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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모 (창 48:17-20,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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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모 (창 48:17-20, 엡 6:1-4)


부모라는 말을 위키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부모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합쳐 부르는 말이다. 세포분열 등 무성생식을 통해 자손을 번식하는 경우에는 부모를 구별할 수 없거나 부모가 하나이다”. 쉬운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풀이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모는 간단히 말하면 ‘좋은 분’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모든 좋은 분들께 하나님의 은총이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최종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며, 하나님의 기쁨입니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부모의 역할이 빛이 납니다. 자녀를 기쁘게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를 위해 혼신을 다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입니다. 자녀를 훌륭한 인재로 키우는 것도 좋은 부모입니다. 가정을 명문 가정으로 만든 부모도 좋은 부모입니다. 그러나 가장 좋은 부모는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부모입니다.  
  
‘밥상머리교육’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식탁에서 자녀를 가르치는 것을 일컫습니다. 밥상머리교육을 말할 때마다 떠올리는 사람이 로즈 케네디여사입니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어머니입니다. 원래 케네디가는 보잘 것 없는 농민이었습니다. 이 농민의 가정을 정치명가로 만든 여인이 바로 로즈 케네디입니다. 그 가정의 저녁식탁은 자녀들의 의견을 이끌어내고 토론하고 지혜를 함양하는 훈련장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문에서 대통령, 장관, 상원의원 등 걸출한 미국의 정치인들을 배출하였습니다. 
  
자녀를 위한 부모의 마음은 어떤 부모나 간절하고 절실합니다. 성경에 나타난 자녀를 위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세요. 성경에는 왕의 신하가 예수님께 와서 자신의 아들을 고쳐 달라고 애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을 위해서는 체면도 없습니다. 예수님께 꿇어 엎드려 말했다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간절한 마음의 자세를 말합니다. 그 아버지는 당시의 상당한 고위직이었습니다. 아들이 아니라면 당시에 지위도 없었던 예수님께 절대로 그렇게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열왕기하 4장에 나오는 수넴여인을 보세요. 남편은 늙고 아들이 없었습니다. 그 여인은 엘리사를 잘 도와준 여인이었는데 엘리사의 예언대로 아들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지옥엽 같은 아들이 죽었을 때에 침상에 두고 문을 닫고 남편에게 고하고 엘리사를 불렀습니다. 어떻게 하든 아들을 살리기 위한 간절한 마음을 가진 어머니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산에 오르시어 변화되신 다음 산 아래로 내려오셨을 때에 한 아버지가 아들을 고쳐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하실 수 있거든 아들을 고쳐달라고 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아들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 이 아버지의 아들을 위한 간절함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가나안인인 수로보니게 여인도 그렇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딸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께 개라는 소리까지 들으면서도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개라도 좋습니다. 내 딸만 고쳐주십시오”. 딸이 아니라면 그런 수모를 견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간절함이 있는 부모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입니다. 
  
자녀를 위한 간절함과 수고와 사랑이 다 중요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모가 되어야 참 부모입니다. ‘부모교육사관학교’라는 것이 있습니다. 좋은 부모가 되기 위해 많이 배워야 합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부모교육사관학교는 교회입니다. 성경적 의미의 부모를 배워서 자녀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모가 되어 합니다. 우리 모든 부모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부모가 되기를 바랍니다. 


첫째,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기쁘시게 합니다. 

