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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날, 그 날(렘 39: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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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 그 날(렘 39:6-18)

사실, 모든 날들은 똑같다. 전도서를 보면  ‘해는 떴다가 지고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니, 해 아래 새것이 없도다’고 말씀처럼 다를 것 없는 시간들의 연속이다. 
참 재미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밋밋한 날에 생일 파티를 열고, 어린이-어버이 날 같은 교훈의 날을 만들어 활력을 불어 넣었다.  이런 날들을 즐기는 것도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리는 한 방편이다. 
그런데 진정한 복은 하나님의 날-여호와의 날을 즐기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날은 하늘과 땅이 만나는 날이다.  
(렘 31:31, 개정)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하늘 보좌에서 하신 말씀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날이다.  하나님 말씀이 성취되어지는 날이다.  그 성취의 날을 보고 나의 날로 삼는 것은 인생 복 중의 복이다.  이런 날을 알고 기대하고 준비함으로  그냥 지나치지 않기를 축복한다. 

본문에는 ‘그 날’이라는 말씀이 3번 나온다. 그리고 그 의미도 각각 다르다. 각 의미의 날들은 우리의 삶에도 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날들을 깨닫고, 기억하고 누리자!

1. 하나님의 날 그 날은 심판의 그 날이다.(렘39:16)
우리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동시에 공의의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심판을 하실 때에도 무조건 막무가내로 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의 성품은 일방적이지 않다.
5월을 가정의 달로 기념하고 있는데, 주님을 주인으로 모신 가정은 주님을 닮아 일방적이지 않다.  주님의 말씀은 상호 관계 속에 있다.  부모와 자녀의 상호 관계가 있으며, 이 관계를 통해 더욱 복되고 아름다운 가정이 되어간다. 
(골 3:20-21, 개정)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면 부모만 기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부모를 기쁘게 해드려도 지갑이 열리는데,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하늘 문이 열리게 된다. 
자녀를 노엽게 한다는 것은 일방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부모의 권위로, 낳았다는 것으로. 내 것인양 내 맘대로 해도 된다는 식이다.  하나님이 하시면 자식이 아비가 되도록 했을 수도 있다.  자녀는 내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하나님의 것이다. 

그 모든 생명을 위하여 하나님은 심판하실 때 일방적으로 하지 않으시고, 충분히 알려 주신다.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나중에 사람들은 분노할 수 없다.  왜, 알려 주지 않았느냐고 대들 수 없다.  그래서 이들은 단지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마24,51)’고 했다.  이를 간다는 것은 후회의 정점으로 그 때,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이지 못한 자신을 저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산에서 배를 만들며 사람들에게 120년을 보게 하셨다. 충분하지 않은가?  처음에는 부활 목젹자들의 세대가 다 지나가기 전에 심판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했는데,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으로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할까 2000년을 유보하고 계신데 충분하지 않은가?  예레미야를 통해 약 40년간 왕 5대에 걸쳐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고 계셨는데, 충분하지 않은가? 
오래 참으신 하나님께서 드디어 ‘그 날’ 심판의 칼과 불이 예루살렘 성에 임했다. 그리고 하나님 말씀을 대적한 모든 이들에게 덮쳤다.  16절의 그 날에 ‘에벳멜렉’의 눈 앞에서 그대로 이루어졌다.  이방인, 구스 사람이지만 하나님 말씀을 손해와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지켜내고 간직했던 그의 앞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하나님께서 보게 하신 것이다.   이 시대의 노아가 되기를 축복한다.  이 시대의 에벳멜렉이 되기를 축복한다. 

2. 하나님의 날, 그 날은 구원의 그 날이다.(렘39,17)
본문 16절은 심판의 날이지만,  17절은 구원의 날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사랑과 공의 양면이 있듯이, 하나님 말씀의 성취에도 양면이 그대로 나타난다.  방주 짓는 120년, 예레미야의 40년 예언 사역,  재림 유보 2000년은 모두 심판 과정 중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심판의 바로 그 날에도 있다.  이 때의 그 날이 ‘구원의 날’이다. 
이 구원의 날은 환난과 핍박 중에도 하나님 말씀을 간직한 사람들이 맞게 되는 날이다. 
홍수 때에는 노아와 그 가족, 그리고 방주에 들어간 동물들이 구원의 날을 경험했다. 예레미야 때는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고관들의 계획을 무력화시킨 한낱 내시가 구원의 날을 경험했다.
에벳멜렉은 누구인가? 고관들의 심부름꾼 정도 밖에 되지 않았던, 그러나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 사랑했고, 하나님 말씀을 귀하게 여겼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을 아겼던 사람이다.  세상에서는 하찮게 여김을 받았던 사람.  높은 사람들의 가방을 들어 주었던 사람, 저들의 횡포에 때로는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던 사람.  그러나 ‘약할 때가 곧 강함’이라는 하나님의 진리를 알아 인내할 줄 아는 사람.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기 위해서 목숨까지도 내어 줄 용기가 있는 사람이다. 
바로 여러분 같은 사람이 아니던가! 이 에벳멜렉에게 바로 ‘그 날’에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다.  17절은 그 임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날에 너를 구원하리니 네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 넘겨지지 아니하리라.”
예레미야를 죽이려고 고관들은 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그러나 예언자들에게 향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슥9,11-2 ‘네 언약의 피로 말미암아 내가 네 갇힌 자들을 물 없는 구덩이에서 놓았나니’)을 이루려고 에벳멜렉은 왕에게 호소했다. 자기들의 계획을 수포로 돌아가게 하는 이 일에 고관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에벳멜렉은 그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해 주셨다.  

