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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관계의 본질, 효 (마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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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본질, 효’.com


 “그 때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2당신의 제자들이 어찌하여 장로들의 전통을 범하나이까 떡 먹을 때에 손을 씻지 아니하나이다 3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4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5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마15:1-6)  

그림을 한편 보십시다. '노인과 여인' 이라는 그림입니다. 이 그림은 중미(中美) 카리브 해(海)에 있는 나라 ‘푸에르토리코’의 국립 미술관 입구에   자리 잡고 있는 특별한 그림이 한 점 입니다.  한 늙은 남자 죄수가 아랫도리만 수의(囚衣)를 걸친 모습으로 가슴을 풀어 헤친 젊은 여자의 젖을 빠는    그림 입니다.  방문객들은 늙은 노인과 젊은 여자의 부자유스러운 애정행각을 그린 이 작품에 불쾌한 감정을 나타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이런 해괴망측한 그림이 어떻게 국립미술관의 벽면을 장식할 수 있단 말인가. 그것도 미술관의 입구에...” 하고 불평을 말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에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담겨져 있습니다.  죄수복을 입은 노인은 바로 젊은 여인의 아버지이고, 커다란 젖가슴을 고스란히 드러내 놓고 있는 여인은 노인의 딸입니다.  그림의 죄수 노인은 ‘푸에르토리코’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운 투사였습니다.  하지만 독재정권은 이 노인을 체포해 감옥에 처넣고는 가장 잔인한 형벌을 내립니다. '음식물 투입 금지' 가 그것입니다. 

노인은 감옥에서 서서히 굶어 죽어갔습니다.  해산한 지 며칠이 지나지 않은 딸이 무거운 몸으로 감옥을 찾아 왔습니다. 아버지의 임종을 보기 위해서였습니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아버지는 마지막 숨을 헐떡이고 있었습니다.  굶어서 죽어가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딸의 눈에 핏발이 섰습니다. 마지막 숨을 헐떡이는 아버지 앞에서 무엇이 부끄러운가. 여인은 아버지를 위해 가슴을 풉니다. 그리고 불은 젖을 아버지의 입에 물렸습니다.  

‘노인과 여인’이란 이 그림은 애국심과 부녀간의 사랑과 헌신이 담긴 숭고한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그리고 ‘푸에르토리코’인들은 이 그림을 그들의 민족혼이 담긴 최고의 예술품으로 자랑하고 있습니다.   동일한 그림을 놓고 사람들은 '포르노'라고 비하도 하고 '성화(聖畵)' 라고 격찬도 합니다.  노인과 여인에   깃든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들은 비난을 서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림 속에 담긴 본질을 알고 나면 눈물을 글썽이며 명화를 감상합니다. 
 
이렇게 사람들은 가끔 본질을 파악하지도 않고 비난의 화살을 쏘아대는 우를 범합니다. 그러나 본질을 알면 시각이 달라집니다. 본질을 알 수 없도록 하는 교만과 아집, 그리고 편견을 버려야만 우리는 세상을 바르게 볼 수 있는 것입니다. 

5월은 ‘가정의 달’로 우리나라는 지킵니다.  각 가정에는 많은 관계들이 있지요. 부부, 부자, 모녀, 고부, 형제, 자매...그러면 ‘가정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효(孝)입니다.  효(孝)는 가정을 지탱하는 기둥입니다.  특히 효(孝)는 교회의 본질입니다. 효(孝)가 성경에서 시작이 되고 기독교처럼 효도를 강조하는 종교가 없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더욱 감사하며 부모님께 대한 효도의 삶을 새롭게 다짐하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한국은 효를 귀하게 여기는 나라였으나  이제는 모두들 효를 잊어가고 있는 듯합니다. 이러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일마저 잊어버리게 될까 두렵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모 섬김을 통해 하나님 섬김을 배우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께 항의하고 있습니다. 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장로들의 유전을 범하는 죄(罪)라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 또 당시의 유대인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는 ‘죄’였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경건하고 거룩하게 사는 것,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그들의 삶의 가장 큰 목적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여러 가지  규칙을 만듭니다. 정말 경건하게 살고자하는 마음에서 율법을 지키기 위한 세세한 규정들을 만들고 지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에는 일하지 말라고 했는데... 어디까지가 일이고, 어디까지는 일이 아닌지 사람들마다 생각이  다릅니다. 그러니 규정이 있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세세하게 규정을 정합니다. 그래서 안식일에는 허락된 거리는 약1.6km입니다. 그 이상은 노동이라고 봅니다. 심지어 제가 아는 어떤 장로님은 랍비부부의 집에 초청을 받았는데... 이야기 하다 보니 금요일저녁, 안식일이 시작이 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안식일에는 집안의 불을 꺼야합니다. 불이 켜져 있는 것은 ‘일’하고 있는 것에 해당이 됩니다. 

