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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을 주신 이유 (삼상 1:9-11,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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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을 주신 이유 (삼상 1:9-11,17-18)


가정의 달을 맞이하였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좋은 신성한 모임은 가정입니다. 가정은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임체이고 부모와 형제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입니다. 이 공동체는 마땅히 행복한 그룹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정에 대해서 소중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사무엘의 가정 이야기입니다. 사무엘의 아버지는 제사장 엘가나였습니다. 그 아내는 한나입니다. 한나는 자식이 없었습니다. 당시 자식을 낳지 못하면 다른 여인을 남편에게 얻어 주어야 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브닌나라는 여종을 남편에게 주었습니다. 그 여종이 임신을 하였습니다. 임신하고 나니까 순종 잘하던 여종이 한나에게 못되게 굴었습니다. 자기의 여주인을 무시하고 조롱하고 핍박하였습니다. 여자의 최대의 적은 여자라는 말이 맞습니다. 그래서 한나는 눈물을 흘리며 성전에 올라가 기도하였습니다. 그 기도문이 오늘 읽은 성경말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보시고 나를 기억하사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시고 주의 여종에게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의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여기 삭도를 대지 않겠다는 말은 아들을 나실인으로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말입니다. 나실인은 내 아들일지라도 함께 살지 못하고 성전에서 일하도록 바쳐진 사람을 일컫는 말입니다. 한나는 그렇게라도 아들을 낳고 싶다고 간구했습니다. 그 안타까운 모습을 보고 제사장 엘리가 한나에게 “하나님이 네가 기도하여 구한 것을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17)”고 축복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이 사무엘입니다. 여기서 가정을 생각하게 합니다. 자식을 생각하게 합니다. 또 우리들이 자식을 낳고 못 낳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는 점도 생각하게 해 줍니다. 자식을 낳는 일이 중요한 일이라는 점도 말씀하십니다. 가정은 몇 가지 원칙으로 형성됩니다.  

부부의 만남 

한나는 엘가나라는 남편과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었습니다. 이 부부관계는 참 신성한 관계입니다. 전혀 모르던 상이한 두 개체가 만나서 이루는 관계입니다. 그래서 이 관계는 신비한 관계입니다. 남남끼리 만나서 평생을 살아간다는 자체가 기적이고 신비입니다. 그런데 이 평생 함께 하는 관계는 남남끼리 만나야 가능합니다. 이것이 하늘의 신비입니다. 이 남남끼리 만나서 살아가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서로를 위한 보완의 섭리입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미완성 상태입니다. 삶도 미완성이고 어딘지 불완전하고 허전하고 고독하고 창조가 없습니다. 둘이 함께 살아갈 때 서로 부족한 부분을 보완해서 창조가 가능하고 부족분이 채워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이기에 사탄의 방해도 많습니다. 사탄은 부부관계에 파고들어 방해하고 사이를 벌어지게 하고 싸우게 하고 갈라지게 합니다. 서로 갈라지는 이유를 성격차이라고 말하지만 그것도 허구입니다. 남남끼리 만나서 살아가는데 성격차이는 절대로 당연한 일입니다. 

형제도 서로 맞지 않는 법인데 남남끼리 마음이 딱 맞을 것이라는 기대부터가 잘못된 생각입니다. 서로 맞추고 극복해 나가는 동안 삶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부부의 서로 상이한 점을 극복한다면 삶의 내용들은 모두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못하면 다른 일도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가정생활이 원만한 사람은 밖에 나가서도 원만한 관계를 유지합니다. 가정은 부부가 만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자녀 낳음 

나무가 크면 열매를 맺습니다. 동물이 크면 새끼를 낳습니다. 식물이 크면 꽃이 피고 열매를 맺습니다. 곤충이 크면 번식을 합니다. 이것이 모든 생명체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이것은 여인에게 가장 큰 고민입니다. 오늘도 여전히 제일가는 고민거리는 이 문제입니다. 내가 아이를 안 낳는 것과 못 낳는 것은 다릅니다. 불임은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의 제일가는 고민입니다. 한나도 그랬습니다. 

그래서 그는 눈물겨운 기도를 하였습니다. “아들을 주시면 나실인으로 바치겠습니다.” 나실인은 머리를 깎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삭도를 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습니다. 또 죽음을 보지 못합니다. 그 말은 자기가 죽어도 아들이 올 수 없다는 말입니다. 한나는 그래도 내 몸으로 아이를 낳고 싶다고 간구하였습니다. 자녀를 낳는 일은 하나님의 섭리이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입니다. 유대인은 다산신앙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신앙이 강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15번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남동생 찰스 웨슬레는 18번째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기적에 가까운 일입니다. 그 부부는 하나님의 뜻에 충실하게 따르겠다는 믿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신실한 믿음을 가졌거나 보수적 믿음을 가진 가정은 대부분 다산하여 자녀들이 많습니다. 오늘 실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가정이나 부부들은 아이를 낳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가장 큰 문제입니다. 앞으로 30년 후에는 천만 명이 줄어들 것이라는 경고가 나왔습니다.  