에베소서 6:4 상반절에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고 합니다. 구약적 의미에서 볼 때 이 말은 부정적 명령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난폭한 마음을 일으키게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아비들아”라고 했으니 그럼 어머니들은 노엽게 해도 괜찮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아비라는 말은 부모의 대명사입니다. 어머니들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교육의 책임자입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를 분노케 하는 태도나 말, 행동을 피해야 함을 권하는 것입니다. 부모는 모름지기 자녀들에게 지나치게 엄격한 훈련, 비합리적 요구, 권위의 남용 등을 행하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오래 전에 잘 알고 있던 어떤 분은 여러 해 동안 저와 만나 상담을 했던 분입니다. 이 분은 어릴 때 아버지에게서 당한 상처를 평생 벗어나지 못하고 살고 있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는 매일 밤이면 술을 마시고 와서 자고 있는 아이들을 다 깨웁니다. 이유 없이 아이들을 폭행합니다. 아이들에게 난폭한 언어를 사용합니다. 그 분에게 아버지는 언제나 무서운 분입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아십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아버지 같이 생각합니다. 하나님도 무섭고 난폭한 분으로 이해합니다. 무서운 하나님은 회개해도 들어주시기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 분도 용서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회개했던 것을 또 하고, 또 하고 끝도 없이 회개합니다. 용서의 기쁨이 전혀 없으니 항상 힘들고 고통스럽습니다. 
  
아이들이 비판과 함께 자라면 비난을 배우고, 적개심과 함께 자라면 싸움을 배우고, 어색함과 함께 자라면 부끄럼을 배우고, 수치와 함께 자라면 죄의식을 배우고, 용서와 함께 자라면 인내를 배우고, 용기와 함께 자라면 신뢰를 배우고, 칭찬과 함께 자라면 감사를 배우고, 공평함과 함께 자라면 정의감을 배우고, 안전과 함께 자라면 믿음을 배우고, 인정(認定)과 함께 자라면 자신감을 배우고, 용납과 함께 자라면 사랑을 배운다고 합니다. 
  
자녀들이 가장 노여워하는 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옆집 아무개는 잘 하는데 너는 왜 그 모양이냐?”, “아무개 반만 해라”, “난 옛날 너 만할 때 안 그랬다”, “넌 누굴 닮아 그 모양이냐?”라는 말들입니다. 이런 말을 할 때마다 아이들은 자신감이 떨어지고 좌절감에 빠집니다. 그리고 속으로 “내가 아빠 엄마 닮아서 그렇지 누굴 닮았겠어?”라고 합니다. 
  
마야 안젤루는 말은 사물이라고 했습니다. 말은 실체가 있는 사물이며 결코 허상이 아닙니다. 말은 죽지 않습니다. 말이 몸속으로 들어갑니다. 말은 건강하게 하고, 희망적으로 만들고, 행복하게 하고, 높은 에너지를 갖게 해줍니다. 말은 혹은 의기소침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말은 우리의 몸속으로 들어와 우리를 우울하게 하고, 못마땅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마침내는 아프게 합니다. 분노의 말은 우리의 몸을 죽이기도 합니다. 
  
하버드대학교 공중보건대학의 연구에 의하면 노여움을 품고 적대적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은 육체적 정신적 건강한 삶을 살 수 없다고 합니다. 노여워하고 적대적인 성격을 가진 사람이 중, 노년층이 되면 폐 기능의 퇴행이 빨리 진행됩니다. 그래서 사람이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좋은 말, 아름다운 말을 써야 합니다. 노여움으로 아이를 대하면 부정적이 되고, 건강치 못한 삶을 살게 됩니다. “원수는 한 명도 많지만 친구는 천명이라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곁에서 좋은 말을 해주고, 칭찬해주고, 격려하는 사람은 아무리 많아도 남지 않습니다. 좋은 친구가 많아야 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해야 합니다. 
  
분노와 불안은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불안을 경험하면서 자란 사람이 분노도 많습니다. 부모가 화를 내면 아이는 언제나 불안합니다. 불안이 내면에 쌓이면 불안을 덜어보려는 무의식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합니다. 이것이 분노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무서운 분은 좀처럼 밝게 웃지 못합니다. 이런 사람들이 자신의 자녀들도 무섭게 때립니다. 아버지의 분노가 자녀의 불안을 키우게 되는 법입니다. 
  
