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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깨동무 교회 (출 3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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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깨동무 교회 (출 36:2-7)


[모세는, 브살렐과 오홀리압과, 주님께서 그 마음에 지혜를 더하여 주신 기술이 있는 모든 사람, 곧 타고난 재주가 있어서 기꺼이 그 일을 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을 불러모았다. 그들은 이스라엘 자손이 성소의 제사에 필요한 것을 만드는 데 쓰라고 가져온 모든 예물을 모세에게서 받았다. 그런 다음에도 사람들은 아침마다 계속 자원하여 예물을 가져 왔다. 그래서 성소에서 일을 하는 기술 있는 모든 사람이, 하던 일을 멈추고 모세에게로 와서, 이르기를 “백성들이, 주님께서 명하신 일을 하는 데에 쓰고도 남을 만큼 많은 것을 가져 오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진중에 명령을 내려서 ‘남자든 여자든, 성소에서 쓸 물품을 더는 헌납하지 말라’고 알리니, 백성들이 더 이상 바치지 않았다. 그러나 물품은 그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 

• 교회 점검표

교회 설립 102주년을 허락하신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곡절 많은 역사의 한복판을 굽이굽이 흐르며, 때로는 모래톱도 만들고, 때로는 급류처럼 일렁이기도 하면서 우리는 오늘의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 속에는 많은 성도들의 이야기가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이야기는 기쁨과 슬픔, 낙담과 희망, 갈등과 화해의 순간들이 만들어내는 삶의 무늬였습니다. 주중에 화장실 공사를 하는 인부가 벽돌을 쌓아올리는 모습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한 켜 한 켜 쌓을 때마다 수평과 수직의 균형을 잡기 위해 세심하게 마음을 쓰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우리가 누리는 모든 것들은 누군가의 정성어린 손길에 의해 그곳에 있음을 절감했습니다. 건물로서의 교회당은 30년 째 이곳에 서있지만,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는 지금도 여전히 건축 중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신비를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며, 그리스도 예수가 그 모퉁잇돌이 되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건물 전체가 서로 연결되어서, 주님 안에서 자라서 성전이 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도 함께 세워져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가 됩니다.”(엡2:20-22) 

과연 우리는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하실 처소입니까? 오늘 우리 공동체에, 그리고 우리가 맺고 있는 관계 속에 하나님이 마음 편히 거하실 수 있습니까? 우리는 이 질문 앞에 서있습니다. 누구도 ‘그렇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지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깊은 영감을 주고 있는 작가 핍립 얀시(Philip Yancy)는 살아있는 교회의 표징을 세 가지로 제시합니다(<>, Zondervan, 2009, p. 87 참조). 

첫째는 다양성(diversity)입니다. 오순절 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 사이를 가르고 있던 분리의 장벽을 무너뜨렸습니다. 남자냐 여자냐, 유대인이냐 이방인이냐, 의로운 사람이냐 죄인이냐, 주인이냐 노예냐 하는 가름이 일거에 무너진 것입니다. 초대교회는 그래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섞여 사는 밥상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가장 건강한 생태계는 다양성을 특징으로 합니다. 교회는 모든 연령과 계층의 사람들이 함께 모여 예배를 드리고 친밀한 사랑을 나눌 때 그리스도의 몸으로 든든히 서 가게 됩니다. 

둘째는 일치(unity)입니다. 다양한 경험과 생각을 가진 이들이 모여서 서로 갈등하고 싸운다면 교회는 생명 공동체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 일치의 중심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은 서로 원수 된 사람들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엡2:15)셨습니다. 우리의 자아가 예수 안에서 녹아질 때 우리는 평화의 새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셋째는 사명(mission)입니다. 사명은 예수님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을 당신의 사명으로 삼고 사셨습니다. 생명이 넘치는 세상은 사랑과 이해와 돌봄이 있는 곳에서 열립니다. 자기에게 속하지 않은 이들의 유익을 위해 일하는 공동체야말로 예수의 교회라 할 수 있습니다.

• 성막 건설의 의미

어떻게 하면 이런 교회를 세워나갈 수 있을까요? 저는 출애굽 공동체가 세웠던 성막에서 그 대답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우리는 출애굽 공동체가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 애굽의 전제 정치 하에 시달리던 밑바닥 계층 사람들로 구성되었음을 압니다.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우리를 구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고 모세를 보내 그들을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노예들의 해방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바로는 열 가지 재앙을 겪고서야 그들이 떠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애굽 온 땅에 재앙이 내렸지만, 히브리들은 피해를 보지 않았습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바다가 갈라지는 기적도 체험했습니다. 하늘에서 만나와 메추라기가 내리는 기적도 맛보았고,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는 기적도 목격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시내산 앞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과 언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제 너희가 정말로 나의 말을 듣고, 내가 세워 준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가운데서 나의 보물이 될 것이다. 온 세상이 다 나의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선택한 백성이 되고, 너희의 나라는 나를 섬기는 제사장 나라가 되고, 너희는 거룩한 민족이 될 것이다.”(출19:5-6)

