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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친(親)과 효(孝) (눅 15:1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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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親)과 효(孝) (눅 15:11-32)


사람이 잠에서 깨어나기 위해서는 육체, 정신, 영혼마다 각각 다른 자극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육체는 약간의 운동이, 정신은 미소가, 영혼은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가 필요하다고 합니다. 그 필요가 채워질 때 사람은 잠에서 상쾌하게 깨어날 수 있다고 합니다. 

오늘 아침 아직 잠에서 덜 깨신 분들을 위해 옆에 계신 분과 가볍게 목례하시면서 입가에 미소를 띠시고 “사랑합니다.”라고 인사하겠습니다.  

몇 해 전 태국에 짧은 여행을 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여행 중 가이드가 저희에게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태국에서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일까요?”  

저는 그때 ‘아마 불교국가이니까 거기에 관련된 것이겠지’ 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제 예상대로 태국에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가 승려라고 합니다. 승려가 지나가면 사람들은 그가 가는 길을 피해 줄 만큼 존경의 대상입니다. 그리고 또 태국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생 중 한번은 승려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답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경의 대상인 승려가 태국의 소중한 것의 4위였습니다. 

3위는 바로 국왕이라고 합니다. 태국은 입헌군주제의 나라입니다. 그래서 나라의 수장인 왕을 인정하지요. 태국의 국왕은 모든 국민들에게 존경을 받는 대상입니다. 그래서 국왕의 사진이 일반 가정집, 식당 등 거의 모든 곳에 있습니다. 하지만 국왕도 3위입니다.  

그렇다면 2위는 무엇일까요? 석가모니입니다. 불교 국가이니 당연하겠지요. 

그런데 승려, 국왕, 석가모니보다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존재가 있답니다. 

태국인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의 1위는 바로 자신의 부모라고 합니다. 자신의 신념이 가득 담긴 종교와 나라라고 할지라도 부모보다 소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 없이 어디서 태어났느냐고 그들은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어제 5월 8일 어버이날을 통해 각 가정마다 효도하고 효도 받는 따뜻한 풍경이 많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저도 어제 어버이날이라고 카네이션을 가슴에 달았습니다. 46개월 된 딸이 어린이집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 와서 아빠, 엄마 것이라며 주었습니다. 

사실 작년에도 어린이 집에서 카네이션을 만들어왔긴 했지만 좋다 말았습니다. wj저에게 달라고 하자 “안돼 내꺼야!” 이러며 가져가버렸습니다. 어린 딸은 전혀 줄 마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이제 좀 컸다고 1년이 지난 오늘에서야 “엄마 아빠 거예요.”라며 주더군요. 이제 드디어 딸에게 효도 받는구나 생각하며 기뻐서 어제 하루 종일 달고 다녔습니다. 그 꽃이 바로 제 가슴에 달린 바로 이 꽃입니다. 

요즘 시대가 점점 핵가족 화 되면서 가족과 가족 간의 유대관계는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부모와 자식 간에 효를 물려줄 만한 본을 보여줄 기회조차 갖기 어려워졌습니다. 또 편리성을 추구하는 시대가 되면서 찾아가던 문화가 전화 문화로 바뀌더니 요즘은 문자하나로 인사를 대신하기까지 합니다. 

어느 가정에서 엄마 아빠가 아이에게 할머니께 효도 문자를 보내라고 시켰습니다. 멀리 사시는 할머니께 손자가 이렇게 문자를 보냈습니다. “할머니 오래 사세요.” 이 문자를 보내고 나름 뿌듯해 하고 있는데 할머니께서 집으로 전화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할머니는 노발대발 화를 내시는 겁니다. 이유는 바로 그 문자 때문이었습니다. 

그만 아이가 문자를 빨리 보내려다가 실수로 ‘ㅅ’을 ‘ㄴ’으로 바꾸어 “할머니 오래 사세요” 가 “할머니 오래 사네요”가 된 것입니다. 간편하게 효도 하려다 오히려 화를 당한 꼴이 되었습니다. 

웃지 못할 이야기이지요. 너무나 편리해진 세상 속에 모든 것을 간단하게 해결하려다 벌어진 어처구니 없는 이야기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편하게 변하고 있다 해도 사람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은 그렇게 쉽게 얻어지는 가벼운 것이 아닙니다. 

심지어 내가 태어나면서 아니, 뱃속에서부터 내 존재를 키워주시고 장성할 때까지 ‘나실 재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르실 재 밤낮으로 애쓰신 그 마음을’ 가지신 내 삶에 가장 가까운 분. 부모님을 여러분은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오늘 본문은 부모의 마음을 알지 못해 불효를 하고 만 두 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stage 1. 아버지의 재산을 내 맘대로

어느 마을에 큰 부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집에서 일하는 모든 일꾼들도 풍족하게 지낼 만큼 매우 부유했습니다. 그에게 장성한 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 둘째 아들이 어느 날 아버지에게 이렇게 요구합니다. 

