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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주의 교양과 훈계로 (엡 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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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교양과 훈계로 (엡 6:1-4)


금년에, 우리교회가 수요일 오전 ‘유니게 기도모임’을 시작했습니다. 자녀를 둔 엄마들의 기도모입니다. 참석하는 엄마들 연령층이 참 다양합니다. 임산부도 있고, 영아 엄마, 유아, 유치, 초등, 중고등, 심지어 할머니도 계십니다. 이 기도모임이 하나님 나라 일구는, 다음 세대들을 축복하는 텃밭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으로 낳은,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를 생각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디모데가 가진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입니다. 디모데에게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은 누구로부터 주어진 것입니까? 그 믿음은, 외할머니 로이스와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던 그 믿음이, 디모데에게 傳受된 것입니다. 그 전수 된 믿음이, 디모데를 생각하는 바울의 감사조건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들이 믿는 하나님을 부를 때 부르는 ‘하나님 이름’이 참 많습니다. 그 많은 이름 중 가장 자랑스럽게 부르는 이름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는 이름입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에는, 歷史의 連續性이 있는 이름입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아주 견고한 역사적인 고리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삭↠야곱이라는 ‘이 고리’는 마치 삽겹줄과도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이름이 깨어지지 않는 것이, 福입니다. 복이 무엇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조심스럽습니다만) 이 하나님의 이름이 이빨 빠진 가정,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할아버지↠孫子代로, 아버지↠아들代만, 몇 代를 아주 건너뛰기도 합니다). 

유교적인 동양윤리는, 부모자식관계를 천륜이라 합니다. 하늘이 맺어준 사람사람 사이에 지켜야 할 도리를 천륜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성경을 가만 보면 부모자식관계는, 天倫,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부모자식관계에서 천륜보다 더 중요한 관계가 있다는 이야깁니다. 

성경의 맥을 한번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그 속에 흐르는 맥이 있습니다. 어떻게 그 맥이 이어지고 있습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이삭과 야곱, 야곱과 요셉 그리고는 그 맥이 400년을 훌쩍 뛰어넘어버립니다. 요셉 이후, 누구에게로 이어집니까? 출애굽 지도자 모세에게로 넘어버리고 맙니다(400년을 뛰어 넘습니다). 모세 다음은, 여호수아에게로 이어집니다. 

마태복음 1장에, 하나님 나라 족보가 나옵니다. 그 족보를 보면, 하나님 나라 歷史의 큰 脈을 잇는 두 人物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아브라함이고, 또 한 사람은 다윗입니다. 그러면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계보)라는 큰 제목을 붙이고는, 그 계보에 오른 사람들의 이름을 한 사람씩 언급합니다. 그 이름의 주인공들이 누군지 보십시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유다와 그 형제들, 다말, 베레스와 세라, 헤스론, 람, 아미나답, 나손, 살몬, 라합(女人, 여리고 기생), 보아스, 룻(異邦女人, 모압 사람), 오벳, 이새, 다윗…이렇게 죽 이어집니다. 이 이름들 사이에,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단어가 하나가 있습니다. ‘낳고’, ‘낳고’ 하는 단어입니다. 낳고, 낳고, 이 단어는 무엇을 뜻합니까? 

生産的인 말이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낳았다, 생산했다, 아버지가 되었다, 어머니가 되었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여기 ‘낳고’, ‘낳고’는 누가 누구를 낳았다는 호적관계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낳고’라는 단어 속에는, 대단히 중요한 관계흐름이 흐르고 있습니다. 마치, 볼트와 너트가 서로 조여서 완성된 하나의 큰 물체(엘리베이터 공사, 3등분 해서)를 이루듯이, 하나님 나라를 잇는 맥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스라엘 역사의 속을 한 번 들여다보십시오. 물 흐르듯이 흐르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스라엘 역사의 흐름 속에는 엄청난 역사적인 단절의 사건들이 수없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이어가지 못하는 역사의 단절들이 곳곳에 널브러져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를(一般史라 하지 않고), 救贖史, Salvation History, Heilsgeschichte라 하지 않습니까? 그런 면에서 보면, 이스라엘 역사에는 ‘역사의 단절’이 너무 많습니다. 그 역사의 단절이, 바로 이스라엘의 비극이었고, 심판이었고, 패망 아닙니까? 

부모자식관계는, 단순한 천륜의 관계만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 하나님의 言約을 전하여 주는 자(傳授者)와 이어 받는 자(繼承者)의 관계입니다. 그 이름이, 바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國師(산헤드린공회원)인 랍비 니고데모에게, “육으로 난 것(어머니 태에서 태어나는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하신 것이지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천륜이라는 부모자식 관계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 言約의 傳授者와 繼承者의 관계에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륜의 관계를 넘어서, 言約의 傳授者와 言約의 繼承者가 되는 것이 부모자식의 본래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에게 하나님 나라 언약의 傳授者가 되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자녀들을 언약의 계승자로 삼고 싶으시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 우리가정의 하나님의 이름이 되기를 바라지 않으십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부모 된 자의 책임, 의무를 감당해야 합니다. 신학적으로 말씀드리면, 부모의 使命을 감당해야 합니다. 우리는, 내가 배 아파서 자식 낳으면, 무조건 다 父母가 되는 줄 압니다. 그러나 그렇지가 않습니다. 세상에는 무면허 아빠, 무면허 엄마들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솔로몬의 시 127, 3말씀(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에 올라갈 때 부르던 노래)에,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基業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賞給이로다”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자식들은, 여호와의 基業이다”는 말을 大企業, 中小企業할 때 그 企業인 줄로 착각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그러다보니, 자식들을 마치 부모의 慾心(望)을 이루는 도구인줄 알고, 마치 대기업 중소기업이 營利目的으로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고 판매활동 하는 것처럼, 자식을 그렇게 다루는 부모들 많습니다. 자식은 大企業, 中小企業이 아닙니다. 

