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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믿음의 가정 엿보기(2) (창 22: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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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정 엿보기(2) (창 22:5-13) 


연변과기대의 부총장을 지낸 정진호 교수가 쓴 '루카스 이야기'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런 감동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느 장애인 부부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간절히 아기를 원했습니다.  두 번에 걸친 자연유산은 그들을 몹시 아프게 했지만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들어선 세 번째 아기를 두고 기도하던 중 임신 초기에 또다시 통증이 왔습니다.  황급히 병원으로 찾아간 그들에게 의사는 아이의 뇌가 골 밖으로 나와 당장 유산을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15분을 살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청천벽력과 같은 말에 부부는 너무도 기다리던 아이라서 그래도 아이를 뱃속에서 키워보겠다고 말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부부는 아이의 이름을 '루카스'(Lucas)라고 지었습니다.  그리고 루카스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매일 루카스를 위해 찬양을 들려주고, 기도했습니다.  그들은 루카스가 심장 박동을 느낄 때마다 부부의 애절한 사랑은 루카스의 혈관을 타고 흘러들어가는 것만 같았습니다.  마침내 출산의 날이 다가왔습니다.  긴장과 두려움 속에 아이를 받았을 때 부부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아들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예상대로 아이의 머리는 정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15분, 1시간이 지나도록 아이는 여전히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살아 있었습니다.  

의사는 더 이상 병원에서 할 일이 없으니 데리고 가라고 했습니다.  집에 온 부부는 부모가 자식을 위해 평생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서둘러 유아세례를 받고, 매일 기도하고 축복하고, 선물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교회 식구들을 불러 파티도 열었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날이 지나고 마침내 루카스는 17일을 살다가 인생을 마쳤습니다.  부부는 임종을 아프게 지켜보았습니다.  아들을 떠나보내던 날, 루카스의 엄마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루카스와 함께했던 지난 9개월은 참으로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와 얼마나 많은 사랑을 나누었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우리는 루카스를 사랑합니다.'  또한 아빠도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루카스로 인해 비로소 아버지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나를 아버지로 만들어준 아이에게 감사합니다.  루카스는 사랑하는 아들의 고통과 죽음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이 땅의 모든 부모의 마음, 그의 사랑을 기억하며 감사하고, 자녀로서의 헌신을 다짐하는 주일입니다.  이런 뜻 깊은 날에 계속해서 믿음의 가정을 들여다보기 원합니다.  믿음의 가정에서 아버지인 아브라함과 아들인 이삭을 통해 배우는 교훈이 무엇일까요?

우선 소통의 중요성입니다. 

본문은 계속되는 아브라함과 이삭가정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이삭은 부모의 기쁨과 웃음을 주며 건강하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중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셨습니다.  백세에 낳은 귀한 아들을 모리아 산에 가서 번제로 드리라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으로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배경과 문화로서는 가능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시험을 잘 통과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받고 우뚝 섭니다.  그리고 그 유명한 '여호와이레'라는 축복의 선언을 이끌어냅니다.  본문은 우리가 잘 아는 사건입니다.

여기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돋보이는 것이 몇 가지 있습니다.  특히 가정과 관련해서 주는 귀한 교훈이 있습니다.  우선적으로 눈에 뜨는 것은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입니다.  짧지만 아주 깊은 대화를 본문은 강조합니다.  아들이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 아버지여" 그러자 아버지가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어 아들은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 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버지는 담담하게 말합니다.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지금 아버지와 아들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짧지만 깊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들 사이에 뭔가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가정에서 뭐가 중요한가를 알려줍니다.  바로 대화가 필요하고, 소통이 중요함을 배웁니다.  말하고, 대답하고, 전하고, 들어주는 대화가운데 교감이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부모와 자녀의 사랑은 깊어 갑니다.

허준의 동의보감에 보면 ‘통즉불통이면 불통즉통’이라는 말이 나온다고 합니다.  이 말은 곧 ‘통하면 아프지 않고 통하지 아니하면 아프다’라는 뜻입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은 소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몸의 모든 구조가 그렇고, 심지어는 인간관계도 물론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정에서의 소통은 행복의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가정의 불행은 소통의 부재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통하지 않고, 부모와 자녀의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 가정은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대화와 소통이 행복의 중요한 변수가 됩니다.  

