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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십자가를 진 가정 (롬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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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진 가정 (롬 16:13)
 
 
1. 종말론적인 가정

사람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좀 더 행복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돈을 벌고, 힘들여 지식을 쌓으며, 또 열심히 건강을 챙깁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고 해서 행복을 얻기는 쉽지 않습니다. 많이 가지고서도 불행한 사람이 얼마나 많으며, 많이 배우고 건강하면서도 행복하지 못한 사람은 또 얼마나 많습니까? 그렇지만 가정과 가족들로부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비록 세상적인 행복의 조건들이 턱없이 모자라도 행복을 느낍니다. 

이렇게 한 사람이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최초의 장소가 가정이기 때문에, 가정은 그 만큼 중요한 것이죠. 뿐만 아니라 가정이 있어야 생명이 태어나고, 가정이 있어야 교회가 있고, 가정이 있어야 사회와 국가도 있습니다. 그리고 가정의 어떠함이 곧 세상의 어떠함이 되고, 오늘의 가정이 내일의 사회를 결정하는 근거가 되기 때문에 가정의 중요성이라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지난 1992년 1월 28일, 당시 대통령인 아버지 ‘부시’는 연두교서에서 다음과 같이 명시했습니다. “우리는 가정을 강화해야 합니다. 가정은 바로 우리의 미래를 책임질 가장 중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밤 <미국 도시 가정 위원회>의 설치를 공포합니다. 지금은 우리의 가정을 결속시켜주고 강하게 해 주고 건전하게 해 줄 수 있는 일을 찾아야 할 때입니다.” 미국이 국가적으로 가정을 강화시키기로 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가정은 중요합니다.

그런데 가정에 대한 바울의 생각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가정에 대한 바울의 사상을 “종말론적인 가정관”이라고 부르는데요. 종말론적이란,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이 다 되어가는 상황에서 그에 맞게 살아가는 태도를 말합니다. 즉, 바울이 “종말론적인 가정관”을 가졌다는 것은 당시 상황이 성도가 신앙을 지키며 살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시기였다는 말이며, 복음 전하는 것이 너무나 다급하고 중요한 사명인데, 복음을 듣지 못하여 죽어가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다른 것을 돌아볼 여지가 없는 상황으로 여겼다는 말이고, 그리고 다시 오실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감이 너무 강해서 그 주님에게만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는 말입니다. 

이런 종말론적인 생각 때문에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고,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고전 7:25-35). 그렇다고 바울이 가정과 그 중요성에 대해서 소홀히 한 것은 아닙니다. 바울이 가정에 대해서 말한 것을 살펴보면, ‘血緣 中心의 家庭’보다는 ‘주님의 뜻에 함께 순종하고 믿음을 위하여 선한 싸움을 함께 싸우는 믿음의 共同體’로서의 가정에 더 큰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가정에서 행복을 누리면서 사는 것이 때로는 다시 오실 주님을 망각하게 만들고, 신앙의 열정을 잃어버리게 만들며, 현세적이고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행복만 추구하려는 경향이 성도 속에 자리잡게 만들 수 있기에 그것을 경고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강조한 것이 무엇입니까? 

가정이 중요한 것은 분명하나, 그렇다고 그 가정의 행복 때문에 주님을 위한 삶, 주님을 기다리는 삶, 복음을 위한 열정이 없어져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성도들은 이러한 바울의 가정관을 주목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이 전부인 것처럼 여기는 성도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가정의 행복을 위하여 하나님, 신앙생활, 사명, 선교, 봉사, 열정 등을 제2, 제3으로 미루어버리는 경향이 짙어져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오늘의 현실에서 주님을 위한 삶에서 성공했고, 또 가정적으로도 성공한 한 가정을 오늘 본문이 소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 어떻게 사는 것이 주님 앞에서도 성공적인 삶이고 가정에서도 성공할 수 있는지를 깨닫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2. 남편의 십자가(막15:21)

