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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요 14: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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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 오셔서 하시는 일 (요 14:25-26)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삶이다. 말로는 하나님을 위해 산다고 하지만, 5년, 10년 신앙생활을 해도, 헌신적인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때문에 손해 보지 않으려 한다. 여전히 자기 중심적인 삶을 고집한다. 소수의 신자만이 헌신할 뿐이다. 

따라서 헌신하며 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헌신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 있다. 자신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자신을 변화시키려면, 자신의 잘못을 깨달아야 한다. 또한 잘못을 알아도, 잘못된 습관과 태도를 고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래서 자신을 변화시키기는, 정말 어렵다. 

그런데 간혹 사랑이,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자살을 많이 하기로 유명한 부산의 태종대에, 사랑의 상징인, 어머니 조각상을 갖다놓은 후에, 자살하는 수가 급격히 줄었다고 한다. 사랑은 죽을 사람도 살리고, 자포자기한 자에게, 용기를 준다는 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다. 

그러나 사랑이 사람을 설득하는데, 최선의 힘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어머니는 갖은 수고와 정성, 사랑으로 아기를 키운다. 때로는 사랑의 채찍을 들기도 하고, 사랑의 칭찬과 격려를 하기도 하면서, 자식을 키운다. 하지만 그 자식이 다 잘되고, 착한 자식으로 자라기만 않는다. 

경제적으로 꽤 부유한 가정의 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집을 나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사랑이 모자라서 그런가 싶어서, 어머니는 다니던 직장도 그만두고, 집에서 아이를 돌보는데, 온 정성을 쏟았다. 그런데 조금 나아지는가 싶더니, 잠시뿐이었다. 
결국 10대 후반이 되자, 교도소를 들락거리게 됐고, 부모는 아들 빼내오랴, 교도소로 면회 다니랴 이래저래, 가산을 다 탕진하게 되었다. 온 정성을 쏟았으나 허사였다. 결국에는 자식의 장래에 대해 포기하고 말았다. 아무리 부모가 사랑을 많이 베풀어도, 자식이 비뚤어질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교육의 힘이, 사람을 변화시킨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전인교육에 힘을 쏟는다. 인격이 성숙한, 올바른 사람으로 키워내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하지만 교육의 혜택을 받았다고, 모두 인격을 제대로 변화되어간다고 말할 수 없다. 

유학까지 다녀온 교수가, 사업자금이 모자라자, 아버지의 재산이 탐나서,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있었다. 최고의 학벌의 교수가 되면 무엇 하는가? 지식이 아무리 많으면, 무엇 하는가? 그 사람이 받아온 교육으로도, 자신의 욕심 하나 자제하지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서, 변화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의 결단을 발표하기도 하고, 맹세하기도 한다. 하지만 곧 실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느 사람이 노름으로, 재산을 다 날리고, 다시는 노름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고, 손가락을 잘랐다. 

그런데 얼마 후, 남편의 행방이 묘연해지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놀음하는 곳에 들러보았더니, 발가락으로 패를 잡고, 노름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말리면 뭐하고, 결심하면 뭘 하는가? 자기의지로 결단을 해도, 그 결단을 지키기는 정말 어렵다. 사람은 자기 의지대로, 변화되기가 쉽지 않다. 

프로이드는 사람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인간에 대해, 대단히 회의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죽기 얼마 전에, 친구 프랭켈에게 "나는 인간에 대해 연구하며 할수록, 더욱더 인간을 경멸한다."고 했다고 한다. 

1.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속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을까? 성령님이 역사 하셔야 한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베드로는 무리들 앞에서, 사랑하는 주님을 부인했고, 저주까지 했다. (마26:33)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고 장담했다. 

그러나 그도 결국, 주님을 배신하고 말았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실 때도, 멀리서 두려움과 공포에 떨고있었다. 그런데 사도행전을 보면, 겁먹은 모습이 아니다. 담대히 복음을 외친다. (행2:36)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3:14-15)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이를 거부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라."고 힘있게 외친다. 자기를 잡으려는,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히 외쳤다. 

