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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본래 사랑하시더니.. (요 1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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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사랑하시더니.. (요 11:5-12)


성경의 인물들 중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자신의 친구(요11:11)라고 불렀던 사람은 바로 나사로입니다. 예수님은 이 나사로의 집을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나사로는 예루살렘에서 남동쪽으로 약 3km 정도 떨어진 베다니라는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근처였고 여리고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실 때면 반드시 베다니에 들렸습니다.

성경에는 나사로에 관하여 많은 이야기가 없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라고 하는 두 여동생이 있고 어느 날 갑자기 병들었다가 죽었는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살려주셨다는 이야기 외에 그의 부모 또는 가정환경에 관한 이야기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인물들을 소개할 때 거의 누구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으로 미루어 나사로에 관하여 그의 가족관계가 소개되지 않는 것은 특이한 일입니다. 
아마도 부모에 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 삼남매가 어릴 적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었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나사로와 그의 누이들을 예수님께서는 특별하게 생각하셨고 예루살렘에 오갈 때 그들의 집에 자주 들려서 음식을 먹기도 하시고 쉬기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방문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는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하게 마르다의 3남매를 사랑하셨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① 긍휼 많으신 마음 때문입니다. 

앞서도 말한 것처럼 그들은 부모가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결혼해서 가정을 가진 것으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추론하건데 어려서 부모를 모시고 3남매가 살아가는 불쌍한 가정 즉 결손 가정이었습니다.
특히 요 11:5절에 의하면 “예수께서 본래 마르다와 그 동생과 나사로를 사랑하시더니...” 라고 했습니다. 본래란 처음부터를 의미합니다. 
이 3남매를 처음 만난 그 순간 그 가련하고 불쌍한 모습에서 동정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 주님의 마음이 끌렸던 것입니다. 

부모도 없고 물질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는 그야 말로 아무것도 없는 가정이었습니다. 
아무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결국 불행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때로는 행복의 출발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나사로 3 남매가 누구 보다 더 예수님을 가까이하고 의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사람들이 불행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 아무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자연히 예수님을 가까이 했고 예수님도 불쌍한 가운데서도 가까이 따르는 나사로 3남매의 가정에 허물없이 다가가셨고 친하게 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잘 나고 배경 좋고 똑똑한 사람보다 상처받고 슬픈 사람들을 찾아가셨습니다. 때로는 내가 가졌다는 것 때문에 예수님을 가까이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불행한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적인 기준으로 불행해 보일지라도 예수님의 눈에 불쌍하게 여겨지면 그것이 행복입니다. 
불쌍한 사람을 사람들은 멀리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에 불쌍하고 가엾은 사람들 편을 택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자신이 머리 둘 곳이 없는 사람처럼 사셨기 때문입니다. 마 8:20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사역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하여 측은하게 여기시는 것으로 특징지워 졌습니다.

힘들고 어렵습니까?
가난하고 외롭습니까? 너무 슬퍼하지 마십시오. 예수님을 그런 당신을 좋아하신답니다. 가까이 가셔서 친구 되어 주신 답니다.

②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요 15:14-15절에 보면 예수님이 일반적으로 우리를 친구라 하겠다고 했습니다. 
“너희가 나의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 종은 주인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 너희를 친구라 하였노니 내가 내 아버지께 들은 것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였음이니라” 

예수님이 개인적으로 친구라고 한 사람은 나사로 한 사람 뿐입니다. 
요 11:11절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가라사대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라고 했습니다. 친구의 집이였기 때문에 언제라도 수시로 방문했고 사적으로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가 되어봅시다. 

③ 대접 잘 하는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집에 자주 가신 이유는 그집에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눅 10:38절에 보면 “저희가 길 갈 때에 예수께서 한 촌에 들어가시매 마르다라 이름하는 한 여자가 자기 집으로 영접하더라” 라고했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마을에 지나가실 때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습니다. 우리는 자기 집으로 영접하였다고 하는 대목에 더 특별한 관심을 두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초청한 것입니다.
 