 결혼은 하나님이 주신 복이고 은혜입니다. 부부됨도 복이고 하나님이 짝을 지어주신 은혜입니다. 자녀를 낳는다는 것은 대단한 복입니다. 아이를 낳을 때 이 아이를 키워서 이다음 효도 받아야 한다며 아이를 낳는 부모는 없습니다. 그것이 하늘의 뜻이기에 낳는 것입니다. 가정은 부부가 만나서 시작하여 자녀를 낳아 건실한 가정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자녀를 낳아 기르는 일은 보통 수고로운 일이 아닙니다. 어쩌면 인생의 절반을 허비하는 일일 수 있습니다. 

그 양육을 허비라고 생각하니까 오늘 아이를 낳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어느 신혼부부가 신혼여행을 가서 대화하면서 남편이 “우리 가족계획을 하자, 몇 명이나 낳을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가 말하기를 “이제 결정합시다. 카펫이 망가지는 것을 택하든지 우리 인생이 망가지는 것을 택하든지”하고 비장하게 대답하였습니다. 아이 하나 기르려면 카펫이 몇 개 망가져야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조선일보에 연재되는 광수생각이라는 만화를 보면 학교 담임선생님이 부모를 오라 했을 때 어머니들의 얼굴에 주름살 1개가 늘어나고 대학입시에서 낙방했을 때 주름살 2개가 늘어나고 사춘기 때 아이들이 사고 칠 때와 사업에 실패했을 때와 방탕할 때 마다 주름살이 하나씩 더 늘어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람들이 굳이 아이들을 낳지 않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것이 인류에게 주어진 사명인데 낳지 않을 수 있습니까. 아이들이 반드시 걱정꺼리만은 아닙니다. 자식들 중에는 가인도 있고 아간도 있지만 디모데도 있고 사무엘도 있지 않습니까.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 얼마나 순수합니까. 어른들을 깜짝 놀라게 해 주는 순수함이 아이들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어린 아이와 같아야 천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때 묻지 않고 순전하고 맑고 하얀 마음을 가진 아이들은 때로 어른들을 부끄럽게 하기도 합니다. 

교회 목사님이 어린이들에게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먼저 용서 받아야 합니다.” 하고 강조하시고는 한 어린이에게 물었습니다. “죄를 용서 받으려면 먼저 어떻게 해야 하나요?” 그러자 아이가 대답하였습니다. “예, 먼저 죄를 지어야 합니다.” 얼마나 순전합니까. 이것이 어린 아이들의 세계입니다. 얼마나 순전하고 깨끗하고 맑고 하얗습니까. 이 아이들이 오늘 점점 잃어가는 순결함을 어른들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정마다 부부마다 아이들을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가정은 부부가 만나서 아이를 낳음으로 이루어지고 형성됩니다. 

