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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버이주일] 어른이 되고자하는 자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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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되고자하는 자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합니다. (마 18:1-5)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얼마 앞둔 시점에서 제자들이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아마도 이 질문은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오래동안 가슴에 묻어 두었던 질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것은 “천국에서는 누가 큰자인가?”라는 질문이었습니다. 마가복음서의 기사에 의하면 제자들이 가이사랴 빌립보를 떠나 가버나움으로 오는 도상에서 이 질문을 가지고 제자들사이에 논쟁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한 어린아이를 불러 제자들앞에 세우시고 가르치시기를 “--너희가 돌이켜 어
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큰자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한국 문화권에서는 큰 분을 가르켜 어른, 어르신네라고 불러 왔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의 교훈을 한국식으로 표현하자면 어른이 되려면 먼저 어린이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 또 하나의 믿음의 역설이 있습니다. 역설이란 모순되어 보이지만 진리인 것을 가르치는 말입
니다.

지난 주일은 어린이 주일이었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지난 주일의 교훈의 핵심이 어린이의 소중함이었다면 오늘 어버이 주일의 교훈의 핵심은 어른들의 소중함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어린이와 어른의 소중함을 놀라운 진리의 역설로 가르치십니다. 어린이는 어른같이 다루어 질수 있어야하고, 어른은 어린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예수님은 천국에 들어갈수 있는 성숙한 인격의 질로서 ‘어른아이다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물론 성경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벗어야 한다는 교훈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어린아이의 유치함, 어린아이의 나약함, 어린아이들의 흔들림등에 대한 적지않은 경고를 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가 어린이에게서 배울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들 성인들이 이 어린이들에게서 배울 것들은 천국백성들의 인격적 본질을 형성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 천국백성들이 배워야 할 어린아이다움의 특성은 무엇일까요?


1.어린이의 신뢰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를 어른과 비교할 때 가장 현저한 대조적인 특성은 신뢰성일 것입니다. 어린이는 잘 믿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믿지 못합니다. 종종 우리 어른들이 어린이들에게 주의시키는 말 가운데는 “사람 다 믿지 말라‘는 말 아닙니까? 어른들은 일반적으로 자기의 상처받은 혹은 배반당한 인생 경험 때문에 세상을 믿지 못합니다. 사람들을 믿지 못합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믿지 못함으로 인하여 하나님도 신뢰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없이 우리는 결코 구원받을수도 천국에 들어 갈수도 없다고 가르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이 혹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준 상처에도 불구하고 다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시람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는 얼마나 잘 믿습니까? 그들은 친구를 믿습니다. 이웃을 믿습니다. 선생님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습니다. 어렸을 때 믿음을 갖지 못하면 어른이 될수록 늙어 갈수록 믿음갖기가 더욱 어려워 진다는 것은 통계학적인 진리입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은 믿지 못할 여러 배신의 경험으로 가득차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음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결코 창조적인 인생을 살아갈수 없습니다. 수학의 공식은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믿음의 전제(명제)를 수용하지 않고는 수학도 풀리지 않습니다. 과학자가 자기의 실험이나 탐구의 결과를 믿지 못한다면 그의 실험이나 탐구가 진행될수 있겠습니까? 사업가가 자기가 착수하는 사업의 결과를 믿을수 없다면 의욕적인 사업의 추진이 가능하겠습니까? 정치가가 자신의 선출을 믿지 못한다면 또한 자기의 정치참여를 통한 보다 낳은 세상의 개혁을 믿을수 없다면 정치에 투신할수 있겠습니까? 

교육가가 자기의 교육을 통하여 학생들의 배움과 학문의 진보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교육이 가능하겠습니까? 의사가 자기의 진단과 치료를 믿을 수 없다면 진료가 가능하겠습니까? 하나님과의 관계의 기초도 믿음입니다. 

잘 아시는 히브리서11:6의 말씀을 다시 묵상해 보십시오.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것과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예수님의 구주  되심에 대한 믿음-이 믿음 없이 우리는 결코 하나님의 자녀가 될수 없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영접하는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요한1:12)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2.어린이의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단순성의 반대는 복잡성입니다. 어른들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그러나 어린이는 단순합니다. 단순하기 때문에 잘 믿고 잘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금세기의 영성운동의 큰 스승인 리챠드 포스터는 단순성이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의 트레이드 마크(trade mark)이어야 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그는 이어서 단순성의 두가지 표현은 솔직함과 만족함이라고 가르칩니다. 단순성은 솔직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투명합니다. 그는 거짓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의 사고는 복잡합니다. 여러 가지를 계산하기 때문합니다. 어린이가 솔직할수 있는 것은 계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손익계산을 다하고 예수님 따를 수 있겠습니까? 요즈음 수요예배에 12제자를 공부하고 있습니다만 처음 제자들에게 공통된 하나의 특성이 있습니다. 바로 이 단순성입니다. 단순하게 믿고 단순하게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순함이 세상을 감동시키는 힘인 것입니다.

단순성의 또 하나의 표현은 만족함입니다. 단순한 사람은 단순한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의 만족은 현재에 있습니다. 그는 미래를 생각하며 미리 걱정하지 않습니다. 어린이를 보십시오. 별것아닌 것 가지고 기뻐하며 만족합니다. 누가 어린이에게 고가의 장난감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습니까? 어른들입니다. 어린이들에게는 장난감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종이조각 하나, 떨어진 단추하나, 나무 가지 하나도, 기어다니는 곤충하나도 모두 신기한 장난감입니다. 이것들과의 놀이에 빠져 있는 어린이들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지켜보십시오. 행복함 그 자체가 아닙니까? 