하나님은 천덕꾸러기로 살아가던 노예들을 향해 ‘나의 보물’이라 이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제사장 나라’, ‘거룩한 민족’이 되게 하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전제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고, 언약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 그들은 하나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인종이나 피부색이나 살아온 지역이 아니라 ‘신앙’에 바탕을 둔 새로운 나라 말입니다. 하지만 영연방 유대교 최고 랍비인 Jonathan Sacks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모래알과도 같았던 히브리들을 하나의 언약 공동체로 탈바꿈시킨 것은 ‘성막 건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구성원들이 함께 창조적인 일에 동참할 때 비로소 공동체가 세워진다고 말합니다. 

시내산에서 내려온 모세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백성 가운데 머무실 성막을 지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성막은 백성들에게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상기시키는 가시적 상징물이 될 것이었습니다. 광야를 진군해 나가던 출애굽 공동체는 여러 가지 위협에 직면하곤 했습니다.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불안감이 있었지만, 그들은 구름 기둥과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숙영지를 세울 때마다 그 중앙에 성막을 세움으로써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었습니다. 바퀴살 서른 개가 하나의 중심에 연결될 때 수레가 움직일 수 있는 것처럼, 출애굽 공동체는 중심이신 하나님과 연결될 때 비로소 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 기여에 경중은 없다

성막의 필요성은 모두가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는 백성들에게 각자의 소유 가운데서 주님께 바칠 예물을 가져오라고 말합니다. 성소를 세우는 데는 금, 은,․ 동, 청색 실, 자주색 실, 홍색 실, 가는 모시 실, 염소 털, 붉게 물들인 숫양 가죽, 돌고래 가죽, 아카시아 나무, 등잔용 기름, 향품, 홍옥수를 비롯한 각종 보석 등이 필요했습니다. 과연 이런 필요에 백성들이 응답했을까요? 그런데 정말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간결하게 보도합니다. 

“마음이 감동되어 스스로 그렇게 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나서서…갖가지 예물을 주님께 가져 왔다”(35:21), 

그들은 비상시를 대비해 여퉈두었던 것을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자재 헌납을 보도하는 대목에서 성서 기자가 거듭해서 사용하고 있는 표현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원하는 사람들’, ‘스스로 바치고 싶어 하는 모든 남녀’라는 말입니다. 조금 개념적인 표현으로 바꿔 말하자면 백성들이 강요에 의해서 혹은 체면 때문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동참했다는 말입니다. 그러한 자발성의 비밀은 ‘마음이 감동되어’라는 말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신적인 신명이 그들에게서 이기심의 껍질을 벗겨냈습니다. 사람은 보람을 먹고 삽니다. 뭔가 창조적인 일에 동참한다는 기쁨이 인색한 마음을 압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일에는 강제가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이 된 감격 때문인지 백성들이 바친 물품은 하나님이 명하신 “모든 일을 하기에 넉넉할 뿐 아니라, 오히려 남을 만큼 있었다”(36:7)고 합니다. 기적입니다. 또한 브살렐과 오홀리압 같은 이들은 하나님이 주신 기술과 재주를 바쳤습니다.

교회의 양적 성장을 목표로 삼는 교회는 유난히 헌신을 많이 강조합니다. 헌신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자주 동원되는 것이 부흥회와 신앙간증입니다. 헌금 많이 해서 복 받은 사람 이야기와, 헌금 생활 소홀히 하다가 어려움 겪는 사람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습니다. 많은 이들이 두려움 때문에, 혹은 체면 때문에, 혹은 복 받으려고 헌금을 합니다. 자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강요된 자발성입니다. 어느 분은 광야에서 만든 성막과 솔로몬이 세운 성전을 간결하게 비교합니다.

“자발적 기여로 창조된 성막은 민족을 통합시켰으나 강제 징발된 노동력의 산물인 성전은 민족을 분열시켰다.”(조나선 색스, <<사회의 재창조>>, 298쪽)

솔로몬이 죽은 후 남북 왕조로 분단된 현실을 이르는 말입니다. 성전을 세운다는 미명 하에 백성들에게 부과된 세금과 부역이 사람들을 갈라놓았던 것입니다. 성막 세우기에서 가장 중요한 말은 ‘스스로 원해서’라는 말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스스로 원해서 한다면 즐거운 법입니다. 교회의 김장을 담근다든지 대청소를 할 때도 마지못해 동참하는 이들과 그렇지 않은 이들은 표정에서 벌써 차이가 납니다.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은 각자가 기여한 바가 다르지만, 모든 사람의 헌신이 하나하나 소중히 여겨졌다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가져왔습니다. 금이나 은을 가져온 사람도 있고, 실을 가져온 사람도 있었고, 나무를 가지고 온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여의 경중이 가려지지는 않았습니다. 많이 냈다고 동판에 큰 글자로 새겨 벽에 거는 일도 없었고, 적게 냈다고 무시당하는 일도 없었습니다. 

