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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수의 힘 5 : 삼백 명 (삿 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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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힘 5 : 삼백 명 (삿 7:1-8) 
 
 
❚하나님의 특이한 방법

사람의 얼굴을 보면 모두가 눈 둘에 코 하나, 입 하나, 귀 둘 똑같습니다만 그것을 다 조화시켜 얼굴 전체를 보면 똑같이 생긴 사람은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참 하나님의 솜씨가 놀랍다는 생각이 듭니다. 생긴 것만 다른 게 아닙니다. 사람마다 타고난 성격도 다 다릅니다. 대범하고 화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소심하고 조심스럽습니다. 꼼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덜렁댑니다. 늘 우울하고 과묵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아주 활달하고 수다스럽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저마다 다른 성격 중에 하나님은 어떤 성격을 좋아하고 즐겨 쓰실까요? 답은 “모든 성격을 다 쓰신다”입니다. 하긴 안 쓰시는 성격이 하나 있기는 하네요. “더러운 성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런 사람 빼고는 모든 성격을 다 나름대로 들어 쓰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방법이 더욱 놀라운 것입니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이 치른 첫 번째 전투였던 아말렉과의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고 모세의 뒤를 이어 가나안 정복도 완성한 위대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런 여호수아에게 의외로 아주 소심한 성격이 있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여호수아 1장을 보면 하나님이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첫 번째로 주신 말씀이 나오는데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 말고 놀라지 말라”는 말씀을 참 여러 번 하십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이 우리 성격을 하나하나 잘 아시는 것처럼 여호수아의 성격이 소심해서 두려움도 많고 놀라기도 잘하는 것을 아시기에 그를 격려하려고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하긴 소심한 성격의 여호수아가 그 위대한 모세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게 되었으니 얼마나 부담스럽고 두려웠겠습니까?

이렇게 소심하고 두려움도 많은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은 여호수아를 들어 위대하게 사용하십니다. 저 같으면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 가나안 백성들을 쳐서 이기고 그 땅을 점령해야 하는 엄청난 일을 여호수아 같이 소심한 사람에게 맡기지 않을 텐데 가장 용감한 사람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이 일을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여호수아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분명합니다. 

이토록 소심하고 두려움 많은 여호수아지만 그 타고난 두려움을 믿음으로 이겨내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하여 용기를 드러낼 때마다 그를 도와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용감하고 대범한 사람도 들어 쓰십니다. 하지만 오히려 용감한 사람이나 대범한 사람은 자기를 믿고 섣불리 덤벼들다가 실패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약한 자를 들어 강하게 하시고, 부족한 자를 도우심으로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는 방법을 아주 좋아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약한 자, 소심한 자, 무능한 자가 오히려 더 위대하게 쓰임 받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고린도후서 12:10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강한 자, 잘 난 자를 들어 쓰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약하고 소심하고 부족한 자를 들어 쓰신다는 놀라운 진리를 깨닫고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도 약하고 성격도 상당히 소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누구보다 담대한 사람처럼 보이나 육체의 가시라고 부르는 지병도 있었고 아주 작은 일에도 실망하고 화를 내는 소심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몸도 약하고 성격도 소심한 바울을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한 사람으로 들어 쓰십니까? 바로 우리가 약할 때 강하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소심한 기드온

성경에 보면 여호수아나 바울 못지않게 정말 소심한 사람 하나가 등장합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주인공인 사사 기드온입니다. 우리는 흔히 “기드온과 삼백 용사” 하는 말로 기드온을 아주 용감하고 능력 있는 사람으로 이해하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기드온이 얼마나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인지가 구구절절 나타납니다.

먼저 사사기 6:11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미디안 백성에게 압제 받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게 하시려고 기드온에게 사자를 보내시는데 바로 그 때 기드온은 어떤 일을 하고 있었는가? 미디안 사람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밀을 포도주 틀에서 타작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곡식을 파종할 때쯤 되면 미디안과 아말렉 사람들이 쳐들어와서 깡그리 약탈해가곤 했습니다. 그래서 기드온은 밀을 빼앗길까봐 몰래 숨어서 타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왜 기드온이 밀을 타작마당이 아닌 포도주 틀에서 타작했을까요?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에 큰 구덩이를 파고 포도송이를 그 속에 부은 후 사람이 들어가 발로 밟아 포도주를 뽑아냈는데 이것이 바로 ‘포도주 틀’입니다. 그러니까 기드온은 지금 미디안이나 다른 이방인들에게 안 들키려고 땅에 판 구덩이 속에 들어가 몰래 밀을 타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얼마나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입니까? 기드온이 우리와 뭐가 그리 다른 사람이란 말입니까? 오히려 우리보다 훨씬 소심하고 겁도 많은 못난 사람처럼 보입니다.