2절 “아버지여 재산 중에서 내게 돌아올 분깃을 내게 주소서.” 이 말은 곧 “아버지께서 돌아가시면 언젠가 제게 돌아올 그 유산 지금 주세요.” 이 말입니다. 

어떤 신학자가 중동지방 전역에 15년 간 그 지역 유지들과 친분을 나누면서 ‘아버지가 정정하게 살아있는 상태에서 유산을 요구하는 것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조사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공통적인 대답은 요구 자체는 말도 안 되며, 그것은 두들겨 맞을 일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요구하는 것 안에 “아버지가 얼른 죽었으면 좋겠다.” 는 뜻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문 15장 13절에서 작은 아들은 유산을 받자마자 그 소유를 몽땅 챙겨 며칠이 안 되어 먼 나라로 떠났습니다. 한 달도 아닌 며칠이 안 되어 말입니다. 

왜 이아들은 많을 유산을 요구하고 며칠이 안 되어 그 집을 떠났을까요? 사업을 하기 위해서요? 아니면 그 돈으로 해외로 나가 열심히 공부하기 위해서요? 아니면 세계 여행을 두루 다니면서 자신의 견문을 두루 넓히기 위해서요? 

아닙니다. 
아들은 평온하고 안락한 삶이 무료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다른 것이 없을까? 더 재미있는 것이 없을까? 이렇게 따분하게 사는 것이 얼마나 인생을 낭비하는 것인가?’

이렇듯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아들은 아버지와의 한 집에서 사는 것조차 답답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아버지를 벗어나 마음대로 살고 싶다!’


stage 2. 가출의 끝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간섭을 피해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하게 재산을 다 허비해 버렸다.”고 본문 14절은 말씀합니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재산이 많을 때는 만나는 사람마다 친한 척을 하며 주위에 사람들을 몰고 다녔던 그였지만 정신없이 낭비하다보니, 어느새 돈은 바닥을 보이고 주머니 속에 짤랑 거리던 동전마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설상가상으로 자신의 욕구 충족을 위해 아버지를 피해 먼 나라까지 왔는데, 그 땅에 큰 흉년이 듭니다. 길거리 나무의 열매하나, 물 한 모금조차도 얻을 수 없는 인심이 야박한 상황을 맞게 되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유대인이 가장 경멸하던 짐승이 바로 돼지입니다. 그래서 유대인이라면 절대로 돼지를 기르지도, 먹지도 않는데 둘째 아들은 자기 평생에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한번도 쳐보지도 않은 돼지를 치며,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까지 먹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건 아닌데.. 내가 원한 건 이게 아닌데...’ 

둘째 아들은 지독한 굶주림 속에 자신이 벼랑 끝까지 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비로소 생각난 것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의 집. 

‘내 아버지에게는 일꾼들도 얼마나 풍족하게 살고 있는가? 내가 여기 있다가는 굶어 죽겠다. 아버지 집으로 가자.’ 

‘그런데 아버지께 가면 날 받아주실까? 무섭게 내쫓지는 않으실까? 
그는 아버지를 만나면 어떤 말부터 꺼낼지에 대해 고민합니다. 
 
‘우선,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고 말해야지.

둘째로,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다고 하고,

셋째로, 나를 일꾼의 하나로 봐달라고 해야지.

이 아들은 굶어죽기 전에 마지막 살 길로 이 말만 열심히 반복하며 아버지에게로 갑니다.  


stage 3. 아버지의 마음 - 친(親)

한편 고향에서는 하루도 빠짐없이 작은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동구 밖에 서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아버지입니다. 

여러분 혹시 한자 ‘어버이 친’자를 아십니까? 이 글자는 나무목자와 그 위에 설립자와 오른쪽에 볼 견자가 조합된 글자입니다. 이 글자의 유래는 부모가/ 장사하러 먼 길을 떠난 아들이 무사히 돌아오기를 빌며 매일같이 나무 위에 올라서서 마을의 먼 곳까지 바라보는 그 모습을 보고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작은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모습 속에 어버이 친자가 그대로 새겨지는 것을 볼 수 있지요. 

작은 아들이 드디어 고향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옵니다. 성경은 ‘아직도 거리가 먼데’라고 표현합니다. 개혁 한글 성경에는 ‘상거가 먼데’ 즉 서로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을 만큼 거리가 상당히 먼 상황인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 먼 거리에서도 아들임을 알아보고 정신없이 달려갑니다. 사실 지금 둘째 아들의 모습은 떠날 때의 화려하고 당당한 모습이 아닙니다. 냄새나고 찢어진 누더기를 걸치고 신발도 신지 않은 거지꼴입니다. 

