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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시 10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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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립시다 (시 102:12)

(시 102:12)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영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부터 영원 까지 하나님이시라고 합니다

(시 90:2)하나님의 영원하심을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스스로 계시고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자라 합니다

(출 3:14)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또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스스로 있는 자가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라

(계 1:4)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시며 
(계 1:8) 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벧전 1: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죽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딤전 6: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권능을 돌릴지어다 아멘

영원히 사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신 32:40) 이는 내가 하늘을 향하여 내 손을 들고 말하기를 내가 영원히 살리라 하였노라

(계 10:6) 세세토록 살아 계신 이 곧 하늘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땅과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이며 바다와 그 가운데에 있는 물건을 창조하신 이를 가리켜 맹세하여 이르되 지체하지 아니하리니

(계 15:7) 네 생물 중의 하나가 영원토록 살아 계신 하나님의 진노를 가득히 담은 금 대접 일곱을 그 일곱 천사들에게 주니


햇수를 측량 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욥 36:26) 하나님은 높으시니 우리가 그를 알 수 없고 그의 햇수를 헤아릴 수 없느니라


영존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시 102:26)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시 102:27) 주는 한결같으시고 주의 연대는 무궁하리이다


하나님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같습니다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영원하신 하나님은 항상 영원한 현재이십니다

하나님의 영원하심은 시간과의 관계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시간에 제한을 받으시거나 메이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시간과의 관계에서 영원하시기 때문에 시간위에 시간을 초월하십니다.
시간은 하나님께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시간안에 계신 것이 아니라 시간이 하나님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하나님은 시간을 초월하여 시간을 주관 하십니다.  
해와 달을 멈추게 하시기도 합니다.
여호수아는 기브온 족속의 원군 요청을 받고 지체하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기브온으로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나타나시어 그에게 위로와 확신의 메시지를 전해 주심으로써 힘과 용기를 북돋워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후원을 약속하신 싸움이었기에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군대에게는 결코 두려워할 것이 없는 전투였습니다. 특히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전능하신 손길로 태양계의 질서를 잠시 멈추시고 이스라엘 군대의 빛나는 승리를 마련해 주셨던 것입니다.

(수 10:12) 여호와께서 아모리 사람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넘겨 주시던 날에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아뢰어 이스라엘의 목전에서 이르되 태양아 너는 기브온 위에 머무르라 달아 너도 아얄론 골짜기에서 그리할지어다 하매(수 10:13) 태양이 머물고 달이 멈추기를 백성이 그 대적에게 원수를 갚기까지 하였느니라 야살의 책에 태양이 중천에 머물러서 거의 종일토록 속히 내려가지 아니하였다고 기록되지 아니하였느냐 해 그림자를 뒤로 물러 가게도 하십니다

히스기야 왕은 이사야 선지자로부터 자신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는 얼굴을 벽으로 향하고 여호와께  기도하였습니다. 즉 오직 하나님께만  소망이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히스기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의 표시로  징조를 베푸셨습니다. 그것은 일영표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도를  물러가게 하신 일이었습니다. 이러한  초자연적 역사는 여호수아가 이끄는 이스라엘 군대가 전쟁을 수행하며 적을 진멸할 때 해와 달을 멈추게 하심으로 보여 주셨던  것입니다 

보라 아하스의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를 뒤로 십 도를 물러가게 하리라 하셨다 하라 하시더니 이에 해시계에 나아갔던 해의 그림자가 십 도를 물러가니라 (사 38:8)


영원하신 하나님은 영원히  통치하십니다

주는 영원히 계시고(레올람 테쉐브)는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시는'이란 뜻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은 현실적인 통치자로, 주권자로 군림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주는 계속 통치하시고, 주의 택하심을 받은 성읍이 폐허로 변하고 주의 특별한 백성이 포로로 잡혀갔지만 주의 보좌는 여전히 든든하다는 것입니다.

만물에 대한 하나님의 주권은 위안의 확실한 근거가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의 통치는 계속되며, 따라서 모든 일이 잘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보좌가 확고한 만큼 하나님의 약속도 그러하며, 결정적인 때가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손에 의탁하신 바를 안전히 보존하실 것입니다.
이 사실은 슬픔을 초월케 하고 큰 위로와 소망을 줍니다.

