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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자형제(父子兄弟) (빌 2: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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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안에서의 부자형제(父子兄弟) (빌 2:19-30)
  

인간 사회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남달리 긴밀하게 되는 특별한 동기들이 있습니다.
처음 만난 사이라 할지라도 동향 출신이라든지 같은 학교 동창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만 가지고도 훨씬 빨리 서로 가까워질 수가 있습니다.
같은 취미생활을 가진 사람 사이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나는데, 우리 교회 안에서만 보아도 축구나 야구를 좋아하는 교인들 사이에서는 세대의 차이까지 뛰어넘는 동호인의 교제가 나누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 인간관계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결속감과 친밀감을 발휘하는 것은 역시 혈연(血緣)관계입니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라는 말처럼, 아무리 사교성이 없고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을 귀찮아하는 사람이라 해도 부모자식형제의 정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런 혈연관계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다시피 그는 평생 독신이었고 성경에는 그의 육신 형제에 대한 어떤 언급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후배 동역자 디모데를 가리켜 자기 '자식'이라고, 자기를 수종들고 있던 성도 에바브로디도를 가리켜 자기 '형제'라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실제로 그들은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친혈육보다도 오히려 더 가까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가정의 달' 5월을 보내고 있지만 기독신자에게 있어서의 가족이란 육신적인 부자모녀형제자매에서 끝나는 것은 아닙니다.
저와 여러분은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하여 과연 어떤 성도들이 '피보다도 더 진한 영적 혈연관계'를 맺고 서로 교제하는 '예수 가족'이 되는 것인지를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예수 가족'은 '하나님의 집'인 교회를 위해 같이 생각하며 기도할 줄 아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본문 19절과 20절에서 사도 바울이 기록하기를 "19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20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했습니다.

빌립보서는 소위 '옥중서신' 중의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처럼 로마에서 외로운 연금생활을 하던 중에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고 이 서신을 빌립보교회에 보내었습니다.
즉 그는 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궁금해 했으며 교회가 어떻게 되어가는지에 대한 소식을 듣고 투옥 중에도 스스로 '안위' 즉 위로를 받고 싶어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 문제에 대하여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사도 바울은 말했습니다.
그리고 23절에서 사도 바울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곧 이 사람(디모데)을 보내기를 바라고"라고 했는데, 여기서 '이 사람'이란 헬라어 문법 구조상 매우 강조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즉 빌립보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바울과 똑같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디모데밖에' 없었던 것이며, 그래서 사도 바울은 디모데를 빌립보교회에 보내어서 그 교회의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했던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왜 디모데를 자기 '아들'처럼 생각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두 사람이 '교회에 대한 관심'에서 완전히 일치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집'인 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마음을 같이 하는' 공감대가 이 두 사람 사이를 절로 '한 집안의 부자(父子)'처럼 가깝게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에바브로디도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25절부터 28절의 말씀에 "25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26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27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 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28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고 바울이 소개하고 있듯이, 원래 빌립보교회가 사도 바울의 옥살이를 뒷바라지해 주기 위하여 대표로 파송했던 성도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처럼 바울을 수종드는 일을 너무 열심히 하다가 그만 "병들어 죽게" 될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습니다.
  
자기를 위해 그렇게 "수고"하던 성도가 중병에 걸려 버렸으니 바울로서는 그야말로 큰 "근심"이 아닐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에바브로디도의 병환에 대한 근심뿐 아니라, 그 소식을 전해 듣게 된 빌립보교회가 또한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을까 하는 근심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그것을 두고 사도 바울은 "내 근심 위에 근심"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며, 에바브로디도가 나중에 "하나님이 긍휼히 여기심"으로써 완전히 낫게 된 후에 바로 그 "근심을 덜려"고 빌립보교회로 "급히 저를 보내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에바브로디도 역시 사도 바울과 똑같은 근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26절 하반절에서 "그가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하니라"고 기록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에바브로디도는 자기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그 자체에 대하여 염려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자기를 바울의 수종자로 파송한 모교회가 자기가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서 얼마나 안타까워하고 있을지를 생각하면서 '심히 근심'했던 것이었습니다.

실로 바울과 에바브로디도는 아주 '신기한 근심'을 함께 나누고 있던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 두 사람은 똑같이 '교회를 생각하면서 근심'하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이 중병에 걸렸으니 앞으로 내 옥살이 뒷바라지해 줄 사람이 없겠구나.'라든지 '내가 주의 사자를 열심히 수종들다가 이렇게 죽을 병에 걸리다니, 어떻게 이럴 수가 있나?'라는 따위의 '자기중심의 근심'들이 아니었습니다.
  
