까 두려워서입니다. 너무 지나친 것 같기도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들만큼 평화스러운 존재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은 모두 신성한 것입니다. 

생명의 신성함 하면 떠오르는 근세의 인물은 앨버트 슈바이처 박사일 것입니다. 그는 모든 생명은 신성하기 때문에 마땅히 경외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바로 생명 경외(reverence for life) 사상입니다. 그는 남들이 겪는 고통을 차마 그냥 볼 수 없는 불인(不忍)의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친구와 함께 새총을 만들어 새를 잡으러 갔는데, 새를 향해 막 새총을 쏘려는 순간 저 멀리 교회에서 수난절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려왔고, 그것은 마치 하늘의 메시지처럼 들렸습니다. 

그는 소리를 질러 새들을 쫓아버렸습니다. 또 어린 시절 잠자리에 들 때면 어머니가 침대 머리에 와서 기도해 주곤 했는데, 언제나 ‘사람들’만을 위해 기도하는 것을 듣고는 기도해 줄 사람이 없는 다른 생명체들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가 방을 나간 후에 ‘숨 쉬고 있는 모든 것들’을 축복해달라고 기도했습니다.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만나는 모든 이들을 주님이 사랑하시는 이로 대해야 합니다. 해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나와 다른 견해와 입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존중해야 합니다. 적극적인 폭력을 행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설사 갈등 상황이 벌어진다 해도 그에 대해서 뒷공론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모함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을 왜곡하지 말아야 합니다. 무시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바로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에 대해 철저히 신뢰해야 합니다. 디모데후서는 말세의 징조를 이렇게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딤후3:2-4a)

과연 우리 시대의 모습 가운데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는 이 시대가 참 난폭한 시대라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다 뭔가에 잔뜩 화가 나있는 것 같습니다. 마음들이 참 각박합니다. 천진한 웃음과 만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 하루 우리가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게 해주십시오.’

•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라

우리가 바쳐야 할 기도는 ‘하나님 사랑 안에 머물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할 수 있다지요? 우리 삶이 각박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외면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자꾸만 우리 마음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셔서 외아들까지 보내주시는 그 사랑에 접속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를 따뜻하게 보듬어 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에서 끊어지면 우리 속에 있는 거친 것들이 나오게 마련입니다.

지난 5월 초에 교회에서 고추 화분을 나눠드렸습니다. 저도 집 베란다에 식구수대로 청양고추를 심었습니다. 분갈이를 할 때마다 여퉈두었던 흙을 다 모아 화분을 만들고 고추모를 정성껏 심고, 물까지 듬뿍 줬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보니 화분마다 알 수 없는 큰 떡잎이 돋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어찌나 큰지 고추모의 뿌리가 다 드러날 정도였습니다. 옳다꾸나 하고 고개를 내민 녀석을 차마 뽑아버릴 수 없어서 며칠 지켜보기로 했습니다. 물론 고추모종을 북돋워주는 것은 잊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보니 그건 호박이었습니다. 아내가 베란다에 호박씨를 말린 적이 있는데, 옷깃에 스쳐 화분에 떨어졌던 호박씨 몇 알이 적당한 물기를 만나자 발아한 것입니다. 지금은 주객이 전도되었는데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마찬가지 원리입니다.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 마음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나는 내가 원하는 선한 일은 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한 일을 합니다”(롬7:19)라고 탄식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속에 없으면 우리는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며 산다는 말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깊이 사랑하며 산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언제나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산다는 뜻일 겁니다. 여러분은 무슨 말을 하건, 행동을 하건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하십니까?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에게 주님은 ‘애린’의 마음을 불어넣어주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에 접속된 사람은 이웃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됩니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에게 세 번씩이나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셨습니다. 베드로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매번 “내 양 떼를 먹여라” 하고 부탁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양들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사랑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마태복음은 그들을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헐벗은 이들, 나그네 된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이라고 말합니다. 꼭 그런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이들 가운데도 누군가의 관심과 사랑에 목마른 이들이 있습니다. 자기의 무거운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는 그대로 받아줄 이가 있다면 세상은 살만합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없다면 인생은 적막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이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식당 주인, 야구르트를 배달하는 아주머니, 신문 배달원, 우편 배달부, 택배 기사, 환경 미화원, 아파트 경비원, 버스 기사, 공사장 인부, 파지를 주워 파는 분…. 그분들에게 우리는 누구입니까? 주님은 우리를 통해 그분들에게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이고 싶어 하십니다. 아까 북돋는다는 말을 썼습니다. ‘북’은 ‘나무나 풀의 뿌리를 싸고 있는 흙’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북돋는다는 말은 식물의 뿌리를 흙으로 덮어주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누군가의 시린 마음을 덮어줄 마음이 우리에게 있을 때 우리는 하나님의 현존을 가리키는 징표가 됩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의 부름에 응답할 때 우리는 인생의 많은 문제들로부터 해방된다는 사실입니다.