어떻게 이런 변화가 일어났는가? 십자가 사건 이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서, 40일을 함께 보내고, 감람산에서 오백여 명의 사람들과 함께, 승천하시는 주님을 감격적으로 지켜보았다. 승천하시면서 (행1:4-5) '성령을 기다려라.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침례를 받으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마가의 집에 모여, 성령이 임하기를 열망하며, 기도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렇게도 기다리던 성령이, 열흘만에 그들에게 부어졌다. (행2:1-4) "갑자기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그래서 그들의 가슴이 이상하게 뜨거워졌다. 이때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었다. 교육이 그들을 바꾸어놓지 않았다. 자기 결단에 의해 바뀌지 않았다. 

성령이 그들 위에 내리자, 변화가 일어났다. 인간의 결심과 용기는, 핍박하는 사람들 앞에서 쉽게 무너진다. 그래서 성령의 역사가 필요하다. 성령을 받은 예수님의 제자들은, 인격은 몰라보게 다듬어졌고, 부족은 채워졌다. 능력자로 다시 태어났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삶으로, 새롭게 변화되었다. 

그러므로 성령이 충만한 사람에게 나타난 변화는, 믿을 수 있다. 성령의 능력을 덧입을 때, 연약한 사람도 강해지고, 담대해질 수 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도, 성령을 덧입으면,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 된다.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성령 충만을 받으면, 사랑의 사람으로 변화된다. 

지금 우리는 성령시대를 살고있다. 성령은 어느 교회나 교파에만 역사하지 않는다. 초교파적으로, 세계적으로 역사하고 있다. 성령의 역사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장이며, 하나님의 본질적인 사역이다. 성령은 세계 모든 교회들에게, 능력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고 있다. 

교회에 나오기에, 삶이 변하지 않는다. 성경공부를 하고, 제자훈련을 받는다고,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의 영이, 거듭남의 과정을 통해 들어오실 때, 비로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성령은 이 땅에서, 성공을 위해서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만든다. 

세상의 영은 아주 강하다. 그래서 마치 연기 냄새가 옷에 배듯, 우리에게 착 달라붙는다. 교묘하게 그 모습을 바꾸기에, 선악을 분별할 수 있는 힘이 없으면, 단순히 속아넘어간다. 종교적인 관용으로 구제사업을 하므로, 자신이 구원받았다고 오해하게 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세상과 구별 되라."고 명령하신다. 세상은 술, 놀음, 음란과 같은 것만 아니다. 이것은 단지 세상이, 외형적으로 드러난 것이다. 세상은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이지 못하게 만든다(요14:7).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이 세상의 본질이다. 
그러나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지게 만들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하게 만든다. 성령이 오시면, 사람의 영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 그래서 불경건과 세상의 정욕을 버리고, 건전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도록 역사 하신다. 성령을 만나기를 원한다면, 말씀을 읽고 묵상하라. 

기도하는 가운데, 말씀가운데 성령을 만나라. 성령은 성경의 저자이다. 성경은 전부 성령의 계시로 이루어졌다. 말씀을 묵상할 때, 성령을 만날 수 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늘 생각하면서 행동하면,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성령은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 

2. 그러나 때때로, 성경에 기초하지 않은 성령운동이 일어나, 신비주의로 빠져들었다.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대해, 올바른 성경적 이해를 갖지 못해, 문제들이 발생한다. 성령운동은 철저히, 말씀 중심의 운동이 되어야 한다. 잘못된 성령운동은, 지금도 성령님이 계시를 주신다고 말한다. 

그래서 성경에 없는 이야기를, 꿈과 환상, 계시 받았다고 하면서, 자신은 예언자요, 사도라고 한다. 이렇게 말하는 자들은 이단이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가 아니라, 악령의 역사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고, 말씀을 초월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요한 복음에서, 계속 말씀하신다. 

