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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외모와 중심 (삼상 16: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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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모와 중심 (삼상 16:1-23) 
 
 
본문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 다윗의 등장과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에 의해 번뇌하는 사울을 보여줍니다. 이후부터 왕으로 부상하는 다윗과 저물어가는 사울은 사무엘상 끝까지 계속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실 것을 계시하셨을 때, 사무엘은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15:11). 그를 떠난 후에도 “사울을 위하여” 몹시 슬퍼했지요(15:35). 사울의 비극에 대한 안타까움과 함께 지도자를 잃은 백성을 향한 연민도 작용했을 것입니다. 타인을 위해 진정으로 슬퍼하는 모습 속에서 따뜻한 인간애를 가진 지도자의 인품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오랜 슬픔에 빠져 있는 것을 중지시키셨습니다. 먼저 “내가”를 강조하셔서 이미 확정되어 바꿀 수 없는 일을 수용하도록 도우셨지요. 다음으로 새 일을 행하시려는 여호와의 뜻을 알고(참조. 사 43:19), 슬픔을 딛고 일어나 그 일을 잘 수행하도록 인도하셨습니다.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1). 큰 슬픔의 때에 여호와께서는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실패로 끝난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크고 비밀한 일을 진행하셨지요. 시위대 뜰에 갇혀서 말씀조차 전할 수 없었던 선지자 예레미야에게도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일을 행하는 여호와, 그것을 지어 성취하는 여호와, 그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자가 이같이 이르노라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렘 33:2-3). 내가 일 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일하십니다.

지난 몇 주 동안 심방하면서 각 가정마다 근심하고 슬퍼할 일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기에 더욱 답답하고 안타까운 상황 앞에서 단지 슬퍼하기만 하고 있다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겠지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일에 대해서는 그분께 맡기고, 현재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성실하게 해나가는 것을 원하실 것입니다. 비록 나로서는 아무 일도 할 수 없지만, 그분께서는 결코 쉬고 계시지 않습니다. 나를 통해 행하기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찾으며,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시고 성취하실 것을 믿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크고 비밀한 일로 응답하실 하나님을 바라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2a)는 말은 다른 왕을 세우려는 시도가 사울 입장에서는 역모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왕권에 집착하고 있는 사울은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따라 행한 일일지라도 결코 용서치 않을 것입니다. 특히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15:28)라고 선언한 상황이라 사울은 사무엘의 동선을 주시하고 있었겠지요. 의심스러운 행동으로 보고되면 사무엘뿐 아니라 이새의 가문조차 죽음을 면하기 힘들겠지요. 이에 여호와께서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2b)하라고 지시합니다.

이 말씀은 사울에게 둘러대기 위한 ‘요령’이 아닙니다. 먼 훗날에 성취될 계시 내용을 아직은 공개하지 말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의식이라는 사실은 이새의 가족들과 다윗조차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깨닫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의 중요성을 말해왔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죽기를 각오하고 가야지’라며 순종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피할 길을 내셔서 감당할 수 있게 도우셨지요. 그래서 성경은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라고 말합니다.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4).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암송아지”(2)는 들판에서 피살당한 시체가 발견되었을 경우 피 흘린 죄에 대해 성읍이 무죄할 경우나(신 21:1-9), 정결케 하는 잿물을 만들 때 사용했습니다(민 19:9). 장로들은 어떤 범죄에 대한 조사 차원의 방문인지, 불화하게 된 사울을 대항하기 위한 차원의 방문인지 알 수 없었기에 떨며 영접했습니다. 사무엘은 “평강”을 위한 방문임을 밝히고, 여호와께 제사하는 일에 “이새와 그 아들들”을 청했습니다(5). 이새는 베들레헴에서 유력했던 보아스와 룻의 손자였으므로, 유력한 가문의 자손으로서 제사에 자연스럽게 초대되었던 것 같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장자 엘리압을 보고 “마음” 속으로 이 사람인가 보다 생각할 때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셨습니다(6).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 먼저 ‘사람은 외모를 본다’는 진리를 생각해봅시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은 사울의 용모와 키를 보고 왕으로 뽑았었습니다(10:23). 탁월한 선지자인 사무엘 역시 사람이므로 외모를 보았습니다. 이 말씀 앞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타인의 마음을 볼 재주가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기껏해야 눈빛을 보고 짐작할 뿐이지요. 중심은 추측할 수 있을 뿐 사실과 다를 수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본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임을 받아들이고 ‘그래도 나는 사람의 마음을 통찰할 재주가 있다’는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아야 합니다. 한 번 의심의 눈으로 보면 그 마음이 온통 의심스럽다가도 의심이 풀리면 몽땅 믿어지기도 할 만큼 인간의 판단이란 정확하지 않습니다. 섣부른 짐작으로 생사람 잡거나 지나치게 좋게 보기도 하지요. 중심을 볼 능력이 없음에도 자신의 짐작을 확실한 판단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상처를 주고받는 일이 허다합니다. 추측한 일을 사실로 여기기 때문에 억울한 일도 많이 발생하지요. 내 생각에는 확실할 것 같아도 막상 그렇지 않을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 중대한 실수를 막아줍니다.