일반적으로 가정에서의 대화가 부족합니다.  현대사회에는 더욱 대화가 부족합니다.  그래서 지금보다 많은 대화가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자녀와 소통을 잘 하기 위해서는 요즘 아이들의 언어를 알아야 합니다.  하루가 멀게 달라지는 신조어로 아이들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요즘 아이들이 쓰는 말을 아십니까?  '무지개매너'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통한 매너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무지 개매너'라는 뜻으로 '매우 매너가 없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갈비'는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갈수록 비호감'이란 말이라고 합니다.  통하기가 힘든 세대의 언어입니다.  하지만 이런 아이들과 눈높이를 하고,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입니다.  

우리교회에 '아름다운 동행'이라는 잡지가 들어옵니다.  이것을 만든 사명새김의 하나가 바로 '소통의 물꼬를 트겠습니다.'라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에, 교회에, 소통의 물꼬가 터져야 합니다.  특히 가정에 부부사이에, 자녀와 부모의 지속적인 대화와 소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믿음의 가정으로 행복을 이어갑니다.  소통을 다짐하는 믿음의 부모, 자녀가 되기를 바랍니다.

둘째는 순종하는 자녀입니다. 

본문은 무엇보다도 '순종'이 돋보이는 사건입니다.  먼저 아브라함의 순종이 뛰어납니다.  하나님 앞에 일체 순종함으로 본을 보였던 아브라함입니다.  그는 얼마든지 핑계를 대고, 거부할 수가 있었습니다.  아이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신데 다시 데려간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항변할 수도 있었습니다.  특히 아내가 알면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날 아침 일찍이 집을 떠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지체하지 않았습니다.  지체가 곧 불순종임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도 말씀 앞에 머뭇거리지 않는 즉각적이고 전적인 순종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인정하는 뛰어난 믿음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아브라함의 순종과 함께 돋보이는 것이 바로 이삭의 순종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했다면, 이삭은 아버지에게 순종합니다.  어떻게 보면 아들의 순종으로 아버지는 인정받은 것입니다.  만약 비뚤어진 청소년처럼 불순종하고, 거부했다면 상황은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학자들은 당시 이삭의 나이가 20세는 전후한 것으로 봅니다.  아버지는 이미 120세에 가까운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힘으로 보면 얼마든지 아들은 아버지가 하는 일에 거부하고 물리칠 수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이삭은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것이 아니기에 아마 아버지의 행동을 막을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나이가 들더니 치매가 왔다며 오히려 병자로 취급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도 아들은 말없이 밧줄에 묶여 제단에 누워있습니다.  그리고 칼이 코앞에 내리치는 순간까지도 순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만큼 돋보입니다.  아니 더 뛰어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바로 이런 자녀의 순종으로 아브라함의 가정에 하나님의 큰 은혜와 축복이 임한 것입니다.

성경은 자녀를 향하여 이렇게 명령합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한 잠언의 말씀에는 더 구체적으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너를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 네 부모를 즐겁게 하며 너를 낳은 어미를 기쁘게 하라" (잠23:22)  자녀에게 늘 강조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모를 공경하라, 순종하라, 청종하라, 즐겁게 하라, 기쁘게 하라, 경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는 자의 자녀는 말씀을 따라야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부모사랑으로 나타내야 합니다.  그것이 성숙한 사람입니다.

부모가 젊고, 능력 있고, 경제력과 도울 힘이 있으면 자녀는 부모를 경홀히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위엄과 존경심으로 따를 것입니다.  하지만 부모가 늙어 힘이 없어질 때입니다.  이젠 부모의 외모, 언어, 능력, 경제, 모든 것에 힘이 없습니다.  자녀에게 도움은커녕 오히려 귀찮은 존재가 되는 경우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부모가 왜 늙고 병들었습니까?  누구 때문에 작고 힘이 없어졌습니까?  자녀를 키우고, 뒷바라지를 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자녀들은 부모가 늙을수록 더 존경하고 귀히 여겨야 합니다. 

