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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아버지와 아들 (삼하 1: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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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 (삼하 1:21-27)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 원수들을 치고 적들을 무찌를 때에, 요나단의 활이 빗나간 일이 없고, 사울의 칼이 허공을 친 적이 없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 독수리보다도 더 재빠르고, 사자보다도 더 힘이 세더니! 이스라엘의 딸들아, 너희에게 울긋불긋 화려한 옷을 입혀 주고, 너희의 옷에 금장식을 달아 주던, 사울을 애도하며 울어라! 아, 용사들이 전쟁에서 쓰러져 죽었구나! 요나단, 어쩌다가 산 위에서 죽어 있는가? 나의 형 요나단, 형 생각에 나의 마음이 아프오. 형이 나를 그렇게도 아껴 주더니, 나를 끔찍이 아껴 주던 형의 사랑은 여인의 사랑보다도 더 진한 것이었고. 어쩌다가 두 용사가 엎드러졌으며, 무기들이 버려져서, 쓸모 없이 되었는가?]

• 용사

요나단의 이름은 우리 기억 속에서 다윗과 더불어 등장할 때가 많습니다. 요나단이라는 이름을 호명하는 순간 우리는 즉시 우정이 무엇인지를 삶으로 보여준 멋진 사나이를 떠올리고, 그의 절친(?)이었던 다윗을 떠올리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설교 제목은 ‘아버지와 아들’입니다. 벗으로서의 요나단 말고, 아들로서의 요나단의 모습을 조명해보고 싶기 때문입니다. 욱일승천의 기세로 역사의 무대 중심에 등장한 다윗에게 가려지기는 했지만, 요나단이야말로 정말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외모와 풍채가 뛰어나고 의젓한 사람을 일러 헌헌장부軒軒丈夫라고 하는 데 요나단은 그런 이름에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사울의 왕권은 발전된 해안 문명을 누리고 있던 블레셋으로 인해 늘 위태로웠습니다. 백성들은 블레셋의 지배를 거의 숙명처럼 여기고 있었습니다. 백성들의 의식 속에 너울처럼 드리운 블레셋 공포증을 벗겨내기 위해서는 큰 승리가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무기도 물자도 부족한 이스라엘이 블레셋을 이긴다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때 등장하는 인물이 요나단입니다. 그는 자기 부관 하나를 데리고 블레셋의 전초 부대를 기습합니다. 요나단이 부관에게 “주님께서 도와주시면 승리를 거둘 수도 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승리는 군대의 수가 많고 적음에 달려 있지 않다”(삼상14:6b)고 말하자, 부관은 즉시 “무엇이든 하시고자 하는 대로 하십시오. 무엇을 하시든지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둘은 바위를 타고 올라가 블레셋의 전초 부대와 전투를 벌인 끝에 블레셋 정예군 스무 명을 죽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공포가 블레셋 진영을 휘감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블레셋 진영이 자중지란에 빠지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없던 용기까지 발휘해서 순식간에 전쟁을 역전시키고 맙니다. 

• 벗 

그는 용감했을 뿐 아니라, 인재를 알아보는 눈도 출중했습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거인 장수 골리앗을 이기고 사울 앞에 부복했을 때 요나단은 다윗의 사람됨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마음이 끌려, 마치 제 목숨을 아끼듯 다윗을 아끼는 마음이 생겼”(삼상18:1)습니다. 사람을 아끼는 마음이야말로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가장 귀한 덕목이 아닐까요? 

춘추전국 시대의 그 참혹한 현실을 본 노자는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治人事天 莫若嗇, 노자 59장). 아낀다는 것은 아무리 하찮아 보여도 함부로 버리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노자는 무릇 아낌을 일러 빨리 돌아감(夫惟嗇 是謂早復)이라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함부로 대하지 않고, 아낄 줄 알아야 근본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말입니다. 많이 사고 함부로 버리며 사는 우리 삶에 평안이 없는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 아닐까요?

요나단은 사람을 아끼는 사람이었습니다. 부관이 사지인 줄 알면서도 요나단을 따라 적지에 뛰어들었던 것도 그런 요나단에 대한 깊은 신뢰와 존경 때문이었을 겁니다. 요나단은 또한 남을 칭찬할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이 다윗을 경계하고 또 의구심에 가득 찬 시선으로 바라볼 때 요나단은 다윗을 극구 변호합니다. 그는 다윗의 좋은 점들을 이야기하고,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켜낸 그를 내치는 것은 하나님께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비평의 전문가와 살고 싶으십니까? 칭찬의 전문가와 살고 싶으십니까? 어떤 경우에나 흠잡을 데를 먼저 찾는 이들은 스스로도 불행하고 남들도 불쾌하게 만듭니다. 반면 사심 없이 누군가를 칭찬하는 사람을 보면 마음이 절로 따뜻해지고 흐뭇해집니다. 똑같은 물을 마셔도 독사는 독을 만들고 소는 우유를 만듭니다. 