예루살렘에 '비아돌로로사'라는 거리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판받으신 빌라도의 법정에서 출발하여 골고다 언덕까지 십자가를 지고 가셨던 그 길을 일컫는 이름입니다. 당시 로마법은 ‘십자가형은 반드시 도시 밖에서 실시하도록’ 명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형을 받은 사람은 자신이 달릴 십자가를 짊어지고 도시 밖 형장까지 가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형 언도를 받았던 총독 빌라도의 관청에서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까지는 약 800m 정도입니다. 아주 짧은 거리죠? 그러나 예수님에게 이 거리는 8km만큼이나 멀게 여겨졌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선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의 크기와 무게 때문이고, 예수님의 몸 상태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의 크기는 작게는 2m 70cm에서 크게는 3m 60cm까지 되는 큰 통나무로서, 그 무게는 40kg에서 80kg까지 나갔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이 짊어져도 결코 가볍지 않은 크기와 무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 십자가에 달리기 전인데도 예수님의 몸은 이미 엉망이 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형은 그 자체로서도 잔인한 사형 법이지만, 죄수를 십자가에 달기 전에 거반 죽여 놓는다는 면에서 정말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경우, 지난 24시간을 거의 한 숨도 주무시지 못했으며, 쉴새없이 계속 되는 심문에 시달렸으며, 채찍에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 크고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가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지요. 비록 사형장까지의 거리가 불과 800m, 평상시 걸음이면 5분도 걸리지 않을 길이었지만, 예수님은 열네 번이나 멈추거나 혹은 쓰러지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네 번째 쓰러지자, 호송을 맡고 있던 로마 군인은 ‘이러다가 길에서 시간 다 보내겠다’ 싶어 그 자리에서 그 일을 구경하고 있던 한 사람을 불러내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에게는 사람들을 강제로 노역 시킬 수 있는 권한이 있었습니다. 소위 ‘징발령’이라고도 하는 이 법은 중요한 일이나 필요할 때 사람들을 임의로 징발해 일을 시킬 수 있는 권한이었습니다. 그때 로마 군인의 눈에 띄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된 사람이 바로 구레네 시몬이었습니다. 

여러분, 이 구레네 시몬은 어떤 사람일까요? 그가 북 아프리카 해안의 작은 도시인 구레네(Cyrene) 출신의 유대인이라는 것 외에는 그의 출생이나 나이 등은 알려진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구레네는 당시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700km 정도의 거리에 있던, 오늘날의 리비아 지역의 도시로서, 알렉산드리아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이 많이 살고 있었고, 그들은 예루살렘에 자신들의 회당을 세울 정도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행6:9). 

유월절을 맞아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들었고, 시몬 역시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거기 와 있었습니다. 바로 그 유월절에 온 유대와 팔레스타인 그리고 로마 제국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형이 집행 중이었고, 시몬은 재판을 받고 형장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행렬을 구경하다가 운명적으로(?) 이 사건에 휘말리게 되었습니다. 

그날, 예루살렘 거리에는 이른 아침부터 엄청난 무리의 사람들이 그 무언가를 중심으로 떼를 지어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궁금하여 구레네 시몬도 가까이 다가가 보았는데, 무리의 중심에는 한 젊은이가 어깨에 무거운 나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본 시몬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금방 알 수 있었습니다. ‘사형 집행 중!’ 십자가형벌은 아주 흉악한 중죄인에게 행해지는 로마 제국의 형벌로서, 제국 내에서는 쉽게 행해지지 않는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유대인의 큰 명절을 앞둔 그날 그 끔찍한 십자가형이 집행 중이었습니다. 잔인하기는 했지만, 시몬 역시 다른 사람들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그 장면을 구경했습니다. 시몬이 보니까, 십자가를 지고 가던 예수는 힘에 붙여서 그 십자가를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가 예수에게는 너무나 무겁게 보였습니다. 로마 군인들은 채찍을 휘두르며 ‘빨리 가라’고 재촉했지만, 십자가를 지지 않아도 제대로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지쳐 보이는 예수는 더 이상 십자가를 감당하지 못하고 넘어졌습니다. 그가 네 번째 넘어지자, 군인들이 눈을 돌려 모여 든 군중들을 살폈는데, 바로 그 순간 그 군인의 눈과 시몬의 눈이 딱 마주쳤습니다. 순간 시몬은 움찔했지요. ‘저 무지막지해 보이는 군인이 왜 나를 쳐다보는 것일까?’ 그 생각이 채 끝나기도 전에 한 군인이 시몬에게로 다가왔습니다. 

그러더니 다짜고짜 군중 가운데서 그를 끌어내어 무리들 가운데 세우더니 명령했습니다. “네가 대신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라!” 구레네 시몬은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고 원치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군인의 명령으로 인하여 그는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몬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이 없이, 더구나 자신의 의지와도 상관없이 십자가를 지게 된 것이죠. 우리말로 하면, 정말 “재수없게(?)” 걸린 것입니다. 이 상황에 대해서 마가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15:21).” 

