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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비움과 채움 (마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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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움과 채움 (마 13:1-9)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주일 예배를 통해 네 번째로 설교를 합니다. 옥토와 관련된 말씀을 묵상하는 가운데 똑같은 옥토인데 왜 열매가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차이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길가와 돌밭과 가시밭 은 열매를 맺지 못하거나 열매 맺는 것에 차이가 나는 것은 이해가 됩니다. 그런데 같은 옥토에 씨가 뿌려졌는데 왜 거두는 열매의 양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 이유를 24절부터 나오는 예수님의 가라지 비유에서 찾았습니다. 농부가 옥토에 좋은 씨를 뿌렸습니다. 예수님은 그 좋은 씨를 천국의 씨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농부가 밤에 잠든 사이에 원수가 살며시 와서 밭에 가라지 씨를 뿌리고 갔습니다. 좋은 씨와 가라지 씨가 같이 자랐습니다. 밭에 가라지가 무성하게 자랐습니다. 종들은 주인에게 가라지가 무성하니 뽑아 버리자고 했습니다. 주인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되니 내버려 두라고 말했습니다. 추수 때가 되면 가라지는 모아서 불사르고 곡식은 묶어 곳간에 넣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즉 옥토지만 그곳에 얼마만큼의 가리지가 뿌려져 자라느냐에 따라 수확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원리는 영적 생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마음 밭에 어떤 것들로 채워져 있느냐에 따라 우리 삶에서 맺혀지는 결실의 양이 달라집니다. 가라지, 즉 세상적인 기쁨과 생각의 씨들이 많이 자리를 잡고 있으면 옥토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의 열매는 매우 적습니다. 반면에 좋은 씨, 즉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만드는 천국의 씨가 많이 뿌려지고 자리를 잡으면 그곳에서는 육십 배, 백 배의 많은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나의 마음속에 가라지와 천국의 씨 중에 어떤 것으로 채워져 있느냐는 열매의 양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한 가지 그림이 생각났습니다. 길 거리에 보면 개업을 홍보하기 위해 바람이 채워지면 일어나 요란하게 춤을 추는 인형이 있습니다. 그 인형은 바람이 들어가 몸의 빈 공간을 가득 채우면 벌떡 일어나 요란하게 흔들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읍니다. 그러나 바람이 약해지면 제대로 일어나지를 못하고 보기 흉한 모습으로 흐느적 거립니다. 바람이 전혀 불지 않으면 일어서지도 못하고 바닥에 널부러져 보기에 아주 흉합니다. 

우리 영적인 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을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은 세상적인 지혜과 힘을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이 세상적인 지혜와 힘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하다 보면 어김없이 시험에 빠집니다. 교회 안에 혼란을 일으키고 아픔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지혜과 힘으로 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의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성령이 임재하실 때까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이 임하시고 권능을 받게 되면 하나님의 사역을 시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의 권능은 하나님의 지혜이며 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성령의 임재하심과 충만함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들의 힘과 의지로 결단도 하고 새로운 시도를 했습니다. 의심 많은 제자 도마도 한 때는 ‘우리가 주님과 함께 죽으러 가자’ 라고 호기를 부리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다른 사람들이 다 주님을 버려도 나는 죽기까지 주님과 함께 하겠습니다’ 라고 한 순간에는 호언장담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돌아가실 때 모두 도망을 가고 말았습니다. 

사람의 의지와 생각을 중심으로 섬김과 결심은 결국 무너지고 맙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을 중심으로 행하다가 실패한 제자들이 마가 다락방에 거하며 기도할 때 성령님께서 강하게 임하셨습니다. 그들은 성령님께서 주시는 능력을 덧입고 경험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이 성령의 인도하심과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 복음을 증거합니다. 그들이 가는 곳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삶과 마음 안에 얼마만큼 자리를 잡고 계시느냐에 따라 우리의 삶의 자리에 맺히는 성령의 열매의 양은 차이가 납니다. 바람에 흔들리는 인형이 바람이 가득 찰 때 힘차게 일어나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을 잘 감당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성령의 사람이 되어 우리의 삶의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를 충만하게 맺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우리의 삶이 삼십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이라면 육십 배의 열매 맺는 삶을 부러워하며 사모하기를 바랍니다. 육십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다면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사모하시기를 바랍니다. 백 배의 열매를 맺는 삶을 살고 있다면 가라지가 뿌려지지 않도록 삶의 자리를 잘 관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옥토도 한 해, 두 해 관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두면 곧 돌밭이 되고, 가시밭이 되고 맙니다. 

옥토는 항상 거름을 주고 잘 관리해야 옥토의 상태를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과거에 옥토였음을 자랑하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현재의 삶에서는 돌밭과 가시밭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 옥토였음을 자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현재가 옥토임을 말하는 사람을 기뻐하시고 그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성령으로 채워지는 삶에 성령의 열매는 풍성합니다. 

옥토에서 거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열매를 성령의 채움을 중심으로 생각해 보았습니다. 옥토에서 거두는 열매를 비움이라는 단어를 중심으로 생각해 볼 수도 있습니다. 사회생활에서 인간관계를 맺어가는 과정에는 몇 단계의 변화의 단계가 있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의 단계입니다. 상대방에게 호기심을 갖는 단계입니다. 다음 단계는 시험 단계입니다. 상대방도 나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단계입니다. 상대방이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인이 되면 다음 단계는 서로 사랑을 나누는 애정의 단계입니다. 

