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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정의달] 예수님의 거룩한 가족 (막 3:3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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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거룩한 가족 (막 3:31-35)

(막3:31-35) 때에 예수의 모친과 동생들이 와서 밖에 서서 사람을 보내어 예수를 부르니 무리가 예수를 둘러 앉았다가 여짜오되 보소서 당신의 모친과 동생들과 누이들이 밖에서 찾나이다 대답하시되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하시고 둘러앉은 자들을 둘러보시며 가라사대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참조 마12:46-50) 

1. 행복한 가정의 근본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시편112:1-7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가정에 대해 이렇게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기를 기뻐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땅에서 부강하며, 그 집에는 부요와 재물이 풍성하고, 그리고 어떠한 불길한 소식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는 의로운 가정이 될 것이니라.”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아니하는 가정은 비록 파수꾼이 깨어 지키고 있을지라도 모든 것이 헛되이 무너지는 것처럼 되고 말 것이라 했습니다.(시127,128편) 성도 여러분의 가정은 하나님께서 항상 함께 하시는 복된 가정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세기의 마스터피스(걸작) 뮤지컬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Fiddler on the Roof)’은 우크라이나 아나테프카 유대인 마을에 사는 ‘테비에’ 가족 이야기입니다. 우유가공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테비에는 신앙심이 깊고, 가난하지만 행복하게 사는 사람으로 딸만 다섯을 둔 가장입니다. 영화는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로 시작합니다. 위태롭게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사람을 바라보며 테비에는 마을 사람 모두를 ‘지붕 위의 바이올린’ 연주자라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노래합니다. 

<왜 위험하게 지붕 위에 올라가 연주하느냐고요? 그 이유는 아나테프카가 우리의 고향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균형을 유지하느냐고요? 한 마디로 말씀드리죠. ‘Tradition!’, ‘전통’입니다! 이 전통 때문에 우리는 오랜 세월동안 삶의 균형을 유지해왔어요. 자고 먹고 일하는 것에 대한 전통, 복장과 생활에 대한 전통, ‘키파’, ‘테필린’, ‘메주자’, ‘치츠트’ 등, 이 모든 전통은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전심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 때문에 자신의 존재에 대해 인식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가정의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은 아버지, 올바른 가정의 정도를 알고, 가정의 평화와 정결함을 지키며, 등등을 아버지가, 자녀들의 배우자 선정과 결정도 아버지가 행합니다. 이 작은 마을에 가장 중요한 사람이자 사랑받는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는 랍비입니다. 우리에게 전통이 없었다면 우리들의 삶은 몹시 흔들렸겠죠?> 

나라 잃고 유랑하며 산다고 하는 것이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위태롭지만 유대인들에게 이러한 신앙의 전통이 없다면 몹시 흔들렸지 않았겠느냐는 것입니다. 테비에 가정 이야기는 큰 딸 사이텔의 결혼 문제로 시작합니다. 사이텔은 부모가 돈 많은 푸줏간 홀아비한테 자신을 시집보내려하자, 가난한 재단사 마텔과 1년 전 결혼 약속했노라면서 아버지에게 결혼 허락을 요구합니다. 이에 테비에는 자녀결혼의 결정권이 아버지에게 있는데 그러한 전통이 무너지는 것에 ‘전통’, ‘전통’, ‘전통은 어디에’!라고 부르짖으며 허락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에 이 둘의 결혼을 허락하고 맙니다. 그런데 결혼식 막바지에 러시아 경관들이 들이닥쳐 식장은 난장판이 되고 맙니다. 러시아 혁명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우여곡절 끝에 장녀의 결혼을 마쳤더니 이번에는 둘째딸, 호델이 키예브 출신(진보주의자) 퍼칙과 결혼을 하겠다며 테비에에게 결혼 승낙을 받으려 합니다. 그러나 테비에는 아주 강하게 반대합니다. 벽에 부딪힌 호델과 퍼칙은 결혼을 허락해달라는 것이 아니라 축복해달라는 것이라며 허락하든 안 하든 자기들은 결혼하겠다며 뜻을 굽히지 않습니다. 테비에는 “아버지에게서 허락도 안 받겠다니! ‘전통’ ‘전통은 어찌 되가는 걸까?” 라고 되뇌이며 황당해 합니다. 그러나 둘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에 결국 결혼에 대해 축복과 허락을 하겠다고 말합니다. 약혼한 상태에서 퍼칙은 혁명 운동을 하다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유배되고 호델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 위해, 가족들과의 재회의 기약도 없이 그 먼 시베리아로 향합니다. 