성경의 족장 중의 한 사람인 이삭과 리브가는 자녀 교육은 잘 못 했습니다. 이삭은 쌍둥이 큰 아들인 에서를 사랑했습니다. 반면에 리브가는 동생인 야곱을 사랑했습니다. 마치 집안에서 대리전 양상을 띄우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좋아했던 야곱은 어머니만 의존하는 마마보이였습니다. 아버지와 형님을 속이고 도망갈 때도 엄마 품에서 떠나서 외삼촌의 집에 갔습니다. 반면에 아버지의 사랑을 받던 에서는 파파보이입니다. 이런 부모의 편애와 분노가 에서로 하여금 들사람을 만들고, 사냥꾼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골로새서  3:21에는 “아비들아 너의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라고 합니다. 아이들을 격노하게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성경적 가르침이고 좋은 가정의 모범입니다. 

  
둘째,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기쁘시게 합니다. 
  
6:4 하반절입니다.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이 말씀은 앞의 부정적 명령에 대한 긍정적, 적극적 명령입니다. 그리스도인 부모는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는 것으로 책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해야 할 책임이 있음을 말합니다. ‘교훈’이란 훈련이나 체벌을 동반한 책망을 의미합니다. 한편 ‘훈계’란 말로 하는 교훈이나 교정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최고의 교사입니다. 부모의 삶이나, 말이나, 직업이나, 행동이나, 부부의 관계는 아이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줍니다. 부모의 삶이 자녀들에게는 평생교육입니다. 저의 선친은 한 평생 저녁 9시에는 주무셨습니다. 그리고 새벽 3시에 일어나십니다. 어디를 가시든지 항상 책을 끼고 사십니다. 저는 어릴 때에 늘 “사람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하고 생각했습니다. 아버지의 삶이 저에게는 평생 학습이 된 것입니다. 
  
‘어린 시절의 경험 중 어떤 것이 당신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주었나요?’라는 질문에 다양한 대답을 하였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공통적인 대답은 “부모님이 잠들기 전에 내게 책을 읽어주신 거예요”라고 합니다. 부모님의 교훈과 훈계와 지혜가 자녀들에게는 가장 진한 영향이 되는 것입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가족 찾기’ 프로그램을 보세요. 오래 전까지만 해도 전쟁 중에 헤어진 이산가족이 대부분입니다. 그런데 요즘은 거의 아닙니다. ‘TV는 사랑을 싣고’라는 프로그램에 ‘용서의 방’이라는 시간이 있지요? 그 시간에 보면 오랫동안 부모와 자녀가 헤어져 있다가 찾습니다. 헤어지게 된 동기가 거의 비슷합니다. 아버지의 술주정이나 폭행입니다. 이런 아버지의 잘못으로 어머니가 집을 나오게 되고 다시 자녀를 찾습니다. “아들아, 딸아, 용서해다오, 할 말이 없다”. 거의 시나리오가 정해져 있습니다. 
  
잠언 22:6에는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합니다. 아이들에게 잘 가르치고 훈계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책임이며 소명이며 명령입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자녀는 정체성을 가지며, 자긍심을 가지며, 안정감을 얻습니다. 심리학적으로 미소는 ‘상대의 발을 묶기 위한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영국의 아동정신분석학자 볼비는 ‘애착이론’이란 이론을 만들었습니다. 아이가 미소를 지으며 부모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 부모와 아이 사이에 애정이 형성된다고 분석하였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미소를 짓고, 웃어주고, 쓰다듬어 주는 것은 행동으로 하는 좋은 교훈이며 훈계입니다. 
  
미국의 약물 중독 및 남용센터의 최근의 연구에 의하면 자녀들이 약물을 복용하지 않도록 하는 핵심 열쇠는 부모들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호기심이 많습니다. 악에 빠지기 쉬운 연약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런 아이들이 건전하고 바르게 자랄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은 부모의 사랑입니다. 사랑은 이 모든 것을 해결합니다. 
  
