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버이주일] 법을 초월한 효 (룻 1:16-17)

  • 잡초 잡초
  • 312
  • 0

첨부 1


법을 초월한 효 (룻 1:16-17)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야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1;16-17)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모압 여인 룻을 통해서 ‘법을 초원한 효’라는 제목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이 말씀이 선포될 때 저와 여러분에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소원합니다. 

농경시대의 대가족제도가 사라진 후 현대사회에서 급속하게 ‘효’라는 말도 사라져가고 있습니다. 너무 핵가족화가 되어서, 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가족을 위해서만 애를 쓰지 부모형제는 잘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런 세태를 보고 어떤 분이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래서 이 세상이 복을 받지 못하고, 이렇게 병이 많고, 이렇게 사람들이 가난하고, 실패하고 고통이 많은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효’를 교육해야 한다.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고 효를 다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므로 복을 받을 수 있게 만들어 주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모들의 책임이요 또 국가가 해야 할 책임인 것이다. 효는 만복의 근원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아멘인가요?  그러면 성경은 ‘효’를 얼마나 중요한 것으로 말씀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성경이 말씀하시는 ‘효’를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오늘 본문의 배경인 룻기를 살펴봅니다. 배경은 간단합니다.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에 큰 기근이 유대 베들레헴에 왔습니다. 그래서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그 아내 나오미, 그리고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데리고, 온 가족이 몽땅... 먹고 살기 위하여 모압 땅으로 갑니다.  이유는 단 하나 ‘먹고 살기 위해서’입니다. 그 하나의 이유로 선민의 땅, 고향을 뒤로하고, 이방신의 땅, 모압을 향하는 것입니다.  

구약 신명기를 보면, 이것은 잘못된 선택입니다. (신23;3)“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이렇게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는 버림받은 이방인의 땅에서 온 가족이 살길을 찾는 것은  분명한 불신앙의 선택입니다. 하지만 엘리멜렉은 모압 땅에 희망(希望)을 걸었고 온 가족을 이끌고 이주를 합니다. 

물론 베들레헴에는 흉년이 있었습니다. 이 흉년을 벗어나서 좀 더 풍요로운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들은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곡식이 풍성한 모압으로 가자고 결정을 했던 것이지요. 물론 엘리멜렉의 가족들도 신앙적인 고민을 했을 것입니다. 모압은 이스라엘에게는 원수의 나라입니다. 그 옛날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오려고 하였을 때, 집요하게 방해를 했던 사람들이 바로 이 모압 사람들입니다.  철저하게 하나님을 대적하고, 우상을 섬기던 족속이고, 도덕적으로도 상당히 부패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멜렉 가족은 모압으로 들어가는 것을 선택합니다.   

성도여러분, 많은 사람들이 “우선 살고 봐야 한다.” 고 말합니다. 물론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 무슨 일이든지, 어떤 선택이든지 다 받아들여질 수 있다면... 도덕은 왜 필요하고, 믿음은 또 무엇인가요?   또한 육신의 삶을 위해서 무슨 선택이든지 할 수 있다면... 영원한 삶을 위해서는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합니까?  성경이 되풀이하고 반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 육신만의 삶, 이 세상만의 삶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버리고 마는 아침안개 같은 것’이라고 성경이 우리에게 여러 번 말씀합니다.  육신의 삶보다 훨씬 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삶, 영원한 삶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증거 가 바로 오늘 본문의 사건입니다. 살려고 나간 가족에게 찾아 온 것은 죽음 밖에 없었습니다. 가장인 엘리멜렉도 죽고, 기둥 같은 두 아들도 죽었습니다. 잘 살 수 있을 것을 기대했지만, 기대와는 달리 온 가족이 망해버렸습니다.  모압 땅에서 10년을 사는 동안 두 아들이 오르바와 룻이라는 모압 여자와 결혼했지만 결국에는 두 아들도 죽고, 엘리멜렉 본인도 죽습니다.  나오미만 혼자 남았습니다. 가족이 해제되어 버린 것입니다. 희망을   꿈꾸며 온 모압 땅이 절망만을 남겼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오늘 이야기가 시작이 됩니다. 오늘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희생(=사랑)이 있다고 말씀합니다.  

첫 번째는, 나오미의 희생(=사랑)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제 유일하게 남은 사람, 나오미의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여기서 죽느냐, 고향으로 돌아가서 죽느냐 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선택을 하시겠습니까? 나오미는 고향에 돌아가서 죽기로 합니다.   처음에는 3사람이 같이 이스라엘로 돌아갑니다.  