셋째 하바는 러시아 청년 피엣카와 사랑에 빠져 역시 아버지의 결혼 허락을 받고자 합니다. 그러나 테비에는 피엣카는 종교와 인종이 다르다며 절대 안된다며 합니다. 그러나 하바가 세상이 변하고 있다며 설득하려고 하자 테비에는 ‘우리에게는 변하지 않는 게 있다. 결코 바뀔 수 없지. 신앙까지 버리고 결혼하겠다고? 절대 안된다!’ 며 허락하지 않습니다. 결국 하바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고 몰래 정교회에 가서 신부주례로 결혼하고 도망칩니다. 이에 테비에는 아내 골디에게 하바는 죽은 것으로 여기라고 말합니다. 

와중에 유대인들은 모두 아나테프카에서 퇴거하라는 추방령이 내려 졸지에 떠나야만 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아나테프카가 에덴동안은 아니라며 유랑민의 설움을 안고 떠나기로 합니다. 추운 겨울 엄동설한에 떠나는 찰나 하바가 나타나 다시 테비에에게 자신들을 자식으로 받아달라고 간청하지만 외면해버립니다. 그리고 마지막 전통의 상징물 ‘메주자’를 문설주에서 떼어 가슴에 품고 기약없는 유랑의 길을 떠나갑니다. 

유대인들은 이사할 때 가장 먼저 ‘메주’자를 떼고 또한 붙입니다. ‘메주자’(mezuzah)는 유대인들이 2천년 동안 지켜오는 ‘전통’으로 신명기 6:4-9 말씀을 새겨 넣어 만든 작은 말씀 상자로 문설주 오른편에 단단히 부착하여 출입할 때마다 만지거나 입 맞추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하나님께 대한 의무를 다하며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고 다짐하는 팻말입니다. 유대인들이 문설주에 이같은 ‘메주자’를 붙이는 것은 가정, 집을 성소(聖所)로 여긴다는 뜻입니다. 가정의 중심에 하나님 말씀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거룩한 성도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2. 오늘 본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본문 마가복음 3:20-30 이하의 내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예수께서 어느 집에 들어가시자 소문을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가 미쳤다는 소문에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붙잡으러 찾아 나섰습니다. 그 소문은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을 고쳐주신 일을 두고 서기관들이 ‘예수에게 사탄이 붙지 아니하고서는 귀신을 쫓아낼 수 없다. 예수는 귀신의 왕인 사탄의 힘을 빌려 귀신들을 쫓아낸 것이다.’고 비방하는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이를 두고 예수가 미친 것으로 소문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그 잘못된 소문을 바로 잡기 위해 비유를 들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탄이 어떻게 사탄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한 나라가 서로 싸워 갈라지면 망하고 한 집안도 서로 싸워 갈라지면 망하느니라. 그래서 사탄의 나라도 서로 싸워 갈라지면 오래가지 못하고 망하는 법이이니라. 강한 사람의 집에 들어가 물건을 털어가려고 하면 먼저 그 사람을 잡아 묶어야 하느니라. 그렇지 않고는 그 집을 털 수가 없으니라. 그와같이 사탄을 결박하지 아니하고서 어떻게 귀신을 쫓아낼 수 있겠느냐? 내가 분명히 말해 두지만 사람에게 대한 모든 죄와 모독은 용서받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 성령께서 하시는 일을 모독하는 자는 절대로 용서받지 못하고 그의 죄는 영원히 남게 되느니라.” 

