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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님을 (고후 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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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닌 내 안의 예수님을 (고후 4:5-6)


우리는 기독교가 서양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미국종교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에 개신교 신앙을 전해준 사람들이 주로 미국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기독교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서양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이해했고 실제로 그랬습니다. 

구한말에 기독교를 받아들인 분들은 서양식의 교육을 제일 먼저 수용했고 또 그중의 많은 사람들이 최초로 해외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이승만 ․ 김활란 ․ 윤보선 이런 분들이 예수님을 믿고 그리고 유학의 길을 떠난 분들입니다. 그것이 국가의 발전에 기여한 바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원래 기독교는 서양의 종교는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동양종교와 더 가깝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서양이 아니고 동양으로 분류되기 때문입니다. near east라고 하지 않습니까. 다만 그것이 서양으로 건너갔고 서양에서 발전했기 때문에 기독교가 서양의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은 기독교 신앙의 메시지와 기독교 신앙을 담는 그릇을 하나로 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우리가 물을 마실 때 컵에 담아서 마십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가치관이든 철학이든 신앙을 그릇에 담아서 전합니다. 그러나 물을 마실 때 물을 마시지 그릇을 마시지는 않는 것처럼 컵이 필요하지만 컵이 내용물인 것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을 전할 때나 받아들일 때 그 신앙의 핵심을 간파하고 그것을 배워야지 그것을 담는 그릇마저도 먹어야 된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내용물과 그릇을 구별할 수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릇이 기독교의 일부라고 생각해서 오히려 신앙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 전파된 기독교는 미국 문화의 옷을 많이 입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기독교를 배우는 것은 미국의 문화를 수용하는 것 같은 인상을 줍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습니다마는 우리나라 신학생들이 제일 유학을 많이 가는 나라가 미국이고 또 교회성장학의 노하우를 배우러 가는 곳이 미국입니다. 국내에서 소위 첨단목회방식이라고 수입하는 목회 모델도 전부다 미국 것입니다. 주로 미국의 백인 중산층 교회입니다. 그러다보니까 우리가 경험하는 기독교신앙은 미국의 문화적인 요소가 많이 있는 것이 사실이에요. 

여기에는 장점과 단점이 있습니다. 미국의 기독교 문화는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인의 회심 ․ 개인의 믿음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 이것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 국가에서 자라날지라도 개인이 회심하지 않으면 그 사람은 기독교인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또 한 가지 장점은 실용주의입니다.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기 보다는 얼마나 효과적이냐를 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유익한 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있어요. 첫째는 성장지향주의 ․ 양적인 성장만을 강조하는 것, 그리고 대중적인 인기와 마케팅과 엔터테인먼트를 강조하는 것, 그래서 미국의 기독교는 할리우드를 흉내 내고 그러다보니까 미국 대형교회, 우리에게 알려진 새들백 교회든 윌로우 크리크 교회든 이런 대형교회의 예배가 쇼를 연상하게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 것이라면 다 좋다고 생각하고 무분별하게 그들의 문화적인 요소를 우리 교회에 도입하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은 좀 아쉬운 것입니다. 