또 사사기 6:15에서 여호와의 사자가 기드온에게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라고 명령할 때 기드온은 어떤 반응을 일으킵니까? 용감하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나서는 것이 아니라 “오 주여 내가 무엇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리이까 보소서 나의 집은 므낫세 중에 극히 약하고 나는 내 아버지 집에서 가장 작은 자니이다”라고 대답하면서 슬슬 꽁무니를 빼고 있습니다. 실제로 기드온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가장 미약한 므낫세 지파 중에도 가장 미약한 아비에셀 가문 태생입니다. 

그러니 이 말은 요즘 말로 하면 “나 같이 집안도 안 좋고 빽도 없고 그렇다고 잘난 구석도 하나도 없고 집안에서조차 천덕꾸러기인 못난 자가 무슨 그런 훌륭한 일을 하겠습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하는 뜻입니다. 정말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 아닙니까? 혹시 우리도 하나님이 쓰겠다고 부르실 때 “나 같은 사람이 뭘 하겠냐고 딴 데 가서 알아보시라고” 핑계 대며 꽁무니를 빼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뿐만 아닙니다. 하나님이 기드온에게 아버지가 섬기는 바알과 아세라 우상을 헐라고 명령하시는데 아버지 가문과 성읍 사람들이 두려워 밤중에 몰래 하고 있습니다(27절). 또 그래도 하나님이 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라고 하시니까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보여 달라고, 그냥은 못 믿겠으니 뭔가 좀 분명한 증거를 보여 달라고, 기적을 보여 달라고, 그러면 내가 믿겠다고 하는데 이 얼마나 소심하고 의심이 많은 사람이란 말입니까? 

이렇게 본다면 기드온은 용감한 사사와는 정말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용기도 없고 소심하고 의심도 많은 그런 소인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이 소심하고 겁 많고 의심도 많은 사람을 하나님이 들어 쓰신 것입니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의 섭리가 들어있습니다. 이렇게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택해 힘주시고 들어 쓰시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인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약한 자, 부족한 자, 소심한 자를 들어 쓰실까요? 그런 사람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힘주셔서 쓰시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성령의 감동’을 통해서입니다. 사사기 6:34절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여호와의 영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니...” 여기 나온 ‘여호와의 영’이 바로 하나님의 영, 즉 성령입니다. 성령이 ‘임하셨다’는 말은 히브리말로 “옷을 입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성령의 옷을 입혀 주신 것입니다. 사사기에 보면 모든 사사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반드시 여호와의 영, 즉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오늘 이 소심하고 겁 많은 기드온에게도 성령이 강력하게 임하여 성령의 감동으로 충만하게 되자 나팔을 불어 백성들을 모아 미디안 족속을 치러 가는 위대하고 용맹한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힘주시는 방법입니다. 아무리 약하고 부족한 사람도, 아무리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도, 아무리 못나고 별 볼 일 없는 사람도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히게 되면 위대한 사람으로, 능력의 사람으로 바뀌게 됩니다. 성령님은 우리를 감동시키고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의 근원이신 것입니다.

여러분도 오늘 이 성령의 감동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나는 못 하지만, 나는 비록 소심하고 겁도 나고 능력도 없고 빽도 없지만 성령의 옷을 입으면 능치 못할 일이 없는 줄로 믿습니다. 오히려 세상에서 힘도 있고 능력도 있고 용감한 사람들은 성령이 역사하기 힘듭니다. 왜요? 내 힘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내가 못해도 나를 도와줄 사람도 많고 빽도 든든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성령이 역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 위대하게 쓰임 받은 사람은 대부분 못나고 부족한 사람들, 허물 많고 연약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오히려 완벽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 받지 못하고 버림 받을 때가 많습니다. 우리가 더 이상 내 능력이나 세상적인 조건 의지하지 않고 오직 성령의 도우심과 감동을 의지할 때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찬송가 563장)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나를 써주시옵소서

이제 소심하기 그지없지만 성령의 강력한 감동으로 무장한 기드온이 앞장서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뒤를 따라 미디안과 싸움을 하기 위해 진을 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2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스라엘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금 이스라엘 군대 숫자가 32,000명입니다. 이 병력조차도 메뚜기 같이 많은(7:12) 미디안과 아말렉 연합군에 비하면 너무 적은 숫자인데 이마저 많다고 줄이라는 것입니다. 자고로 전쟁이란 우선 병력부터 많고 봐야 하는데 참 이상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명령이지만 일단 기드온은 순종하기로 하고 병력을 줄여나갑니다. 

본디 겁 많고 소심한 사람이 의심도 많습니다. 예전의 기드온이라면 이 이해할 수 없는 명령에 순종하기 어려웠겠지만 이제 성령의 두루마리로 옷 입은 기드온은 다릅니다. 무조건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사람은 절대 순종하는 법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지요.