성도 여러분, 구레네 시몬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졌습니다만, 그로 인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돕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하셨던 말씀을 다 들었습니다. 십자가 옆에 있던 죄수가 예수님께 자기를 ‘기억해 달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 ‘오늘밤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라고 대답하신 것도 들었습니다. 태양이 어두워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향해 ‘정말 하나님의 아들이다’라고 고백하는 것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의 십자가 가장 가까이에서 그 모든 것을 목격한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진 그 일로 인하여, 한 시간도 되지 않는 그 짧은 시간을 통해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십자가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이고 영광이겠습니까? D.L. 무디와 함께 미국의 대부흥운동을 이끌었던 미국 최고의 讚頌詩人인 F.J. 크로스비 여사는 찬송가 439장에서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 …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라고 찬송했습니다. 예수님을 잘 알던 사람들, 그의 제자들 중 어느 누구도 주님의 고난 길에 함께 하지 않았지만, 구레네 시몬은 주님의 고난길과 십자가에 동참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짐으로서 시몬이 받은 복은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 후 시몬은 아주 대단한 신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봅니까? 로마서 16장이 말하는 대로 그의 부인과 아들들이 초대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인물들이 된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시몬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짊어진 일이 그의 삶의 전환점이 되었고, 그가 만난 예수님을 가족들에게 전하여 그들을 주님의 교회의 신실한 일군으로 만들었다는 면에서, 그가 진정한 신자의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시몬은 십자가를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고, 부인과 자녀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아프리카 최초의 크리스천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니 여러분, 비록 얼떨결에 지는 십자가라 할지라도 십자가를 지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복을 받는 지름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 지기를 피하지 마시고 여러분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달게 지고 가시기 바랍니다.

3. 아내의 십자가(롬16:13)

구레네 시몬의 가정에는 家長의 십자가, 男便의 십자가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초대 교회에서 더 유명하고 널리 알려진 사람은 시몬보다는 그의 아내였습니다. “靑出於藍”이라고, 비록 남편을 통하여 예수님을 믿게 되었지만, 남편보다 더 주님과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충성한 여인이 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단순히 아내나 어머니로 살아가는 여인들이 많습니다. 남편이 유명하다면 ‘아무개의 아내’로 불립니다. 아들딸이 유명하다면 ‘아무개의 어머니’로 불립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은 자신의 이름 드러내기를 원하지도 않습니다. 이 땅에 사는 아내나 어머니는 대부분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으로 보람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목회자 역시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수고하는 이들로 인해 목회에 활력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더 많습니다. 

예수님의 3년간의 사역이 이름을 밝히지 않은 여러 명의 여인들이 자기들의 소유로 섬겼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처럼(눅8:1~3), 목회자가 목회를 성공적으로 수행한다면 그 이면에도 많은 여성들이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여성들 가운데 목회자의 친어머니처럼 헌신적으로 목회를 돕는 이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한 여인을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녀는 바로 “루포의 어머니”입니다. 

로마서 16장에는 바울이 평소 고맙게 여기던 사람들의 이름, 교회와 복음을 위하여 함께 수고한 동역자들의 이름, 그리고 주님의 복음이 로마를 넘어 세계로 뻗어나갈 것을 위한 복음의 세계화의 일꾼들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이름들 중에 “루포의 어머니”가 있다는 것은 아주 의미심장하지요. 이 루포의 어머니는 누구입니까? 마가복음 15장 21절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라고 분명히 밝혔는데,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이 “루포의 어머니”는 곧 구레네 시몬의 부인이라는 것에 대해 당시나 오늘날이나 부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이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 사도에게와 초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하고 특별한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이 다메섹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그가 가이사랴에서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잠깐 동안 그의 조카가 등장했습니다만, 그 외에는 그의 가족들 이야기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님을 믿었기 때문에 정통적인 유대인인 그의 가족들에게 버림을 받았다고 봅니다. 바울은 정말 외롭게 사역을 한 셈이지요. 그런 바울에게 친 가족처럼 친어머니처럼 챙겨주고 도와준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루포의 어머니라고 오늘 본문에서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루포의 어머니”는 바울에게 영적인 어머니요, 바울을 위하여 생명 걸고 기도해 주는 기도의 어머니요, 복음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어머니였으며, 바울이 낙심할 때 용기와 소망을 주며 격려해 주었던 어머니, 그리고 물질적으로 넉넉하지 못했던 바울에게 물질적인 필요를 채워주는 어머니였습니다.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 모 집사님을 “어머니”라고 불렀습니다. 교회마다 연세가 많은 권사님과 집사님이 계시기 때문에 담임 목사가 아무나에게 “어머니”라고 부를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목사님이 그 집사님을 “어머니”라고 부른 이유는 그 집사님이 자기 집보다 교회를 더 소중히 여겼기 때문이고, 그 집사님이 목사님과 함께 거의 매일 철야를 하면서 함께 기도했기 때문이고, 교회 개척 초기라 정말 어려울 때 그 분은 자신은 굶어가면서도 헌금하고 목사님을 도왔기 때문이며, 자신의 가정에도 어려운 일이 많았지만 언제나 교회와 목사님을 우선으로 하여 헌신적으로 도왔기에 그 분을 어머니라고 부른 것입니다. 

