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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내일을 향한 가능성 (막 5:35-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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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을 향한 가능성 (막 5:35-43)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날 없다는 속담이 있습니다. 
일곱 명의 자식을 둔 어느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아이들을 키우느라 매우 지쳐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자녀를 ‘일곱 개의 무거운 짐’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밖에서 놀던 한 아이가 다리가 부러져 들어왔습니다.
어머니는 신세를 한탄하며 아들을 치료해줬습니다.
그리고 남편에게 무슨 좋은 소식이 없느냐고 물었습니다.
‘좋은 소식이 있지. 우리 아이 일곱 중 여섯 명은 다리가 부러지지 않았고 온종일 잘 놀았어’

그래요 자식이 건강하게 잘 자라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때 유행했던 말 ”공부 못해도 좋다 건강하게만 자라다오”라고 할 수 있는 부모가 과연 몇이나 될까요? 

먼저 생각할 것은 자녀를 키우는 과정에 많은 아픔의 시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날 갑작스럽게 직장에 사표를 내고 저 남쪽 목포로 내려가 가난한 전도사의 생활을 시작한 사위를 보면서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를 알지도 못하셨던 분이셨건만 장모님께서는 오히려 그런 사위를 축복해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런 장모님께서 다시금 경상도 농촌으로 단독목회를 떠난 사위를 보기 위해 그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찾아주셨다가 그만 연탄가스에 중독되셨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시골교회 전도사는 그런 장모님을 대구 큰 병원이 아닌 동네 군소재지에 있는 작은 병원으로 모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행히도 장모님은 회복되셔서 서울 댁으로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후유증이 치매로 나타나 처가 식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누구하나 그런 와중에도 오히려 저희를 격려해 주시곤 했습니다. 장인께서는 그런 장모님을 지성으로 돌보시다가 어느 날 갑작스럽게 식사를 하시다가 그대로 쓰러지셔서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얼마 후 서울에 잠시 올라왔던 차에 처가에 잠시 들렀다가 다시 시골 목회지로 내려가려고 준비하다가 보니 어린 딸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치매로 정신이 온전치 못하신 장모님과 함께 감쪽같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래 온 동네를 다 헤매며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습니다. 그래 급히 실종 신고를 하고 전단지를 만들어 만나는 사람마다 나누어주며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어요. 마침 그날이 토요일이었기에 할 수 없이 저는 시골 교회로 내려갑니다. 

장로님께서는 자기가 예배를 인도할 터이니 아이부터 찾으라고 하셨지만 목회자로서 차마 그럴 수가 없어서 저만 홀로 시골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는 온 교회와 함께 기도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고 눈물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월요일 일찍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서울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궁금하여 처가로 전화를 넣었더니 놀랍게도 아이를 찾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딸과 인상착의가 똑같은 아이가 있다고 경찰로부터 연락이 그곳으로 다들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 처가로 가서 기다리니 과연 우리 딸이 맞았습니다.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하기도 하면서 다시금 찾게 하여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지금도 아이를 잃어버린 이야기들을 듣게 되면 남의 이야기 같지가 않습니다. 누구보다 그 아픔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게 다가 아닙니다. 송구영신 예배를 준비하면서 막 돌이 지난 어린 아들 우유를 먹이기 위해 컵에 물을 따라 식히고 있는 중에 아이가 그 컵을 잡아당겨 그만 뜨거운 물을 아이 얼굴에 가득 뒤집어썼습니다. 그래 급히 병원으로 들고 뜁니다. 다시금 화상 전문 병원으로 옮겨서 일주일 넘게 치료하는데 정말 막막합니다. 다행히 온 교회 성도들의 기도대로 얼굴에 화상의 흔적이 남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사실 경우는 다르다고 해도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 이렇게 가슴이 철렁할 때가 어찌 한두 번이겠습니까? 자녀들 때문에 눈물을 흘려보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때로는 열이 들끓는 아이를 안고 병원을 향해 이리 뛰고 저리 뛰던 때가 왜 없었겠습니까? 밤을 새하얗게 지새울 때가 어찌 한두 번이겠습니까? 자녀들로서는 자기 혼자 다 큰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부모로서 내게 해 준 일이 뭐냐고 하겠지만 그 뒤에는 이렇게 눈물로 돌보는 부모가 있음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데 말로는 고맙다고 하지만 그걸 진정 마음으로 깨닫게 되기까지는 내가 자녀를 키워보며 그런 어려움의 시간들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아하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회당장의 신분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 당시로서는 크게 존경받는 자리입니다. 누구라도 그 마을에서는 다 고개를 숙여 공경을 표시합니다. 그런 만큼 아주 자존심도 강합니다. 누구 다른 사람에게 아쉬운 이야기하는 법이 없습니다. 그런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을 찾아옵니다. 그 이유는 딸이 병이 들어 죽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말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그런 자식입니다. 이제 겨우 12살입니다. 그런 딸이 죽어가고 있는데 아버지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문제가 있다고 하면 그건 이렇게 하고 저건 저렇게 하라고 상담도 해 주고 권면도 해주고 교훈도 해주곤 했는데 막상 자기 사랑하는 딸이 아프고 보니 누구 말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지금까지 회당장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르쳐오고 있었지만 그런 선생으로서의 권위도 지금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하나님에 대해서 알고 있는 대로 하나님께 간구도 했지만 아무런 소용도 없이 계속해서 더 상태가 나빠져만 가는 딸을 보면서 억장이 무너집니다. 