제가 다녔던 초등학교는 영락교회 재단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이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선생님들 목사님들 중에 이북 분들이 많이 계셨습니다. 그분들은 설교하실 때 이북 사투리로 설교하셨습니다. 저는 그게 이북 사투리인 줄 모르고 예수 믿는 사람들의 어투인줄 알았어요. ‘이건 이렇게 하는 거야요.’ 전 그게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줄 알았는데 나중에 그게 이북 사투리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 기독교 신앙을 제일 많이 받아들이고 열심이었던 분들이 이북에서 월남한 분들이었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그런데 어린 저의 받은 인상에 이북 분들에게는 어떤 독특한 성격이 있었다고 생각됐습니다. 먼저 근면하고 성실하고 매사에 추진력이 있었어요. 그러나 동시에 끼리끼리 모이는 성향이 있고 또 우월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됐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제가 거듭난 다음에 생각해 보니까 왜 내가 미션스쿨을 다닐 때는 거듭나지 못했을까. 내가 왜 어린 나이에 교회에 다녔을 때는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을까. 그들이 장로교의 전통을 잘 유지하는 면이 있지만 불신자라든가 초신자에게 잘 알아듣고 신앙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면에 있어서는 좀 약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과거 서양선교사들이 비난을 받았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들이 세계선교에 그렇게 이바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평가를 보면 그렇게 좋은 점수를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는 문화적 제국주의의 성격을 띠었기 때문입니다. 문화적인 제국주의. 오늘 가톨릭 선교사들의 실수를 언급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들이 금을 찾기 위해서 신대륙을 발견하고 그 나라들을 식민지화하고 그리고 대포와 선교사를 함께 보낸 것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나 개신교 선교사들에게도 제국주의적인 우월감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못사는 나라, 소위 제3세계 나라들을 찾아가서 복음을 전할 때 우월한 자의 입장에서 열등한 민족을 돕겠다는 자세로 복음을 전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적으로도 우월하고 군사적으로 문화적으로도 우월하고 영적으로도 우월한 자의 입장에서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열등한 민족을 도와주겠다는 자세를 가진 것입니다. ‘너희들은 우리 것을 받아들여라. 우리 것이 너희 것보다 낫다.’ 받는 자의 입장에서 감지덕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과연 성경적인 것이냐를 생각해야 됩니다. 이것이 정말로 예수님의 정신을 본받은 것이냐.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말씀하셨지만 너희가 많이 받았으니 적게 받은 자를 도우라는 말씀은 하신 적은 없습니다. 기독교의 봉사와 섬김은 많이 가졌기 때문에 적게 가진 자를 돕겠다는 자세와는 거리가 멉니다. 예수님이 물질이 많았습니까. 예수님이 더 많은 것을 보유했습니까. 더 특권을 누렸습니까. 그래서 특권을 가진 자의 입장에서 소위 노블레스 오블리제, 적게 가진 자를 돕는 그런 사역을 하셨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셨고 가난한 자들과 함께 사셨고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병자들이 많았고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고 지중해의 변방에 있는 작은 나라였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문화적인 우월감이나 경제적인 능력이나 이런 것으로 일하신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성령과 하나님의 구원의 복음을 가르치신 것뿐입니다. 

사도바울의 선교 팀을 보면 그것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그들이 온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때 사도바울의 팀이 더 우월한 문화를 갖고 더 뛰어난 의술을 가지고 더 많은 재력을 가지고 덜 발달한 사람들을 돕는 차원에서 선교를 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어요. 그리고 그 당시에 세계적인 문화는 헬라문화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지중해 변방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결코 우위를 자랑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데 당시 기독교인들에게 남들이 갖고 있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뿐이었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이 있지 않습니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을 너에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일어서라’ 은과 금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다닌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오늘날 구제든 봉사를 말하는 분들을 보면 내가 은과 금이 있어야 되는 줄로 생각하고 내가 가진 것으로, 나의 가진 것으로 남에게 베푸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많이 있는데 그렇다면 갖지 못한 사람은 섬기지 못한다는 얘기입니까. 그 생각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나를 전하는 것과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나를 전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섬기고 봉사하고 복음 전하는 것이 내 종교를 전하는 게 아니고 내 생각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내 것을 남들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것은 내 것이지만 내 안에 있는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나를 나 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기 때문에 결국 내가 위대한 게 아니고 내가 경건한 게 아니고 내가 거룩한 게 아니고 내가 남들보다 많은 것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고 내가 남들보다 많이 알기 때문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 내가 남들보다 더 나은 것이 없습니다. 오히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할 수밖에 없는 나의 연약함이 있을 뿐입니다.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먼저 은혜를 의지할 수 있었다면 그건 내가 더 연약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천국갈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의롭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의지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와서 내가 자랑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내가 무엇이 위대합니까. 내가 무엇이 잘났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안에 계신 예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을 가르치는 게 아니고 남들도 예수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것뿐입니다. 내가 그들을 구원하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에게 성령을 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예수님이 성령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예수님이 천국을 주시고 예수님이 구원하시고 예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만남을 주선하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와 우리 안에 있는 예수님을 구별해서 생각할 수 있어야 됩니다. 우리 신앙이지만 우리가 아니고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기독교는 어느 한 민족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서양민족의 전유물도 아니고 유대인의 전유물도 아닙니다. 지금은 아시아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고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국인의 기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는 누구든지 받아들이는 사람의 몫입니다. 한때는 서양에서 기독교 신앙이 부흥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때가 지나갔어요. 이제는 라틴아메리카 ․ 아시아 ․ 아프리카에서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이 시대에 어느 누구가 기독교 신앙이 서양종교라고 말하겠습니까.