(룻1;6-8)“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7있던 곳에서 나오고 두 며느리도 그와 함께 하여 유다 땅으로 돌아오려고 길을 가다가 8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기 너희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3사람이 같이 돌아오다가 나오미의 마음이 바뀝니다. 두 며느리를 돌아가라고 합니다.  “ 나는 이스라엘로 돌아간다. 너희들은 모압 여자니까 모압에서 살아라. 너희는 이스라엘에 가도 남편도 없고 새로 결혼할 남자도 없으니 너희 친정에 돌아가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맏며느리인 오르바는 그 말을 듣고 떠났습니다. 그러나 둘째 며느리인 룻은 강하게 말합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룻이 이르되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야훼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고 말합니다.

왜 룻이 이런 말을 할까요? 룻이 계산도 못하고, 행복이 뭔지도 모르는 아직 철없는 여인일까요?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룻의 이 짧은 말에 ‘어머니’라는 말이 8번이나 반복이 됩니다.  즉 지금 룻의 마음에는 어머니 나오미가 꼭 차있습니다. 나오미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소중한 사람입니다. 심지어 자기의 행복도 뒷전이고,  모압 여인으로서 이스라엘이라는 타국으로 가는 것도 개의치 않습니다. 남은 인생을 어머니 나오미하고만 둘이서 살아도 좋다는 고백입니다.  왜 룻이 이렇게 되었을까요? 
  
나오미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오미의 말에서 룻이 이렇게 된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11-13절)“나오미가 이르되 내 딸들아 돌아가라 너희가 어찌 나와 함께 가려느냐 내 태중에 너희의 남편 될 아들들이 아직 있느냐    12내 딸들아 되돌아 가라 나는 늙었으니 남편을 두지 못할지라 가령 내가 소망이 있다고 말한다든지 오늘 밤에 남편을 두어 아들들을 낳는다 하더라도 13너희가 어찌 그들이 자라기를 기다리겠으며 어찌 남편 없이 지내겠다고 결심하겠느냐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말미암아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하매”  

나오미가 “내 딸들아”라는 말을 3번이나 합니다. 이 말속에는 두 며느리를 향한 나오미의 큰 사랑이 숨어 있습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다. 여러분이 나오미라면 두 며느리와 함께 이스라엘로 갈까요? 돌려보내고 혼자 이스라엘로 갈까요?  만약 내가 나오미라면 저는 함께 갈 것 같습니다. 성도여러분, 지금 나오미는 늙었습니다. 피붙이 하나 없는 홀몸이고 재산도 없습니다.  이제 이스라엘로 돌아가봐야 뭐하겠습니까? 아무 돌봐줄 사람이 없기는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차피 힘겹게 얻어먹으면서 살다가 쓸쓸히 죽을 것입니다.   그러니 젊고 착한 두 며느리가 옆에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얼마나 의지가 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가 있지요. 자기는 좋으나 자기 때문에 이 두 며느리가   행복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재혼은 그 자체도 힘든 것이지만, 더구나 두 며느리는 이방여인입니다. 멸시나 안 당하면 다행입니다. 자기 때문에 이 두 며느리도 같이 평생을 외면당하면서 늙어가야 합니다. 자기 죽을 때 까지, 또 죽은 후에도 이 두 며느리는 자유롭지가 못합니다.  그래서 이제라도 돌려보내고, 그냥 혼자 돌아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 두 며느리가 자기에게서 벗어나서 새로운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홀로 남은 자기는 비록 힘들겠지만, 이스라엘로 돌아가서 혼자 어찌 어찌 사는 것만이 시어머니로서 이 두 며느리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사랑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라, 돌아가라’ 라고 강권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나오미의 자기희생이며, 사랑입니다. 이렇게 사랑이 넘치는 시어머니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자기 앞가림을 하기도 힘들게 된 이때, 며느리들을 이용해서라도 살 길을 찾아볼 수도 있으련만, 시어머니는 오히려 며느리들을 먼저 염려해줍니다. 
 
옛날에 노부모를 산에 버려두고 오는 것을 ‘기로속(耆老俗)’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우리나라에서도 이민가기위해 노부모를 제주도에 버린 일이나, 자식들 집으로 거처를 옮겨 다니다가 부모를 모시는 일로 형제들간에 불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다 못해 노부모가 음독자살하는 일, 독거노인이 사망한 뒤 한참 지나서야 발견되는 일...이런 일이 얼마 전에도 일어났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모두가 자기밖에 생각하지 못하는 세상에서,  오히려 먼저 며느리를 생각하는 그런 시어머니입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 각각 친정으로 돌아가서 좋은 남자를 만나고 새 출발을 하라고 권했습니다. 이는 며느리들의 앞길을 열어주는 인간적인 배려이지만 동시에 시어머니의 권리를 포기하는 행위입니다.  룻기의 아름다운 이야기는 이렇게 자기를 포기하는 나오미의 희생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두 번째는 룻의 희생(=사랑)이 있습니다. 

