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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가정의 꽃, 사랑 (아 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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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꽃, 사랑’ . com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 
(아가2;15) 

5월은 가정(家庭)의 달입니다. 
창세기를 보면 하나님이 마지막으로 만드신 것이... ‘가정’입니다.  여섯째 날에 남자와 여자를 만드시고, 그 둘을 만나게 하사 가정을 이루게 하신 뒤에야 “천지와 만물이 다 이루어지니라”(창2;1)고 하셨습니다. 가정이 없으면 천지와 만물은 미완성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가정은 하나님의 창조의 완성이요, 축복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이 축복의 완성으로 주신 가정을 꿈꾸는 여러분, 가정을 소중히 여기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가정을 포도원으로 표현을 합니다. 그 포도원에 꽃이 피었답니다. 꽃이 피었으니 이제 곧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그런데 ‘작은 여우’가 있다고 합니다. 이 작은 여우가 포도원을 허는 일을 합니다.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도여러분, 꽃이 핀 포도원을 허무는 작은 여우..,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는 작은 여우입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기로 결심하는 이 시간이 되셨으면 합니다.  

먼저 우리의 가정에서 가장 소중하고 귀한 꽃이 무엇일까요? 
  
① 저는 그것을 ‘사랑’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장’으로 불리우는데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고정13;2)라고 말씀합니다.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라는 이 말씀처럼 사랑의 소중함을 표현하는 말은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우리의 삶은 무엇을 가지든지, 무엇을 이루든지, 무엇을 누리든지 우리의 삶도, 또 우리의 가정도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처럼 소중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사실 사랑은 없을 때 문제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조금만 결핍되어도 당장 문제가 생깁니다.  어떤 목사님 집에 세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가 셋이 되다보면 가장 위험한 아이가 둘째입니다. 위와 아래로 치어서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을 놓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목사님의 둘째가 어렸을 때 손가락을 심하게 빨았답니다. 엄지손가락에 군살이 박힐 정도였답니다. 그것은 욕구불만이 있다는 표현 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 같지만 사랑에 대한 결핍은 이렇게 비정상적인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물론 부모입장에서야 세 아이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똑같지만,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은 달랐습니다. 첫째 아이를 낳았을 때 너무 좋고 기뻐서 늘 아이를 빨리 보기 위하여 뛰어 다니다시피 하였답니다. 백일도 해주고 없는 돈에 카메라도 사서 열심히 사진도 찍어주고 했습니다.  그러나 둘째를 낳았을 때 아무래도 첫째만큼은 안해지더랍니다. 백일도 그냥 넘어가고, 사진을 찍는 것도 첫째만큼 많지 않았답니다. 둘째가 첫째만 못했기 때문이 아니라 부모가 자녀에 대한 욕구가 어느 정도 첫째에게서 충족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모를것 같은 아이가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첫째는 손가락을 빨지 않았는데 둘째는 손가락을 빱니다. 엄마 아빠가 자식에 대한 욕구가 채워져 조금 소흘해진 순간, 아이는 엄마 아빠에 대한 욕구불만이 생긴 것입니다. 사랑은 그만큼 민감한 것입니다.    둘째의 손가락 빠는 습관을 고치기 위하여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물론 야단도 치겠지만 그것은 야단으로 고칠 수 없습니다. 그렇게 되면 문제가 더 심각해집니다. ‘사랑의 결핍’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그것은 ‘사랑의 보충’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세상에 나타나는 모든 옳지 않으며, 바르지 않으며, 좋지 않은 일의 원인은 다 ‘사랑의 결핍’입니다.  사랑 없이는 그 어떤 것으로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모든 문제의 해결은 사랑에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치명적인 죄의 문제를 사랑으로 푸셨습니다. 십자가로 푸신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사랑으로 알듯이 사랑이야 말로 모든 문제의 열쇠입니다. 우리들이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삶을 원하신다면 사랑에 관심(觀心)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리고 사랑에 투자(投資)하셔야만 합니다. 사랑을 위하여 늘 기도하고 노력하여야만 합니다. 

② 그러면 우리가 꼭 가져야할 사랑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첫째로, 부모의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삶을 위하여 반드시 받고 느껴야만 할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를 상상해 보십시오. 정상적이고, 바른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겠습니까? 아이는 백지(白紙)라고 합니다. 즉 부모가 그리는 대로 그려진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부모에게 아이의 인격을 자기가 결정할 수 있는 이처럼 크고, 결정적인 책임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런 큰 책임은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제대로 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는 부부의 사랑입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삶을 위하여 반드시 받고   느껴야만 할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 부부의 사랑입니다. 보통의 경우 사람은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게 되는데 이럴 경우 남편의 사랑을 늘 충만히 받고, 아내의 사랑을 늘 충만히 받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남편을 사랑하고,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가 되기 위하여 연구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의 사랑을 받는 남편이 되기를 위하여 연구하고 노력하고 기도하여야만 합니다. 부모의 사랑은 일방적이지만, 부부는 인격적인 선택입니다. 