(3:34) "하나님이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 (8:28)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인 줄을 알고, 또 내가 스스로 아무 것도 하지 아니하고, 오직 아버지께서 가르치신 대로, 이런 것을 말하는 줄도 알리라." 

(요12:49-50)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내가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계명, 규정)하여 주셨으니, 나는 그의 명령(규정)이 영생인 줄 아노라, 그러므로 내가 이르는 것은, 내 아버지께서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니라 하시니라." 

(요14:10) "내가 아버지 안에 거하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 것을, 네가 믿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    , 명령하다. 이야기하다)은, 스스로 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시는 것이라." 

예수님은 자의로 말씀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않으신다고, 계속 반복해 말씀하신다. 또한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고 하였다. (생략된 부분) 

성령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예수님이 말씀하셨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시는 교사와 같은 분이다. 이렇게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결코 떠나지 않는다. 성령은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계시를 주시는 분이 아니다. 

(계22:18) "내가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증언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이것들 외에 더하면, 하나님이 이 두루마리에 기록된 재앙들을, 그에게 더하실 것이요"라고 하였다. 더 이상의 계시는 없다. 다만 우리에게 말씀하신 내용이, 밝히 깨닫게 되는, 조명만 있을 뿐이다. 

(요15:26)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언하실 것이요" 성령은 예수님을 증언하여,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진리임을 나타내준다. 예수님을 통해, 구원받게 됨을 말씀해 준다. 다른 구원은 절대로 없다. 

예수님을 믿지 않고는, 구원받을 방법은 없다.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 간다고 하면, 그것이 잘못된 말이다. 이단의 말이다. 예수님을 믿어도 지옥 간다고 하면, 많은 사람이 모이는 목사가 말을 해도, 교황이 말을 해도, 그들은 다 이단이다. 지옥 가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만일 지옥에 가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주여, 주여'라고 했던 종교인일 뿐이다. (마7:22)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여기서 그들은 진짜가 아니라, 노릇을 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신앙은, 언제나 현재임을 보여준다. 과거의 신앙은, 노릇을 했을 뿐이다. 그래서 주님은 (마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고 하신다. 

여기서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는 '내가 너희를 결코 만난 적도 없노라.'는 경험적인 뜻이다.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있다고,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없다. 인격적인 관계로 주님을 만나야만 한다. 그렇다면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구세주로, 주님으로 인정하고, 삶을 맡기고 있나요? 

또한 예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새로운 계시를 말하는 것이 예언인가? 아니다. 다시 말한다. 그것은 악령의 역사이다. 출애굽기를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말씀을 전하신다. 시내 산에서 우레와 번개와, 나팔 소리로 말씀하셨다(출20:18).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이 무서워서, 모세에게 간청한다. (출20:19) "모세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말씀하소서, 우리가 들으리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말게 하소서, 우리가 죽을까 하나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두려워서, 들을 수 없었다. 

백성들이 간청하자, 하나님은 예언자를 세우시고, 그에 따른 선지자의 직분을 세우신다. 신명기에 더 자세히 나타나 있다. (신18:16-18) "이것이 곧, 네가 총회의 날에 호렙 산에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 구한 것이라, 곧 네가 말하기를, 내가 다시는 내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 하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그들의 말이 옳도다,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서,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말하리라." 
그래서 한 사람이, 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서, 산 아래에서 두려워 떨고 있는 백성에게, 주님의 말씀을 전달하게 된다. 이런 방식으로, 이스라엘의 예언은 시작된다. 따라서 예언자가 전하는 말은, 예견하는 내용이 주된 내용이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한 말씀과 뜻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시의 핵심인 십계명에는, 미래를 예측하는 내용이,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예언적 메시지는 '대언'이기에, 미래에 일어날 일들도 말하게 된다. 예를 들면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 힘들게 살아도 말씀대로 살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상을 주신다고 말할 수 있다. 