이때 예수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예수를 데려가려고 부르자 둘러앉은 사람들이 예수께 ‘선생님, 어머니와 형제분들이 밖에서 선생님을 찾고 계십니다.’ 고 전합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내 모친과 내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 피보다 진하다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보내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말씀에 순종하므로 예수와의 깊은 영적 가족 관계를 가질 때, 혈연관계의 가족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유대 종교의 교권을 장악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권세있는 말씀에 자신들의 입지에 위기를 느껴 예수를 잡아 죽이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의 가족들이 당황하며 더 이상 예수로 인해 자신들에게 피해가 오지않도록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활동을 저지하고자 데리러 왔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육신적인 가족들은 예수를 직접적으로 배척하지는 않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신분, 즉 그가 자신들의 혈육이지만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이신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때문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인해 자신들에게 해(害)가 미치지 않을까 염려되어 예수의 활동과 사역에 반대하고 제한하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께서 그러한 가족들을 두고 “누가 내 모친이며 내 동생들이냐?” 고 말씀하시고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마치 육신의 가족들을 부인(否認)하시는 듯한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혈육관계를 부정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셨습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고 말씀하시므로 육신의 모친을 친 어머니처럼 잘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마리아를 친 어머니처럼 모셨습니다. 

(요19:26-27)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이로 보건대 예수께서 육신의 가족들을 부인하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예수께서 열두 살되던 해에 부모와 함께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갔습니다. 절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갈 때 예수는 성전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부모는 돌아가는 순례자들 무리에 있을 것으로 알고 꼬박 하룻길 가서야 예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예수가 보이지 않자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 성전에서 예수를 찾았습니다. 예수는 선생들 틈에 앉아 듣기도 하고 질문하기도 했습니다. 선생들은 예수의 예리하고 지혜로운 질문과 답변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부모는 몹시 마음이 상해서 “얘야, 왜 이렇게 했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 정신이 없었다.” 라고 말하자 어린 예수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할 줄을 모르셨나이까?”(눅2:41-52)그러나 그 부모는 예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비록 어린 나이지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밝히시며 자신이 앞으로 혈연관계에만 매어 있을 수 없는 분이심을 분명히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하신 것은 출생과 혈통으로 이뤄지는 혈연관계보다 영혼의 거듭남으로 이뤄지는 하나님과의 영적, 신앙적 관계가 더 중요함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혈육관계는 세상에서 사는 동안 일뿐 영원한 관계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혈과 육으로 들어가는 곳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라도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지지 못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마3:7-11) 

한 번은 예수께서 “(눅16:13)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는 말씀으로 바리새인들을 가르치시자, 유난히 돈을 밝히는 바리새인들이 눈을 부라리며 예수 그리스도를 현실을 모르는 대책 없는 사람으로 몰아부쳤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부자는 바리새인들을 비유합니다. 한 부자가 최고 명품 브랜드 옷을 입고 과시면서 사치와 호화생활을 즐겼습니다. 그런데 그 집 앞에서 구걸하는 거지 나사로가 있었습니다. 나사로는 그 부자 집에서 내다버리는 음식찌꺼기로 끼니를 때우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온 몸이 종기투성이인 거지 나사로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그 몸에 난 종기를 핥기 위해 모여드는 동네 개들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습니다. 부자도 죽었는데 그는 지옥에 들어가 끊임없이 타오르는 불길에 끝없는 고통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가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바라보는데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안긴 나사로가 보였습니다. 

놀라서 소리쳐 말합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 한 방울만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몹시 괴롭습니다.’(눅16:24-25) 지옥에 들어간 부자가 ‘아버지 아브라함이여’라고 부른 것은 바로 그 부자가 혈통적으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었다는 뜻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정통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자부하고 당연히 천국에 들어갈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왜 지옥에 떨어졌겠습니까? 앞에서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말씀하신 바대로 그들은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기는, 다시 말해 돈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이용해 돈벌이하는, 돈에 환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에게 주어진 재물과 인생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 보다는 자기 마음대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유대인 중의 유대인,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이라 해도 믿음으로 천국에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 말씀과 그 뜻대로 살지 아니하면 아브라함의 자손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예수 믿을지라도 그 자녀들 역시 믿음을 가지고 거듭나야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 믿고 하나님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가리켜 “나의 모친과 나의 동생들을 보라.”고 말씀하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고 어떠한 어려움과 핍박에도 굴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로 결단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바로 자신의 ‘영적인 혈육’,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 