모든 만남의 관계가 서로 사랑하는 애정의 단계에서 멈추면 좋겠는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서로 좋아하는 애정기의 단계를 지나면 단점과 허물을 보며 싫증을 느끼는 권태기의 단계가 찾아옵니다. 대부분의 관계가 깨지고 아픔이 일어나는 시기가 바로 이 권태기 단계입니다. 권태기의 단계를 잘 극복해야 다음 단계인 성숙기의 단계에 이르게 됩니다. 성숙기 단계는 상대방의 단점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수용하는 단계입니다. 단점이 없어서가 아니라 단점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녀의 사랑을 말할 때 애정기의 사랑을 말합니다. 서양 사람들은 이런 사랑을 허니문이라고 말합니다. 신혼생활에서 누리는 사랑을 꿀맛에 비유한 것입니다. 꿀처럼 달다는 것입니다. 순간적인 행복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부부의 사랑이 항상 꿀처럼 달콤할 수 있습니까? 그것을 바란다면 꿈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그 단맛은 그렇게 오래 가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랑은 대체적으로 3년을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우리 조상들이 사랑을 표현하는 것을 보면 서양 사람들 보다 훨씬 지혜롭고 깊이가 있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신혼부부가 아기자기하게 사랑하는 모습을 ‘깨가 쏟아진다’라고 표현했습니다. 서양 사람들이 사랑을 단 맛이라는 순간적인 느낌을 중심으로 표현했다면 우리 조상들은 사랑을 깨를 추수하는 과정으로 표현했습니다. 

제가 농사일을 잘 몰라서 권사님과 집사님들에게 참깨를 어떻게 추수하는지에 대해 물어 보았습니다. 참깨를 수확할 때는 참깨를 베어서 다발로 묶어 이 삼일을 햇볕에 말리면 참깨 껍질이 쫙 벌어진다고 합니다. 그후에 참깨를 거꾸로 들어 올리면 벌어진 껍질 사이로 참깨들이 우수수 떨어진답니다. 참깨가 다 떨어지지 않으면 작대기를 가지고 참깨 다발을 툭툭치면 남아 있는 참깨들이 다 떨어지고 빈 껍질만 남습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한다고 하면 항상 깨가 쏟아지는 삶을 생각하지만 참깨가 다 쏟아지고 남는 빈 껍질의 모습은 생각하지 않습니다. 깨가 쏟아지는 것만을 사랑으로 생각하기에 왜 계속해서 깨가 쏟아지지 않느냐고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깨가 쏟아지고 나면 빈 껍지만 남는 때가 오는데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빈 껍질을 보며 볼품이 없고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합니다. 이때가 바로 만남의 과정에서 깨가 쏟아지는 애정의 시기를 지난 후에 맞게 되는 권태기입니다. 사람들은 이 단계를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그런 모습을 외면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권태기의 단계가 찾아오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입니다. 

사랑한다고 했던 사람들이 이 권태기의 단계를 이기지 못하고 끝없이 원망하고 다툽니다. 불평합니다. 어떤 이들을 헤어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에서 ‘사랑은 오래 참고,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깨를 다 쏟아내고 볼품없이 남아 있는 빈 껍질의 모습으로 인해 아프고 힘들지만 잘 참고 인내하면 빈 껍질 속에서 더 깊은 사랑과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깨가 쏟아지는 단계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깨가 쏟아지는 과정을 만들기 위해 깨가 영글도록 품고 있었던 껍질의 수고와 애씀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알게 됩니다. 진정으로 성숙한 만남은 깨가 쏟아지는 애정기의 단계가 아니라 깨를 다 쏟아내고 남아 있는 빈 껍질의 모습, 즉 권태기의 단계를 잘 극복할 때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쫓을 때 언제나 깨가 쏟아지는 순간을 바라보며 쫓았습니다. 귀한 말씀이 선포되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실 때 그 분의 옆에서 환호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 되는 순간만을 기다리며 쫓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와 물을 한 방울 남김없이 다 쏟으시고 돌아가실 때 모든 제자들은 예수님께 등을 돌리고 떠났습니다. 빈 껍질의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의 사랑의 한계와 권태기를 느낀 것입니다. 항상 애정기의 단계에서 머물기를 원했던 제자들에게서는 그 순간이 고통이었고 절망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은 은 삼십 냥에 당신을 판 제자의 빈 껍질의 모습을 그대로 품으셨습니다. 자신을 저주하며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제자의 빈 껍질의 모습을 그대로 수용하셨습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을 찾아온 대부분의 사람들을 보면 그들은 자신의 삶에서 깨가 쏟아지는 애정기의 단계에서 예수님을 찾지 않았습니다. 삶 속에서 깨가 다 쏟아지고 빈 껍질만 남아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병들고, 실패하고, 지친 모습으로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빈 껍질의 모습 그대로를 품으셨습니다. 빈 껍질의 모습을 쓰다듬어 주시며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빈 껍질 조차도 사랑으로 품어주신 예수님의 성숙한 사랑 앞에 제자들과 모든 사람들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성숙한 사람은 항상 깨가 쏟아지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깨를 다 쏟아내고 남은 빈 껍질의 모습을 인정하고 수용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무엇인가 채워져 있어서가 아니라 도리어 더 비워져 있기에 더 아름답고, 영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빈 껍질의 삶 같지만 깨를 다 쏟아 붓는 과정에서 겪는 아픔을 극복한 여유로움과 넉넉함이 있습니다. 진정한 믿음의 영향력과 향기는 쏟아지는 깨에서가 아니라 그것을 품고 있었던 빈 껍질에게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옥토에서 거두는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의 결실은 채움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비움 가운데 갖게 되는 선한 영향력 안에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또 한 새로운 열매 개념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자리에 세상의 가라지가 잔뜩 뿌려진 삶이 아니라 선한 말씀의 씨앗이 가득 뿌려져 성령의 열매를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 맺어가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의 나라와 이웃들을 향해 자신의 것을 쏟아 부어 빈 껍질의 모습이지만 선한 믿음의 영향력으로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로 더 커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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