그러던 차에 많은 병자를 고치고 귀신들린 자를 고치시며 심지어는 죽은 자까지도 살려내셨다는 예수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는 순간 그의 절망적인 가슴이 뜨겁게 방망이질하기 시작합니다. 마침 그 예수가 가까이까지 오셨다는 겁니다. 어쩌면 그 아내가 먼저 빨리 그분을 모셔오라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어찌됐든 그는 체면불구하고 예수를 찾아옵니다. 그리고는 내 집에 가달라고 내 딸이 죽어가고 있다고 가서 좀 고쳐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예수가 누굽니까? 당시 갑작스럽게 나타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나뉘었습니다. 아주 위험천만한 사람이라는 쪽도 있고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분이 틀림이 없다고 그분이 선지자임이 분명하다고 이야기하는 쪽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은 죽어가는 딸을 살리는 일이 더 급합니다. 그래 체면 불구하고 예수를 찾아왔습니다. 그리고는 내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내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을 하였던 것이고 예수께서 승낙하여 지금 그 집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죽어가는 자식을 지켜보는 부모의 마음이 어땠을까요? 오죽하면 회당장의 신분에도 불구하고 예수께 찾아와서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물에 빠진 사람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정말 그런 심정이 아니겠습니까? 거기에 무슨 체면이 있고 무슨 부끄러움이 있겠습니까? 
우리네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다만 표현의 차이가 있을 뿐이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 공통점은 자식을 키우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많은 아픔들입니다. 그런데 더 큰 아픔은 그렇게 자식을 키웠건만 자식이 거들떠도 안보고 오히려 그런 부모에게 섭섭하다는 말만 할 때는 정말이지 지난 세월들 내가 뭘 했던가 싶기도 하고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내가 그 오랜 세월들을 그토록 수고했던가 싶기도 해서 착잡하지만 합니다. 하지만 자녀들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를 생각해 보시고 정말 자녀들의 입에서 고맙다는 말이 진정에서 우러나올 수 있도록 자녀들을 이끌어주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부모의 욕심이나 무관심 때문에 자녀에게 상처를 주지는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자녀 양육에 있어서 가장 큰 아픔은 부모가 자녀를 사랑해서 한다고 하면서 하는 일들이 오히려 자녀를 아프게 한다는 것입니다. 결국 자녀들의 생각과 부모의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발생하는 일입니다. 부모가 생각하는 자녀가 이렇게 되었으면 하는 길도 좋지만 자녀들이 원하고 되고 싶어하는 그 길을 갈 수 있도록 뒷받침되는 일들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철저히 부모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아이들을 키우려고 합니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자녀들의 마음에 생기는 분노입니다. 부모들아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고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바울 사도는 권면하거니와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뮬론 어떤 경우에도 자녀가 화나게 만들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자녀들이 이건 아닌데 하고 그 마음에 분노를 품게 만드는 그런 행동들이 부모들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비교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와 다른 아이 또는 자녀들 간에 서로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 각자 나름의 개성이 있고 삶이 있습니다. 너만 왜 유독 그러냐고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나만 유독 그래서 안 되는 것은 또 무엇입니까? 오히려 오늘의 시대는 유독 그런 사람이 잘 되는 세상이다. 결국 세상은 역발상의 세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모두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사는 것은 그저 평범한 삶으로 그치지만 역발상의 생각을 가진 사람은 새 세상을 열어가는 앞선 일꾼이 된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 길이 결코 쉽다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이 바로 세상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입니다. 또 하나 자녀를 상처받게 만드는 것은 편애입니다. 소위 차별하는 것입니다. 차별하지 마십시오. 누구는 되고 누구는 안 된고 하는 식의 편가름을 하지 마십시오. 남자는 여자는 안 된다는 것도 아닙니다. 너는 어려서 안 된다고도 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도 귀한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어쨌든 자녀의 마음에 상처를 주는 일은 절대 금물입니다. 상처로부터 나오는 것은 피눈물뿐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음으로부터 진짜 욕심을 내려놓고 사랑해 주십시오. 그럴 때 자녀들의 길이 아름답게 열려지게 됩니다. 내일을 열어가는 사람되도록 자녀들을 이끌어주는 길은 편견없는 사랑입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자녀들과 더불어 행복한 사회를 이루어나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렇다면 자녀들을 복되게 성장시키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다른 것은 다 잃는다고 해도 결코 잃어서는 안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아니 우리 자녀들에게 반드시 있어야 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의 자녀들뿐 아니라 사람들이 살아감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믿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신뢰입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우리는 서로를 믿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면 이것처럼 불행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고 자녀들을 가르치는 분도 계십니다. 아니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된다면 부모는 어떻게 믿습니까? 그럼 부모의 말도 믿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누구도 믿을 수 없다면 어찌 사람들 사이에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서로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식당인들 어떻게 가겠습니까? 가짜를 파는 사람도 있습니다. 엉터리를 파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것도 사지 말고 먹지 말아야 합니까? 중국에서는 심지어 달걀까지도 가짜가 있다는데 가게에서 파는 생수 가운데 70%가 가짜라고 하는데 그럼 어떻게 합니까? 그래도 진짜겠거니 하고 사서 마셔야 하지 않나요? 