지나치게 결과 중심적이고 목적 지향적인 오늘의 가치관은 현대인들에게서 단순한 행복을 빼앗아 가고 말았습니다. 어떤 수도사 지망생이 산위 높은 곳에 있는 수도원을 찾아올라 와서 큰 스승앞에 엎드려 진리를 배우고 싶다고 말하자 이 스승은 젊은 수도사 지망생에게 “산위에 오르는 동안 무엇을 보았느냐?”고 묻습니다. 그는 수도원을 찾느라고 미쳐 주의를 기울이지 못했다고 하자,“네가 산길을 걸어 오르는 동안 지나친 그 많은 꽃들의 행복과 시내물의 노래소리를 떠나 어디에서 너는 진리를 찾고 행복을 구하겠느냐”고 되돌려 보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눈을 떠서 보면 우리 주변에는 지금 여기서도 만족할수 있는 행복이 지천으로 늘어져 있습니다. 내가 숨쉴수 있는 행복, 사랑하는 사람들과 어울릴수 있는 행복, 하나님을 찬양하고 예배할수 있는 행복, 이런 단순함의 눈이 열린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서도 천국을 보고 누리는 자가 될 것입니다. 이 단순성을 배워야 합니다. 어린이에게서 배워야 합니다.


3.어린이의 개방성을 배워야 합니다.

개방성은 열린 마음입니다. 호기심이라고도 할수 있습니다. 실로 어린이의 특성은 끊임없는 호기심이 아니겠습니까? 열린 마음의 반대는 닫힌 마음입니다, 폐쇄성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 것에 대한 기대가 없습니다. 다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더 이상 탐구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대부분의 성인들의 의식구조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꿈이 없습니다. 발전이 없습니다. 호기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어린이를 관찰해 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새롭습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탐구하고자 합
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더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더 알고 싶어하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의 신비를 더 알고 싶어합니다. 이것이 바로 천국백성들의 특성이 아닙니까? 그런데 당시의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 본질적인 것들에 대한 호기심을 상실한 채로, 비 본질적인 것들을 가지고 논쟁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천국에 대한 호기심보다도 천국에서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앉게 되는 것에만 관심이 고정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진정한 어른이 되려면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개방성이야 말로 우리를 젊게하는 비밀입니다. 유대인 랍비 시드니 그린버그는 정신적인 청년과 정신적인 노인의 차이를 이렇게 구별했습니다.

“우리가 사람들을 믿는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의심으로만 대한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받기보다 주고자 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즐길 것을 즐길줄 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인생이 뜻대로 안된다고 해서 꿈을 포기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예로부터 존재한 편견에만 사로잡혀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성공을 위하여 일하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공상만 일삼고 있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매력적인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더 이상 아름다움에 관심이 없다면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사랑을 찾고 있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고독을 떠나지 못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아직도 행복을 추구한다면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려 하지 않고 행복을 찾는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우리가 사랑을 주고 받을줄 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받기만을 기대한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모든 것은 나의 성실성에 달려 있다고 믿고 아직도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면 우리는 청년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노인이다.”

오늘은 어버이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는 우리교회 모든 어버이들께서 이런 개방성을 지닌 어린이의 마음으로 혹은 청년의 마음으로 살아가시는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개방성은 창조력의 원천이요 우리가 창조할수 있는 한 인생은 아직도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소위 창조적인 계절이 지났다고 생각하는 노년기에 오히려 더 위대한 창조를 남긴 사람들의 기록으로 가득차 있습니다. 우선 성경을 보십시오. 

모세는 80세에 자기 민족을 출애굽시키는 위대한 모험을 시작했습니다. 안나 할머니는 84세에 메시야 대망의 기도가 응답받는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갈렙은 85세에 아직도 “그 산지를 내게 주소서”외치며 미완
성 과업을 향한 인생의 도전을 시작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90세에 주께로부터 환상을 받아 인류 역사에 대한 불멸의 계시를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된 생명 이삭을 품에 안을수 있었습니다.

대령 샌더스는 나이 66세에 유명한 캔터기 프라이 치킨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소설가 홈스는 70세에 ‘커피잔 너머’라는 명작을 저술했습니다. 레이건은 70세에 미국 대통령이 되어 미국 역사상 가장 인상깊은 스피치들을 남긴 대통령으로 또한 통치기간 가장 백성들을 행복하게 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습니다. 

괴테는 80세에 파우스트를 완성했습니다. 전도자 빌리 그래함은 80대에 아직도 왕성한 열정으로 세계적인 전도 집회들을 인도하며 영혼들을 주께로 인도하고 있습니다. 시인 로버트 부라우닝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나와 함께 나이를 먹자./가장 좋은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나니/인생의 끝 그것은 처음을 위하여 만들어졌나니/하나님을 신뢰히라. 전체를 보라. 두려워 하지말라.” 

그는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내가 처음 태어날 때 모든 사람들은 웃었고 나는 홀로 울었나니. 그러나 내가 죽는 날 모든 사람들은 울고, 나는 홀로 웃을수 있는 삶을 살자”

그렇습니다. 젊음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가 아니라 태도입니다. 우리교회 모든 어르신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하시고 어린이의 믿음, 그 단순성 그리고 개방성을 가지고 주님을 더 깊이 알아가시는 영원한 소년 소녀, 영원한 청춘을 누리시는 어버이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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