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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아들아, 나를 본받아라 (삿 13: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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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나를 본받아라 (삿 13:12-14)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라는 책이 있습니다.
이 책은 1,000 명의 죽음을 지켜본 호스피스 전문의사가 지은 책입니다.
그 내용 중에 열일곱 번째 후회가 ‘자식이 있었더라면’입니다.
그 내용 일부를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자녀가 일곱, 손자가 스물, 증손자가 서른 명이나 되는 여든이 넘은 할머니가 있었다. ‘증손자까지 챙기려면 너무 힘들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할머니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가득했다. 4대가 함께 하는 할머니의 병실은 언제나 시끌벅적하고 훈훈한 정이 넘쳤다. 손자와 증손자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는 할머니의 눈에는 지금까지 열심히 살아온 인생의 결과물을 바라보는 듯 뿌듯함이 담겨있었다. 서른 명이 넘는 가족 부대가 밤낮으로 간호를 했고 마지막 순간에는 모든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히 눈을 감았다. 인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결혼해서 아이를 가졌더라면........ 그게 제일 후회가 되네요.’”

사실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엄청난 정성과 시간은 물론 어마어마한 비용이 드는 일이기도 합니다.
부모는 살아있는 동안, 아니 죽는 순간까지도 자식을 걱정합니다.
자식이 훌륭하게 자라서 누가 봐도 성공한 인물이 되었다하더라도 부모는 앉으나 서나 자식걱정을 합니다.
오죽하면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했겠습니까?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맛보는 기쁨과 행복은 돈으로 환산할 수 없습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교육에서 가장 중요한 것,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절대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교육자가 피교육자로부터 교육자로서의 권위와 자격을 인정받는 일입니다. 
그것을 얻지 못한다면 교육은 애당초 불가능하게 됩니다.

자녀 교육에 실패한 여러 원인 중의 하나는 많은 부모들이 자녀들로부터 교육적인 권위와 자격을 인정받지 못한 데에 있습니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에는 자기 부모가 세상에서 가장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자랑합니다. 그래서 이런 아이들의 대화중에 “우리 아빠가…”, “우리 엄마가…”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나이를 한 살씩 먹어가면서 부모가 자기가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근사하거나 훌륭한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때 아이들의 실망감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더 큽니다. 
그 다음부터 부모의 말은 교육적인 힘을 상실하고 자녀교육에 위기가 닥치기 시작합니다. 자녀교육에 있어서 부모가 교육적인 권위와 자격을 확보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간단한 본문 말씀은 그 유명한 머리카락이 긴 사사, 삼손의 출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삼손의 아버지 이름은 마노아였습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임신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오랫동안 기도했겠지요?
‘자식 하나 점지해 달라.’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천사가 마노아의 아내에게 ‘아들을 낳으리라’고 잉태를 알려줍니다. 
그때 마노아가 “이제 당신의 말씀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라고 묻습니다. 

이제 본문을 중심으로 몇 가지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1.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오리까?’

본문에 보면, ‘아들을 낳으리라.’는 천사의 고지를 듣고, 마노아가 하나님께 질문한 한 내용이 있습니다.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
물론 그 당시에도 가정마다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아이 기르는 법’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아이의 발육을 위하여 ‘잼잼’ ‘돌이돌이’ ‘곤지곤지’를 시킨다거나 뭐 그런 것이 있었겠지요? 
마노아도 그런 것 정도는 알고 있었을 것이고요. 
그러나 마노아는 아들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기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에도 사회적인 통념으로 자식에 대한 욕심이 있었을 것입니다. 
우리 식으로 말하면, 자식을 교육시켜 사(의사, 검사, 변호사 등)자 돌림의 직업인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그런 욕심 말입니다.
그러나 마노아는 자기 욕심보다는 자식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물었던 것입니다.
마노아는 아들을 하나님의 뜻대로 기르고 싶었던 것입니다. 

마노아의 열망이 우리에게 도전을 줍니다.
‘자식을 내 욕심대로 키우고 싶은가 아니면 하나님의 욕심대로 키우고 싶은가?’
‘자식을 내 욕심대로 키우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뜻대로 키우고 있는가?’
우리가 자식을 품에 안고 꼭 한번 해봐야할 질문입니다.