노아나 에벳멜렉은 개인적인 구원의 날을 경험했다. 이들이 경험한 구원의 날은 일시적인 구원이다.  살면서 또 다시 두려운 일을 당하고 두려운 사람을 만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하나님 말씀으로 구원해 주실 것이다. 일시적인 구원이라는 말은  다시 또 구원의 날이 필요하고 계속해서 구원의 날이 필요하다.  살면서 수고와 영적 싸움이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 싸움이 우리의 승리로 완전하게 끝날 구원의 날이 있다. 그 날은 바로 성경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되는 예수님 재림의 날이다.  
마지막 하나님의 그 날에는 하늘이 열린다. 그리고 백마를 탄 이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울 것이다.
(계 19:11, 개정)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백마와 그것을 탄 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충신과 진실이라 그가 공의로 심판하며 싸우더라』
백마를 탄 하늘 장군의 이름이 ‘충신과 진실’이라고 하는데 그 더 구체적인 이름이 다음 절 13절에 나타난다. (계 19:13, 개정) 『또 그가 피 뿌린 옷을 입었는데 그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칭하더라』
그러니까, 백마 탄 하늘 장군, 충신과 진실, 피 뿌린 옷을 입은 이,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가 한 분을 지칭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예수 그리스도이시다(요 1: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보혈의 피를 흘리신 분이시다.  
일시적인 개인의 구원을 넘어 전 인류와 세상의 마지막 구원의 날, 누가 이 마지막 우주적 구원의 날을 경험할까? 
이 자리, 오늘 처음 나오신 분이라도 구원의 그 날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흠 없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죽은 양심에서 살아 하나님 앞에 나가게 한다(히 9:14 『...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그렇게 예수님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이 되셨다(요 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누구든지 이 사실을 마음에 믿고 고백하면 구원을 얻는다(롬 10:9-10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이 모든 것이 하나님 말씀대로 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 앞에 ‘충신과 진실’로 선 자는 승리하여 구원의 날을 경험한다.  말씀이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그리스도라고 높이는 자가 주님과 함께 승리한다.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 말씀을 ‘진실’로 여기고 ‘충신’하는 자가 승리한다.  
주일에 강단에서 선포된 하나님 말씀을 지금 귀하게 여기는 자, 비록 사람의 입에서 나왔지만, 하나님 말씀이라고 한다면   어찌하든 최고로 여기는 자, 일점일획이라도 우습게 여기지 않고, 하찮게 여기지 않는 자, 두렵고 떨림으로 충성스럽게 간직하고 지키는 자가 구원의 날을 경험한다. 

3. 하나님의 날, 그 날은 회복의 날 위로의 날이다.(렘39,10)
그 날에는 구원과 함께, 충분한 보상의 날이 될 것이다.  그동안 아무 소유가 없이 빈민으로 살았던 날이 얼마나 힘들었는가?  하나님의 날에는 하나님으로부터 그 모든 것이 갚아질 것이다. 
누가복음 16장에 예수님은 부자와 거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그런데 부자와 거지는 하나님의 날에 서로 뒤 바뀐다. 부자가 거지가 되고 거지가 부자가 된다. 
부자는 세상에서 잠깐 승리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영원히 계속되는 하나님의 날에 부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한다. 물 한 방울만 있어도 시원하다고 여길터인데, 그 물 한 방울이 없다. 반면에 하나님의 날에 거지 나사로가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위로를 받는다. 그에게는 풍성한 하나님의 영원한 공급이 있다.  모세와 선지자의 증언, 곧 하나님 말씀을 듣지 않았던 부자는 거지가 되고, 말씀을 지키며 산 세상의 가난한 자는 천국의 품에 안겨 있다(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요한복음 5장에 베데스다 연못이 나온다. 천사가 내려와 물을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는 자는 어떤 병에 걸렸든 낫게 되는 연못이다. 자연히 세상에서 고칠 수 없는 사람들이 모여 물의 동함을 기다리느라 장사진을 치고 있다. 제일 먼저 뛰어가는 자만 축복을 받는다.  이것이 세상의 모습이다.  세상에는 뛰어가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이들은 어찌하랴! 영원한 낙오자로 살아야 하는가?
아니다. 위로와 회복의 날이 있다.  주님은 38년 된 병자를 찾아간다. 뛰어가기는커녕 누워만 있어야 했던 그를 주님은 만나주셨다. 그리고 자신을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는 가난함을,  또한 가는 동안에 다른 이들이 먼저 내려간다는 하소연을 다 들어 주시며 위로셨다.  그리고 ‘일어나 누웠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시면서 회복을 선포하셨다.(요5,8)

만남에는 3가지 종류가 있단다. 생선 같은 만남, 꽃과 같은 만남, 손수건 같은 만남.
첫째, 생선 같은 만남이란 만날수록 싫은 만남이다. 만나기만 하면 비린내가 난다. 만나기만 하면 시기하고 질투하고 싸우고 원한을 남기게 된다. 
둘째, 꽃과 같은 만남은 만나면 향기가 나고 좋아 어쩔 줄 모르지만 금세 시드는 만남이다. 출발은 좋은데 갈수록 나빠진다. 
셋째, 손수건 같은 만남은 상대가 슬플 때 눈물을 닦아주고 그의 기쁨이 내 기쁨인 양 축하하는 만남이요, 힘들 때는 땀도 닦아주는 만남이다. 
말씀과 만난 그날이 있는 자는 심판 중에도 구원의 날을 맞이할 것이요, 또한 하나님으로부터 부요함을 누리게 될 것이다.  
(서연교회 이명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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