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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아버지의 나라 (마 6:9-13, 눅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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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나라 (마 6:9-13, 눅 11:1-4)

   
지난 주간 주님이 가르쳐주신 주기도문을 묵상하며 그렇게 기도하셨습니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친근하게 불러보셨습니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그리스도인다운 삶을 살려고 최선을 다하였던 주간이었으리라 믿습니다. 오늘 어버이주일에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며, 부모님을 통해 나를 세상에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립시다.

기도할 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데 마음에 거리낌이 없으십니까?   나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이시면 주기도문은 정말 우리의 기도문입니다.   왠지 어색하고 거리낌이 있는 분이 있다면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심각하게 고려해야 합니다.  똑같은 말이지만 내가 하늘 아버지의 자녀가 아니던가 하나님이 나의 아버지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자녀 사이이기는 하지만 대화에 불편이 있다면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죄는 항상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갈라놓습니다. 아버지 앞에 담대히 나아가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를 떳떳하게 뵐 수 없도록 가로막는 죄의 장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부모자녀 사이라면 일상의 문제뿐 아니라 삶의 깊은 고민을 내놓고 대화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는 먼저 하늘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가 바르게 되어야 합니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아버지가 아닌데 아버지라 부르는 것도 이상합니다. 아버지에게 드릴 말씀이 있고 옆집 아저씨에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이웃 아저씨를 아버지라 부르는 사람이 간혹 있기는 하지만 정상은 아니지요? 혹시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하늘 아버지가 아니라 다른 어떤 신을 아버지로 착각하고 헛다리를 짚고 있는 사람은 없기를 바랍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실 것을 먼저 기도하라고 하신 주님은 또한‘(아버지의) 나라가 임하옵시며’라고 기도하라 하셨습니다.우리 성경에 ‘나라이 임하옵시며’ 할 때 ‘나라이’는 여러분이 잘 아시는 것처럼 ‘나라’에 주격조사 ‘이’를 붙인 우리말의 옛 표기 방식입니다.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유대인들은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할 것을 기다리던 백성입니다. 영광스런 다윗의 왕국이 회복될 날을 기다리며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이 땅에 임할 것을 기다렸습니다.   

마태가 기록한 마태복음은 자기 백성 유대인들을 일차적인 대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왕되심을 선포한 복음서입니다.  유대인에게 가장 큰 관심사는 다윗 왕국의 회복과 메시야의 오심이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가 약속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탄생하셨음을 증거하려고 시작부터 다윗의 족보를 소개합니다.   

이방인들에게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가 별로 흥미 없는 내용이지만 유대인들에게는 왕권의 정통성을 증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족보는 왕의 족보이며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그리스도의 족보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갈릴리 나사렛 출신 목수로만 이해하고 배척하였습니다. 예언대로 오신 메시야를 알아보지 못하였고 영접하지 아니했습니다.이 땅에서 이루어질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를 지리적이고 정치적인 왕국으로, 사람의 방식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입니다.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고,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시려고 죽임당할 어린 양으로 오셨지만 그들이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이 땅에서 설움 당하고 억압받는 정치적인 고통과 경제적인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줄 메시야를 고대할 뿐이었습니다.   

세계 민족 중에 이스라엘을 으뜸이 되게 하실 강력한 왕이 다스리는 나라를 소망했는데 기대와는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아무도 하나님의 아들이 탄생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동방에서 별을 보고 찾아온 박사들은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에게 경배하러 예루살렘으로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베들레헴 마굿간 말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께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선물로 드리고 경배하였습니다.   