연약한 한 인생인 시편 기자는 소멸하여도 시온의 소망은 그의 영원한 왕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상황이 너무 자주 혹은 급하게 변하여서 잠시 동안도 안정을 누릴 수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영원한 왕으로서 변치 않는 분이라는 사실은 큰 위로가 됩니다. 
  
영원불변하시는 하나님의 복의 약속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더욱 웃음거리가 되어가는 듯 보일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인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교회에 주신 약속들, 특히 그 위대한 언약적 약속을 회상하고 있습니다.

(출 25:8) 내가 그들 중에 거할 성소를 그들이 나를 위하여 짓되 (출 25:9) 무릇 내가 네게 보이는 모양대로 장막을 짓고 기구들도 그 모양을 따라 지을지니라 하시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의존하여 시인은 비록 현재의 상황이 불행하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자녀들은 궁극적으로 천상적 영광을 함께 나눌 수 있음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지난날도 함께 하시고 지금도 함께 하시고 앞으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112년경 비두니아의 통치자인 플리니우스가 로마 제국의 트라야누스 황제에게 보낸 서한에서, 기독교인들과 그들의 예배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들은 동트기 전 정해진 시간에 모여서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찬송가를 부르곤 합니다.' 이 비두니아의 지도자는 이교도들이 없어지고 기독교 신앙이 빠른 속도로 퍼진 이유를 로마 황제에게 설명하려고 애썼다. 그는 기독교의 숨은 능력과 그것이 세상에 널리 퍼진 사실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만이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습니다. 인간보다 뛰어나신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영원한 희망이 되시며, 우리의 예배의 대상이십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를 믿는 신앙의 모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영원하신 통치를 믿고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 합시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언약 역시 변치 않으십니다
  
"여호와여 주는 영원히 계시고."는 나는 소멸되지만, 주는 그렇지 않으시나이다. 내 민족은 거의 사라질 지경에 처했지만, 주는 항상 불변하시나이다 입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시편 기자는 한없는 위로를 얻습니다.

언젠가는 우리의 생명도, 이 세대들도 사라져 없어질 것입니다.
인간이 가진 모든 소유도 변화되고 지상의 모든 것은 소멸될 것입니다.

(시 102:11) 내 날이 기울어지는 그림자 같고 내가 풀의 시들어짐 같으니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나 계시고 변함이 없으시며 영원토록 통치하시는 주권자이십니다.
때문에 그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연약함과 가련함을 도우십입니다.
영원토록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살아 역사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어머니의 배속에서 참으로 행복합니다. 너무 춥지도 뜨겁지도 않은 알맞은 온도와 요람처럼 떠있기 좋은 알맞은 습도와 그리고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아도 어머니의 탯줄을 통하여 가장 알맞게 영양분을 공급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태아는 그곳에서 오래 오래 살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열 달이 채워지고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죽을 각오를 하고 어둠의 터널을 지나서 태아는 거의 혼절하다시피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또 다시 유일한 영양공급원이던 탯줄마저 끊겨버렸습니다. 태아는 이제는 죽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순간 이게 웬일일까요. 죽을 줄로만 알았던 그에게 새로운 세계가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제까지 내가 구축한 그 세상이 최고인 것으로 생각하며 어둠에 갇힌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나의 교만과 편견과 아집인 내 속에서 갇혀서... 내가 진정 의를 위하여 나를 깨치고 죽을 때 영원한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망각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시인의 마음은, 개인적인 근심으로부터 돌이켜 모든 위안의 참된 원천이신 여호와께로, 그리고 자기 백성을 향하신 그분의 은혜로우신 목적에로 향합니다. 
  
"주에 대한 기억은 대대에 이르리이다."합니다

사람들은 나를 잊겠지만, 주께서는 인생들을 영원토록 기억하시리이다 입니다.
현재의 하나님은 앞으로도 항구여일하실 것이며, 우리는 여호와와 관련하여 선조들에 의해 전해진 사실이 현재에도 진실임을 발견하며, 또한 우리의 경험을 통해 기록된 바는 우리 자손들에 의해서도 여전히 확고한 진실로 통할 것입니다.