교회에서 아이에게 십계명을 암기 시켰습니다.  그런데 아이가 5계명을 암송하면서 '부모를 공경하라'를 '공격하라'로 잘못 읽는 것입니다.  아빠가 듣다가 민망하여 공경과 공격의 뜻을 설명해 줍니다.  그러자 아들이 '그럼 왜 아빠는 할머니를 공경하지 않고 공격하냐'고 따져 물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부모를 공격하지 말고, 공경해야 합니다.  순종하고 존중히 여기고, 때론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늙고 병들어 힘이 없다고 느낄 때 더 잘해야 합니다.  그들의 삶을 무게를 인정하고 자녀로서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부모공경의 믿음으로 땅에서 잘 되는 축복받는 자녀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본문을 얼핏 보면 우리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매정하다고 느껴질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녀를 사랑할 줄 모르고, 자녀를 마음대로 하는 그런 아버지로 오해하기도 쉽습니다.  자녀에 대해 아브라함은 고민한 흔적이 없고, 또한 아내와 상의한 기록도 없습니다.  아무리 하나님의 명령이라도 자녀를 가진 부모의 심정을 짧게라도 표현할 만한데 전혀 그런 내용이 보이지 않습니다.  마치 아브라함은 자녀를 죽여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생명을 무가치하게 여기는 것처럼,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깊은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습니다.  본문은 믿음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기에, 성경에서 아브라함을 소개하는 말씀에는 언제나 믿음이 중심이기에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여기 사건으로 믿음의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가히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기에 손색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시험을 통과하여 하늘로부터 '내가 이제야 나를 사랑하는 줄을 내가 알았다'는 음성을 듣고, 당대와 후대에 뛰어난 믿음의 사람으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떤 믿음이었을까요?  한마디로 '대안이 없다'는 믿음입니다.  지금 아브라함은 이삭을 제물로 드리지만 대안이 없으니까 이삭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더 놀라운 것은, 혹 실수해서 아들을 죽여도 결국 대안이 없으니까 하나님은 죽은 이삭을 다시 살리실 것으로 믿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이처럼 그는 믿음으로 아들을 드린 것입니다.  성경은 믿음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라함도 아버지요, 부모입니다.  부모의 심정으로 이삭을 보면 찢어질 듯 아픔이 있었을 것입니다.  아들이 제물이 어디 있느냐고 물을 때 아비의 마음은 타들어가고, 그의 속은 통곡하고 있었습니다.  부모가 아닐진대 어떻게 부모의 심정을 이해하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닌데 어떻게 아브라함의 마음을 헤아리겠습니까?  특히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은 너무도 소중합니다.  부모에게 모든 자녀가 다 소중합니다.  열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게 없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이 전부였습니다.  그토록 기다리던 아들입니다.  '금지옥엽'이란 말이 여기에 해당되는 말입니다.  날마다 금이야, 옥이야 하던 아들입니다.  하나님도 아브라함이 너무도 아들을 사랑하기에 바치라고 시험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심정입니다. 

그런데 부모는 어느 때 자녀를 향한 이런 사랑과 마음을 잘 나타내지 않습니다.  여기 본문에 자녀를 향한 부모의 마음이 나타나지 않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내가 자녀일 때는 부모의 속을 헤아리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내가 어른이 되고, 부모가 될 때 그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그것이 바로 여기 아버지 아브라함의 심정입니다.  믿음의 시험이기에 아브라함의 마음이 숨겨져 있지만, 이 말씀을 통해 자녀를 향한 부모의 심정을 깊이 엿볼 수 있습니다. 

어려서 철부지 같던 자녀는 부모의 마음을 몰랐습니다.  그가 성장하여 이제 부모의 심정을 알려했더니 부모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모의 마음을 알았지만, 더 사랑하고, 잘해드리지 못한 아쉬움에 하늘나라에 계신 부모님께 눈물로 편지를 보낸 자녀가 있습니다.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우리 어머니는 엄마가 보고 싶지 않은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친구가 한 사람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몸이 절대 아프지 않는 특별한 몸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아무 꿈도 품은 적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잠드는 것을 좋아하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특별히 좋아하시는 음식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짧은 파마머리만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얼굴과 몸매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우리가 전화 길게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 계실 줄 알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단 하루라도 쉬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웃는 걸 모르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딸이 시집가는 것을 보고 마냥 기뻐만 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양복 입고 넥타이 매는 것을 싫어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안주머니에는 늘 돈이 넉넉히 들어 있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좋아하시는 운동도, 취미도 없는 줄로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듣지 않으시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무리 험한 길을 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 눈에는 눈물이 한 방울도 없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우리가 객지로 떠나는 것을 좋아하시는 줄 알았습니다.../

나, 당신의 자식이었을 때는 미처 몰랐습니다/ 당신이 그러하듯, 나도 당신처럼 자식의 부모가 되어보니 알겠습니다/ 어리석게도 이제야 알아차린 당신의 마음과 눈물을 가슴에 담고/ 당신의 사랑이 무척 그리운 이 시간에 하늘나라에서 지켜보시는 두 분께 외쳐봅니다. '사랑합니다, 아버지, 어머니!"

여러분, 오늘 우리도 가슴 깊은 곳에서 이렇게 부모를 생각하며 불러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머니, 아버지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이제 우리 모두 말씀의 깨달음으로 소통의 중요성을 배우고, 순종하는 자녀로, 그리고 부모의 심정을 헤아리는 자녀로 승리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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