그래서 이 랍비부부는 미안한 표정으로 장로님에게 벽의 스위치를 내려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이미 안식일이 시작이 되었으니 벽의 스위치를 내리는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일은 오늘 이 순간에도 많은 경건한 유대인들이 굳게 지키고 있는 현실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율법을 지키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 즉 ‘본질적인 일’입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에게 와서 왜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느냐’는 지적을 하는 것입니다.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 것은 율법을 잘 지키기 위해서 장로들이 정한 ‘유전’과 ‘전통’을 어기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지적에 대해 예수님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냐” 하고 그들의 문제점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는 우리들이 보기에 참 엉뚱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4절)   왜 갑자기 부모공경의 이야기를 하십니까?  바리새인들은 ‘범죄’를 이야기 하는데 예수님께서는 ‘효도’이야기를 하십니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왜냐면 본질을 보는 눈이 달라서 그렇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신앙의 본질’은 효도(孝道)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불효(不孝)가 ‘범죄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식적인 종교 행위를 효도(孝道)에 관한 말씀을 가지고 책망하십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의 유전(遺傳)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어떤 계명인가요?  십계명의 5계명,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인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계명’입니다.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것은 부모님께 드려져야합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드려져야하듯이 ‘부모님에게 드려져야 할 것은 부모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부모님에게 드려야 할 것을 가지고, ‘이것을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성경의 뜻이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강력하게 이 사실을 지적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불효(不孝)는 모든 범죄(犯罪)의 본질(本質)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효도에 대하여 배워야 합니다.  우리의 효도 생활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효도의 첫 번째 요소는, 부모(父母) 공경(恭敬)입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씀은 ‘신앙적 효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4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계명입니다. 하나님은 십계명의 제 5계명에 부모 공경을 명문화(明文化)하셨습니다. 여기서 ‘공경하라’ 는 ‘존경하다’, ‘숭배하다’라는 의미가 있는 히브리어(킵베드)의 번역어입니다. 원래 이 단어는 특별한 존경의 대상인 ‘하나님’(마15:8, 막7:6, 요5:23)과 ‘그리스도’(요5:23)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나타내는 데 여러 번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단어가 부모에게 사용된 것은,  인간은 마땅히 부모를 크게 존경해야 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람을 향한 계명 중 첫 번째가 바로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인데... 왜 부모 공경이 제일 먼저 등장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부모 공경이야말로 인간관계의 가장 기본적이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참 신앙인은 하나님을 공경하듯 부모님을 공경하는 성도입니다. 당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잘 지킨다고 자타가 인정하는 자들이었으나 사실은 가장 기본적인 율법조차 범하는 위선자 였습니다. 
  
성도여러분, 가장 멋진 자녀, 가장 헌신적인 자녀, 또한 가장 신앙이 좋은 사람은 어떤 모습일까요? 부모님을 존경하는 것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제일이야’ 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자녀, 부모님을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존경하는 자녀는 참으로 귀한 사람이며,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이면서 동시에 축복의 주인공입니다. 
  
(레 19:3) “너희 각 사람은 부모를 경외하고 나의 안식일을 지키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안식일을 지키기 이전에 먼저 부모님을 경외하라고 하십니다.  부모님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진정한 예배를 드릴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의 복을 받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위대한 인물들은 모두 효도의 사람들이었습니다.  노아의 두 아들 셈과 야벳을 보십시오. 그들은 아버지가 술에 취해 하체를 드러내는 부끄러운 일을 행했을 때도 아버지의 허물을 드러내지 않았습니다.  

(창 9: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아버지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대했던 두 사람과 그 자손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위대한 복을 준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노아의 수치를 드러낸 아들 함은 저주를 받습니다.   그런데 함이 아니라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창 9:27)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

왜 함이 저지른 잘못을.. 아무 런 일도 하지 않은 가나안이 저주를 받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당연한 영적인 법칙을 하나 볼 수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불효했으니 당연히 아들이 저주를 받는 것입니다.  함이 아버지 노아에게 불효했고, 함의 아들인 가나안이 저주를 받습니다.  내가 부모에게 불효하면 내 자녀가 저주를 받습니다.  성도여러분, 부모에게 불효하지 마십시다.  사실 본인이 저주를 받는 것이 본인의 자녀가 저주를 받는 것보다 훨씬 낫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나의 불효가 씨앗이 되어 나의 자녀에게서 저주의 열매를 맺는 일이 절대로 없기를 바랍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제자 요한에게 어머니를 부탁하셨습니다. (요19:27)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에서 우리는 끝까지 육신의 어머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자기의 죽음 앞에서 홀로 남은 어머니를 먼저 걱정하십니다.

효도의 두 번째 요소는, ‘부모님을 비방하지 않는 것’입니다. (4절)“...또 아버지나 어머니를 비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거늘” 비방하지 않는다는 것은 ‘도덕적, 인격적 효도’를 말합니다. 이 말씀은 (출 21:17절)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 라는 말씀과,   (레 20:9절) “만일 누구든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그가 자기의 아버지나 어머니를 저주하였은즉 그의 피가 자기에게로 돌아가리라” 의 인용 입니다.  ‘비방하는’(카콜로곤)이라는 말은 ‘악한 말을 하다’, ‘업신여기다’, ‘저주하다’ 등의 부정적인 의미를 갖는  단어입니다. 

