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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청년주일] 하나님 말씀을 통한 영혼의 정화 (시 119: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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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통한 영혼의 정화 (시 119:9-16)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아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말게 하소서 내가 주께 범죄하지 아니하려 하여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 

우리교회에 하나님께서 젊은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보내 주셨습니다. 20대가 재적의 50%를 넘으니까 우리교회는 소망이 있는 교회이고 미래가 있는 교회입니다. 앞으로 그 많은 젊은이들 가운데서 좋은 지도자들이 많이 나올 것입니다. 

괴테는 젊은이는 술을 마시지 않아도 취하는 세대라고 했습니다. 청년은 말만 들어도 충천, 열정, 꿈이 생각되는 세대입니다. 인생에서 가장 좋은 세대이고 복을 받은 세대입니다. 그런데 아직 세상에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에 실패율도 그만큼 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실패와 실수와 오류도 많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일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자주 넘어지듯이 젊은이 때에는 경솔하고 생각도 짧아서 실수할 확률도 많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젊은이들에게 본문의 말씀을 통해서 메시지를 주려고 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시편 119편으로 참 유명한 시입니다. 우선 성경에서 176절이나 되는 가장 긴 장수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빛나는 명구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문학의 백미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이 말씀들 속에서 하나님은 부단히 영적교제를 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영혼의 정화를 이루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시편은 모두 22개 단락으로 각 단락에서 여러 가지 교훈과 당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 22개의 단락 중 2단락에서 청년에게 주시는 당부가 있습니다. 


말씀 따름 

9절 말씀을 보면 “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청년은 인생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출발점은 중요한 지점입니다. 그 출발을 잘하면 오류가 없이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자칫하면 잘못 출발하게 되면 그 결과는 엉뚱한 길로 가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그 결과도 재앙으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화살이 출발점에서 정확하게 쏘면 과녁에 정확하게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 출발점에서 조금만 빗나가면 그 결과는 엉뚱한 곳에 떨어질 것입니다. 젊은이의 인생의 출발은 그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그래서 청년은 말씀 안에서 미래를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의 시인은 기도하였습니다. “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하게 하리이까 주의 말씀만 지킬 따름이니이다.” 젊었을 때 자칫 잘못하면 큰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비전”입니다. 20년 후를 기대하고 오늘 기도한다면 그것은 분명 비전입니다. 그래서 기도 속에는 꿈이 들어있고 온갖 기대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희망과 꿈이 담뿍 들어 있습니다. 바실 밀러는 미래가 탄탄하게 보장된 교수자리를 내 놓고 인도로 선교사로 떠납니다. 

인도에서 20년 사역에 대 성공을 거두며 인도인의 영혼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동안 수많은 기적들이 일어났고 치유의 역사와 회심의 역사도 일어나 마침내 그의 사역이 대 성공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신은 어떻게 승리를 할 수 있었는가”라는 물음에 “나는 한일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다만 기도 외에 한일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어떤 때는 30일간을 기도하였고 어떤 날은 무릎을 꿇고 36시간씩 연속으로 기도하였다고 했습니다. 그의 기도에는 네 가지 목표가 있었습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질 때까지, 기도응답이 주어질 때까지, 그분이 나를 부르실 때까지, 이다음 천국에서 승리를 외칠 때까지”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기도는 젊은이들의 삶에 기초가 되어야 합니다.   

역사를 바꾼 사람들을 보면 거의가 20대였습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처음 들고 온 선교사 아펜젤러는 나이가 27세였습니다. 언더우드는 26세, 게일은 25세, 스크랜턴은 29세, 알렌은 27세였습니다. 그들이 우리나라에 올 때 왜 나이가 20대였는가 하면 이유가 있습니다. 1885년 당시 세계에서 선교지 중에 1급지는 중국이었고 2급지는 일본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장 불편하고 미개지인 한국은 3급지였습니다. 그때 경험이 있는 선교사나 백이 있는 선교사는 모두 1급지 2급지인 중국과 일본으로 갔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에 온 20대의 젊은 선교사들은 모두 경험도 없고 백도 없는 선교사들이라 모두 3급지인 한국으로 오게 된 것입니다. 그들이 한국으로 왔을 때는 의지할 자도 없었고 기댈 사람도 없어서 오직 혼자 사역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까 할 것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 외에는 할일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그 젊은 선교사들이 대 성공을 거두게 된 것입니다. 때로 나 혼자라고 생각되는 지점이 기적이 만들어지는 순간일 수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백을 찾지 말고 내일의 인생을 위해서 기도부터 해야 합니다. 하나님 백이 최고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고 살아가는 것이 최고의 배경입니다. 그래서 9절에서 시인은 “청년이 무엇으로 행실을 깨끗게 하리이까 오직 주의 말씀만 따를 뿐”이라고 기도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시인은 10절에서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전심으로 주를 찾았다”는 말은 목적과 목표가 분명하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으면 만나고 체험하게 됩니다. 삶에 목표가 분명해야 뭔가를 이룰 수 있습니다. 특히 젊은이는 목적이 분명하지 않으면 방황하기 쉽고 소중한 시간을 무의미하게 낭비할 수 있습니다. 목적이 불분명하면 남들을 생각 없이 따라가게 되고 나중에 후회하게 됩니다. 내가 정말 뜻을 두고 평생 기쁨으로 할 일이 무엇인지 내게 주어진 은사를 개발해야 합니다. 