자식은 기업(基業)입니다. 기업이라는 말을 요즘 우리가 쓰는 가장 쉬운 말로 번역하면, 宿題라는 말입니다(하나님께서 부모에게 주신 과제물, 리포트, 인생의 가장 기본이 되는 부담). 요즘, 자식양육이 어렵다보니, 자식을 낳지 않는 부모도 있습니다. 낳아도 겨우 하나 낳아 잘 기르려고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최초의 복인데, 자식 낳지 않거나 적게 낳는 것은, 곧 저주를 의미합니다(구약적인 관점; 렘 16, 2 결혼하지 말고 자식 낳지 말라; 곧 하나님의 심판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부모로서 하나님 나라 언약의 傳授者가 되려면, 두 가지 숙제(사명)를 잘해야 합니다.

1.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많은 경우에, 부모님들의 그릇된 신앙 때문에 자식들이 하나님 나라 언약의 계승자가 되는 것을 포기하는 자들 많습니다. “나는 엄마 아빠가 믿는 그런 하나님이라면, 하나님 안 믿어”합니다.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유가 뭡니까? 부모들이 자식을 노엽게 하기 때문입니다. 자식을 노엽게 하지 말라는 말씀은, 그저 人格的인 말로 자녀를 양육하라는 그런 次元의 말씀이 아닙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본질적인 고민을 해야 합니다. 여기, 자녀를 노엽게 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오르기조, ovrgi,zw”라는 단어를 씁니다. ‘콧구멍을 벌름거리면서 씩씩대며 내는 화’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비유 아시지요? 집 나갔던 아버지의 둘째 아들이 돌아오자, 아버지가 살진 ‘그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고 기뻐합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일하다가 돌아온 맏아들이 그 사실을 알고는 대문 밖에서 어떻게 행동했습니까? “그가 怒하여 집으로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여기 맏아들이 노하였다 할 때 쓰인 단어가,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단어와 똑같습니다(“오르기조, ovrgi,zw”). 여기 맏아들이 누구를 가리킵니까? 예수님 당시 自己를 義롭다, 하나님 가장 잘 섬긴다고 사람들 앞에서 자랑하던 유대종교의 바리새인, 서기관들입니다. 바로 이 점을 특히, 유의하십시오.

구약성경에 보면, 이와 똑같은 노여움을 드러낸 人物이 또 있습니다. 요나 선지자입니다. 그는 니느웨로 보냄 받은 선지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거부합니다. 도리어 화를 냅니다. 이유가 뭡니까? 니느웨는 이방인의 도시입니다. 국제관계에서 보자면, 이스라엘의 적대국 관계에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 나라의 도시에 가서, 회개를 선포하여 구원을 받게 하라 하신, 하나님의 부르심(召命)이 너무 너무 싫었던 겁니다. 결국, 하나님은 노를 발하는 그를 큰 물고기가 그를 삼키게 하셔서, 니느웨로 보내지 않습니까? 니느웨에 가게 된 요나는 마지못해서, 니느웨 백성들에게 회개를 선포합니다. 그런데 그런 요나의 선포를 듣고, 회개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받게 됩니다. 그러자, 요나는 또 다시 크게 화를 냅니다. 

요나가 매우 싫어하고, 성을 내면서 하나님께 항의합니다. “여호와여 원하건데, 이제 내 生命 거두어주소서.” 이방인의 나라, 니느웨 백성들이 悔改하고 救援받게 된 것이 너무 싫었던 거지요. 그래서 화를 내면서, 죽기를 간구했습니다. 이 때, 요나가 낸 화가 오늘 본문, 자녀를 노엽게 하다는 말(“오르기조, ovrgi,zw”)과 똑같습니다(요나의 기질? 담즙질, 아주 외향적, 자기 의지가 강하고, 아주 현실적이고, 화를 잘 내고 고집이 셉니다. 동정심이 적습니다. 자기중심적입니다. 계산적입니다. 영적인 일에 관심이 적습니다. 남을 무시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자기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과격하게 행동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을 노엽게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부모의 불완전한 信仰때문입니다. 자식과 도저히 대화가 되지 않는 律法主義的인 信仰이나, 심각한 가치관의 차이 때문에, 자식들이 노엽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모의 신앙이, 건강하면 자식들이 노엽게 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 아들 이삭을 祭物잡듯이 잡아서 번제(불에 태워서)로 드리라는 命을 받고, 아들에게는 번제단 위에 태울 나무를 등짐지우고, 자신은 칼과 횃불을 들고 갑니다. 그때, 이삭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내 아버지여!”하고 부르자 아버지 아브라함이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하지요. 그때, 이삭이 묻습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羊은 어디 있나이까?” 