다른 모든 것들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풀처럼 말라버린다고 해도, 한 가지 영원불변하는 빛은 계속 비칠 것이며, 다른 모든 그림자들이 사라진다고 해도 그 빛은 줄곧 비칠 것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패망하기까지 그들이 당한 수모는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마지막 모습을 대표하는 마지막 왕이었던  시드기야는 바벨론 왕에게 사로잡혀 눈이 뽑히고 목에 쇠 사슬이 매인 채 짐승처럼 바벨론으로 끌려 갔습니다.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적 처소이었던 성전은 폐허가 되었고 거룩한 하나님의 통치의 실현을 상징하는 이스라엘의 도성인 예루살렘은 성벽이 모두 헐리고 이방민족으로 가득찬 이방 땅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아무런 희망도 기대도 가질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결코  잊지 않으셨습니다

(사 49:15)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라고 말씀 하신 약속대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회복 하셨고 그들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돌아 오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암흑기라고 불리는 신구약 중간 시대를 지나 에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왔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찾아 가셔서 하닌 첫 번째 말씀이 임마누엘 즉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랑의 고백이었습니다.

죄 많고 허물 많은 그들이었지만 하나님의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적용하여 영적 암흑기가 오게한 그들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폐기하지 아니한 영원한 사랑의 언약으로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 사랑으로 그들을 지키시고 안위해 주신 사실을 기억하게 합니다.

아무리 죄 많고 허물 많은 인생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은 우리에게 영원히 유효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언약에 의지하여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우리의 모든 죄를 자복하고 진정한 성도 구원받은 성도로 부르심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죄로 인해 하나님을 외면하거나 죄책감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됩니다. 폐기하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하고 그 사랑안에서 용서함 받고 참된 자유함을 누리는 성도가 도어야 합니다.  

헬렌 스타이너 라이스가 쓴 ‘날개 없는 새’라는 책에 전설적인 얘기가 있다합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새들도 날개가 없어 푸른 창공을 날아다니지 못했던 때의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전설 속의 재미있는 이야기라 합니다. 곱고, 밝은 색깔의 깃털을 가진 새들이 지저귀는 노래는 뛸 듯이 가벼웠지만 정적 날개가 없어서 정작 날을 수가 없는 새들이 있었습니다.  

어느날 하나님께서는 노래하는 새들을 불러 모았고, 그리고 아름다운 날개를 달아 주시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은 무겁지만 이 짐을 벗어버리지 말고 잘 지고 견디거라. 그 짐을 견디고 나면 날개를 펴고 하늘을 날을 수 있는 날이 온다” 

새들은 품속에 날개를 달아 그 날개를 접어 넣고서 수없는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무거운 날개를 펴고 나르는 연습을 거듭했다고 합니다. 드디어 처음엔 그렇게 무겁던 날개도 점차 가벼워지고 두 날개로 하늘을 쉽게 날게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이 작은 전설에는 잊어서는 안 될 교훈이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날개가 클수록 높이, 멀리 날을 수 있는 것처럼 오늘 우리의 양 어개에 짐스러웠던 날개는 내일 우리를 창공으로 훨훨 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지만 그 짐을 가볍게 짊어지고 나는 새처럼, 우리에게는 인생의 날개가 필요합니다. 햇빛 같은 미소로 웃어볼 수 있는 마음은 무거운 불만을 벗어 던지고 하늘 높이 날아 올라가는 기쁨을 만드는 인생의 날개입니다. 노래하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도 인생의 괴로움을 벗어 던지고 날아가는 즐거움을 만드는 인생의 날개라합니다. 권리를 뒤에 두고 의무의 짐을 지며 기꺼이 의무 이상의 봉사를 할 수 있다면 날개를 달고 사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받는 것보다 주고자 하는, 의미와 보람을 찾는 사랑의 큰 날개를 달고 살 수 있을 것입니다. 미움보다 크고, 악보다 크고, 죽음보다도 더 큰 사랑을 갖게 된다면 그 때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영원한 사랑을 맛보며 살게 되는 것입니다. 희망과 사랑으로 인생의 수고나 무거운 짐을 감당할 때, 경제적인 이해나 합리적인 계산보다 크고 위대한 기적은 가능해집니다. 이 모든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교육하고 선교하고 봉사하며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교회가 되기를 다짐하고 기도 하고 실천 하는가운데 5월은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달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께 영광돌리며 사명 감당하는 모두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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