마태는 하나님의 아들을 배척한 유대인들에게 왕의 족보와 탄생 기록을 보이며 나사렛 예수는 우리의 왕이시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자기 땅에 오셔서 공식적인 왕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 자신의 통치권에 위기감을 느낀 사단은 광야에서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신 예수님을 찾아와 시험하였습니다. 그 시험은 한 마디로 구세주의 사명을 포기하라는 유혹이었습니다. 내가 제시하는 몇 가지 조건에 동의하면 이 세상에서 명예와 인기를 마음껏 누리도록 해주겠다는 그럴듯한 흥정이었습니다.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내 말을 들어 세상의 영화를 누리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미혹하는 사단다운 간교한 흥정입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만물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 앞에서 사단은 감히 이 세상을 자기의 것이라고 허풍을 치며 내게 엎드려 절하면 천하 만국과 영광을 다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처음부터 살인자요 거짓말장이 사단은 사람들을 미혹하는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까지 미혹하려던 악한 영물입니다. 이 세상이 자기의 것이라고 우길만큼 사단은 정말 이 세상의 권세를 움켜 쥔 거짓의 아비요 어두움의 왕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간교한 사단을 말씀으로 책망하고 물러가라 하시니 더 이상 감당할 수 없음을 알아차린 사단은 꼬리를 내리고 떠나갔습니다.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사단의 왕국은 비로소 심각한 위협을 받기 시작하였고 주의 나라는 회복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라가 임하옵시며’할 때 그 나라는 하늘 아버지의 나라, 아들이 아버지의 왕권을 가지고 오심으로 이 땅에서 시작한 나라입니다. 그 나라는 우리 가운데 임하되 중단되지 않고 계속하여 임하는 나라입니다. 인간의 공력으로 세운 나라가 아니라 하늘 아버지로부터 주어진 나라, 위로부터 주어지는 나라입니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시니 귀신들이 두려워 떨었고 주님의 명령에 쫒겨났습니다. 예수께서 갈릴리를 비롯하여 유대와 사마리아 지방을 다니실 때 각종 질병을 가진 사람들이 주 앞에 나와 고침을 받고, 귀신들린 사람들이 악한 영들의 권세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습니다.왕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가 이렇게 사람들 속으로 들어와 확장되어갔습니다.   진리의 빛이 오시니 어두움은 물러가고 세상은 광명한 낮이 되었습니다.  

이사야가 예언한 메시야의 오심,‘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사9:2)가 드디어 성취되었습니다.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사9:6-7) 예언된 그 왕이 다스리는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마태는 4장14절에서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함으로 예수께서 바로 그 왕으로 오셨다고 증거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사단이 권세를 잡고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협하며 억압하던 어두움의 나라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의 생명이신 빛이 오셨습니다.그 빛은 참빛이요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며 세상은 그 빛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지만 세상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습니다. 그 빛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자기 백성들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으니 이것은 육신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사람들입니다(요1:9-13).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의 피로 새 생명 얻은 사람, 곧 주의 이름으로 거듭난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종하는 새로운 백성이며 그 나라의 시민입니다. 그런데 아들이 아버지의 왕권을 받들어 자기 땅에 오셨으나 사람들이 그를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오히려 십자가에 매달아 살해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허약한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닙니다. 정의를 부르짖다가 힘이 딸려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항거한 민족주의자나 열사의 죽음이 아닙니다. 사단의 능력을 파괴하지 못하고 실패한 헛된 죽음은 더욱 아닙니다. 사단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포자기하도록 최후 순간까지 미혹하던 훼방자였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단의 꾀임을 물리치고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죽으신 거룩한 희생제물이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고 아버지의 뜻을 이루심으로 사단은 그 머리를 강타당하고 말았습니다.   

창세기 3장에서 예고하신 것처럼, 뱀의 후손이 여인의 후손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했지만 여인의 후손은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였습니다.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사단은 그 세력을 잃고 생명의 주인이신 그리스도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첫번째 아담은 사단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여 선악과를 먹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을 잃었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는 사단을 이기고 잃어버린 생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첫째 아담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이 모든 사람의 왕 노릇하였지만 둘째 아담으로 오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영생에 이르게 되었습니다(롬5:12-21 참고).

이것이 죄인들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선물 구원입니다. 이제 누구든지 십자가에 죽으신 아들의 이름을 믿고 자기 죄를 회개하고 그 말씀, 곧 하나님 나라의 법에 순종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그 나라 백성이 됩니다. 그 나라는 더 이상 지리적인 이스라엘이나 혈통적인 유대인으로 이루어진 나라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맺어진 자녀들의 나라입니다. 곧 하나님의 가족이며 새로운 사회이고 주의 몸된 교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지상의 교회가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아닙니다.  지상의 교회는 주의 은혜로 용서받은 죄인들이 세상의 유혹, 죄악의 세력과 싸워야 하는 전투적인 교회입니다. 교회는 지금 최후 승리를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총사령관이 되심으로 성도들을 이끌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더 이상 사단의 다스림에 굴복하지 않습니다.   어두움의 권세에 휘둘려 어두움의 자식, 죄의 노예로 살지 않고 왕이신 하나님을 섬기며 하나님 나라의 의를 구하며 삽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안에 계시고 그의 말씀이 나를 붙들고 있는 이상 세상 나라와 죄의 노예로 살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성도와 교회는 이 사명과 책임을 성실하게 담당해야 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신 말씀처럼 예수님의 오심으로 시작된 현세 천국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   그리고 내세 천국은 주님 다시 오실 그 날에 우리 가운데 주어질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내가 죽어서 가는 나라, 혹은 내가 살아있는 동안 다시 오신다면 그때 변화된 몸으로 주님을 영접하여 주님과 함께 그리고 먼저 세상을 떠난 성도들과 함께 영원히 사는 그 나라가 내세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현세 천국과 내세 천국 둘 사이에 살고 있는 하나님 나라 백성입니다. 