선택에는 책임이 따르고, 노력이 따릅니다. 부부는 저절로 사랑해지지 않습니다. 귀한 것을 노력으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귀한 것을 귀한 줄을 모르는 사람에게 주시는 법이 없습니다. 

마태복음 7장 6절에 보면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며 너희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가치를 모르는 개와 돼지에게 거룩한 것과 값진 것을 주지 말라고 하시지요?  사업을 위해서는 밤잠을 자지 않고 연구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면서도 정작 보다 중요한 가정을 위하여, 사랑을 위하여는 연구도 하지 않고 노력도 하지 않고 기도도 하지 않는 남편과 아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업과 비교할 수 없는 귀한 사랑과 가정을 위하여 공부하고 노력하고 기도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다 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을 보십시오. 사랑이 저절로 됩니까? ‘절로 절로’하는 것은 거짓말입니다. 부부의 사랑을 위하여 노력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는 자녀의 사랑입니다. 

자녀의 사랑은 건강하고 아름다우며 풍성한 삶을 위하여 반드시 받고 느껴야만 할 사랑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자녀들이 받아야 하듯이, 자녀의 사랑을 부모가 받아야만 합니다.  남편의 사랑을 받는 아내가 행복하고 아내의 사랑을 받는 남편이 행복하듯, 자녀의 사랑을 받는 부모가 행복한 것입니다. 모든 자녀들은 부모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아내는 남편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모든 남편은 아내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부모는 자녀의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십계명을 보십시다.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무엇입니까?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이 누구에게 주신 계명인가요? 부모에게 주신 것입니까?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까? 자녀에게 주신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약속 있는 첫 계명’이라고 합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주님께서 자녀에게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말씀하신 다음에는 유일하게 여기서만은 축복의 약속을 주셨습니다. 부모 공경의 계명에만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는 약속을 붙여 주신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자녀중에 공부를 좀 소홀히 하던 아이가 있었습니다. 어느날 그 아이를 불러 놓고 이야기를 합니다. 아빠는 하나님이 허락만 해 주신다면 늙어서 이교회를 은퇴하지 않을 것이다. 아빠가 늙어서 이교회를 은퇴하게 되면 아마 원로 목사가 될 수 있을 것이고, 원로 목사만 된다면 노후는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러나 아빠는 늙어서 교회의 덕을 보고 싶지는 않다. 아빠는 할 수만 있다면 너희 덕을 보며 살고 싶다. 네 생각에는 엄마 아빠가 늙어서 교회 덕을 보면서 사는 것이 좋겠냐? 너희 덕을 보면서 사는 것이 좋겠냐?  아이는 생각할 필요도 없이 당연 하다는 듯이 '저희 덕을 보시면서 사셔야죠'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 아이에게 '그럼 이놈아 공부 좀 열심히 해라. 그래 가지고 늙어서 아빠가 네 덕 보고 살 수 있겠냐?'라고 이야기 해 주었습니다. 그 말이 효과가 있어서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제는 제법 공부를 열심히 한답니다. 그리고 그 목사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기가 과연 자식 덕을 볼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는 모르겠다. 그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께 '늙어서 자식 덕을 보며 살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기도합니다.  

그렇습니다. 늙어서 자식의 덕을 보면서 사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축복중의 하나라고 믿고 있습니다. 자식 덕을 미리 함부로 포기하면서 사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옳지 못하며 좋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교만한 생각이며, 또한 비 성경적인 생각이요, 자녀들을 복받지 못하게 하고, 장수하지 못하게 하는 생각입니다. 

사람이 젊어서는 남편과 아내의 사랑을 받는 것만으로도 살 수 있지만...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사람들이 갈망하는 것은 자식의 사랑을 받는 것입니다. 자식의 사랑을 받는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자녀들은 이렇게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 제발 저희 부모님께서 저희 사랑을 듬뿍 받으시게 해 주세요. 부모님을 오래 오래 사랑하고 모시는 자녀가 되게 해 주세요.’   자녀여러분, 여러분의 부모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실 마음은 없으십니까? 