이런 시어머니의 사랑이 룻의 가슴에 와 닿습니다. 자기보다는 며느리들을 먼저 챙기는 그 마음이 감동이 됩니다.  정말 며느리가 아니라 ‘내 딸들아’하는 말이 맞습니다. 나오미는 두 사람을 딸처럼 여기며, 딸의 행복을 위해 자기의 노후를 포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룻이 압니다. 그래서 룻은 시어머니를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고생이 된다고 해도, 모든 사람들이 자기를 이방여인이라고 외면하고 비웃는다고 하더라도, 누구보다 자기를 사랑해주는 시어머니와 함께라면 아픔도 오히려 행복이라고 룻은 생각했습니다.    

성도여러분, 사랑은 감동입니다. 감동만 되면 무엇을 못하겠습니까? 나오미가 룻을 감동시키니...룻도 나오미를 감동시키는 것입니다.  오늘 주인공인 룻은 나오미의 사랑에 감동한 여인인 것입니다. 사랑의 감동이 룻의 신앙마저 바꾸게 했습니다. 룻도 자기의 행복보다 시어머니의 행복을 생각했고, 그런 시어머니가 믿는 하나님을 생각했습니다.   이런 어머니가 믿는  여호와라면 나도 믿겠다. 이제 ‘어머니는 나의 어머니이고, 어머니의 하나님도 나의 하나님이다’ 하는 것입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를 두고 고부갈등(姑婦葛藤)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은 동서고금 어디에나 통용됩니다.   나오미처럼 나이가 들어서 남편과 아들을 잃고 가진 것 전혀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그런 시어머니를 따라 나서겠다는 며느리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나오미는 자기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는 것을 밝히면서 며느리에게 자유를 선언했으나 룻은 그것을 잘 알면서도 시어머니를 좇았습니다.
 
이것은 효(孝)의 위대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이라면 가진 재산도 없고, 주변에 남편 될 만한 사람도 없고, 아무런 희망이 없는데 거기에다 자기의 인생을 걸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효의 마음’이 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같은 사랑을 받고, 같은 감동을 받은 ‘오르바’는 울면서 고향인 모압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룻은 어머니를 따릅니다. 이것은 룻의 결단이요, 룻의 선택입니다.  

성도여러분, 효도는 계산을 넘어섭니다. 현대는 많은 사람들이 효도를 계산합니다. ‘좁은 집에 같이 있는 것 보다 시설이 갖추어진 요양병원에 있는 것을 더 좋다’ 고 합니다. 또 ‘요양 병원에 모시는 것이 돈이 더 많이 든다면서 그것이 더 많이 효도를 하는 것이다’ 라고 변명을 합니다. 

저는 이것을 무조건 불효라고는 말할 수 없다고 봅니다. 각자 분명히 사정이 있을 것입니다. 같은 행동이라도 그 속을 보면 전혀 다른 이유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분명한 것은 부모는 자녀를 그렇게 키우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를 키울 때는 집이 좁으니 하숙으로 보내지 않습니다. 자녀가 아프다고 시설 좋은 병원에 입원시키고 한 달에 한번, 몇 달에 한번 문병가지는 않습니다.  

우리가 계산을 한다면 이미 참된 효의 마음과는 멀어지는 것이 아닐까요?  이방 여인인 룻의 효도는 다른 한편으로는 위대하기 까지합니다. 모압 족속인 룻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섬기겠다고 선언한 것은 신앙적인 개종을 뜻합니다. 

룻은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16절)고 하였습니다. 

자기의 민족과 종교를 버리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온다는 선언입니다.  그 당시의 시대적인 정서나 사회적인 통념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발상입니다.  저는 이것이 시어머니인 나오미의 사랑 때문인지, 나오미의 신앙 때문인지...정확하게 구분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모압에 사는 룻이 언제 여호와를 알았겠습니까? 결혼해서야 여호와를 알았지만,  그 시댁조차  먹고 살기위해 이스라엘을 떠나온 집안 아닙니까? 그렇게 신앙심이 투철했다고 보기는 어렵지 않습니까?  결론은 룻의 시어머니를 향한 효심입니다. 효도하려는 결심이 종교와 민족조차 버리도록 한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효도는 이렇게 강한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의 희생(=사랑)이 있습니다. 

룻은 이방인, 그것도 모압족속의 여인입니다.  모압족속의 시작은 아브라함의 조카 ‘롯’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심판을 받아 멸망을 한 후, 롯의 큰 딸이 아버지를 술 먹이고, 아버지와 동침하여 낳은 아들이 모압입니다.  아기 모압을 본 아버지이자 동시에 할아버지인 ‘롯’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모압은 시작부터 불효의 결과요, 불륜의 자식입니다.  그리고 모압 족속은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가나안으로 들어갈 때 적극적으로 이스라엘을 방해하고 타락시킨 민족입니다.  