요나단은 ‘利’보다는 ‘義’를 중시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동지적 우애를 나누며 어떤 일을 함께 도모하던 이들이 사소한 이익 때문에 갈라지는 일을 많이 목격하고 있습니다. ‘나의 이익’이 모든 판단의 근거가 될 때 ‘진리’는 질식되고 ‘의로움’은 사라지게 마련입니다. 요나단은 다윗과의 우정의 맹세를 굳게 지켰습니다. 오랫동안 권력의 자리에 앉았던 사울은 사람들의 마음이 다윗에게로 기울고 있음을 불안스레 파악하고는 다윗을 죽이려 합니다. 요나단이 아버지의 그런 처사에 항의하자 사울은 아들에게 역정을 냅니다. 

“이새의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한은, 너도 안전하지 못하고, 너의 나라도 안전하지 못할 줄 알아라. 빨리 가서 그 녀석을 당장에 끌어 오너라. 그 녀석은 죽어야 마땅하다.”(삼상20:31)

아버지의 속내를 알게 된 요나단은 슬퍼하며 항의합니다. “그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기에 죽어야 합니까?”(20:32)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사울은 아들을 향해 창을 겨누기도 합니다. 利와 義가 부딪치는 순간이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습니다. 아버지가 다윗을 모욕한 것이 가슴 아파서, 그 날은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다윗의 은신처를 찾아가 다윗에게 피신할 것을 권유합니다. 둘은 서로 끌어안고 울었습니다. 성경은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20:42b)고 건조하게 보도합니다.

• 아들

이승에서의 그들의 인연은 이렇게 끝났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 이야기에서 사울은 언제나 문제 많은 인물로 그려집니다. 물론 그들의 이야기를 기록한 사람들이 다윗 왕조에 속한 사관들이었으니 이해할 만도 합니다. 사울은 권력을 잃지 않기 위해 충성스러운 신하까지도 없애려는 파렴치한 인물로, 혹은 악신에 들린 광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는 매우 현실적인 정치인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민중들의 든든한 울타리와 같았던 그의 최후도 장엄합니다. 블레셋의 침입에 맞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전투에 참여했던 그는 길보아산 전투에서 아들과 함께 장렬하게 산화하고 맙니다. 

이미 노령에 이르렀지만 사울은 안전한 후방에서 전선의 소식을 기다리는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최전방에서 군인들을 독려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부하들을 전투에 내보내고 부하 장수의 아내인 밧세바와 정을 통했던 말년의 다윗의 모습은 너무나 초라해 보입니다. 블레셋 군인이 쏜 화살에 맞은 사울은 자기의 최후가 다가왔음을 직감하고는 무기 담당 병사에게 명령합니다.

“네 칼을 뽑아서 나를 찔러라. 저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이 와서 나를 찌르고 능욕하지 못하도록 하여라.”(삼상31:4) 

병사가 겁이 나서 주저하자 그는 자기 칼을 뽑아들고 그 위에 엎드려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길보아 산 전투는 그렇게 끝났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사울의 목을 베고, 갑옷을 벗긴 다음, 블레셋 땅 사방으로 전령들을 보내어,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들의 신전과 백성에게 승리의 소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사울의 갑옷을 아스다롯의 신전에 보관하게 하고, 그의 주검은 벳산 성벽에 매달았습니다. 처절한 최후입니다. 

사울을 피해 시글락에 머물고 있던 다윗에게도 그 비극적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다윗은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을 슬퍼하며 조가를 지어 바쳤습니다. 물론 다윗의 조가는 사울을 지지하는 이들의 마음을 얻기 위한 의도에서 지어진 것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노래에는 어느 정도 다윗의 진정성이 담겨 있다고 보고 싶습니다. 다윗은 용사들의 무덤이 된 길보아 산을 향해 외칩니다. 

“길보아의 산들아, 너희 위에는 이제부터 이슬이 내리지 아니하고, 비도 내리지 아니할 것이다. 밭에서는 제물에 쓸 곡식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길보아의 산에서, 용사들의 방패가 치욕을 당하였고, 사울의 방패가 녹슨 채로 버려졌기 때문이다.”(21)

이것은 길보아 산에 내리는 저주가 아닙니다. 인간사에 무심한 눈길을 보내는 길보아의 산들조차 이스라엘 백성들의 슬픔에 동참해달라는 초대입니다. ‘녹슨 채로 버려진 방패’의 이미지는 우리에게도 낯설지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비목碑木이고 녹슨 철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다음 대목입니다.