여러분,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특정한 분을 지칭해서 “내 어머니”라고 부르는 것이 쉬운 일이겠습니까? 도리어 목회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루포의 어머니를 “내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종, 세계적인 선교사, 뛰어난 신학자, 그리고 탁월한 목회자인 바울로부터 “나의 어머니”라고 부릴 정도로 루포의 어머니, 시몬의 아내는 특별한 삶을 주님과 교회 앞에서 살았다는 것을 입증해 주는 말입니다. 이렇게 시몬의 아내는 남편의 뒤를 이어 자신도 십자가를 졌습니다. 교회를 섬기는 십자가, 사역자를 섬기는 십자가, 성도들의 어머니가 되는 십자가 ….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히 여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신앙과 삶이 바로 이 루포의 어머니처럼 되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목회자와 성도들의 영적인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들을 위하여 목숨걸고 기도하는 기도의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복음을 위하여 생명마저도 아끼지 않는 사랑과 희생의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목회자와 성도들이 낙심할 때 용기와 소망을 주며 격려해 주는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와 목회자가 어려울 때 물질적으로 채워줄 줄 아는 어머니가 되시기 바랍니다!

4. 자녀의 십자가(롬16:13)

세 번째로 오늘 본문과 기독교 역사는 구레네 시몬과 그 부인의 뒤를 이어 그 자녀들에 대한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 어린이들이나 청소년들이 자기 부모를 얼마나 존경하며, 또 자기 부모님처럼 살겠다고 하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는지 아십니까? UNICEF(유엔 산하 국제아동교육 자금기구)가 아시아 17개국 9살에서 17살까지의 청소년을 대상으로 <부모를 존경하는 비율>을 조사했습니다. 우리나라보다 여러 가지 수준이 한참 낮다는 방글라데시, 파푸아뉴기니, 베트남, 캄보디아의 아이들의 70% 이상이 부모를 존경한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는 14%에 불과했습니다. 또 하버드대학교에서 <당신의 부모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바꾸겠는가?>라는 질문으로 설문조사를 했더니 ‘기회가 주어진다면 부모를 바꾸고 싶다’고 대답한 것은 백인 학생들의 경우 4%, 우리 교포 자녀들은 19%나 되었다고 합니다. 정말 부끄러운 현실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구레네 시몬의 가정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던 일로 인하여 평생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살았던 시몬과, 주님의 교회와 복음 역사에 아주 특별한 여인으로 살았던 그의 부인의 뒤를 이은 두 아들들은 그 명성 면에서는 오히려 부모보다 더 뛰어났습니다. 구레네 시몬에게는 ‘알렉산더와 루포’라는 두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로마서를 기록한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 성도들에게 두 사람을 언급하면서 별 소개 없이 이름만 언급한 것으로 보아 두 사람은 이미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까지 잘 알려진 저명 인사였다는 것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교회 역사는 ‘루포’가 알렉산드리아 지역의 초대 감독이었다고 전해줍니다.