다음으로 ‘여호와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진리를 생각해봅시다. 성경이 예수님에 대해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요 2:25)라고 증언하는 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도무지 볼 수 없는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이 여호와를 경외하는지, 참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존중하는지 아십니다. 두 마음을 품었는지, 딴 마음을 품었는지, 은밀한 죄를 품었는지 아시지요.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는 경외하는 척, 경건한 척하는 일들이 전혀 소용이 없습니다. 성도는 사람 앞에서 살지 않고 오직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앞에서 살아야 합니다.

8-11절은 참석한 이새의 아들들이 다 선택되지 않았음을 알고 모두가 “말째”를 기다리는 장면입니다. 당시 제사는 성인 남자만 참여했었는데, 말째는 20세가 채 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그 나중 된 자를 기다려서 기름 붓게 하셨지요(참조 막 10:31). 20절에서야 비로소 그 이름이 소개되면서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고 말합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으로 쓰시기 위해 구별할 때 행했던 의식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할 수 있는 은사 부어주심을 의미하지요. 다음 장의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그 증거가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사사기를 보면 하나님의 신은 당신님의 뜻을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 갑자기 임하시곤 했습니다.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은 은사를 받고 곧장 그 임무를 행했지요. 사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11:6). 하지만 본문은 다윗은 무엇 때문에 기름 부음 받는지 명확하게 언급하지 않습니다. 당시 상황에서 미성년이 다윗을 보호하는 차원에서라도 비밀로 남겨둬야 했겠지요. 하지만 기름 부음의 의미는 다윗이 왕으로 준비되는 과정과 30세에 왕이 되어 40년을 다스리는 동안(삼하 5:4) 서서히 드러납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왕의로서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셨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편을 통해서도 하나님의 나라의 특성을 드러나게 하셨습니다.

사울도 기름 부음은 받았습니다. 하치만 그 의미를 무시하고 살았지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과 백성을 다스리는 직분을 받았지만 왕권에만 집착했지요. 하나님의 뜻에 따라 하나님 나라를 증시하는 왕으로 구별되지 못하고 세상의 왕들처럼 되고 말았습니다. 기름 부음의 의미가 없어졌으므로,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했습니다(14). 다윗과 사울은 은사의 차이보다는 그 중심의 태도에서 차이가 있었습니다. 능력이 있거나 직분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 나라를 잘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중심에서부터 은사를 주신 까닭을 생각하고 은사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함이 있어야 하지요.

하나님께서는 오늘날도 성도 각자에게 은사를 주셨습니다. 재능들을 주시고 직분들을 주셨지요. 돈 버는 것도 하나의 은사이며, 사회적 신분과 직업도 하나의 직분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은사를 주신 목적에 대해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엡 4:12)이라고 명확히 말씀했습니다. 성도 안에 내주하시는 성령님께서는 이러한 방향으로 성도를 인도하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은사 주신 의미를 무시하고 재능과 직분을 자기와 가족을 위한 것으로만 사용한다면 그 중심이 하나님께 합당치 않겠지요.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거부하고 애써 성령을 소멸하는 행위와 같을 것입니다(살전 5:19).

14-23절에서 하나님께서는 기름 부음의 의미를 드러내기 위해 다윗을 베들레헴 촌구석에서 왕궁으로 인도하십니다. 그로 하여금 수금을 “탈줄 알고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로 준비시키셨고(18), 사울조차 “그를 크게 사랑하여 자기의 병기 든 자”로 삼게 하셨지요(21). 왕이 되려면 아직 더 많은 과정이 남았지만, 사울 왕과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꼭 필요한 인물임이 조금씩 드러납니다. 함께하시면서 중심뿐만 아니라 외모까지도 왕의 자격을 갖추도록 준비시키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도 이렇게 인도하고 계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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