설사 바로 눈앞에서 지나가도 설마 내 아들일까 의심해도 모자를 그 상황에 아버지는 먼 거리에서도 아들임을 알고 가슴이 찢어지는 고통 즉 측은한 마음을 안고 눈물을 쏟으며 아들에게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울며 달려오는 감격적인 순간과 달리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까지 연습한 세 가지 말을 혹시나 잊어버릴까봐 계속 대뇌입니다. 

아들 앞에 선 아버지는 와락 아들의 목을 껴안고 울면서 입을 맞췄을 때, 그 순간 아버지는 아들의 모든 잘못을 용서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마음을 알 리 없는 아들은 아버지의 모습에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가 연습한대로 외운 것만 반복하며 첫 번째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두 번째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불릴 자격도 없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말까지 하려고 하는데, 아버지는 아들이 하는 말을 더 이상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용서하였기에 그 말들은 모두 의미 없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입에서 자신을 일꾼의 하나로 보라는 절망적인 말이 나오기 전에 아들의 권리를 인정하는 모든 조건을 바로 시행합니다. 

22절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아들임을 인정하는 모든 행위에 마지막으로 발에 신을 신기우면서 
“너는 절대로 종이 아니야. 너는 내 아들이야.”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당시 종들은 신발을 신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신을 신는 것은 곧 자유인으로 신분이 격상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stage 4. 장자 콤플렉스 

이제는 항상 바른생활의 사나이, 큰 아들이 등장합니다. 이 아들은 아버지 곁에서 성실하게 일하며 도와드리는 착한 아들입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밭에서 열심히 일하고 돌아옵니다. 

그런데 집에서 북적대고 흥겨운 잔치의 소리를 듣게 된 큰 아들은 종을 통해 동생이 돌아온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멀리 헤어진 가족과 다시 만날 때의 기분이 어떠시겠습니까? 1년 중 명절 때 겨우 만나는 형제들을 볼 때도 상당히 기쁜데, 하물며 죽었다고 생각한 자기 동생이 돌아올 때의 느낌을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기쁘고 반가울까요? 그동안의 근황을 물으며 자신의 이야기와 정겨웠던 옛날의 추억도 나누며 즐거운 대화를 나누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큰 아들은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분노에 가득 차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어찌 된 일일까요?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유산을 달라 요구하고, 그 소유를 몽땅 팔아 떠난 동생. 그가 떠난 순간부터 큰 아들은 동생을 더 이상 동생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때 일을 결코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밖으로 나와서 큰 아들에게 같이 들어가자고 직접 권하기까지 했지만 큰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화를 내며 원망의 말을 내뱉어 버립니다. 

“창기와 놀아나 아버지의 재산을 다 삼켜버린 당신의 아들을 어떻게 맞을 수 있습니까?” 큰 아들은 아버지에게 더 이상 자신의 동생이 아닌 “당신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나와는 상관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아버지의 말씀에는 순종하며 산 자신에게는 염소새끼 한 마리도 잡아준 적 없으면서 어째서 아버지의 재산을 다 날려버린 그에게 살찐 송아지를 잡아 주냐 말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여기에 숨겨진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 12절 말씀에 아버지가 처음 유산을 나누어 줄 때 “아버지가 그 살림을 각각 나눠 주었더니”라고 말씀합니다. 작은 아들에게만 준 것이 아니라 큰 아들에게도 그의 몫을 주었다는 것이지요. 다만 큰 아들은 아버지를 배려해서 아버지 곁에서 상속받은 재산을 마음대로 쓰지 않았던 것뿐입니다. 

또, 작은 아들이 멀리서 오는 모습을 보고 달려가 껴안고 맞아준 것처럼, 큰 아들 역시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밖으로 나가 친히 아들을 맞이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이 두 아들 중 한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두 아들을 향한 동일한 사랑을 이미 보여주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바른 삶을 살고, 아버지께 효도하며 살았다고 자부한 그 큰 아들이 한 가지 크게 놓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도 역시 아버지에게 용서를 받아야 했던 불효자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29절에 “내가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거늘”이라고 주장하며 자신의 태도를 합리화시킨 큰 아들이 과연 아버지의 명을 어긴 적이 없을까요? 

아닙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가 원했던 몇 가지 소중한 명령을 어겼습니다. 

둘째 아들을 매일같이 기다리고 그와의 거리가 먼데도 불구하고 그의 모습을 알아보고 달려가 와락 껴안았던 아버지의 모습을 통해, 아버지는 분명 집을 떠난 작은 아들을 매우 보고 싶어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매일같이 큰 아들에게 말합니다. “작은 아들이 정말 보고 싶구나. 네 동생이 어디 있는지 수소문해서 알아 올 수 있느냐, 혹시라도 내가 죽은 후에 동생이 돌아오면 따뜻하게 맞아주려무나.” 아버지는 이러한 명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큰 아들은 동생의 소식을 전해주지 않습니다. 이미 창기와 놀아나 아버지의 재산을 모두 탕진한 사실을 알면서도 아버지께 일언반구 하지 않습니다. 그가 알았다는 것은 본문 30절에 “창녀들과 함께 삼켜버린”이라는 말을 통해 동생의 삶을 이미 알 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지요.  