그런데 여러분, 시몬의 두 아들이 초대 교회에서 아주 중요한 사람이었던 것은 그 아버지나 어머니의 후광을 입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시면,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여기에서 “택하심을 입었다”는 것은 단순히 ‘선택되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탁월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에 선택되었다’는 뜻입니다. 즉 알렉산더와 루포는 믿음이 아주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이 탁월한 믿음을 가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➊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친밀하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과의 친밀함’, 이것을 우리는 ‘경건’이라고 부릅니다. 즉 시몬의 두 아들은 아주 경건한 사람들로서 에녹이나 노아처럼 범사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산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➋ 그리고 믿음이 좋다는 것은 그 삶이 선하고 아름답고 다른 사람을 잘 섬기며 봉사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믿음은 곧 인격이고 삶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시몬의 두 아들 루포와 알렉산더가 “탁월한 믿음을 가졌다”는 말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 특별했고, 인격과 삶이 다른 사람들에게 돋보일 정도로 뛰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초대 교회의 핵심적인 사역자가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루포가 알렉산드리아의 초대 목회자가 되었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북 아프리카에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살고 있던 도시,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만큼 예루살렘보다 더 유대적인 도시에서 목회를 했다는 것은 그만큼 어렵고 힘든 사역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줍니다. 즉 주님과 복음과 교회를 위하여 그도 어버지나 어머니처럼 십자가를 졌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자녀를 둔 부모는 정말 행복한 부모이지 않습니까? 부모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자녀, 부모 욕이나 먹이는 자녀들이 많은 시대에 시몬의 두 아들처럼 도리어 부모보다 더 빛나는 삶을 사는 것, 이만한 복이 어디 있겠습니까? 여러분의 자녀들이 다 이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 자신이 먼저 십자가를 기쁘게 지고 가셔야 한다는 것 역시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5.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를 보여주는 가정

말씀을 맺겠습니다. 미국 뉴욕에 있는 ‘리버사이드 교회’에는 그 위에 십자가가 세워진 아주 커다란 종탑이 있었습니다. 종탑이 높아서 그런지, 평소에 이 종탑을 바라보는 사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많은 군중들이 운집하여 교회당 종탑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본 그 교회 성도 한 사람이 궁금해서 그 중 한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러자 사람들이 대답했습니다. “저 십자가를 보십시오!” 그래서 가르쳐 주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십자가 종탑을 수리하는 수선공이 그 십자가에 매달려 열심히 작업을 하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그 교인은 생각했습니다. ‘참 이상한 일이지! 평소에는 십자가를 쳐다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어찌 수선공이 올라가 청소를 하니까 저렇게 바라보는 것일까?’ 그 순간 그 사람에게 놀라운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렇다. 십자가에 매달리는 사람이 있어야 사람들은 십자가를 쳐다본다.” 무슨 말입니까? 누군가 십자가를 지는 사람이 있을 때, 사람들은 십자가를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시몬과 그의 가정은 주님의 십자가를 졌고, 그 일로 인하여 십자가와 거기 달리신 예수님을 세상에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이 일로 인하여 시몬과 그의 가정이 받은 복이 얼마나 큰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마 10:40). 또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라고도 했습니다(마 10:41). 마태복음 10장 45절에서는 ‘제자의 이름으로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상을 결단코 잃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은 주님과 주님의 일을 위하여 아주 작은 대접과 봉사와 희생이라도 즐겁게 바친 사람은 반드시 복을 받게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볼 때 구레네 시몬은 상 받기에 충분한 일을 했습니다. 구레네 시몬과 그 가정이 받은 복이 무엇입니까? 

➊ 예수님의 십자가를 진 일로 인하여 시몬은 나사렛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게 되었고, 이후 평생을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삶을 살았습니다. 

➋ 그의 부인은 초대 교회에서 그 남편보다 더 인정받고 존경받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➌ 시몬의 아들들은 그 부모보다 더 뛰어나서 초대 교회 역사에 그 이름을 올려놓았습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진 사람, 십자가를 진 가정이 받은 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부터 여러분이 이 구레네 시몬처럼 주님의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여러분 자신이 복을 받고, 여러분의 집안이, 여러분의 후손들이 복을 받게 되시기 바랍니다. 

어떤 가정은 家長 만 열심히 십자가를 집니다. 그보다 더 많은 가정들은 부인 혼자 孤軍奮鬪하면서 십자가를 집니다. 혹은 부모만, 아니면 자식 만 열심히 신앙 생활하는 경우들도 많습니다. 남편이 너무 열심인지라 자신은 대충한다는 부인도 있고, 부인이 교회 일에 너무 열심인지라 자신은 교회 오기도 싫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부모가 교회에 열심이 넘쳐서 자신들은 조금 거리를 두겠다는 자녀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버지인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고, 시몬의 부인이 초대 교회와 복음 사역의 십자가를 졌으며, 그 아들 루포와 알렉산더가 그 부모의 뒤를 이어 교회와 복음의 십자가를 졌던 구레네 시몬의 가정처럼, 여러분의 가정이 그렇게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주님의 십자가를 이웃과 온 세상에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여러분과 여러분의 가정에 주시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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