어떤 이들은 내세 천국을 부정하고 오직 현재 세상만 인정합니다.   혹시 천국이 있다면 이 땅에서 지극한 행복을 누리는 상태가 곧 천국이라고 말합니다.   같은 논리로 지옥이라는 것도 지금 견딜 수 없는 고통 중에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이 나기 때문에 지금 힘들지만 그때까지만 견디고 버티면 지옥의 삶은 끝이 난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지옥같은 순간을 면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합니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한 순간은 위로가 될 수는 있지만 내세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없기에 사실은 가장 불쌍하고 무책임한 인생을 사는 셈입니다. 

한편, 하나님이 다스리시는 현세 천국에 성실하지 못하고 오직 내세 천국만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지금 나의 왕이신 주님의 명을 받들어 순종하지 못하는 불량 시민입니다.   죄를 짓는 육신은 더럽고 썩어질 것이니 무가치하고 오직 영혼만 선하다고 주장하는 극단적 이원론주의는 한 쪽만 보는 생각입니다.   죄로 가득한 이 땅은 망할 것이니 이 땅의 일들은 무가치하게 여기고 오직 새 하늘과 새 땅만 기다리는 것이 좋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반쪽짜리 믿음이고 현세를 거부하는 극단 종말론자 혹은 현실도피주의로 전락할 위험이 있습니다.   이런 극단주의자들은 초대교회 사도들의 시대에 벌써 나타났고 2천년 기독교 역사 속에 끝없이 나타났다 사라졌으며 지금도 있습니다.   

대표적인 예로 1992년 10월28일 자정에 세상 종말이 온다고 예언하여 세상을 시끄럽게 만들었던 다미선교회 이장림 같은 시한부 종말론자들입니다. 인간의 역사를 일곱 세대로 구분하고 한 세대를 천년으로 계산하는 세대주의 신학자들의 해석 방식을 따라 종말의 시기를 계산하였습니다.아담으로 시작하는 구약의 4천년 기간과 신약의 2천년 기간, 도합 6천년이 거의 끝이 났으니 이제 여섯 세대가 지나고 곧 천년왕국이 시작하는 예수 재림이 임박했다고 선포하였습니다. 그 정도가 아니라 구약과 신약에 나오는 숫자들을 자기 편리한대로 계산하여 휴거의 날짜까지 발표하였습니다. 1999년을 6천년의 마지막 해로 보고, 말세 전에 7년 대환란이 시작되는데 1999에서 7을 뺀 해가 바로 1992년이며 성도들은 대환란이 시작되기 직전에 휴거할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성경은 장르별로 나누면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역사서가 있고, 시문학서도 있습니다.  묵시를 기록한 내용 또한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해석할 때 경우에 따라 문자 그대로 혹은 비유처럼 상징적으로 혹은 영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시한부 종말론자들은 특히 요한 계시록에 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무리하게 해석하여 물의를 일으킨 경우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에서, 다가올 종말에 대한 내용을 쓴 편지의 결론에서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하고 경고하였습니다.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관심과 거짓 선생들의 미혹은 2천년 전 베드로 시대에 벌써 있던 일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천년왕국에 대한 해석도 관점에 따라 다양한 주장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천년왕국이 예수님 재림 전에 있다고 하며, 재림 후에 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런가 하면 천년이라는 숫자는 문자적으로 천년이 아니라 영적으로 해석하여 긴 기간을 의미한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재림을 믿느냐 아니냐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믿고 기다리느냐 무시하느냐에 있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재림도, 하나님 나라의 도래도 믿고 기다리는데 성경해석에서 발생하는 생각의 차이 때문에 서로 힐난하며 불필요한 논쟁을 벌이고 힘을 빼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가 아닐 것입니다.

하늘 아버지를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며 기도하는 형제들끼리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것 때문에 서로 비난하고 정죄하며 편을 가르며 싸우는 것보다 더 나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혹시 천국에 가서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만나면 등 돌리고 상종도 하지 않으려고 할까 우려됩니다.  그렇다면 그런 곳은 천국이 아닐 것이고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 시민의 자격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계하고 조심해야 할 것은 성경을 무리하게 억지로 해석하다가 스스로 모순에 빠져 자기도 모르게 거짓 그리스도의 자리에 서는 것과 이상한 사람들의 미혹에 빠져 함께 멸망의 길로 가는 일입니다.