대부분의 영어성경(KJV, NASB, NIV)은 이 동사를 모두 ‘저주하다’(curse) 또는 ‘경홀히 여기다’ 는 의미로 봅니다.  성도 여러분! 부모를 업신여기는 것은 반드시 죽임을  당하는 죄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것을 아주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있는 것을 책망하셨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십시오. 부모를 대적하거나 비방하면 죽음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렇지만 부모를 공경하면 장수의 축복을 누렸습니다. (출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이것이 주님의 뜻입니다. 
 
단순히 우리를 낳아주셨기 때문에 공경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부모가 완벽한 분이라서 하는 말도 아닙니다.  땅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로 하늘의 하나님을 온전히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요일4;20)“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말씀을 따라 살고 싶으십니까?  부모님을 공경하십시오. 꿈에서도 업신여기지 마십시오. 바로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성경은 세상보다 효에 대하여 훨씬 엄격합니다.  

(신 27:16) “그의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경홀히 여긴다는 것은 가볍게 여기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모를 가볍게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습니다.

(겔 22:4,7) “...그러므로 내가 너로 이방의 능욕을 받으며 만국의 조롱 거리가 되게 하였노라...그들이 네 가운데에서 부모를 업신여겼으며...” 

이스라엘은 부모를 업신여기다가 만국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신21:18, 19-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의 아버지의 말이나 그 어머니의 말을 순종하지 아니하고 부모가 징계하여도 순종하지 아니하거든...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듣지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면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성도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말씀 속에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부모를 업신여기지 말아야 하는 것은 선택사항이 아니라 필수사항 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전혀 반대의 일들이 연일 일어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부모를 대적하고 학대하며 모른체하며 심지어 죽게 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도둑질이나 강도나 사기죄는 감옥에 가는 죄라고 다 생각하지만 불효는 감옥 갈 죄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과 참 반대인 이 세상 법률입니다.  예수님은 “...자식들이 부모를 대적하여 죽게 하리라”(막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러한 일들이 일어날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원수가 되는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이지, 믿는 우리 성도들, 교회 안에서는 절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효도의 세 번째 요소로,  물질적 효도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부모님을 섬기되 마음으로 뿐 아니라 물질적인 면에서도 정성을 다하여 섬겨야 할 것입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5-6절) “너희는 이르되 누구든지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6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을 드리는 것이 부모님을 공경하는 삶입니다. 자녀 된 우리는 부모님께 모든 것을 드릴 수 있어야 하는데, 특별히 물질로 효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병행구절인 마가복음에는 ‘하나님께 바친다’는 의미를 지닌 ‘고르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막 7:11) “너희는 이르되 사람이 아버지에게나 어머니에게나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 하고” 

예수님 당대에 이 단어는 하나의 맹세어로서, 어떤 물건에 대하여 ‘고르반’(=하나님께 드리는 제물) 이라고 맹세만 하면 그 물건은 아무도 손을 대지 못하게 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부모나 다른 사람에게  어떤 물건을 주기 싫으면 단지 ‘고르반’ 이라고 맹세만 하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하나님께 헌금하는 믿음좋고 경건한 사람이 됩니다. 완전히 눈 가리고 아웅하는 짓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위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당시의 유대 사회의 전통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폐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6절)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 도다” 

여기 ‘폐하는 도다’는 말씀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 이상 삶의 기준이 되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위선자로 전락해버리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외식하는 자들’(7절) 이라고 불렀습니다.  거룩한 척만   하던 그들은 실상 외식하는 자들이었습니다. 겉모양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그 속은 부패하여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가르침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혹시 저와 여러분의 모습이 이렇지 않습니까?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참 대단하다, 경건하다, 열심이다’하는데 실제로는 부모를 공경하는 데는  한참 부족한 그런 사람은 아닙니까?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6;2,3)  

두 가지 축복이 등장합니다.   

첫째, 잘 된다고 했습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우리의 삶은 형통의 복을 누립니다.   
둘째, 땅에서 장수한다고 말씀합니다. 부모님을 공경하면 우리가 건강하고 오래 산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이 두 가지 축복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말씀대로 부모님을 공경할 때 이 엄청난 축복이 반드시 주어집니다.  모압 여인 룻을 보십시오. 시어머니에게 효도했더니 보아스의 부인이 되었고, 효도를 해서 다윗 왕의 조상이 되었고,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영광을 차지했습니다. 

부모님을 마음으로 존경하십시오. 부모님의 말씀 한마디라도 가볍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업신여기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부모님께 물질을 아끼지 않으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효도를 통해 큰 복을 누리십시오.  세상 사람들이 어떻게 산다 할지라도 나는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살겠노라고 결단하십시오.  부모를 공경함으로  주님 주시는 귀한 축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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