많이 내도 우쭐거리거나 음성이 높아지지 않았고, 적게 내도 부끄럽지 않았습니다. 함께 어울려 더 큰 세계를 만들어 냈습니다. 和而不同입니다. 일곱 색깔 무지개가 하늘에 걸리면 아무리 무덤덤한 사람이라도 가던 길을 멈추어 선 채 하늘을 바라보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 다른 것들이 어울려 조화를 이루는 게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본능적으로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 바람아, 불어라

한 가족과 세 명의 젊은이가 경북 청송군에서 한집 살림을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그 일을 곁에서 도왔던 어떤 이가 원주의 장일순 선생님께 어떻게 해야 그들이 뜻을 이뤄가며 화목하게 잘 살 수 있을지를 물었습니다. “나 같은 건달이 그런 걸 어떻게 알겠어.” 장일순은 웃으며 이렇게 운을 떼고 말을 이어갔습니다. “그러나 다음 두 가지는 얘기를 할 수 있겠지. 여럿이 모였다면 깃발이 있을 것 아냐, 어떻게 가겠다는? 

그 깃발 아래 모였으니 깃발을 중심으로 해야 할 테지만 깃발을 너무 앞세울 때는 함께 가는 사람 가운데 늦게 일어난다거나 일을 게으르게 하는 사람이 있으면 나무라기 쉽지. 미워하는 마음이 일기 쉽다는 거야. 그럴 때는 말이지, 따뜻한 마음을 갖고 어깨동무를 해서 일으켜 세워 같이 가는 마음이 중요해. 다른 하나는 그렇게 하다 보면 일이 이뤄질 것 아냐? 크든 작든 공이 생긴단 말이야. 그때 그건 내가 잘해서 그렇게 됐다 하지 말고, 같이 가는 사람들 공이다, 이렇게 공을 남에게 넘기라는 거지. 이 두 가지를 지키면 되지 않을까 싶네.”(최성현, <<좁쌀 한 알>>, 245쪽)

참 평이하면서도 분명한 가르침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깃발을 너무 앞세우면 마음에 원망이나 미움이 깃들기 쉽습니다. 그럴 때면 오히려 따뜻한 마음으로 어깨동무를 해서 일으켜 세우랍니다. 그리고 공은 남에게 돌리라는 것입니다. 화목의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도마복음에는 “한 집에 사는 두 사람이 화목하면 그들이 산아 움직여라 하면 산이 움직인다”는 말이 나옵니다. 공동체를 이루려는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들입니다.

하지만 살아있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한 가지가 더 있어야 합니다. 어쩌면 그것이 더 본질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의 임재입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성령 충만을 체험한 후에 ‘어깨동무’가 되었습니다. 말씀을 나누고,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음식을 나누고,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을 떨치고 일어나 복음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장벽은 철폐되었고, 그들의 사랑은 가족의 울타리를 넘었습니다. 요엘 선지자는 주님의 영이 부어지면 일어날 일을 이렇게 예고한 바 있습니다.

“너희의 아들딸은 예언을 하고, 노인들은 꿈을 꾸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볼 것이다.”(욜2:28)

이것은 함께 지어가야 할 세상에 대한 꿈을 공유하게 된다는 말이 아닐까요? 성령의 역사를 강제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성령의 바람이 불어올 길을 마련할 수는 있습니다. 먼저 기도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 까닭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마음의 절실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아픔이 하나님의 아픔임을 안다면 어찌 하루라도 기도하지 않고 지나갈 수 있겠습니까? 또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말씀을 거울삼아 우리 자신을 자꾸자꾸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이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이 아니고는 이 땅에 ‘생명’과 ‘평화’의 성막을 짓고 싶은 우리의 꿈은 완성될 수 없습니다. 어려운 시절을 함께 겪고 나면 운명 공동체 의식이 생겨납니다. 하지만 어려움을 함께 겪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심정에 사로잡혀 창조적인 일을 함께 할 때 신앙 공동체가 태어납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면서, 서로를 원망하지 않고, 공을 서로에게 돌릴 때 우리는 하나님이 머무실만한 집으로 지어져 갈 것입니다. 작년 말부터 제 마음을 떠나지 않는 시편 구절을 읽는 것으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가 걷는 길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길이면, 우리의 발걸음을 지켜주시고, 어쩌다 비틀거려도 주님께서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니, 넘어지지 않는다.”(시37: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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