이제 작은 여우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란 무엇일까요? 저는 두 가지로 생각을 합니다. 
첫째는, 표현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우리가 흔히 문제아, 문제아 하지만 '문제아(問題兒)는 없다 다만 문제 부모가 있을 뿐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부모가 문제가 있을 때, 특히 부모의 사랑에 문제가 있을 때, 그 아이들은 문제아가 됩니다.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는 아마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뭐가 문제일까요?  ‘전달’에 문제가 있고, ‘표현’에 문제가 있습니다. 많은 부모님들이 자녀를 정말 사랑하지만... 문제는 그 사랑을 아이에게 전달하는 방법입니다. 그 효율이 아주 낮다는 것입니다. 부모의 마음속에 있는 사랑은 100인데 정작 아이들에게 전달되고 느껴지는 사랑은 10도 안 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러니 부모는 ‘나는 너를 100으로 사랑한다’ 하는데,  하지만 아이는 ‘아 우리 부모님은 나를 10만큼 사랑 하는구나. 나는 사랑받는 아이가 아니구나’ 합니다.  

성도여러분, 만약에 비싼 돈을 주고 산 가전제품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어떡하겠습니까? 100만원 주고 산 냉장고가 10만원 짜리 보다 못하면 되겠습니까?  이렇게 사랑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거의 소용이 없습니다.   

사랑은 부뚜막의 소금과 같아서 아무리 가득 있다 해도, 솥 안에 넣지 않으면 효과가 없습니다.  많은 부모의 사랑이 마치 부뚜막에 있는 소금과 같습니다. 그러나 소금이 가득하게 있다는 것만으로 음식이 짜지지는 않잖아요?  마음속에 사랑이 가득하다는 것만으로 아이들의 마음이 행복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아이가 알 수 있도록, 아이가 느낄 수 있도록 표현하여야 합니다. 부모님들은 표현을 배워야 합니다. 맞습니까???   
 
하지만 현실은 그 반대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모르는 것을 부모들은 ‘아이가 철이 없어서 그렇다’고 아이에게 원인을 돌려버립니다. 그러나 저는 말씀드립니다.  아이가 철이 없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부족해서, 어리석어서 그렇습니다. 집에 있는 냉장고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을 집이 안 좋아서그렇다 라고 말 할 수 없습니다. 즉 아이가 부모의 사랑을 못 느끼는 것이 아이 책임이 아니라, 제대로 표현 못하는 부모의 책임이라는 사실을 부모는 알아야 합니다.  그런 말이 있지 않습니까?  밥은 먹어야 밥이고,  종은 울려야 종이다. 사랑은 표현되어야 사랑이다.  이것이 모든 사랑의 원칙입니다. 
 
그래서 아내가 남편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아내 책임이 아니라 남편 책임입니다. 남편이 아내의 사랑을 모르는 것은 남편의 책임이 아니라 아내의 책임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사랑을 표현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님께 사랑을 나타내야 합니다. 효사랑병원이나, 요양원에 보내는 것을 부모 공경이라고 생각하나요? 

한 달에 한번, 몇 달에 한번 얼굴보이는 것이 효도인가요?  여러분이 한번 병원에 입원해 보십시오. 부모가 면회를 얼마나 오는지..,   모든 사랑은 상대방이 충분히 느끼고 알 수 있도록 늘 상대방의 이해 수준에서 표현되어야만 합니다.  ‘맞다 맞다’ 하십니까? 그런데 혹시 다 상대방 탓하시지는 않나요? 내 탓이라고 해야 합니다. 내가 문제였다고 해야 바른 은혜입니다. 

두 번째는, 잘못 표현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상처’가 있습니다. 사랑의 대상인 부모에게서, 배우자에게서, 자녀에게서 받는 마음의 상처가 뜻밖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고전13장을 보면 사랑의 원칙이 많이 나옵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며 6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13;4-7)

이 말씀을 한 마디로 줄인다면 ‘사랑은 인격적이다. 사랑은 상대방중심이다’ 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면 상대의 인격을 존중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부모들이나, 남편들이 자기 자식에게, 아내에게 인격이 있다는 것을 잘 모릅니다. 아니 인격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시끄러워, 니가 뭘 알아. 내 말 들어, 조용히 해’ 라는 말을 자주 합니다. 분명히 자녀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사랑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함부로 대하는지 모릅니다. 