부모 떠나는 일 

한나는 어렵게 아들을 낳았습니다.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그런데 그는 이미 하나님께 “아이를 주시면 나실인으로 바치겠다”고 약속을 하였습니다. 한나는 약속한 그대로 아이가 자라 젓을 떼자 그 아이를 엘리 제사장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씩 아이의 옷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멀리서 아이를 보았습니다. 아이를 부모 곁에서 떼어놓는 일을 과감히 이행하였습니다. 성경은 아이를 젓을 떼자마자 부모 곁에서 떼어 놓으라고는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은 성장하여 스스로 독립할 때가 되면 부모 곁을 떠나서 살아가라는 말입니다. 우리나라는 이 끊고 맺음이 불분명한 문화를 갖고 있습니다. 서구사회는 냉정하리만치 합리적인 사회입니다. 그래서 18세가 되면 부모 곁을 떠나 독립적인 삶을 시작합니다. 경제활동도 스스로 이루고 책임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대학공부도 스스로 혼자 힘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합니다. 우리나라는 어림도 없는 발상입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계속 의지하려 하고 부모는 자녀를 내 보내지 않고 계속 곁에 두고 있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강조하기를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을 이루라“고 합니다. 그래야 새 창조의 삶을, 새 삶을, 새 세계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것이 확장의 삶입니다. 그런데 오늘 자녀들은 부모 주변을 맴돌고 떠나지 않고 의지하며 재산에 눈독을 두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창조를 이루지 못하는 것입니다. 또 부모는 재산을 물려주려고 맘먹고 있어 버릇되어 독립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생력도 야성도 상실되는 것입니다. 이유식은 적당한 시기에 먹여야 합니다. 늦으면 떠내기 어려워집니다. 그래서 옛날에 이유시킬 때 아이가 안쓰러워 젓을 계속 주다보니까 초등학교 때까지 젓을 물고 있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떼어내려 해도 안 떨어집니다. 그래서 어머니들은 젓꼭지에 몹시 쓴약 금계랍(金鷄蠟)이라는 것을 발랐습니다. 그렇게라도 해서 떼어내야 아이가 독립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이 40이 되어도 어머니에게 용돈을 타 쓰는 신세가 됩니다. 그런 자식에게 용돈을 계속 주는 어머니는 장한 어머니가 아닙니다. 금계랍이라도 발라서라도 빨리 떼어내야 합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나는가 하면 모질게 떼어놓지 못하기 때문에 의존도가 커져서 그렇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아이가 소파에 누워 TV를 보고 있습니다. 목이 마르니까 부엌에서 일하는 엄마에게 물 좀 갖다 달라고 했습니다. 엄마가 부드럽게 냉장고에 있으니 갖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잠시 후에 또 물 좀 갖다 달라고 합니다. 엄마가 조금 큰 소리로 “네가 갖다 먹으라”고 했습니다. 한참 후에 아이가 물 좀 갖다 달라고 소리쳤습니다. 화가 난 엄마가 “네가 갖다 먹어, 또 한 번 하면 혼난다”그랬습니다. 한참 후에 아이가 말했습니다. “엄마 나 혼내러 올 때 물 좀 갖다 줘” 그럽니다. 매사 대령해 주다보니까 이런 일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빨리 떼어놓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아이들도 좋고 자신에게도 좋습니다. 한나처럼 과감하게 떼어놓는 일을 해야 합니다. 늙어서까지도 손자 손녀 보느라 매여 살면 안 됩니다. 젊어서 애 키우느라 할 일을 못했으면 늙어서라도 못한 일을 해야지 손자 보느라 늙어서까지 꼼짝 못하면 이다음 천국 가서 뭐라고 말 할 것입니까. 할 말은 고사하고 천국에 가기나 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요즘 철든 부모들은 손자 손녀에 매이지 않는 법을 개발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애를 맡기러 올 것 같다는 기분이 들면 아침 일찍 나가버립니다. 그것을 알고 딸이 애를 업고 더 일찍 찾아옵니다. 그런 예감이 들 때에는 아예 새벽기도회 나왔다가 그 길로 나가버리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풍경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보다 더 영악한 방법이 있습니다. 아예 손자 손녀 봐 달라고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이 방법은 며느리 앞에서 보란 듯이 해야 효과가 있습니다. 그것이 네 가지입니다. 하나는 김치를 입으로 쭉 빤 다음 손으로 찢어서 손자 입에 넣어주는 방법입니다. 둘째는 행주로 손자의 입을 닦아 주고 셋째는 바퀴벌레가 나오면 손으로 때려잡습니다. 

넷째는 영어를 가르쳐 줍니다. 단 발음을 토속발음으로 아니면 진한 경상도 발음으로 가르쳐 줍니다. 예를 들면 버터를 빠다로, 팬티를 빤스로 가르쳐 줍니다. 이러면 금방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리고 나면 자유시간이 많이 나옵니다. 그 많은 자유 시간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하면 그동안 할일을 제대로 못한 주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천국갈 준비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은 “자녀들아 장성하여 부모 곁을 떠나 한 몸을 이루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원칙의 삶에서 너무 벗어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에 악순환이 계속 일어나는 것입니다. 한국의 부모들은 참 헌신적이고 자식 사랑이 처절할 정도로 나무랄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과연 처절할 정도로 곁에 붙들어 놓고 살아가는 것이 정말 자식들을 사랑하는 일인가. 그리고 그것이 자식들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정말 도움이 되는 일인가.” 적당한 시기에 떨어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한나는 애절하게 기도해서 낳은 아들을 젓을 떼자마자 약속대로 제사장에게 보냈습니다. 

가정의 의미 

여기서 한 가지 더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왜 가정을 주셨을까”하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결혼해서 애 낳고 잘살고 손자 보다가 늙어 죽음, 그것이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목적인가.” 물론 그것도 중요한 목적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정한 목적은 또 있습니다. 한 가지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어렵지만 잘 살고 있을 때 그냥 놔두는 것이 복입니까, 아니면 새 세계에서 새 삶을 위해서 고난의 길을 가도록 출애굽 시키는 것이 복입니까.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고된 길을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수십 년 동안 광야 길을 가며 성숙하게 만들었고 그들이 성숙하였을 때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셨을까요. 그것을 알아야 출애굽의 신학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출애굽 시켜 가나안에 들어가게 하신 이유는 그 백성들이 가나안에 가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백성,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가장 숭고한 책임과 삶과 우선 할일과 목적과 사명은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정을 주신 것은 편안히 잘 먹고 잘 살라고만 주신 것이 아니고 우리들의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을 살라고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정을 건강하게 이루고 자녀들을 양육하고 부부의 삶을 건실하게 이루어 그 시대에 몫을 다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삶입니다. 그러기에 한나는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약속은 하였지만 실제로 바친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었지만 감행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였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인의 삶에서 이 영광 돌리는 삶이 결여되면 삶에 온갖 부작용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 이 시대는 우리의 가정이 건강하기 위해서 기도할 때입니다. 그리고 건강한 가정을 만들어 살아가도록 힘써야 할 때입니다. 그것이 이 시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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