한 사건을 두고 바울이나 에바브로디도나 둘 다 '이 일로 인하여 빌립보교회의 성도들이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라는 '교회중심의 근심'을 나누고 있었던 것이었고, 그것이 바로 그 두 사람을 절로 '형제'로 만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한 가족에 속한 식구라면 자기 집안 문제에 대해서 똑같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염려하는 가운데 또한 그 해결책을 찾으려고 같이 고심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성도 간의 영적 혈연관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한 '하나님의 집'인 교회에 속한 한 집안 식구입니다.
그리고 진정 그런 '영적 가족애'를 공유하고 있는 신자라면 그 교회의 '사정'에 대하여 늘 '이심전심'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 성도 간의 이심전심이란 바로 교회에 좋은 일 생기면 같이 기뻐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교회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같이 염려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물론 목사는 교인들에게 낙심을 주지 않기 위해서 교회 문제에 대해서 그 어떤 '부정적인 말'도 결코 공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장로 역시 교회의 어려운 문제를 앞장서서 도맡아 해결하려고 애쓰고 교인들에게는 숨기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지도자 된 자들이 마땅히 져야 할 '남모르는 짐'인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인들이 '장결자'들은 교역자들만이 관심을 가질 일이고 '교회재정'은 당회원들만이 알아서 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해서는 결코 아니 됩니다.
적어도 영적으로 한 집안 식구 된 교인이라면 '자기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은 목사나 장로나 평신도들이나 다 똑같이 통해야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그리스도의 몸 되신 교회'의 지체 된 성도들은 아예 그 사고구조 자체가 완전히 교회중심으로 바뀌게 됩니다.
자기 육신이 중병에 걸리거나 돈벌이가 잘 안 될 때에 '이래 가지고서야 내가 어떻게 살 수 있을까?'라고 '자기중심의 염려'에만 빠져서는 아니 됩니다.
'주님, 제가 이렇게 약해서는 교회를 제대로 섬기지 못하게 될까 근심되오니 저를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혹 교회 내에 큰 시험이 생길 때에도 '이런 교회에 골치 아파서 못 다니겠다.'라는 '자기중심의 원망'에만 사로잡혀서는 아니 됩니다.
그럴 때일수록 '주님, 우리 교회가 당한 이 큰 어려움을 이겨내는 일에 제가 어떻게 도움이 되어야 하겠습니까?'라고 더욱 간절히 기도해야 마땅한 것입니다. 

한 지붕 밑에 사는 부모자식 형제자매 지간이라면 자기 집안일에 대하여 당연히 '같은 관심과 근심'을 나눌 수밖에 없듯이, 한 '하나님의 집' 안에서 같은 '예수 보혈'로 통하고 있는 성도는 이처럼 교회중심의 생각이 통하고 교회를 위한 기도에 절로 일치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이 매일 새벽의 제단과 금요일 밤의 기도회에서 교회를 위한 기도 제목을 먼저 나누고 주일예배의 목회기도에 다같이 '아멘'으로 화답하는 것이 바로 한 '예수 가족'의 마음이 교감되고 공감하는 시간인 것입니다.
이전에 '마귀의 종' 되었을 때에 순전히 '자기중심으로만 생각하고 원망하고 욕심내던' 이기심을 완전히 버리고 오로지 '교회중심으로 관심을 가지고 선한 근심을 나누며 간절한 기도에 합심함으로써' 정말 이 교회를 중심으로 한 집안 식구와 같은 영적 혈연의 정을 나눌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예수 가족'은 '하나님의 일'인 사명을 위해 함께 수고하며 충성할 줄 아는 자세로써 확인됩니다. 

21절과 22절에서 사도 바울은 "21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22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고 간증했습니다.

여기 21절에서 사도 바울이 언급하는 "저희"란 불신자들이 아니라 바로 바울 주변에 있던 기독신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명색이 전도자요 교인이라면서도 의외로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그리 놀랄만한 일은 아닙니다.
  
오늘날에도 '그저 주일예배에 출석만 해 주고 교회의 다른 일에 끌려들어가기는 싫어하는' 교인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목사라 하면서도 순전히 '자기가 받는 사례 액수'에만 급급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몸 되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이 먼저 '한 알의 썩는 밀알' 되는 섬김에 대해서는 아예 까마득한 '삯군'들 역시 수두룩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 주변에도 그처럼 명색은 신자라 하면서도 순전히 '자기 실속'만 차리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지 그는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라고 안타까워하면서 속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단 한 사람 예외가 있었는데 바로 디모데였습니다.
본문에서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라고 번역되어 있는 말은 직역하자면 '디모데의(가 보여 준) 증거를 너희가 아나니'라는 뜻입니다.
즉 다시 말해서 '디모데가 어떤 사람인지는 그가 보여 준 증거를 통해서 너희들도 잘 알고 있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빌립보교회 교인들도 이미 보고 잘 알고 있던 디모데의 '증거'란 것이 과연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여기서 "자식이 아비에게 함 같이"라는 말은 문맥상 '자식이 아버지를 섬기듯이'라기보다는 '자식이 아버지와 함께 일하듯이'라는 뜻입니다.
  
