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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부모의 은혜와 책임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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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은혜와 책임 (엡 6:1-4)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은혜를 입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 은혜의 대상이 많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가장 큰 은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았고 예수를 보내심으로 구원을 받고 자녀 삼으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가장 큰 은혜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대부분 이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국가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국가가 내게 무엇을 해 주었느냐고 말할런지 모르지만 그것은 큰 오해입니다. 손에 쥐어지는 것만 복이 아닙니다. 국가가 부강하면 내 삶도 내 인생도 부강해 집니다. 국가가 초라하면 내 삶도 인생도 초라해집니다. 나라없는 민족인 팔레스타인이나 내몽고족 그리고 티베트 족들을 보면 얼마나 초라합니까. 동남아시아의 가난한 나라들을 보면 나라가 초라하니까 국민들의 삶도 신분도 초라합니다. 그래서 남의 나라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느라 돌아다닙니다. 북한에서 목숨을 걸고 탈출하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자기 나라가 좋으면 사람들이 왜 목숨을 걸고 탈출을 시도하겠습니까. 국가는 나의 삶에 많은 은혜를 입혀주고 있습니다. 

스승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스승은 제자들에게 눈을 뜨게 해 주고 세상을 알게 해 주고 지성을 열게 해 줍니다. 학교는 참 중요한 곳입니다. 검정고시를 통해서 빨리 월반하려고 과정을 무시하고 빨리 끝내서 조기졸업을 하려고 하는데 빨리 마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디지만 과정을 거치는 것도 중요합니다. 사람은 한꺼번에 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좀 더디고 느려도 과정을 거치는 것이 좋습니다. 이웃과 친구의 은혜도 큰 은혜입니다. 그들이 있음으로 내 삶이 행복하고 그들과 나누는 교제의 은혜는 우리에게 삶의 질을 높여 줍니다. 이웃과 친구가 없다면 이 세상은 참으로 삭막할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부모의 은혜는 더 큰 은혜가 될 것입니다. 부모는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하시고 양육하시고 사랑하신 분입니다. 사랑도 기막힌 사랑입니다. 자녀는 당연히 그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천안함 침몰로 자녀를 잃은 부모들의 울부짖음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울부짖음을 보면서 부모 말고 누가 저렇게 울부짖어 줄까를 생각하였습니다. 

형제도 다릅니다. 삼촌도 다릅니다. 눈물의 질이 다릅니다. 부모이기 때문에 실신하는 것입니다. 아내들은 이제 나 혼자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하며 눈물을 짓겠지만 그 점이 부모와의 다른 점입니다. 부모는 그런 차원이 아닙니다. 

이런 은혜를 기억하고 알고 살아가라고 성경은 강조하십니다. 오늘은 어버이의 은혜를 생각해 보는 주일입니다. 매년 어버이 주일에 설교하다 보니까 본문선정에 한계가 있음을 느끼게 됩니다. 금년 어버이 주일에는 또 어떤 본문으로 말씀을 드릴까 고민하며 성경에서 적당한 말씀을 찾으려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찾은 결과 그래도 가장 적합한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었습니다. 이 본문은 여러 번 본문으로 선택하였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이 본문은 오늘 자녀들에게 그리고 부모들에게 짧지만 가장 적합한 말씀과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모를 알라고 강조하시고 그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최고의 가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최고의 계명이고 자식들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이 당부의 말씀을 경청하고 소중히 받아야 합니다. 두 번째는 부모들은 자식을 잘 훈련시키고 양육하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 말씀은 자녀들을 인격적으로 잘 다듬어 양육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의미를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자녀의 할 일 

자녀에게는 자녀의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이 어버이의 은혜를 아는 일입니다. 본문은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강조하십니다. 그것이 최고의 계명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길이 네가 잘되고 성공하는 비결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우리는 먼저 부모의 은혜를 알아야 합니다. 

오늘은 불행하게도 이 은혜의 소중함을 모르고 살아가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말세라는 말을 많이 합니다. 말세라는 말은 은혜를 잊어버린 시대라는 말입니다. 어버이라는 존재는 사랑해야 할 존재입니다. 특히 어머니는 특별한 존재입니다. 오늘은 이 특별한 존재를 잊고 사는 시대입니다. 

오늘 어머니라는 존재가 잊혀지고 무시당하고 남편들로 하여금 박대받고 살아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이 잊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회복은 내 자신이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결국은 믿음의 회복과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은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고 살아갑니다. 사람은 잃고 나서야 소중함을 발견하고 정신을 차리게 됩니다. 그래서 인간은 늘 후회하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어버이들의 헌신과 희생은 엄청납니다. 특히 어머니들의 헌신과 희생은 처절할 정도입니다. 그 희생은 지극히 자발적입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헌신이 소중한 것입니다. 이 헌신의 삶 과정에서 어머니들에게는 많은 스트레스가 주어지게 됩니다. 