그때, 아브라함이 어떻게 對答합니까? “내 아들아, 燔祭할 어린 羊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親히 준비하시리라”합니다. 얼마나, 지혜롭고 신중한 對答입니까? 아버지 아브라함의 믿음이, 頂點에 이른 것을 봅니다. 경지에 오른 아브라함의 믿음임이 드러나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명하는 아브라함의 그 숭고한 믿음 때문에, 이삭도 하나님의 뜻에 全的으로 順從하는 믿음의 아들 된 것 아닙니까? 여기서 우리는 아버지 아브라함의 위대한 믿음이, 그 아들 ‘이삭’에게로 傳受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노엽게 하지 않는 것은, 그저 부드러운 말로, 인격적인 말로 자식을 양육하라는 그 이상의 의미입니다. 父母가, 하나님 나라 言約말씀에 대하여 확고부동한 믿음의 자리에 설 때, 자식과의 소통이 일어나게 됩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믿는 하나님,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라면 나 안 믿겠어요. 바로 이것이, 부모들이 자식을 노엽게 하는 뿌리임을 알아야 합니다.

2. 부모는, 자식들을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 주의 교훈은 무엇이고, 훈계는 무엇입니까? 主의 敎訓이나 主의 訓戒는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가진 말입니다. 교훈은, 훈련이나 체벌을 동반한 일정한 지침을 가지고 훈련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훈계는, 특별히 말(언어)로 충고와 격려를 하는 교육을 말합니다. 잠언 13, 24에 “초달(매)을 아끼는 자는 그의 子息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勤實히 징계하느니라” 말씀합니다(경우에 맞는 체벌이 필요하다).

열아홉 명의 자녀들을 모두 하나 같이 훌륭한 자녀로 키운 존 웨슬레의 어머니 수잔나를 아시지요?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자녀교육의 비밀은 무엇입니까?” 그 때 수잔나가 한 대답이 이것입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이 그들의 머리가 크기 전에, 좀 더 정확히는 다섯 살이 넘기 전에 그들의 의지를 꺾어 하나님의 말씀에 順從하는 法을 가르쳤습니다.” 

요즘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의 氣를 꺾지 말아야 한다’고 합니다(cf. 氣죽은 모범생보다 기산 꼴찌가 성공한다, 정기인). 그러나 성경은, 인간의 꺾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인간적인 기, 부패성, 죄성의 기가 있습니다. 그런 氣를 반드시 꺾어 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기를 꺾어준다고 10대 된 자녀에게 매를 들면 안 됩니다. 교육방법론적으로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땐, 진솔한 대화와 말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할 때, 구체적인 규범으로 해야 합니다. 그냥 “TV보지 말라”, “개임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합니다. 규범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규범은 구체적일 때, 유용합니다. 만일, 오늘 TV는 꼭 유익한 프로그램을 골라서 한 시간만 보도록 하자와 같이 원칙을 정했다면, 이것은 규범이 됩니다. 그냥, “너 오늘 TV보지 말라”하면 이것은 적절한 규범이 되지 못합니다. 

자식을 교훈하고 훈계할 때, 엄마 아빠가 같은 생각을 가지고 몰아붙이면, 아이는 숨 막혀 죽습니다(엄마도 아빠하고 똑같아, 아빠도 엄마하고 똑같아). 만일, 자식교육에 대한 부모의 기준이 서로 다를 때, 그럴 때는 보다 더 건강한 기준을 가진 부모가, 자식에게 숨 쉴 수 있는 여유 공간을 제공해 주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한 부모의 자식교육 기준 때문에, 자식은 노여움을 탑니다.

어린이 주일은, 어린이(자식)가 가정에서 帝王的인 존재로 여겨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개구쟁이라도 좋다, 튼튼하게만 자라다오” 이것도 아닙니다. “내 아기는 다르다. 무엇이든 최고의 것을 주고 싶다. 아기를 키우는 데는 연습이 없으니까.” 이것도 아닙니다. 어린이날에 부모들이 자식들의 노예가 되라는 것도 아닙니다. 돈으로 어린이날을 기념해주라는 것도 아닙니다. 

父母는, 자녀들에게 하나님 나라 언약의 傳授者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하나님 나라 언약의 繼承者가 되어야 합니다. 이 분명한 정체성 속에서, 우리 가정의 부모자식관계를 재정해야 합니다.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는 부모가 되십시다. 그래서 가정을 하나님의 나라로 가꾸십시다. 아멘.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5월 가정의 달 맞이해서, 우리 가정에 주신 기업과 상급인 자식들로 인해 하나님의 이름 높이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우리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하나님 나라 언약의 전수자가 되게 하옵소서. 우리 자식들은 하나님 나라 언약의 계승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과 같이 가정에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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