세상 사회에서 한 사업을 가지고 두 사람 이상이 동업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아버지와 아들이 '합명회사'를 세우고 동업하는 경우는 그저 친구지간에서 '합자회사'를 세우고 동업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서로를 신뢰하면서 강력한 협동심을 발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회사를 통한 이해관계(利害關係)가 문자 그대로 '자기 일'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는 바로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그렇게 '자기 일'처럼 여기면서 사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기를 마지 아니 하는 가운데 절로 '사명의 부자지간'이 되었던 것이었습니다.

에바브로디도 역시 그런 관계를 통하여 사도 바울과 영적 혈연을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아까 읽었던 25절 하반절에서 사도 바울은 "그(에바브로디도)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30절에 보면 그처럼 '함께 군사 된 자'라는 사실에 대하여 더욱 구체적으로 밝히기를 "30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이란 말은 빌립보교회 교인들이 사도 바울을 모시는 정성이 부족했다는 뜻이 아니라, 지금 로마에서 연금생활하고 있는 바울을 빌립보교회 교인들 모두가 직접 와서 위문하고 도울 수는 없는 '현실적 제약'을 가리킵니다.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그 '부족함'을 빌립보교회를 대신해서 "채우기" 위하여 파송되었었는데, 그는 그처럼 사도 바울의 옥살이 뒷바라지하는 일을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섬기는 것으로 여겼던 것입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에바브로디도가 그 사명을 위하여 헌신 충성한 자세였습니다.
그는 그 일을 무슨 '가벼운 봉사' 정도로 생각하지 않고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할" 정도로 섬겼습니다.
너무 열심히 그 일을 하는 바람에 자기 자신이 '병들어 죽을 정도가' 되기까지 했지만,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에바브로디도는 마치 '자기 목숨을 내놓은' 사람처럼 자기 병 고칠 생각은 하지 않고 사도 바울을 수종드는 일에만 끝까지 헌신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보기에는 그야말로 '사선을 함께 넘기로 아예 작정을 하고 싸우는 같은 편의 군사'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전우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같이 죽고 같이 사는 사이'가 아니겠습니까? 
특히 총탄이 빗발치듯 오가는 전투의 현장에서 자기의 목숨을 서로에게 의지하면서 함께 싸우는 전우란 그 순간만큼은 멀리 고향에 있는 자신의 진짜 부모형제보다도 훨씬 더 가까운 '한 핏줄'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바로 이렇게 사도 바울과 '새로운 혈연관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같은 고향 출신의 지연관계나 같은 취미를 가진 동호회원 따위의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유대감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부자가 동업하는 것'처럼, '전우가 같이 싸우는 것'처럼 함께 충성함으로써 절로 형성된, 그야말로 '피보다도 더 진한 동지애'로 똘똘 뭉친 관계였던 것이었습니다. 

오늘날 교회들 가운데 '함께 충성하자'는 자세는 전혀 없이 그저 '서로 사랑하자'는 구호만 가지고서 성도의 교제를 나누겠다는 교회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성도 교제란 사실상 이 세상 사회의 사교클럽에서 이루어지는 것보다 나을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처럼 '함께 일하는' 동역은 없이 그저 '같이 놀면서 친하게 지내는' 것을 성도의 교제라고 생각하는 교회일수록 교인들 사이에 싸움과 분쟁이 생길 위험은 훨씬 더 높기 마련입니다.
아주 사소한 일에도 피차 신경이 쓰이고 오해가 생기고 시기하고 미워하는 등, 그야말로 '텔레비전 드라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온갖 복잡한 관계들이 연출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함께 수고하면서' 나누게 되는 관계는 훨씬 더 각별하게 됩니다.
같은 아파트에 살아도 그저 옆집에 살기 때문에 아침저녁으로 만나게 될 때마다 절로 인사를 나누게 되는 이웃보다는 동(同)이 달라도 서로 아이들도 봐 주고 아파트 부녀회의 일도 같이 하는 이웃이 훨씬 더 가깝게 되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성도 역시 서로의 경조사에 인사나 해 주고 병문안 정도나 나누는 사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같이 뛰면서 땀과 눈물을 서로 나누게 될 때에 비로소 진짜 '한 멍에를 같이 메고 있는' 동역자의 깊은 정을 피차 느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교회 일을 섬기는 사명'에 충성하는 강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그 성도 간에 나누어지는 신뢰와 사랑 역시 정비례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최고의 단계가 바로 피차 '평화시대에 순교의 각오로 충성하는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는 우리 경향교회의 성도들이 바로 이런 '영적 전우애'를 통하여 최고 수준의 성도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경향교회의 지난 37년 역사는 그야말로 '영전(靈戰)의 연속'이었지 않습니까?
고려신학교 설립, 여의도 이전, 경향선교회 발족, 강서 성전 건축, 교육관 2천평 운동 등등 한 가지 엄청난 싸움을 그야말로 등이 휘어지도록 싸우고 나면 잠시 쉴 틈도 없이 또다시 새로운 싸움을 시작해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경향의 성도들은 그런 힘든 전투들을 그저 '순교하는 대신에'라고 '사선을 함께 넘는 군사'처럼, 그리고 '생애 최고의 것과 전부의 것을 다 바쳐서'라고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전우'처럼 싸워 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의 결과 중에 하나가 바로 이 경향공동체가 지금까지 37년 동안 교회 안에서 그 어떤 편당이나 분쟁이 생기지 않고 항상 일사불란한 화합과 단결을 이루어 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교인들끼리 '싸우고 자시고' 할 여가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저 '서로 사랑'만을 외치는 교회 안에서는 마치 후방에 있는 편안한 군대에서 졸병이 인사만 잊어 먹고 지나가도 고참병이 당장 집합을 걸고 기합을 주는 것처럼 서로 상대방이 자기를 어떻게 '대접'해 주는가에 대하여 항상 촉각이 날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머리 위로 총알이 핑핑 날아다니는 전투의 현장에 있으면 일단 '같이 살고' 보는 것이 급선무이지 무슨 자질구레한 '예의'니 '관심'이니 하는 것들을 가지고 '티격태격'거릴 여유가 있겠습니까?
  