옛날 어머니들이나 오늘 어머니들이나 양상은 좀 다르지만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자식으로부터 시부모로부터 남편으로부터 생활의 압박으로부터 각종 스트레스들의 도전이 많을 것입니다. 그 스트레스들은 마땅히 풀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합니다. 여인들은 그 스트레스들을 풀 방안을 스스로 만들어 살아가기도 하였습니다.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소설을 보면 온갖 스트레스를 안고 살아가는 주인공 박소녀가 나오는데 이 주인공이 견디기 힘들 때마다 장독대에 올라가 못생긴 장독 뚜껑을 골라 담벼락에 던져 산산 조각을 냄으로서 자기 나름대로 스트레스 해소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옛날 여인들이 남모르게 부엌에서 바가지를 깨는 방법도 있었습니다. 옛날의 어머니들이나 며느리들은 시부모를 모시고 아이를 기르며 매일 바쁜생활을 하였습니다. 밥하고 소여물 쑤고 빨래하고 농사일 하며 눈코뜰 사이없이 살았습니다. 며느리가 그렇게 분주한데도 아이를 받아주지 않고 시어머니는 안방에서 누워 잠을 자고 있습니다. 그때 며느리는 아이를 엎고 일하다 보면 속에서 부아가 치밀어 올라올 것입니다. 

옛날에는 그때 두 가지 방법으로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하나는 등에 엎인 아이 엉덩이를 세게 꼬집습니다. 그러면 아이가 죽는 소리로 울게 됩니다. 그 소리를 듣고 시어머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받아 엎고 이웃 마실을 가야 합니다. 그런데 눈치없는 시어머니는 그냥 누워 있습니다. 그러면 부엌에서 2차 신호가 옵니다. 부엌에서 졸고 있는 강아지를 걷어차면 강아지가 죽는 소리를 하며 도망갑니다. 그러면 좀 늦었지만 시어머니는 빨리 일어나 아이를 받아 엎고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감히 시어미를 걷어차다니” 하고 소리를 치게 되면 집안이 시끄럽게 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여자의 최대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어머니들은 이 며느리의 심정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며느리들의 마음을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남편이 아내를 이해하지 않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어머니 편만 듭니다. 그래서 남편을 내편이 아니기 때문에 남 편입니다. 그런 때 아내들의 스트레스는 배가로 증가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심정을 자식들도 이해하지 못합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그 때는 또 그것이 팔자라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오늘 시어머니들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오늘 남편들도 많이 변화되었습니다. 아주 바람직한 이해입니다. 우리는 아내의 헌신, 어머니의 헌신, 어버이의 헌신과 희생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이 자녀의 도리입니다. 그래야 부모를 사랑하고 섬기고 순종하는 삶이 따라오게 됩니다. 모성의 희생이 얼마나 숭고합니까. 그래서 성경은 한없이 그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성은 기대고 싶고 품에 안겨 울고 싶고 다가가 한없이 냄새라도 맞고 싶은 것이 모성입니다. 예수님은 낮고 낮은 자리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삶은 고난과 섬김과 수고와 100%의 헌신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것이 해산하는 모성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모습은 마치 모성적인 모습입니다. 

그래서 근래에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 하나님”을 강조하는 교회가 생겼습니다. 세계복음선교회라는 교단으로 국내에 400여개 해외에 천여 개의 교회가 있다고 하는데 이 교단에서는 하나님 아버지는 있는데 왜 어머니 하나님은 없는가 라고 질문을 합니다. 

그래서 마침내 어머니 하나님 교단을 만들게 되었는데 성경의 근거는 갈라디아서 4장26절의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의 어머니라”는 말씀과 

요한계시록 21장9절의 “내가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는 말씀과 

이사야 49장15절의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을지며 ...”라는 말씀을 근거로 하였다고 합니다. 

또 오늘 여성학자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을 아버지 하나님으로 기록한 것은 성경이 쓰여지던 시대가 가부장적인 시대라서 그랬는데 원래 하나님은 중성인데 왜 아버지라고만 해야 하는가 라고 반문합니다. 그래서 이제는 “하나님 아버지”가 아니고 “하나님 어머니”로 불러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지금은 모성의 시대이고 아이가 넘어지면 어머니부터 부르듯이 우리는 이제 “어머니 하나님”을 불러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우리는 늘 헌신하시는 어버이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은혜를 잊지 말고 그 사랑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의 그 은혜를 저버리는 것이 곧 하나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자녀들은 이 부모의 은혜를 기억하고 공경하고 사랑하는 일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부모의 할 일 

부모의 할 일도 있습니다. 성경은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님의 교훈으로 양육하라”고 강조하십니다. 이것이 부모의 할 일입니다. 오늘은 자녀들을 양육하기가 참 어려운 시대입니다. 오늘 부모들은 오늘 세대들이 살아가는 문화를 너무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 젊은이들의 문화가 너무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은 심한 괴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 결과 자녀들과 부모사이에 갈등이 심각하게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노릇 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오늘 어버이들도 상당히 변해버렸습니다. 