2.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이 아이를 어떻게 기르며 우리가 그에게 어떻게 행하리이까?”(12절)라는 질문에 천사가 대답합니다.
“… 내가 여인에게 말한 것들을 그가 (영어 성경에는 She라고 표현되었음)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포도주와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고 내가 그에게 명령한 것은 다 지킬 것이니라 하니라”(13,14절)

여기 보십시오! 
의외의 대답을 하십니다.
마노아는 “아이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줘야 되지요?”라고 물었는데 천사는 “아이보다는 부모가 더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가 (영어 성경에는 She라고 표현되었음) 다 삼가서 포도나무의 소산을 먹지 말며.........”
어디에도 자식을 어떻게 하라는 얘기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가(어머니), 즉 부모가 삶의 본을 보이면 자식교육은 저절로 된다는 것입니다. 
즉, 자녀 교육을 제대로 시키려고 한다면 부모가 삶의 본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놀라운 통찰이지요?

3. 그러면 부모는 어떤 삶의 본을 보여야할까요?

세 가지 본을 보이자고 권면합니다. 

1) 예배생활의 본을 보이십시오.

그리스도인은 예배에 성공해야 성공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감동, 감화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인생이 변화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예배에 승부를 걸어야 합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살고, 예배가 살아야 우리가 삽니다. 
예배가 습관화되고, 형식화되고, 죽어 있으면, 교회도 죽고, 교인인 우리도 죽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 은혜 충만한 예배에 우리의 생명이 달려 있습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예배를 소중히 여기세요! 
예배에 승부를 거세요! 
예배에 본을 보이십시오! 

‘꽃은 오늘 지나면 없어지고 말지만, 예배는 오늘 못 드리면 다음 주 드리면 돼.’하고 화전놀이 가지 마시고, ‘오늘 예배 허탕 치면 한주간은 허탕이다’라는 자세로 예배에 적극적이 되길 바랍니다.

우리는 보통 3일 만에 한번 씩 자동차에 기름을 넣습니다. 
아무리 좋은 자동차라고 하더라도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만드실 때, ‘일주일마다 영적기름을 넣어라’고 만드셨습니다. 
창2:3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이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따라서 일주일마다 영적기름을 채우지 않는 사람은 그 능력이 어떠하든, 그 열심히 어떠하든, 영적으로 멈춰 서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신앙생활의 기본은 주일예배입니다. 
주일예배에 대한 바른 이해와 결심과 신앙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주일 예배에 대한 조그마한 신앙적인 양보의 틈새가 보이기만 하면, 주일날 예배에 빠질 이유가 왜 그렇게 많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이상하게 몸이 으스스하고 감기몸살 기운을 느끼는 일, 
급한 전화를 기다려야 할 일, 
부부사이에 말다툼이 일어나 예배드릴 마음이 싹 가시는 일, 
토요일 늦게까지 손님 접대해야 할 일, 
주일까지 꼭 마무리 지어야 할 보고서를 작성하는 일, 
주일에 꼭 공부해야만 될 것 같은 수험 준비하는 일, 
꼭 가 보아야할 문중일,
사탄은 이런 일을 계속 만들어서 그 영혼을 노략질합니다. 

자식이 입만 열면 ‘효도, 효도’하면서 부모님의 생신 때에도 찾아뵙지 못한다면 어떻게 그 자식을 효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하늘 백성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복 주시고, 거룩하게 하신 날’을 외면한다면, 어떻게 그 사람을 신실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어떻게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녀교육을 잘 하라면 먼저 예배생활의 본을 보이십시오.

2) 정직의 본을 보이십시오. 

잠11:1 “속이는 저울은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공평한 추는 그가 기뻐하시느니라.”
11:3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악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하게 하느니라.”
이 말씀은 정직한 사람은 처음에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결국 성공하게 되고, 속이는 사람은 처음에는 잘 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결국 망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IMF 한파가 몰아치면서 많은 사람이 직장을 잃었습니다. 
특히 회사의 중역들이 많이 퇴직을 당했습니다. 
그 목사님의 교회에도 대기업의 이사로 있는 집사님이 계셔서 걱정이 되어 전화를 걸었습니다. 

