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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치욕을 제하는 사람 (삼상 1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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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욕을 제하는 사람 (삼상 17:1-37) 
 
 
16장에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16:18)으로 간략하게 소개되었습니다. 17장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며 그의 삶을 인도하셨는지,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16:13)되었던 다윗의 중심에 어떤 것이 담겨 있었는지 보여줍니다. 오늘은 전반부 말씀만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블레셋이 이번에는 “골리앗”을 앞세워 공격해왔습니다(1-10). 그는 약 57kg의 비늘 형태 갑옷과 청동 투구와 청동 정강이 보호대를 입고 창날 무게 7kg정도의 쇠창을 지닌 약 280cm의 거인이었습니다. 골리앗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청동 괴물 같은 모습으로 “사십 일을 조석으로”(16) 나타나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10)하며 일대일 대결을 신청했지요. 이에 “사울과 온 이스라엘”이 “이 말을 듣고 놀라 크게 두려워”했습니다(11). 남보다 머리 하나 만큼 키가 더 컸던 사울도, 한 때 믿음으로 승리를 이끌었던 요나단도 감히 나서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정쟁을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지도자가 필요한 상황이었지요. 

이 무렵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을 위해 수금을 타던 다윗은 양을 치기 위해 베들레헴에 돌아가 있었습니다(15). 전투 중에 있는 형들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아버지의 심부름을 갔다가(17-18), “마침” 골리앗이 “전과 같은 말”(23)을 하는 것을 듣지요.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그 앞에서 도망”(24)하는 모습도 봅니다. 본문은 골리앗의 모습을 ‘보고’ 그가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했다는 표현들이 반복됩니다. 곁에 있던 어떤 사람도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25)고 말합니다.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의 눈과 귀가 온통 골리앗에게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다윗은 이런 상황을 “이스라엘의 치욕”(26)이라 생각했습니다.

여기서 다윗과 다른 사람들 사이에 생각의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일반적 전투상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 거대한 골리앗과 싸워야 할 허약한 자신을 보았지요. 그 결과 시간이 흐를수록 골리앗이 점점 더 두렵게 느껴졌습니다. 반면 다윗은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과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의 ‘영적 전부상황’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했습니다(26). 동일한 전투 상황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인식했습니다. 그 결과 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독하며 도전해 오는 자에 대한 분노가 생겼습니다. 상황만 생각한 사람들은 점점 두려움에 빠졌지만, 하나님을 생각한 다윗은 오히려 대담해졌지요.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딤후 1:7)이라 했습니다. 어떤 상황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지도 않은 두려움이 성도의 마음을 사로잡아 가고 있다면, ‘성도의 치욕’입니다. 상황만 보고 살아계신 하나님은 충분히 인식하지 않고 있음을 의미하니까요. 성도는 어떤 당혹스런 상황에 직면할지라도 그 상황만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신님의 백성을 위해 역사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그 상황과 관련해서 생각해야 합니다. 당신님의 백성에게 두려움 대신 능력과 사랑과 근신의 영을 주셨음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때에, 더 이상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동일한 상황 속에서 다윗의 마음속에는 두려움 대신 골리앗과 싸우려는 ‘소원’이 싹틉니다. 하나님께서 조롱받으시는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는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이 되고자 했습니다(26). 젊은 혈기가 발동해서 한 순간에 가진 감정이 아닙니다. ‘아무도 싸우려 하지 않으니 나라도 한번 싸워서 상을 받아볼까?’라는 얄팍한 생각도 아닙니다. 만일 한 순간의 감정과 가벼운 생각이었다면 그의 형 엘리압이 “노를 발하여 … 네 교만과 네 마음의 완악함을 아노니 네가 전쟁을 구경하러 왔도다”고 심히 책망했을 때 수그러들었을 것입니다(28). 하지만 다윗의 소원은 형의 분노 속에서도 꺾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연약해진 교회를 보면서 한심하다고 비판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교회를 향한 세상의 조롱은 조석으로 끊임없이 반복됩니다. 한심한 교회 지도자나 신앙인들 때문에 모든 성도가 함께 창피를 당하곤 합니다. 이런 시대에 필요한 인물은 썩은 교회라면 차라리 망해버리라고 분통 터뜨리는 사람이 아니며, 나는 모르겠다며 외면하는 사람도 아닙니다. 비록 망가진 모습일지라도, 여전히 ‘사시는 하나님의 교회’임을 생각하고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잘 드러내는 교회가 되기를 아픈 마음으로 소원하는 사람일 것입니다. 한 순간의 감정과 가벼운 생각으로 끝나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소원을 붙들고 지금 상황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찾는 사람이 필요하지요.