그리고 동생이 돌아왔을 때 동생을 동생으로 부르지도 않고 아버지에게 대뜸 “당신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큰 아들의 이 모든 행동이 아버지에게 불효를 저지른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stage 5. - 효(孝)

여러분, 한자어 효도하다 효자를 아시지요? 이 글자 형태를 살펴보면 늙은 노耂 아래 아들 子가 있어 아들이 늙은 부모를 업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글자가 만들어진 유래를 살펴보면 참 재미있습니다. 

- 효의 유래 - 

옛날에 효심이 깊은 한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홀로 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죽기 전 소원은 임금님의 용안을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었습니다.  

청년이 어머니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려고 작정하던 중 때마침 이웃 마을에 임금님이 행차하신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청년은 새벽같이 서둘러 어머니를 단장시켜서 50리가 넘는 길을 어머님을 업고 걸어서 그 마을로 부지런히 갔습니다. 

마침내 임금님의 행차는 보이기 시작했고 청년은 어머님께서 임금님의 용안을 보실 수 있도록 어머님을 어깨위로 무동을 태우고 수많은 인파 속에서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어머님은 아들의 어깨 위에서 임금님의 용안을 보며 감회에 젖어 눈물을 흘렸습니다. 

얼마 후 임금님이 궁궐로 돌아가 신하들에게 노모를 업고 구경하던 그 사람을 불러서 지극한 효를 칭찬하고 금 100냥과 쌀을 상으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웃 마을에 불효로 이름난 어떤 사람이 효자의 상에 대한 소식을 듣고 자기도 상을 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원하지도 않는 어머니를 새벽부터 깨워 억지로 단장시켰습니다. 그리고 굳이 사양하시는 어머니를 억지로 업고 걸어갔습니다. 어머니는 힘들고 피곤해서 집에서 쉬고 싶은데, 임금님 얼굴 특별히 볼 이유도 없는데, 임금님의 행차를 억지로 구경시켜주겠다고 행렬 가까이 가서 기어코는 자기 목에 어머니를 올려 무동까지 태웠습니다. 

그런데 그 후에도 역시 임금님은 그 불효자를 불러서 전과 같이 금 100냥과 쌀을 상으로 주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만류하면서 임금님께 그 자는 지난번의 효자와 다르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불효자요 상을 받기위한 수단으로 고의로 한 짓이니 오히려 엄히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효도란 흉내만 내어도 좋은 것이니 그 흉내를 인하여 상을 주도록 하라”

그렇게 억지로 상을 받은 불효자는 그러한 사실을 알고 마음 깊이 뉘우치고 남은  여생을 진실한 효를 다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아들이 노모를 업고 있는 모습이 바로 효도효(孝)자가 되었습니다. 
아들의 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려 그 마음에 기쁨을 드리고자 했던 노력 그것이 바로 효입니다. 

잠언 23장 2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그런 면에서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진정한 아버지의 기쁨을 드리지 못한 불효자였습니다. 


결론

며칠 전 한국일보에서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습니다. 

“가장 좋은 효도 방법” 

전국의 성인 남녀 8,064명을 대상으로 '부모'에 대한 인식을 조사한 결과, '부모님께 효도하는 가장 좋은 방법'의 순위는 다음과 같습니다.  

4위 충분한 생활비(용돈)를 드리는 것'(11.5%)

3위 자식들이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12.8%), '

2위 자식들끼리 행복하게 잘 사는 것'(18.2%)

1위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것'(41.5%)

돈도 돈이고, 자식이 사회적으로 잘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자식들끼리 서로 행복하게 잘 살고, 또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소중함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해석하면 이런 것이 될 것입니다. 
자주 만나고 연락하는 것' -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과 친밀한 대화를 끊임없이 하는 것입니다. 

자식들끼리 행복하게 잘 사는 것' - 예수님의 대답 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큰 율법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신 것이요 둘째는 이것이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것이라 이보다 더 큰 계명이 없느니라.”(막12:30-31)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받은 것을 가정과, 학교와 일터에서 서로 나타내야 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가득 차고 넘쳐 주위의 많은 사람에게까지 흘러가길 원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부모님을 사랑하고 부모님의 마음을 알기 원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이웃을, 우리의 형제를 사랑하고, 용납하고, 용서하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이러한 기대를 통해 참 어버이되신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지금 이시간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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