그래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신23;3)“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속한 자는 십 대뿐 아니라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여호와의 총회에 영원히 들어오지 못하는 버림받은 이방인의 땅에서 온 한 여인이 있는데, 그 여인이 효심(孝心)으로 충만한 ‘룻’입니다.  
  
효심이 지극한 룻은 베들레헴에서 보아스를 만났습니다.  보아스와 결혼하고 결국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됐습니다. 룻기 4장 13절에 보면,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고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를 임신하게” 하셨다고 성경이 기록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임신하게 하신 이 아이가 ‘오벳’입니다.  (4;17)“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그리고 나중에는 예수님께서 이 집안에서 태어납니다.  성도여러분, 율법에 따르면 절대로 모압이나 암몬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못됩니다.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압 여인 룻은 이스라엘 백성이 됐을 뿐만 아니라, 다윗왕의 조상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들어가는 여인이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희생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신 율법의 말씀을 넘어서 룻을 받아들입니다. 룻의 지극한 효심이 하나님의 율법조차 통과한 것입니다.  

효(孝)는 율법(律法)을 초월(超越)할 수 있습니다.  효는 율법조차 뛰어넘는 큰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자기가 정한 율법의 말씀을  어기시는 하나님을 우리가 비난할 수 있을까요?  정답은 십계명(十誡命)을 보시면 됩니다.  십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있지요. 5계명이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입니다. 출20;12절을 합번 같이 읽어볼까요?  

(출20;12)“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효(孝)는 약속 있는 첫 계명입니다.  효는 살인보다 간음보다, 거짓말보다  앞에 있습니다. 효는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입니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룻의 효심을 크게 보시고, 기뻐하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룻이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고, 예수님의 계보에 든 것은 온전히 그녀의 효심 때문에 받은 상급이요, 축복입니다. 

성도여러분,  제가 이 설교를 준비하면서 크게 놀란 것이 있습니다.  성경말씀에 있는 공통점인데요... 인간에게 주신 첫 계명 “자녀들아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5계명이 부모가 아니라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또한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잠1;8,9) 로 시작하는 잠언 말씀도 그렇고, 대부분의 잠언 말씀이 부모에게 주시는 말씀이 하나(1)라면 자녀에게 주시는 말씀은 아홉(9)입니다.  에베소서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2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3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4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엡6;1-4)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은 3절인데, ‘아비들아’ 하시는 말씀은 1절 뿐입니다. 즉 성경은 몇배나 많은 말씀을 자녀들에게 주시면서 자녀의 효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대학교에서, 심리학이나 상담학에서 배운 학문은 그 반대입니다. 사회에서 배운 모든 지식은 부모에게 문제가 있고,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를 어떻게  치료하는가...하는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즉 부모가 바뀌어야 하고, 사회의 기득권을 갖고 있는 어른들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이제껏 내가 배운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반대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면 대부분의 사회문제가 해결된다고 합니다. 불효가 모든 인간 문제의 바탕에 있으니,  효도야 말로 대부분의 문제의 해결책이다 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 성경인 ‘룻기’에서도 나오미의 사랑도 중요하지만, 룻의 효심이 룻기의 주제입니다.   저의 생각에도 100만큼을 부모가 가지고 있다면, 그중에서 80~90을 자녀에게 줄 것이고, 100을 다 주는 부모도 상당할 것입니다. 아니 빚을 내어서라도 자녀에게 줍니다. 그러나 100만큼을 가진 자녀가 그 가진 것을  부모에게 효도로 돌려 드리는 것은 얼마나 될까요?  80~90을 효도로 돌려주는 자녀는 찾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20~30만 효도로 돌려주어도 큰 효자, 큰 효녀 소리를 들을 것 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의 해결은 ‘자녀의 효’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부모는 어차피 자녀를 사랑하니까... 남은 것은 자녀의 효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습니다.

*자기를 포기하는 나오미의 사랑을 우리가 보았습니다.    

*그 시어머니의 사랑에 감동하여 자기의 민족과 신앙마저 포기하고 끝까지 시어머니를 모시겠다는 룻의 효심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정하신 율법마저 넘어서 다윗과 예수님의 족보로 룻을 받아들이시는 하나님의 사랑하심도 우리는 보았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우리들이 정말 마음에 품고 살아가야 할 것이 무엇인가요? 이 죄 많은 사회를 바꾸고 변화시키는 것이 무엇인가요? 그것은 ‘효도’입니다.  효도야 말로 우리 신앙인의 본분입니다.  부모님에게 효도하고, 하나님께 효도할 것을 다시 한 번 결심하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