3. 성령은 오셔서, 믿는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고아처럼 두지 않으시고 돌보신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갈릴리 산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마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그러면 부활 승천하신 예수님이, 어떻게 세상 끝 날까지, 함께 할까? 

(요14:16-18)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셨다. 구원의 보증으로, 성령을 보내 주셨다. (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고 하였다. 하나님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고아이다. 

두 유형의 성도가 있다. 한 사람은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반면에, 한 사람은 고아처럼 산다. 모든 고민을 혼자 다 하고, 모든 계획을 혼자 다 짜고, 모든 일을 혼자 힘으로, 다 하려고 한다. 고아다. 반면에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들은, 아버지의 능력으로 모든 일을 이루어간다. 

이것이 성도들의 모습이다. 우리는 언제나 함께 하시며, 구하기만 하면, 능력을 주시는 아버지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구하기만 하면, 마귀의 일들을 멸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세다. 이러한 자녀의 권세를 활용하는 사람이 성도다. 

중국에 임어당이라는 사람이 있다. 하버드대학에서 40년 동안, 강의를 했던 석학이다. 대만 양명산 밑에, 임어당의 무덤과 그가 살던 집이 있다. 그 집에 가보면 많은 문집들이 있다. 지금도 그 문집들을 읽을 수 있다. 그 문집 중에 이런 글이 있었다. 

"그리스도 없이 보낸 40년은 나에게 있어, 완전히 고아와도 같은 삶이었다." 그 말이 인상적이다. 임어당은 예수님 없이 살았던 인생을, 고아와 같은 인생이었다고 표현한다. 자신이 많은 공부를 하고, 많은 것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여전히 자신의 정신 상태는 고아였다고 한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다음, 비로소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평안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성도이다.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일들을 감당함으로, 고아의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의 모습을 회복하기 바란다. 

부모 있는 아이와 고아의 차이점이 어디서 나타나는가? 같이 놀 때는 모른다. 그런데 부모 없는 자식과 부모 있는 자식이 언제 구분되는가? 저녁이 되면 구분된다. 해가 지면 부모가 있는 아이들은 서둘러서, 엄마 아빠를 만나러 돌아간다. 그러나 고아는 돌아갈 곳이 없다. 그래서 방황한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구분될 때가 언제인가? 죽을 때 보면 안다. 불신자는 죽을 때, 불안과 괴로움 가운데 떤다. 반면에 신자는 아버지께로 돌아간다. 평안함 가운데 또 확신 가운데 아버지의 집에 찾아갈 수 있다. 이처럼 우리 신분은, 성령님이 늘 함께 하시기 때문에, 고아가 아니다. 

하나님의 일들을 다 이루고 난 다음, 우리는 돌아갈 장소가 있다. 평안히 거할 장소가 있고, 영광의 장소가 있음을 꼭 기억하시고, 생명을 바쳐서,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되시기 바란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말씀해 준다. 

몇 년 안 남았다. 예수님 앞에 서야 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하셔야 한다. 하나님 앞에 겸허한 자세로, 내가 무엇을 붙들고 살아야 하는지, 내 안에 사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살아야만 한다. 우리의 남은 인생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어디 한눈 팔 수 있는가?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길을 가도록 만들어 주신다. 무엇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지, 말씀하신다. (엡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을 받으라."고 했다. 성령으로 충만하시기 바란다. 

결론이다. 성령은 오셔서,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일하신다. 말씀을 깨달아, 순종하게 하신다. 또한 성령은 오셔서, 우리와 함께 하심으로, 힘들고 어려울 때 보호해주시고, 도와주신다. 그래서 보혜사, 보호해주고, 은혜를 베풀어주어, 구원하는 일을 하신다. 이러한 은혜가, 우리에게 넘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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