그리고 많은 음식을 차리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습니다. 
요 12:2절에 보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리신 후에 나사로의 집에서 잔치를 했습니다. 그때 마르다는 일을 보고 ... 라고 했습니다.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 새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이것은 마르다는 살림꾼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르다는 예수님이 자신의 집에 들릴 때 마다 좋은 환경을 만들고 정성들여 음식을 만들고 실제적으로 예수님을 대접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집에는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습니다. 

대접하기 좋아하고 잘하는 마르다, 그가 있었기에 예수님의 발걸음이 나사로의 집에 자주 가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대접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하나님도, 예수님도 성령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잠 8:1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습니다. 

성도들은 인색하고 남을 대접할 줄 모르는 사람 되지 말고 대접하는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대접 잘해서 복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대접하는 마음으로 잘 대접해야 할 사라들이 누구입니까?
성경에서 소자 즉 지극히 작은 자 라고 표현된 우리의 이웃들입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마 25:45)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마 10:42절에 보면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마 18:6절에서는 소자를 실족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실족하게 한다는 것은 상처주지 말라는 것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그리고 마 18:10절을 보십시오. 
“삼가 이 소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에게 말하노니 저희 천사들이 하늘에서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라고 했는데 업신여긴다는 것도 역시 멸시 천대하는 것으로서 인격적인 모욕을 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소자라고 업신여기지 말고 대접 잘하는 사람에게 예수님 찾아가십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위로하고 찾아서 돕는 일이야 말로 주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의 상급과 면류관이 약속된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 영원히 죽어가는 영적 소자들을 대접하는것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소자에게 냉수 한그릇 주는 것은 약간 대접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자에게 복음을 전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하는 것은 영원히 대접하는 것입니다. 

④ 말씀 잘 듣는 마리아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자기 집에 찾아 오셨을 때 마르다가 대접을 잘하였을 뿐 아니라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눅 10:39) 그에게 마리아라 하는 동생이 있어 주의 발 아래 앉아 그의 말씀을 듣더니
언니 혼자서 부엌에서 땀을 흘리고 있어도 마리아는 예수님 앞에 앉아서 열심히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었습니다. 
말씀을 잘 들어야 사랑받습니다. 

대접 잘하면 칭찬받고 복 받습니다. 그런데 말씀 잘 들으면 사랑받고 귀염 받습니다. 대접도 잘해야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잘 들어야 합니다. 저도 설교 잘 듣는 교인이 좋습니다. 
제가 설교할 때 한 마디 한마디를 정성들여 듣는 교인 그리고 듣고 깨닫고 깨달은 것을 순종하는 성도가 가장 사랑스럽고 좋습니다. 
왜 설교를 잘 들어야 주님이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이 주의 종들을 통해 말씀하시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히 13:7-8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 받으라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주님이 세상에 계실 때는 직접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령으로 주의 종들을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계 2:1절에 보면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오른손에 일곱 별을 붙잡고 일곱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이가 가라사대... ” 라고 했습니다.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 즉 목회자를 의미합니다. 
계 1:19-20절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네 본 것은 내 오른손에 일곱 별의 비밀과 일곱 금촛대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사자요 일곱 촛대는 일곱 교회니라” 라고 했습니다. 
목회자들을 강단에서 붙들고 말씀하시는 분이 주님이십니다. 

교회에 세우신 주의 종들 사자들을 붙잡고 계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주의 사자를 통해서 말씀을 들을 때 주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설교를 주님의 음성으로 듣는 사람에게 주님은 즐겨 찾아가시고 사랑하시는 것입니다. . 

말씀을 잘 듣는 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듣는 자세가 좋다는 기본적 의미
2) 듣고 따라 순종한다는 실천적 의미
두 가지가 다 좋아야 합니다.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설교가 단지 사람의 교훈이나 강연정도로 아는 사람은 결코 주님이 기뻐하지 않습니다. 설교는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려져야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우리교회 성도들이 말씀을 잘 듣는 훈련이 되어야 합니다. 
설교를 들을 때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깨달은 말씀을 실천하고 순종하여야 그것이 말씀을 잘 듣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예수님이 나사의 집을 즐겨 찾으시고 사랑하신 이유는 
① 불쌍한 가정 즉 결손가정이었기 때문입니다. 
② 친구였기 때문입니다. 
② 대접 잘하는 마르다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③ 말씀 잘 듣는 마리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의 은총이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이들에게 충만하게 임하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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