• 선을 행하라

우리가 날마다 바쳐야 할 기도는 “선을 행하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웨슬리 목사는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위한 규칙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선한 일을 하라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으로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할 수 있는 한 모든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때에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에게
할 수 있는 한 오래오래

웨슬리는 이런 규칙을 철저히 자기 삶에 적용했습니다.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리 속에 있을 때 우리는 상대방의 태도나 행동에 제한받지 않게 됩니다. 그것은 나의 일을 함께 하자는 주님의 초대에 대한 응답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고 선을 행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에 원망이 없습니다. 저는 최근에 서영남의 <<민들레 국수집의 홀씨 하나>>라는 책을 참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그는 25년 동안 몸담았던 수도원을 떠나 세속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온 몸으로 실천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전국의 교정시설에 수감된 최고수들과 장기수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배고픈 형제자매들을 위해 무료로 밥을 제공하는 ‘민들레 국수집’을 열었습니다. <인간극장>이라는 프로그램에도 소개되어 그와 민들레 국수집을 아는 분들이 꽤 많은 것 같습니다. 제가 그 책을 읽으면서 놀란 것은 그가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였습니다. 민들레 국수집은 밥 대접보다 사람대접을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거기서는 사람을 줄 세우지 않습니다. 인정머리 없는 잔소리도 없고, 긴 설교를 하지도 않습니다. 서영남 씨는 그 집을 찾는 노숙인들을 장씨, 김씨, 이씨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이름으로 부릅니다. 단 한 사람이라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고 관심을 가져줄 사람이 있을 때 자기 존재감을 찾게 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그는 가급적이면 손님이 먹고 싶은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려 합니다. 오랜 노숙 생활로 복수가 차오르는 병을 얻어 몸을 제대로 움직일 수 없는 태수 씨를 위해 그는 묵밥을 만들어 배달하기도 합니다. 

앵벌이를 하며 지내는 동준 씨가 고아원에서 먹어본 음식 중에 제일 맛있었던 게 ‘꽃게무침’이라 하자, 그는 다음날 기어이 꽃게무침을 만들어 동준 씨를 대접합니다. 10년 넘게 옥바라지를 한 끝에 제노비아 형제가 남을 배려하는 모습을 보이자, 그는 겨우 10년 만에 변한 그를 바라보며 한없는 기쁨을 느낍니다. 민들레 국수집에서 일어나는 기적은 너무나 많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물론이고,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기적도 자주 일어납니다. 이기심 없는 사랑, 인내하는 사랑이 일으키는 기적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사도 요한은 “사랑하는 이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십시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난 사람이고, 악한 일을 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뵙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선한 사람의 표본으로 데메드리오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진실한 삶으로 그런 평을 받았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성령 강림절과 웨슬리 회심을 기념하는 오늘이야말로 우리의 회심일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를 끼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사랑 안에 머무십시오. 그리고 힘써 선을 행하십시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바칠 영적 예배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삶이 누군가에게 선물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