아니면 전부 가짜 같으니 물도 마시지 말고 그냥 목말라 죽어야 하나요? 아니 길을 가는데 마주 오는 사람이 갑자기 칼을 휘두를지 어떻게 압니까? 그가 들고 있는 컵에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그런 독이 들어 있는데 그 독을 갑자기 나에게 뿌려댈지 어떻게 압니까? 그럼 아무도 만나지 말아야죠.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기초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 즉 믿음입니다. 

비록 로마의 황제 시저도 가장 사랑했던 부하에 의해 칼에 찔려 죽고 말았지만 그래서 칼에 찔리는 마지막 순간 “브루투스 너 마저도”라고 부르짖었다는 유명한 이야기가 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사귀지 말아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런 세상이기에 더욱 우리 자녀들에게뿐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에 대한 믿음입니다. 비록 속고 또 속을지라도 그래도 끝까지 믿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자녀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이 아닙니까? 때로는 뻔히 속이 들여다보이는 거짓말을 자녀들이 합니다. 그래도 모른 척 하고 넘어갈 때도 있지를 않습니까? 그런다고 해서 미워하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그래서 야단도 칠 때가 있습니다. 매를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녀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녀를 믿어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는 그 순간 아니 그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불러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셨고 그것을 깨달아 하나님을 믿는 그 순간 너는 내 아들이야 너는 내 딸이야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다 하나님의 소중한 아들과 딸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온 세상의 왕이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그 말은 저와 여러분이야 말로 하늘나라 왕자요 공주들이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보잘 것이 없어 보여도 아무리 초라해 보여도 그런 나, 그런 너 역시도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한 번도 믿을 수 없는 모습을 우리들에게 보이신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 약속을 어기신 적도 없습니다. 하나님이야말로 정말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분입니다. 그래서 신실하신 하나님 믿을 수 있는 하나님, 미쁘신 하나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자신은 물론 자녀들에게 반드시 심어주어야 할 것이 있다면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면 그 결과는 망하는 것뿐입니다. 사막을 갈 때 믿을 수 있는 것은 지도와 나침반뿐입니다. 그런데 그 지도를 믿지 못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니 나침반이 고장 난 것이라면 그건 끝장입니다. 나침반은 고장 날 수 있습니다. 지도가 잘못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결코 잘못되실 수 없는 분입니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만들어주신 지도를 따라가면 거기에 오아시스가 있고 거기에 생명의 길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녀들에게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다면 아니 정말 우리와 자녀들이 복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 믿음을 가르쳐 주면 그 믿음 안에서 가장 복된 자로 살아가게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결코 잘못된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무런 고통도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온전한 믿음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훈련하시기 때문에 그 시작은 매우 힘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훈련을 잘 받으면 그 다음부터는 아주 쉽습니다. 