서울대학교의 어느 교수는 인생교훈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갈까 말까 할 때는 가라, 살까말까 할 때는 사지 말라, 말할까말까 할 때는 말하지 말라, 줄까말까 할 때는 줘라, 먹을까 말까 할 때는 먹지 말라. 재미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이 성경적 교훈은 아닙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모든 교훈들이 주의 교훈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기독교정신으로 세워진 세계 명문대학들의 교훈을 보면 교훈이 성경적입니다. 하버드대학교는 ‘진리’입니다. 예일대학교는 ‘진리와 빛’입니다. 프리스턴대학교는 ‘신구약성경’입니다. 옥스퍼드대학교는 시편 36:9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입니다. 학교의 건학이념을 성경에서 교훈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이 학교의 목표이었습니다. 
  
한나는 아들이 없어 마음에 고통이 많았습니다. 기도하여 낳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그런데 어린 사무엘을 엘리에게 맡겨 성전에서 자라게 하였습니다. 자녀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가장 좋은 교육이며 훈계입니다. 아기들을 누구에게 맡긴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부모에게 맡기지 말고 하나님께 맡겨 교육하게 해야 합니다. 
  
잠언 23:13-14에는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고 합니다. 채찍을 훈계의 도구로 사용하십시오. 아이들에게 “젊잖게 놀아라”고 하지 마십시오. 아이들이 젊지 않게 나이 든 사람같이 놀아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아이들은 아이답게 놀아야 합니다. 그래야 어린이답습니다. 성경적으로 교훈하고 훈계하는 지혜가 우리 부모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결론 

충북 진천군 백곡면 대문리교회의 권학도목사님이 계십니다. 텔레비전에서도 그 분이 여러 번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그 목사님은 자녀가 7남3녀입니다. 욥과 같이 자녀의 축복을 받은 분입니다. 10남매 가운데 큰아이가 19살이고 막내가 1살입니다. 여덟째를 낳고 주민등록등본이 두 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 많아서 한 장으로는 모자랐습니다. 목사님의 가정은 홀어머니 모시고 10 아이를 깊은 산골에서 반듯하게 키웠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서는 10가지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는 공부보다 신앙이 먼저다. 둘째는 공부는 평일에 최선을 다하고 주일에는 공부하지 않는다. 셋째는 유치원이나 학원을 보내지 않고 과외공부도 않는다. 넷째는 누구든 피아노는 칠 줄 알아야 한다. 다섯째는 친구가 집에 와서 노는 것은 언제든지 환영하지만 가급적 다른 친구네 집에 가서 놀지 않는다. 여섯째는 컴퓨터는 정해진 시간에 정해준 영역 안에서만 사용한다. 일곱째는 외모는 사람의 인격이므로 언제나 용모를 단정하게 한다. 여덟째는 책을 많이 읽는다. 아홉째는 잘했을 땐 꼭 상을 주고, 잘못했을 땐 반드시 거기에 상응하는 벌을 준다. 열째는 나중에 어른이 되어 뭘 하면서 살아가든지 오직 주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 주님을 위해 살도록 가르친다. 이 가정에서는 일류대학이나, 출세나, 성공을 교훈으로 가르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 살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리의 어머니 수산나 웨슬리는 19남매를 낳아 신앙적으로 잘 교육하여 19남매가 다 훌륭하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권목사님의 가정은 웨슬리의 가정을 따라가기는 좀 힘들어 보이네요. 그러나 정말 말씀으로 잘 교훈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 가정들이 10남매는 아니라도 셋은 낳읍시다. 우리나라가 OECD 국가 가운데 출산율이 가장 낮습니다. 한 가정에 평균 1.2명밖에 안 됩니다. 잘 낳아 건강하게 키우고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것은 하나님을 유익하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하는 부모의 소명입니다. 이 소명을 잘 감당하는 부모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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