어느 청년이 고민이 많았습니다. 그 젊은이는 인문계를 지원하여 대학공부를 마쳤습니다. 인문계를 지원할 때 “이것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있었지만 “4년제 인문계”라는 우리사회의 등식 때문에, 체면 때문에 지원하여 졸업하였지만 그는 오늘 갈 곳이 없어서 지금도 무직으로 있습니다. 그래서 이제 다시 전문대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런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람이 긍지나 자부심이 참 좋은 것이지만 때로 긍지 중에는 “사람을 죽이는 긍지”도 있습니다. 소위 일류대를 나왔다는 분들이 여기에 빠지기 쉽습니다. 이 분들은 어지간한 직장은 눈에 차지 않습니다. 큰 직장에 가려고 하면 갈 곳이 없습니다. 

그래서 놀고 있는 동안 동료들은 승승장구합니다. 그때 그들을 바라보며 “재는 학교 다닐 때 별 볼일 없던 앤데”, “저 놈은 매일 날 따라다니던 놈”이라고도 말합니다. 이것이 자신을 죽이는 긍지입니다.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아오니” 우리 신앙인에게 이런 분명한 목적이 있고 일생 기쁨으로 일할 수 있는 은사를 분명하게 발견하였다면 그 사람은 평생 행복하게 일하고 사역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예의 익힘 

12절을 보면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여기 율례라는 말은 법도와 말씀과 경건을 말합니다. 신앙인은 그 율례를 어려서부터 익혀야 합니다. 신앙의 율례나 전통은 어느 날부터 갑자기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려서부터 꾸준히 익혀야 만들어지고 조성됩니다. 

예의도 마찬가지로 20대 전에 몸에 익혀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은 자기를 망치는 행동입니다. 20대 이전에 몸에 익히지 않으면 굳어져서 고치기 어렵습니다. 몸에 밴 예의는 인생을 풍요하게 그리고 향기롭게 만드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어느 은행을 지원하는 여성이 용모는 부족하였습니다. 그런데 대신 성실하였고 예의가 몸에 밴 여성이었습니다. 면접 때 심사관들은 그를 보는 시선이 시큰둥하였습니다. 또 낙방하였구나 생각하고 나오던 중 땅에 떨어진 핀을 주워 책상위에 놓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이 합격을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우리 회사에는 당신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평가 때문입니다. 즉 그 여성에게서 가능성을 발견한 것입니다. 

어리광은 10대 때만 가능합니다. 20대가 넘으면 그 어리광은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그 때는 얼마나 예의를 몸에 익히고 살아가느냐가 평가기준이 됩니다. 오늘 젊은이들은 너무 지나치게 유행에 민감하게 행동합니다. 그런데 오늘 유행이 조금 생각해 보면 너무 탈선된 유행이 많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이 그 유행을 생각 없이 받아서 행동하고 다니는 것이 문제입니다. 예를 들면 청바지를 입을 때 오래 입어서 헤어졌다면 이해가 가겠는데 온전한 것을 일부러 찢어서 구멍 내서 입고 다닙니다. 그것이 젊은이들 사회에서는 멋인지는 모르겠으나 그것은 타락된 유행입니다.

우리는 그 시대를 살면서 유행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아무것이나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문제입니다. 북한에서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한에서 청바지를 만들어 북한으로 보내면 북한 여공원들이 남한에서 보낸 청바지를 돌판에 놓고 갈아 낡게 만들고 조금씩 구멍을 내는 일을 했습니다. 북한 여공원들이 그 일을 하면서 돈은 벌지만 이것은 아니다 해서 마지막에는 그 일을 거부하였습니다. 유행이라고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시편의 시인은 12절에서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하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율례, 예의는 청년 때에 몸에 익히게 하여야 합니다. 예의는 어느 날 갑자기 몸에 익히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전통이나 역사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훈련 

14절을 보면 “내가 모든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도를 즐겁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재물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좋아하고 좋아하다 못해 재물에 목숨을 걸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재물은 좋은 만큼 또 위험요인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물질을 좋아하는 만큼 주의 도를 사랑하게 하소서”하고 기도합니다. 지혜로운 기도입니다. 