웬만한 것에는 눈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해병대가 그토록 큰 소리를 치면서 해병 동우회라는 것을 만들어놓고 있는 것도 그만큼 그들이 강한 훈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 남겨두지 않습니다.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왕자답게 공주답게 살아가도록 훈련시킨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좋은 왕자 좋은 공주 되기를 포기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을 이겨내야 합니다. 숨이 턱에까지 차도 한 걸음 더 나가다 보면 더 먼 거리도 가뿐하게 갈 수 있는 힘이 내 안에 생겨집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전혀 힘들지 않게 다닐 수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이 없어 보여도, 힘만 들고 헛된 수고를 하는 것처럼 보여도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게 되면 그 하나님의 인도하심에는 아름다운 열매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복된 행복한 인생입니다. 진짜 행복은 믿음 안에 있습니다. 믿음 안에서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기쁨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이 편안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리고 마음이 기쁘고 평안하면 몸도 평안하게 바뀌어갑니다. 점점 더 건강해집니다. 

회당장 야이로에 주신 주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결코 믿음을 잃지 말라는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지만 사람들은 말합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그래요 아프던 딸이 죽었다면 더 이상 고치고 말고 할 것도 없지를 않습니까? 이미 죽었는데요. 한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말씀대로 믿었더니 어떻게 되었습니까? 죽었던 딸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비록 모두가 딸이 죽었다고 슬픔에 잠겨 있지만 그래서 울고불고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고 믿었더니 그 딸이 다시 살아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그렇습니다. 지금은 다 망가진 것 같아도 우리에게 믿음이 있으면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으면 우리의 결국은 죽어도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다 망가진 것 같은데 새롭게 고쳐주실 것입니다. 마치 사고로 다 망가진 차도 자동차 정비소에 들어가서 고치고 난 다음 보면 거꾸로 더 새 차가 되어 있지를 않습니까? 아 그러면 새롭게 되기 위해서 우리는 망가져야 되겠네 하고 일부러 사고를 치라는 뜻이 아니라 다 망가진 차도 새 것처럼 고치시는 그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미 하나님은 우리를 새롭게 만드셨습니다.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우리 몸과 마음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몸과 마음으로 바꾸어놓으셨습니다. 그 믿음을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럴 때 그들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이끌어 가심으로 이윽고 복되게 만들어주십니다. 이런 복된 가정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 소녀를 일으키셨던 달리다굼의 역사입니다. 죽은 소녀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서 달리다굼 하셨더니 죽었던 소녀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이 달리다굼이라는 말 원래대로 발음하면 텔리타 쿠미인데 이는 “귀여운 소녀야 일어나거라”라는 뜻입니다. 주님 말씀하시니 죽었던 나사로도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너라.” 이미 죽었는지 나흘이나 되었던 나사로였지만 그런 나사로가 다시 살아났습니다. 

죽은 자도 살리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우리와 자녀들을 복되게 하실 수 없겠습니까? 당연히 하나님은 우리를 복되게 하시는 분입니다. 우리를 부르실 때 이미 내가 너에게 복을 주겠다. 너를 통해서 많은 사람이 복을 받도록 복의 통로가 되게 해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약속을 분명히 믿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을 따라 부지런히 살아가노라면 어느 틈엔가 우리의 삶이 정말 행복하게 바뀐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작은 것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하루하루가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지막으로 맥아더 장군의 아버지의 기도를 소개합니다.

주여! 나에게 이런 자녀를 주옵소서. 
약할 때에 자기를 돌아볼 줄 아는 여유와,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는 용기와,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한 자녀를 주옵소서.

생각해야 할 때에 고집을 세우지 말게 하시고 
주를 알고 자신을 아는 것이 지식의 기초임을 아는 자녀를 내게 허락하옵소서.

원하옵나니, 
그를 평탄하고 안이한 길로 인도하지 마옵시고 
고난과 도전에 직면하여 항거할 줄 알도록 인도하여 주옵소서. 
그리하여 폭풍우 속에서 용감히 싸울 줄 알고 
패자에게 관용할 줄 알도록 가르쳐 주옵소서.
그 마음이 깨끗하고 그 목표가 높은 자녀를, 
남을 정복하려고 하기 전에 먼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자녀를, 
장래를 바라봄과 동시에 지난날을 잊지 않는 자녀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런 것들을 허락하신 다음, 
이에 더하여 내 자녀들에게 유머를 알게 하옵시고 
생을 엄숙하게 살아감과 동시에 생을 즐길 줄 알게 하옵소서. 
자기 자신에 지나치게 집착하지 말게 하시고 
겸허한 마음을 갖게 하시어 참된 위대성은 소박함에 있음을 알게 하시고, 참된 지혜는 열린 마음에 있으며, 
참된 힘은 온유함에 있음을 명심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나 아버지는 
어느 날 내 인생을 헛되어 살지 않았노라고 
고백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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