오늘 자식들도 부모를 예전처럼 생각하지 않지만 부모들도 자식에 대해서 이제는 예전처럼 무조건적으로 희생하거나 헌신하려고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제는 부모들이 자식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하던 시대도 지나가고 있는데 이것도 시대적인 영향일 것입니다. 그래서 오직 아들 일념으로 살아가던 한석봉의 어머니에 대한 해석도 이제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옛날 한석봉의 이야기를 보면 아들 한석봉이 어느 날 집에 왔습니다. 어머니는 반가웠지만 또 한편 마음은 염려부터 되었습니다. 그래서 “왜 벌써 왔느냐”, “불을 끄고 글을 써 보라”고 합니다. 어머니는 불을 끄고 떡을 썰고 아들은 글을 썼습니다. 불을 켜고 보니 어머니가 썬 떡은 질서정연하게 놓여 있는데 아들이 쓴 글은 엉망이었습니다. 그러자 그 어머니는 그 밤에 아들을 다시 스승에게로 돌려보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옛날 한석봉 어머니의 버전입니다. 

그런데 오늘 한석봉의 어머니는 그것이 아닙니다. 어머니가 “왜 벌써 왔느냐”, “글을 써 보라”고 하자 한석봉이 “어머니 불을 끌까요” 그럽니다. 그러자 어머니는 “불은 왜 끄냐, 내 손을 베면 네가 책임질래”하고 반문합니다. 이것은 오늘 시대가 많이 변했다는 것을 풍자한 이야기입니다.   

오늘은 어버이 노릇을 잘 하야 하는데 어버이 노릇하기가 어려운 시대입니다. 부모가 부모노릇을 잘 못하면 그 영향이 자식들에게 그대로 미치게 됩니다. 그것은 더 무서운 일입니다. 예를 들면 부모가 술 중독에 빠져 매일같이 방탕하게 살아갈 때 가정은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아이들은 그 모습을 보고 자랍니다. 그때 아이는 “나는 이다음에 결코 술을 입에도 대지 않겠다”고 맹세를 합니다. 

그런데 묘한 것은 그 아들이 크면 그 아버지와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노름에 중독되어 재산을 탕진하고 온가족에게 고생을 안겨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또 맹세합니다. “나는 이다음에 절대로 노름은 안하겠다”. 그런데 그 아들이 성장하면 그 아버지와 똑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아버지가 매일 술에 취해서 집에 오면 어머니를 구타하고 행패를 부리고 가정에서 폭군으로 군림합니다. 그 모습을 본 아들이 또 맹세를 하지만 그 아들도 크면 그 아버지와 똑같이 되는 경우가 발생합니다. 참 신비하고도 무서운 일입니다. 

어머니가 장사를 했습니다. 초등생 아이가 늘 계산하는 어머니를 보고 자랍니다. 그 아이도 매사를 값으로 계산하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옆 친구가 좋은 필통을 가지고 오면 “그 필통 얼마짜리냐”하고 물었습니다. 좋은 연필을 가지고 오면 “그 연필 얼마짜리냐”고 물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선생님이 “모든 것을 얼마냐 하고 계산하고는 것은 나쁜 버릇”이라고 다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그러자 그 아이가 선생님에게 “죄송합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충고는 100만 원짜리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고 합니다. 

부모는 자식의 모델입니다. “아름다운 비행”이라는 영화를 보면 기러기 새끼들이 자기들을 부화시킨 소녀를 어미로 알고 졸졸 따라다닙니다. 기러기는 알에서 태어날 때 처음 본 상대를 어미로 알고 무조건 따라다니는 습성이 있다고 합니다. 그 현상을 임프린팅(imprinting) 현상이라고 합니다. 자녀들은 그 부모에게 영향을 받고 따라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왕이 모두 24명인데 아들이 아버지를 따라서 왕위를 계승하게 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아버지가 선한 왕이었으면 그 아들도 선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악한 왕이었으면 그 아들도 악한 왕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100%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 확률이 79.2% 로 아들은 거의 아버지를 그대로 닮게 되는 통계를 나타내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아비들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아주 강하게 당부하고 있습니다.  


가정 - 세상의 중심 

성경 3절을 보면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고 하였습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일은 상줄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또 다른 프리미엄을 붙일 일도 아닙니다. 부모를 공경해야 한다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고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성경은 이와 같이 상을 약속하고 부모 공경하는 일에 상당한 프리미엄을 붙여놓은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부모를 공경하는 일이 그만큼 어려운 일이라는 점도 있지만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일은 이 세상을 가장 건강하게 만드는 첩경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내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받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 건강한 훈련과 연단과 양육이 있어야 합니다. 가정은 곧 인생의 훈련소입니다. 교관은 그 부모입니다. 가정은 세상의 중심이고 가정이 건강하면 세상도 건강해집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을 충실하게 이루는 삶의 내용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하겠습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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