물론 서로 의견이 달라서 다툴 수가 있습니다. 자기의견이 옳습니다. 그러나  옳다는 것이 함부로 대해도 된다는 것은 아니고, 옳다는 것이 상대를 무시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잘 살펴보면 대부분이 유교의 영향입니다. 유교는 어른 중심이고, 성인 남자 중심입니다. 유교는 삼강오륜에서 보듯이 ‘위 아래’간의 역할을 지킴으로 유지되는 질서의 종교입니다.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 ·부위자강(父爲子綱) ·부위부강(夫爲婦綱)을 말하며 이것은 글자 그대로 임금과 신하, 어버이와 자식, 남편과 아내 사이에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즉 위 아랫간의 지켜야할 도리입니다. 임금, 어버이, 남편은 위고, 신하, 자식, 아내는 아래입니다. 

  오륜은《맹자(孟子)》에 나오는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의 5가지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도(道)는 친애(親愛)에 있으며, *임금과 신하의 도리는 의리에 있고, *부부 사이에는 서로 침범치 못할 인륜(人倫)의 구별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사이에는 차례와 질서가 있어야 하며, *벗의 도리는 믿음에 있음을 뜻한다.  공통점은 철저히 신분사회요, 위 아래질서로 유지되는 사회입니다. 신분에 맞는 역할의 충실로서 그 사회가 유지됩니다. 전혀 평등사회가 아니요, 철저히 계급사회입니다.  평등은 반역이요, 역천입니다.   특히 아내요 어머니는 여자라는 이유로 밥상조차 한 자리에 먹을 수 없는 것을 당연시 하는 사회입니다. 이 삼강오륜은 중국뿐만 아니라 한국에서도 과거 오랫동안 사회의 기본적 윤리로 존중되어 왔으며, 지금도 일상생활에 깊이 뿌리박혀 있는 윤리 도덕입니다.』 
  
그래서 유교에는 늙은이, 젊은이 라는 말은 있어도 ‘어린이’ 라는 말은 아예 없습니다. 조선시대의 글을 보면 ‘어리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그것은 ‘어리석다’란 말입니다. ‘어린이’ 라는 말은 ‘3·1운동 이후 소파(小波) 방정환(方定煥)을 중심으로 어린이들에게 민족의식을 불어넣고자 하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기 시작해서, 어린이들에게 "이노무 자식 저노무 자식" 이라고 하거나 "애자식"이라고 부르지 말고 우리아이들에게도  "어린이"라고 높여 부르자고 했으며, 아이들은 이 나라의 보배이기 때문에 마구 때리지 말고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어른들이 희망을 줍시다! 라는 의미로 "어린이"라는 단어를 만들어서 알리는 운동을 했습니다. 

1923년 5월 1일, 색동회를 중심으로 방정환 외 8명이 어린이날을 공포하고 기념행사를 치름으로써 비로소 어린이날의 역사가 시작되었고, 1939년 일제의 억압으로 중단된 뒤 1946년 다시 5월 5일을 어린이날로 정하였다. 1970년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대통령령 5037호)에 따라 공휴일로 정해진 이래 오늘에 이른다. 5,000년 역사 중에서 어린이가 무시당하지 않고 존중된 지 40년 되었다는 말입니다. 
 
성도여러분, 한국은 아직도 가부장적인 유교 문화권속에 있는 나라입니다.  유교는 남자 중심입니다. 여자는 철저히 주변인입니다. ‘삼종지도(三從之道)’라고 해서 아버지를 따르고, 남편을 다르고, 아들을 따릅니다. 이유가 없습니다. 아버지가 알콜 중독자라도, 남편이 무능하고 가정을 버려도, 자식이 천하의 불효자라도, 남자는 옳고 여자는 틀렸습니다. 여자는 따라가는 사람이지, 앞장서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것이 유교의 법입니다.  때문에 아직도 남편과 아내의 관계는 동등하지 않습니다. 잘못된 유교적인  전통은 가정에서 아내가 남편으로부터 인격적인 모독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가정은 포도원입니다. 이 포도원에 꽃이 피었습니다. 우리는 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합니다. 이제 우리의 사랑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사랑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서로사랑’ 해야 합니다. 가족 구성원들간에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 사랑이 상대방 중심으로 충분히 표현되어져야 합니다. 말 안 해도 알아주겠지...이것은 바른 표현이 아닙니다.  무시하거나 함부로 하는 것은 사랑의 잘못된 표현입니다. 가장 큰 사랑,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겸손한 마음’에서 나옵니다.  겸손이 곧 사랑입니다. 예수님은 하늘보좌를 버리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겸손이요, 이런 표현이 바른 표현입니다.  성경적인 사랑을 배우고 실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사랑이 더 성숙해지고, 더 아름다워지기를 바랍니다.    아멘.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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