병력을 줄이는 것은 두 단계에 걸쳐 이루어지는데 먼저 총 32,000명의 병력 중에서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돌아가라”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순식간에 22,000명이 떠나고 1만 명만 남습니다. 물론 두려워 떠는 자는 전쟁에 도움이 안 되기 때문에 보낸 것이겠지요. 하지만 병력을 줄인 진짜 이유가 2절에 나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그렇습니다. 우리 숫자가 많아서 우리 능력으로 이겼다고 교만하고 자랑할까봐 하나님은 병력을 줄이게 하신 것입니다. 보세요. 성령의 능력 의지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숫자나 능력 의지하는 사람은 아무리 그 수가 많아도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법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에 방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니까 숫자를 줄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두 번째로 병력 수를 줄이시는데 그 기준은 더 이상합니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남은 1만 명의 병력을 데리고 물가로 가서 물을 마시게 하는데 서서 손으로 물을 떠서 개가 핥는 것처럼 혀로 물을 핥아 먹는 자는 남게 하고 무릎을 꿇고 머리를 물에 박고 마시는 사람은 돌려보내게 하십니다. 이렇게 했더니 개처럼 물을 핥아 먹은 사람 300명만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왜 이런 이상한 방법으로 300명을 추린 것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 해석이 분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서서 손으로 물을 떠서 먹은 사람은 유사 시, 이를테면 적의 급습 등에 대응할 수 있는 속도가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는 자들보다 훨씬 빠르므로 전쟁에 적합한 자였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서서 물을 핥아 먹은 사람들은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고 마신 사람들보다 훨씬 주위를 잘 경계하고 방심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어떤 방법으로 물을 마셨느냐 그 자세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방법으로 물을 마신 사람들에 비해 이렇게 특이한 자세로 물을 마신 사람들이 소수였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수를 사용하기 위해 이런 방법을 쓰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증거는 이것입니다. 이 추리고 추린 300용사들마저도 실제 한 일이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7:19부터 보면 300명이 한 일이라곤 밤중에 조용히 적진에 접근한 후 일시에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횃불을 꺼내 큰 소리로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다!”라고 외친 것뿐입니다. 이게 전부였습니다. 아무도 칼을 빼들고 싸우거나 불을 지른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나팔소리와 외치는 소리, 횃불에 놀란 적군은 스스로 자멸합니다. 혼비백산한 적은 무질서하게 도망하다가 서로를 적인 줄 알고 죽입니다. 300용사가 한 일은 이렇게 적군이 자기들끼리 실컷 죽이도록 내버려 두는 일 뿐이었습니다. 

나중에 도망하는 잔당을 쫓아가 소탕하는 일도 300용사가 직접 하지 않고 에브라임 사람들을 시켜서 합니다. 그래서 어쩌면 우리가 흔히 쓰는 ‘기드온과 300용사’라는 말도 틀린 말인지도 모릅니다. 기드온도 용감한 장군과 거리가 먼 소심하고 겁 많은 사람이요 300용사도 정예용사라기보다 그저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나팔 불고 항아리 부수고 횃불 들고 소리 지른 사람들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줍니까? 모든 일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을 뿐이라는 것입니다. 미디안을 칠 때 사용된 나팔이나 항아리와 횃불처럼 말입니다. 내가 직접 하려 들고 내 힘으로 하려고 들었다면 300명이 아니라 3만, 3십만이라도 안 될 텐데 소심한 기드온과 소수의 용사들이 내 능력, 내 생각 다 포기하고 오직 하나님이 시키시는 대로만 하니까 거기에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300용사가 두 손에 들었던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 세 가지 도구를 묵상해 보았습니다. 나팔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소리를 내는 일입니다. 항아리가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 안에 횃불을 감추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깨지는 일입니다. 횃불이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자신이 타올라서 불을 밝히는 일입니다. 미디안 대군은 이 나팔소리와 횃불의 빛을 보고 놀라 서로 죽이고 도망한 것이므로 어찌 보면 300용사가 무엇을 했다기보다 이 세 가지 도구가 적을 물리치는 데 일등 공신이었던 셈입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나팔이 소리를 내야 할 때 소리를 내고, 항아리가 깨져야 할 때 깨지고, 횃불이 타야 할 때 타니까 위대한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이것 아니겠습니까? 내 소리 내 의견 내는 것이 아니라 나팔처럼 하나님이 소리 내라고 하시면 그대로 내고, 내가 손해 안 보고 안 깨지려고 드는 것이 아니라 항아리처럼 꼭 필요한 순간에 나 스스로가 깨지면 되고, 횃불처럼 내가 타올라야 할 때 나를 태워 빛을 내면 되는 것입니다. 기드온도 300용사도 바로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그 순간에, 하나님의 쓰임새에 꼭 맞게 사용되었기 때문에 성격도 소심하고 숫자도 적지만 미디안 대군에게 승리한 것 아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이 나를 도구로 들어 쓰시면 성격도 숫자도 문제가 안 됩니다. 환경도 능력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반드시 승리합니다. 하나님의 손으로, 오직 하나님의 힘으로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믿으시고 기드온처럼, 300용사처럼, 그들이 들었던 나팔과 항아리와 횃불처럼 꼭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는 그 순간에 성령에 사로잡혀 전적으로 순종하고 희생함으로 귀하게 쓰임 받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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