오늘 이 시대는 물질을 너무 좋아합니다. 그래서 좋기도 하지만 반대로 그 재물 때문에 큰 시험도 큰 실패도 주어지는 것입니다. 물질은 때로 복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재앙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재앙을 만나기도 하고 실패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실패의 기회를 선용하여 우리를 연단하시기도 하고 훈련하기도 하십니다. 그래서 연단의 기간이 길어지기도 하고 아픔이 깊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때 그 시험이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라면 그 시험이나 실패는 “거룩한 방해”일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경우입니다. 4세기의 교부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도성”이라는 책을 씁니다. 그 책을 쓰게 된 동기가 있습니다. 기원 후 313년에 로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밀라노 칙령을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다”는 칙령입니다. 이제는 기독교가 더 이상 핍박을 받지 않게 되자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제 꿈을 이루었다고 만세를 불렀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마음껏 신앙의 삶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동쪽의 야만민족인 게르만민족이 쳐들어와 로마를 멸망시켰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가장 놀란 사람이 어거스틴입니다. 어거스틴은 이 사실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성도가 야만민족에게 멸망을 당한단 말인가.” 그런데 시간이 흐른 후 어거스틴은 비로소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하나님께서 로마를 굴복시킨 게르만 민족을 복음화 시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게르만민족이 다시 로마를 세우고 그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때에야 어거스틴은 고백하기를 “하나님은 세상나라를 멸망시킴으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우신다”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어거스틴은 기막힌 하나님의 역설의 운영의 묘를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를테면 더 큰 빌딩을 짓기 위해서 그 주위에 있는 작은 초가집들을 부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더 큰 뜻을 이루시기 위해 내가 애지중지하던 물건을 뺏으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때로 우리에게 고난도 실패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다가 그런 경우를 만나면 당황하거나 비관할 일도 운명을 탓하고 사주팔자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한 방해”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경우 사주팔자를 보고 싶다는 유혹을 받게 됩니다. 성종임금이 자기와 사주가 동일한 어느 과부를 발견하고 그를 불러 그의 삶의 과정을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서로의 삶을 맞추어 보니까 이런 결과가 나왔습니다. 

성종이 세자로 책봉되던 해에 그 여인은 어머니와 사별하였습니다. 성종이 임금에 등극하던 해에 그 여인은 남편과 사별합니다. 성종이 경사를 맞던 해에 그 여인은 불행이 겹쳤고 지금은 밥을 빌어먹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그래서 고백하기를 “세상에 못 믿을 것은 사주팔자”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알려진 명작은 대부분 고난을 통해 만들어졌습니다. 오늘의 명작들은 모두 고난을 통해 만들어진 작품들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향이 강한 향수재료는 발칸산맥 최고봉에서 한밤 12시에서 2시 사이에 핀 장미꽃에서 추출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향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셉이 고난을 통해서 성공하고 모세도 고난을 통해서 출애굽의 지도자가 되고 다윗도 고난을 통해서 임금이 됩니다. 그러니까 시인은 그렇게 기도합니다. “내가 재물을 즐거워함 같이 주의 도를 즐거워하게 하소서(14).” 


삶 중요한 두 덕목 

16절에서 시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않겠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근본적인 율례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율례이고 또 하나는 “아래로 부모를 사랑”하는 율례입니다. 즉 “신앙과 가정”입니다. 

우리의 인생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가정을 소중히 여기는 일”입니다. 젊을 때에는 이 두 가지에 너무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도 쉽게 떠납니다. 그때는 신앙이 없이도, 하나님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가정의 소중함도 모릅니다. 그래서 청년 때 그리고 젊을 때에는 밖으로 나아가 살아갑니다. 직장에 온 정신을 쏟고 살아갑니다. 승진, 돈 벌음, 성공을 이루려고 가정은 별로 관심이 없어집니다. 그러는 사이에 아내와 사이가 벌어지고 아이들에 관심이 멀어집니다. 

중년에 이르러서 눈을 뜨고 보니 가정이 허물어지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됩니다. 불행하게도 눈을 뜨고 살펴보니 이미 가정은 병들어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온갖 갈등으로 가정이 병들어 분열 되고 중증으로 앓고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무엇 때문에 그렇게 애쓰고 땀 흘려 살아갑니까. 무엇을 위한 성취이며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수고입니까. 세상에서 다 잃어도 하나님과 가정만은 잃지 말아야 합니다. 부도 지위도 명예도 사업도 취미도 하나님께 그리고 가정에 득이 되도록 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 그리고 가정에 해가 된다면 그것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가정이 불행해지면 많은 것을 잃는 것입니다, 내가 성공했는데 부모는 슬프고 버림받고 하나님은 멀리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전부를 잃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주 중요한 것을 둘 다 잃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기도하고 있습니다. “내게 주의 율례를 가르치소서”, “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 우리들이 하나님 곁에 있을 때가 가장 강할 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 때가 가장 힘이 있을 때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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