서로 받기만을 원하는 깨어지기 쉬운 '얄팍한 성도 사랑'이 아니라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함께 그 몸 되신 '교회를 위해 충성'하는 가운데, 그 어떤 우정이나 가족애보다도 더욱 뜨겁고 진실한 '신앙의 동지애'를 나눌 줄 아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교회를 생각하면서 기도하는 마음'과 '교회를 중심으로 충성하는 삶'을 통하여 '피보다도 더 진한 예수 가족의 혈연'이란 바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셨던, 아니 친히 느끼셨던 교제였습니다.
  
마태복음 12장 4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의 "모친과 동생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찾아와 "밖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당장 나가셔서 그들을 만나려 하지 않으시고 그 대신에 그 말을 전해 준 사람에게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라고, 정말 '뚱딴지' 같은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그런 후에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키시면서"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이 '혈육의 관계'는 예수님의 제자 된 자에게는 더 이상 필요 없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까지 장남으로서 동생들을 부양하신 것이 틀림없으며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조차 어머니 마리아를 봉양할 것을 제자 요한에게 특별히 부탁하실 정도로 형제우애와 부모효성이 깊은 분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혈육의 정'을 부정하거나 조금이라도 깎아내린 것이 아니라, 그처럼 세상에서 가장 가깝다고 하는 '육신의 혈육관계'보다도 더 깊고 뜨거운 관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 나누어지는 '영적 혈육관계'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 가족'이란 바로 이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는 마음과 하나님께서 명하신 선한 일을 '행하는' 삶을 통하여 새로이 맺어지게 되는 '차원이 다른 가족'인 것입니다.

저는 교인들 사이에서 '형님, 누나' 따위로 호칭하는 것은 삼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이 주신 거룩한 직분 명칭들과 성도라는 호칭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만 예를 든다면, 저는 우리 교단의 젊은 목사들 중에서 원로목사님을 가리켜 '저의 아버지 같으신 분'이라고 남들 앞에서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람치고 나중에 문제를 안 일으킨 목사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 특별한 정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는 성도는 그것을 그저 속으로만 간직하지 결코 떠벌리지는 않는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바로 그런 '영적 혈육의 정'을 이 지상교회 안에서 꼭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예수 안에서의 형제자매 부모자녀의 관계'란 이 세상에서 끝날 수밖에 없는 육신의 가족과는 달리 저 천국에서 영원히 함께 살게 되는 '천당 가족'으로 필연적으로 이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란 유명한 말은 '같이 놀아서'가 아니라 '같이 죽을 고생을 한' 관계이기 때문에 생긴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한 번 경향인은 영원한 천국인'이 되는 것 역시 바로 교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이 통하고 교회를 중심으로 죽도록 충성하는 사이가 될 때에 비로소 성립되는 것입니다.
그 '천당 가족'이 되는 그날까지 이 지상의 천국인 교회를 중심으로 '아비와 자식'처럼 한마음으로 기도하고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하는 군사'처럼 함께 손발을 맞추어 충성함으로써,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제자들과 나누셨으며 사도 바울이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사이에서 피차 느꼈던 그 진정한 사랑의 교제를 영원히 누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석기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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