예수께서  그날과 그시는 아무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신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 종말론자들은 이상하게 그 부분에 가면 과잉반응을 하고 엉터리 행동을 합니다.  그런 사람이 언제나 성경말씀을 누구보다도 잘 쪼갠다고 자부하고 나섭니다.  신학자들이나 기성교회 목사들이 해석하기 어려운 문제도 시원하게 풀어준다는 사람들이 기어코 엉뚱한 일을 저지르곤 합니다.   

1992년 10월28일이 되었을 때 다미선교회 이장림이나 그와 비슷한 극단적 종말론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휴거를 기다린다고 난리를 쳤습니다. 이장림은 휴거를 부정하면 구원을 받지 못하여 지옥에 간다고 겁을 주며 마치 휴거 신앙이 구원의 조건인 것처럼 주장했고, 다미선교회 같은 단체에만 구원이 있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특히 장로교인들이 대부분 휴거되지 않을 것이라는 말도 하였습니다.  그런 분위기에 어떤 사람들은 그 말을 믿지도 무시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자세로 안절부절 못하며 패닉 현상에 빠져들기도 했습니다. TV 방송에서는 그들의 광신적인 행동들을 흥미롭다는 듯 찍어 구경거리로 만들어버렸습니다.   

이장림의 추종자들이 흰옷 입고 한 데 모여 북을 치고 목이 쉬도록 소리질러 기도하며 초긴장 상태로 밤12시 휴거의 순간을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그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굳게 믿었던 휴거가 일어나지 않아 결국 대망신을 당하였고 어리석은 사람들의 해프닝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다미선교회는 ‘다가올 미래를 대비하라’의 줄임말이라고 하는데 다가올 미래를 전혀 엉뚱하게 준비한 사람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항상 변명하는 말이 있습니다.  숫자 계산에 오차가 있었다고 하거나 주님이 오시기 직전에 잠시 연기하셨다고 하며 또 다른 날짜를 제시하는 엉터리 수법입니다.   

그렇게 세상 종말을 강조하고 이 땅의 것들은 썩어질 것이니 돈도 필요 없고 공부도 직장도 다 쓸데 없는 것이니 다미선교회로 모여라.  세상의 재물과 돈은 이제 다 쓸모 없으니 집 팔고 땅 팔고 퇴직금 받은 돈, 학교 등록금 모두 다미선교회에 바쳐라. 불에 타 없어질 재물은 천국에 쌓아야 한다고 했던 이장림이가 그 돈을 자기 명의로 된 계좌에 저금해 놓았습니다. 도대체 그 사람은 그 돈을 어디에 쓰려고 했을까요?  결국 이장림은 사기죄로 감옥행이 되고 말았으며 그들을 추종하던 많은 사람들은 패가망신의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움 속에 똑같은 방식으로 그날을 계산하며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직도 있습니다.    

어리석은 가르침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극단적 행동이 우리에게 주는 소중한 교훈도 있습니다. 그때 어떤 이들은 기대했던 휴거라는 사건이 발생하지 않자 ‘그것 봐라 예수의 재림은 없다’ 하며 성경이 말씀하는 재림의 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나섰습니다. 부활신앙과 함께 기독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인 재림신앙을 마음껏 조롱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재림신앙에 대한 회의감을 불어넣었고 종말과 재림과 내세신앙에 대하여 방심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만들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교회가 전도하는 일에 어려움만 생겼습니다.   예수 믿으라 전도하면 일단 색안경을 끼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하던 때가 있었습니다. 잘못된 종말론자들 때문에 발생한 역효과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 사단의 전략입니다.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현혹하고 거짓으로 부추기는 전략입니다.  거짓 그리스도로 변장하여 혼란을 주는 고단수 계략입니다. 사단은 복음전파를 적극 방해하고 박해하는 일만 하지 않습니다.  믿기는 믿되 성경말씀대로 믿지 말고 좀 특별나게 믿어라. 일반 교인들과는 뭔가 다른 모양으로 믿어야 한다 하며 교묘한 방식으로 접근합니다. 일반 교회는 다 가짜 교인들만 모였고(물론 가짜도 있긴 합니다) 성경도 모르는 목사들이 자리잡고 있다. 우리에게 와야 죄사함의 비밀을 깨닫고 구원의 표를 확실하게 받을 수 있다는 식의 감언이설로 미혹합니다.  