“사울과 요나단은 살아 있을 때에도 그렇게 서로 사랑하며 다정하더니, 죽을 때에도 서로 떨어지지 않았구나!”(23) 

우리는 다윗에 대한 사울의 의구심, 요나단과 다윗의 우정에만 초점을 맞추느라 사울과 요나단의 관계에 대해 살필 여유가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와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용사였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하는 일이 부당하다고 느낄 때는 그 뜻을 돌이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끝내 아버지의 마음을 돌이킬 수 없음을 알았을 때에도 여전히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자리까지도 같이 합니다. 그는 비록 그릇된 사랑이기는 하지만 아버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압니다. 그렇기에 아버지를 떠날 수 없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떠나 그는 외로운 아버지의 울타리가 되어 드리고 싶었던 것입니다. 지금 저의 성서 읽기가 적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요나단의 마음에 감응하고 있습니다. 

• 부모도 외롭다

요나단은 아버지의 깊은 외로움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서른 살에 왕이 되어 42년을 다스리면서 사울이 겪어내야 했던 위기가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홀로 중대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순간들, 그 심연과도 같은 고독을 알아줄 사람이 얼마나 되었겠습니까? 요나단은 그런 아버지의 마음을 읽었던 것이 아닐까요? 부모의 심정을 헤아릴 줄 알아야 철든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소설가 신경숙의 <엄마를 부탁해>라는 책은 ‘엄마를 잃어버린 지 일주일째다’라는 문장으로 시작됩니다. 치매에 걸린 박소녀 할머니는 생일상을 받으려고 아들딸이 살고 있는 서울로 상경했다가 길을 잃어버립니다. 자식들은 어머니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지만 결국 찾지 못하고 맙니다. 가족들은 사라진 어머니를 떠올리며 자기들의 삶 속에서 어머니는 오래 전에 실종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머를 마치 투명인간처럼 대하며 살아온 지난날 어머니는 이미 실종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설 속의 큰 딸은 어머니 집에 들렀던 어느 날의 광경을 회상합니다.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이어 “동생 있는가?”라는 음성이 들려옵니다. 엄마는 쏜살같이 밖으로 나가더니 “오빠! 오빠!” 하며 찾아온 이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쳤습니다. 오랫동안 소식이 끊겼던 오빠의 등장에 어머니는 영락없는 귀염둥이 동생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딸은 이때 처음으로 엄마에게도 어린 시절이 있고, 자기만의 감정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이 대목을 떠올리며 김영봉 목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박소녀. 그녀는 누군가의 아내 혹은 아이들의 엄마이기 이전에 한 인간이었습니다. 한 인간으로서 그녀에게도 남편이 필요했고, 아버지도 필요했고, 엄마도 필요했습니다. 오빠도 필요했고, 친구도 필요했습니다. 그녀 안에는 어리광 부리고 싶은 어린아이도 있었고, 떨어지는 나뭇잎을 보며 눈물짓는 문학소녀도 있었으며, 봄바람에 마음 설레는 처녀도 있었고, 멋지게 차려입고 여행을 떠나고 싶은 중년 부인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직 엄마의 역할에만 충실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그녀 자신도 그것이 잘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살았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그녀의 삶이 얼마나 고단했을까요!”(<<엄마가 희망이다>>, 110쪽) 

세상의 어떤 존재도 하나의 역할 속에 고정되어서는 안 됩니다. 모든 사람 속에는 왕자도 있고, 유목민도 있고, 전사도 있고, 요부도 있습니다. 어떤 역할을 하느라 그런 모습을 억누르고 살고 있을 뿐입니다. 그 마음을 알아주고 곁에 머물러주는 사람이 있다면 세상은 살만한 곳이 됩니다. 그 마음 하나 만나지 못해 인생이 적막강산입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17세기 프랑스 화가인 조르주 드 라 투르의 <목공소의 성 요셉과 어린 예수>를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그 익숙하지만 낯선 정서가 떠오릅니다. 예수님이 어머니와 함께 있는 그림은 많지만 아버지와 함께 있는 그림은 많지 않습니다. 화가는 아버지의 일터인 목공소에서 공구를 다루는 아버지 곁에서 촛불을 밝혀들고 서있는 어린 예수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그림은 매우 감동적이었습니다.

어버이주일을 맞으면 늘 가슴이 아려옵니다. 세상이 어지러워져 부모를 바르게 모시는 자식이 많지 않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와 생각이 달랐지만, 아버지의 곁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생각을 돌려보려고 애원도 하고 항의도 했지만, 아버지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약함도 또한 보았습니다. 헌헌장부이고, 우정의 가치를 소중히 여겼던 요나단은, 또한 말없이 아버지의 울타리가 되어드린 아들이었습니다. 그에게서 우리는 늘 아버지와의 하나 됨을 구했던 예수의 그림자를 봅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이들을 사랑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가 우리에게 베푼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가 스스로를 보살피지 못할 때 돌봐드리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가 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부모에게 분을 품지 않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한다는 것은 부모에게 가족이라는 소속감을 느끼게 해드리는 것입니다. 어버이 공경이야말로 우리 정신을 근본으로 돌이키게 하는 통로임을 잊지 말고 사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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