“집사님은 괜찮으세요?” “주주총회가 끝나봐야 압니다.” 
그 집사님이 얼마 후 ‘승진감사헌금’을 드렸습니다. 
목사님은 반가운 나머지 물어보니 ‘주주총회에서 상무로 승진되었다’는 것입니다. 
주주총회에서 나온 얘기가 ‘회사를 위해 최선을 다한 사람은 많다(그렇겠지요. 회사의 중역까지 되었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열심히 일하지 않았겠어요!)그러나 정직한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정직한 기독교인 집사님이 발탁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고지식하다고 유두리가 없다고 불평하고 빈정거릴 때에도, 그는 정직하게 일처리를 하였습니다. 
결국 정직이란 단어가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습니다. 
남들은 퇴직을 하는 때 오히려 그는 승진을 하게 되었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가 뭐라고 해도 정직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녀교육을 잘 하려면 부모가 정직의 본을 보이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처럼 마음의 순수성에 있어서나, 외적 행동에 있어서 완벽하게 깨끗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정직해야 합니다.
그래야 자식을 가르칠 수가 있습니다.

3) 성실의 본을 보이십시오.

마 25장에 나오는 달란트 비유가 말씀하고자 하는 핵심이 ‘성실’ 아닙니까!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책망을 받아서야 되겠습니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꼴통’이라고 놀리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바보’라고 비웃고,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모자라는 사람’으로 손가락질하고,
요령껏, 적당히, 대충대충, 눈가림만하는 것을 똑똑한 사람으로, 유능한 사람으로 여기는 나라는 망하고 맙니다.

저는 군대 생활은 젊은 청년들에게 참 좋은 교육기회라고 생각합니다. 
감수성이 예민한 청년기에 2~3년이란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사람을 개조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지요! 
그런데 군대에 가서 성실함을 배우기보다는 요령을 배워가지고 사회에 나오는 젊은이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마당을 쓸 때 빗자루를 바로 잡고 꼼꼼히 마당을 쓸면 ‘바보’라고 머리통을 쥐어박습니다. 

어떻게 하느냐하면, 먼저 휴지나 돌 같은 것을 대충 주워내고 그 다음에 빗자루를 거꾸로 잡고 빗자루 질 한 것처럼 대충 자국만 남깁니다. 
눈가림만 하는 것이지요! 
한 시간 동안 땀을 흘려야 될 일을 5분 동안 해치웁니다! 
우리는 그것을 요령 있다고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사회풍조를 고쳐야 합니다!
누군가가 이런 생활태도를 악하다고 삶으로 지적해야 합니다.
누가 보든 말든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사람들이 사회 구석구석에서 나타나야 합니다!
그 일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감당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해변에서 망대위에 앉아서 누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지나 않나 살펴보는 생명구조원 있지요? 
어떤 분이 미국에서 경험한 얘기를 하는데 날씨가 흐리고 좋지 않아 해변에는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생명구조원은 망대에 올라가서 자기가 맡은 시간동안 정확하게 해변을 감시하더라는 것입니다. 
바보스럽게 그 짓을 하고 있더라는 거지요! 
우리 그리스도인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지난 주 국민일보에서는 ‘왜 영국교회가 몰락하고 있는가?’를 현지 취재하여 보도했습니다.(2010년 4월 27-28일)
영국교회는 아프리카 선교의 리빙스턴, 인도선교의 윌리암 캐리, 중국선교의 모리슨을 낸 선교국가였습니다. 
그런데 지난세기에 수천 명이 모였던 교회들이 지금은 노인 20명이 모이거나, 이슬람 사원으로 팔려가거나, 빠찡꼬 건물로 개조되었다는 것입니다.

신문은 그 원인을 세 가지로 분석했습니다.
하나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구령(영혼구원), 즉 전도하는 일에 힘을 쏟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사회사업에 집중하느라 성경을 가르치는 교회교육에 실패했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성령의 존재와 임재와 역사하심을 도외시 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영국교회가 기독교 교육에 실패했다는 말이 저의 마음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올해 표어는 ‘다음세대’입니다.
가정의 다음세대인 자녀교육을 잘 하여 믿음의 명문가문을 만들도록 합시다.
교회의 다음세대인 교회교육을 잘 하여 연부년 부흥하는 교회를 만들도록 합시다. 
우리나라의 다음세대를 잘 교육하여 일본처럼 밑도 끝도 없이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융성의 내일을 만들도록 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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