성경 지식이 부족하고 믿음이 약하거나, 삶의 문제로 갈등하는 심약한 사람들을 미혹하여 말세에 대한 공포감을 불어넣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특별한 비밀을 가르쳐 줄테니 우리에게로 모이라 선전하는 사람은 초대교회 때부터 지금까지 끊임없이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일반 교회에서는 가르쳐주지 않는 비밀이 우리에게 있다던가, 아무도 시원하게 풀어주지 않는 천국의 비밀을 우리는 알고 있으니 이리로 모여라 하는 유사 종말론자들이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손짓합니다. 그날의 비밀을 오직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시는데 성급한 사람들 혹은 거짓 영들은 자기들은 계시를 받아 그 비밀을 알고 있다 미혹하여 함께 망하는 자리에 빠집니다.   

한편으로 이장림 같은 사람들의 엉뚱한 행동이 그동안 주님 재림과 종말의식에 둔감하여 안일한 자세로 잠자던 현대 교회를 향해 도전장을 던진 긍정적인 면도 있습니다. 세상의 부요와 물질만능의 가치관에 정신을 빼앗기고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빠져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지 못하고 살던 기독교인들에게는 올바른 종말 의식을 가지게 하는 경고의 나팔이 되었습니다. 말세와 재림 그리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그런 이상한 종말론자들만 전매특허를 내어 강조하는 주제가 아닙니다. 말씀을 바로 읽고 깨닫는 성도들이라면 예수께서 아버지께로 가실 때 약속하신 그 말씀을 아멘으로 받고 주님 오실 그날까지 믿음으로 기다리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이 망할 세상 포기하고 속세를 떠나 기도원이나 수도원으로 들어가라는 말이 아닙니다. 가정도 팽기치고 하늘만 바라보고 기도하라는 말씀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금도 이 망할 세상 속에서 진리의 빛을 비추고 있습니다. 망할 세상이지만 이 세상을 사랑하시기에 독생자를 보내시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실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내세천국도 보장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라 하셨습니다. 그 나라는 주님이 오심으로  시작되었고 지금도 오고 있으며 주님 다시 오실 때 완성되는 나라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 나라가 어느 때 임합니까?’물을 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다’(눅17:20, 21) 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있는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지 않으면서 죽어서 가는 그 나라만 기대한다면 커다란 모순입니다.  주어진 현실에 충실하지 못하면서 다가올 천국만 기다린다면 분명히 잘못된 신앙입니다.  현세 천국의 시민으로 성실하게 살지 못하면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못 들어갈까 겁을 먹고 기쁨이 없이 예수 믿는 사람처럼 가련한 사람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주신 이 땅에서 주님이 왕이심을 고백하고 그 말씀에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내 맘에 드는 부분은 순종하고 내가 판단하기에 불편하고 이해가 안되는 것은 거절하는 것은 선택적 순종이지 절대적 순종이 아닙니다. 그 나라 백성으로 살고 있다면 왕의 명령과 그 나라의 법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 땅에서 제자의 삶을 살라고 명하신 그 뜻이 비록 힘들고 어려워도 즐거이 따르는 것이 그 나라 백성으로 사는 자세입니다.   

반대로, 이 땅에 나를 위한 천국을 만들려는 목적으로 하는 기도 역시 아버지의 나라를 먼저 구하지 않는 기도입니다. 이 땅에서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집을 짓고 시집가고 장가드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여기고 거기에 몰두하다 주님 오실 날을 예비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집을 짓고 시집가고 장가들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우선순위를 바로 하라는 말씀입니다. 먹고 마시는 잔치와 육체적 쾌락에 온 마음을 두고 하나님 나라의 일에는 무관심으로 산다면 건강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입술로는 주여 주여 외칠지라도 그 마음은 이 땅의 즐거움에 있습니다.   여기가 천국이거니 하고 세상 친구들과 즐기며 인간관계 맺는 것에 온갖 정력을 다 쏟고 사는 것 역시 말씀을 자기 편리한대로 해석하여 무지와 어리석음에 빠져 사는 잘못된 신앙입니다.   

주기도문을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하기를 구하라고 하신 주님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바랍니다. 오늘 나에게 주어진 천국 백성의 특권과 책무를 힘써 다하시기 바랍니다. 내가 주인 노릇, 왕 노릇하면서 하나님을 종 부리듯 혹은 떼를 쓰듯 기도하지 않기 바랍니다. 부모님께 효도하는 척 말로는 잘하면서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릴 줄도 모르고 공경할 줄도 모르는 못된 자녀가 아니길 바랍니다.  보이는 부모님을 잘 섬기고 순종하지 못하면 보이지 않는 하늘 아버지 공경은 더욱 어렵습니다. 이 땅에 살지만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이중국적을 가진 사람답게 그 나라의 질서를 따르고 왕이 주시는 은혜를 받아 신앙의 균형이 잘 잡힌 성도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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