영국의 성공회가 회의를 할 때 전 세계의 주교들이 모이는데 영국의 성공회는 자유주의신학으로 흘러가려고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제3세계 아프리카에서 온 주교들의 보수적이고 성경적인 신앙 때문입니다. 이제는 기독교 신앙이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도록 돕는 자들이 과거에 도움을 받았던 과거에 선교를 받았던 제3세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신앙지도자들이 더 성경적이고 더 뜨겁고 더 복음적이고 더 보수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배우려고 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은 어떤 특정 국가나 민족의 전유물이 아니고 여기에는 문화를 뛰어넘는 유니버셜한 문화를 초월하는 핵심적인 메시지가 있고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만일 초대기독교인들이 그들의 문화를 전하려고 했다면 이방인들에게 너희도 우리처럼 되라고 가르쳤을 것입니다. 너희가 구원받으려면 우리처럼 되라. 우리처럼 할례를 받고 우리처럼 율법을 따르고 우리의 식습관을 따르고 우리가 되면 너희도 구원받을 수 있다 이렇게 가르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대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나 우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가르쳤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방인이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방인은 이방인대로 예수님을 믿고 유대인은 유대인대로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지 이방인이 먼저 유대인처럼 되고 그리고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이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이건 신학적인 면에서 중요한 것뿐만이 아니고 실천적인 면에서도 중요합니다. 

우리끼리 얘기지만 전도를 하려고 하는 사람에게서 좀 거만하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지요. 여러분은 모르겠지만 저는 느낀 적이 있습니다. 그 이유가 뭔지 아십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전한다는 명목으로 자기를 전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는 겁니다. 자기가 믿는 예수님과 자기를 구별하지 못하다보니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가 어떻게 들리느냐면 나처럼 되라는 것처럼 들립니다. 나처럼 믿어라. 나처럼 신앙생활하고 나처럼 기도하고 나같이 되라. 이런 식으로 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만하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건 나를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말씀에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를-we do not preach ourselves-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우리가 정말로 섬기는 종이 되는 비결은 사람들 앞에서 친절하고, 아유 어서 오세요,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무얼 드릴까요, 씻어주고 깎아주고, 오 땡큐, 그런 친절함으로 섬기는 것이 아니고 나를 전하지 않고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사람을 섬기는 길입니다. 왜냐하면 나를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게 겸손한 것입니다. 

내가 위대한 게 아니거든요. 나의 가진 것, 나의 지식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내 신앙을 전하는 게 아닙니다. 내 신앙을 자랑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잘 믿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나처럼 믿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고 내가 거룩하기 때문에 남들이 나처럼 되라고 가르치는 게 아닙니다. 나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헷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헷갈리는 사람은 정신 나간 나귀와 같습니다. 나귀가 예수님을 태우고 예루살렘에 들어갈 때 사람들이 그 나귀 앞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그들의 옷을 벗어서 길에 깔고 호산나라고 외치니까 나귀가 자기에게 그러는 줄 알았어요. 내가 예루살렘에 가다보니까 사람들이 나에게 호산나라고 하고 나에게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더라. 정신 나간 나귀입니다. 자기가 태우고 있는 분과 자기를 혼동한 것입니다. 자기가 태우고 있는 분 때문에 사람들이 그렇게 하는 것인데 자기 때문에 그런 줄, 자기가 위대한 줄 생각한 착각하는 나귀가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나를 전하는 게 아니고 내가 모시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입니다. 아주 중요한 차이점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아무리 신앙생활을 오래했던, 몇 대째 예수를 믿었든, 목사든, 목사의 목사든 간에 주님과 친해질 수는 있지만 주님을 익숙하게 여겨서는 안됩니다. 신앙에 대해서 익숙하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늘 처음 접하는 것처럼 늘 어려운 마음을 가지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해야지 익숙해지는 순간 우리는 교만해집니다. 신앙에 대해서 익숙해지는 순간 내가 나오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목사가 목회에 익숙해지면 자기 정성이 들어가지 않습니다. 남편이든 아내든 자기 배우자와 익숙해지면 그때부터는 애정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익숙해지면 그 앞에서 트림도 하고 뭐도 하고 옛날에는 상상도 못했어요. 익숙하기 때문에. 그러나 친한 것과 익숙한 것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친해야 되지만 예수님과 익숙한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항상 예수님이고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우리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고 나는 약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진정한 섬김은 그럴 때만이 가능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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