다윗은 두려워 떠는 모습을 보면서도 오합지졸 같다고 조롱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의 모습을 제대로 드러내고 싶었지요. 하지만 대표가 아닌 다윗은 출전 자격이 없었습니다. 골리앗과 싸우려면 먼저 대표로 선발되어야 하는데, 군사훈련도 받지 않은 소년 목동이 대표로 뽑히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지요. 그런데 기묘하게도 “혹이 다윗의 한 말을 듣고 그것을 사울에게 고하였으므로 사울이 다윗을” 불렀습니다(31). 대표 선발 권한을 가진 왕 앞에서 자신의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가 갑자기 주어졌지요. 다윗은 사울에게 “그를 인하여 사람이 낙담하지 말 것이라 주의 종이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리이다”(32)라고 말합니다.

사울은 다윗을 면접한 후 단박에 불합격 판정을 내립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33). 하지만 다윗은 자신의 신앙 체험을 제시하며 싸우려는 불타는 소신을 밝히고 승리에 대한 확신을 보입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 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34-36).

사울의 입장에서는 아무나 내보낼 수 없습니다. 패배하게 되면 가뜩이나 떨어진 아군의 사기가 급속히 떨어져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잠깐 머뭇거리는 순간에 다윗은 다시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 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37a)라고 말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소년이 아니라 보이지 않지만 소년과 함께 역사하신 하나님을 볼 수 있도록 한 것이지요. 이 말이 사울에게 결정타가 되었습니다.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 (37b). 마침내 다윗은 대표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소원대로 행할 수 있는 ‘환경’을 얻은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다윗을 불러 당신님의 뜻을 행하게 하실 때, 먼저 마음에 ‘소원’을 주셨습니다. 그 소원을 주변 사람들과 나누게 하셨고, 반대 상황에 부딪쳐도 그 소원이 꺾이지 않게 하셨습니다. 다윗의 능력에서 벗어나는 상황에서도 소원을 말할 수 있는 ‘기회’와 소원대로 행할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셨지요. 성경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라고 말합니다(빌 2:13). 다윗뿐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이런 과정을 겪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려면, 성경을 통해 분명히 계시된 하나님의 뜻이 나의 소원과 일치되는 일부터 먼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라도 그분께서 조롱받으시고 멸시 당하는 상황을 참지 못해야 합니다. 조롱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육체적으로 싸우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상황과 상황 이면에 있는 사단의 세력에 대항해서 영적 싸움을 싸워야 한다는 뜻입니다. 사시는 하나님의 영광이 내가 속한 자리에서 드러나기를 소원해야 하지요. 하지만 실상은 초라한 자기 교회의 부족한 모습을 보면서 실망하며 낙담하는 사람이 많고, 언제 망할지 두려워 떨기만 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은 이런 모습 속에서도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의식하며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 6:8)라고 소원합니다.

우리교회 역시 하나님의 나라 됨을 증시함에 있어서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제대로 갖추어져 있는 것이 적어서 한심해 보이는지 관심을 가지고 교회를 방문했다가 그냥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종종 있습니다. 교회가 베풀어 줄 수 있는 현실적인 혜택은 없고 고생하고 헌신할 일들만 보이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지치고 피곤해서 섬김 받고 싶어 왔는데, 섬겨야 할 상황이라면 부담이 크겠지요. 화려한 청년 대학부도 없고, 고등부, 중등부 모두 반겨주고 위로해주고 격려해 줄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이해가 됩니다. 그러면 누가 그 일을 해야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소원 주셔서 그 일을 하게 하실 사람은 누구입니까? 누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겠습니까?

본문의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2)는 다윗의 집이 있던 “베들레헴”(15)에서 서쪽으로 약 20km 위치에 있습니다. 아침 일찍 출발해서 전쟁터에 도착했으니 다윗도 지쳤을만한 때이지요. 그는 싸워야 할 의무를 가진 군인도 아니었습니다. 여러 가지 조건도 싸우기에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다윗에게는 현실 조건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군인들은 다 뭣하고 있느냐’며 다른 사람이 골리앗과 싸우도록 떠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런 현실을 발견했을 때 ‘하나님! 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부족하지만 저를 사용하여 주소서’라는 태도를 취한 것이지요. 사실 그날의 행보가 다윗이 통일 이스라엘 왕좌를 향한 첫걸음을 내디딘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사람이 되고 싶고, 하나님께서 자녀들을 통해 일하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하지만 막상 하나님의 일을 행할 기회가 왔을 때는 두려워하며 슬금슬금 피해버리는 사람도 많지요. 자기만 피할 뿐 아니라 ‘공부나 하라’며 자녀의 헌신하려는 열정을 꺾고 만류하기도 합니다. 이런 현상이 성도의 치욕입니다. 누구든지 성도의 치욕을 제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 주실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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