제자들 뿐만 아니라 지금 이 시대에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사람은 모두가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것입니다.(눅8:21) 예수께서 최초의 기적, 가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신 기적을 베푸실 때였습니다. 잔치집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을 알게 된 마리아가 예수께 포도주가 없다고 말하자 예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2:4)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성령으로 잉태되었지만 자신을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오게 하신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여자여”라고 부르신 것은 하대(下待)하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마리아를 그렇게 부르셨다는 것은 인류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한 공적(公的)인 사역, 즉 구원의 사역을 시작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예수께서 메시야, 구세주로서의 사역을 행하실 때 오직 하나님의 뜻만이 그 자신의 삶에 이루어질 것이며 혈통적 모친이 된 마리아의 뜻이나 권리는 전혀 간섭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비록 예수님의 모친이라도 그 모친 된 권세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어떠한 사역에도 간섭할 수 없다는 뜻으로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세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 앞에 이제 혈과 육의 모친도 하나의 ‘여자’의 지위를 가질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육신의 어머니를 “여자여”라고 부르실 때는, 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 순종해야 될 한 여자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십자가 상에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도 바로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죄 사함을 받아 구원받아야 할 한 여자이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오게 한 육신의 어머니라는 것을 동시에 의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인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실 때에 더 이상 혈통적 인연에 매이지 않아야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잠시 뿐인 세상에서의 혈연관계에 매이기보다 가족 모두가 다 영원한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되어 금세와 내세가 아울러 행복한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혈연관계보다 나를 영원히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되게 하시는 하나님을 더욱 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 되어 하나님의 사랑이 가정에 충만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가정의 중심이 되고, 하나님 말씀이 중심이 되는 가정에 하나님의 거룩한 사랑과 은혜가 충만하게 됩니다.(마 10:37) 


3. 다음으로,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기 위해 범사에 항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한 혈육이었지만 예수의 형제들이 예수를 어떻게 생각했었는가를 보겠습니다. 

요한복음7:1-9 내용입니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사주(使嗾)를 받은 유대인들이 예수를 죽일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주로 갈릴리 지역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고 계셨습니다. 때는 유대인 남자라면 반드시 지켜야하는 명절인 초막절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예수께서도 초막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야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형제들이 절기를 빌미삼아 예수께 이렇게 말합니다. 

‘여기를 떠나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이 몰려드는 유대에서 형님이 하시는 일을 공개적으로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사람치고 자기가 하는 일을 숨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왕 이런 일을 하실 바에는 형님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십시오.’ 

이 말은 예수 때문에 자신들이 피해를 입지 않기 위해 예수를 대도시 유대지역으로 몰아붙이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가족들이 뜻하지 않게 화를 입을 수도 있다고 느꼈기 때문에 갈릴리를 떠나시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겉으로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으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려면, 소위 출세가도를 달리기 위해서는 서울로 가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예수 때문에 화를 입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형제지만 같이 죽고 싶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예수님의 친형제인 그들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믿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과 형제 관계이면서도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괴로우셨는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때를 따라 행동하시지만, 그 형제들은 극히 세상적으로 생각하고 자기중심주의로 행동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형제들에게 “너희는 어서 명절을 지키러 올라가라. 나를 기다릴 것 없다. 나는 준비되지 않았다. 지금은 내 때가 아니다.” 고 말씀하시고 갈릴리에 남아계셨습니다. 이 말씀은 형제들의 생각이나 권면에 상관없이 자신은 오직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따라 행동하시겠다는 의미입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신에게 정하신 수난 시기(受難時期)를 아시고,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실 시기를 알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그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 아버지의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의 뜻을 그 정하신 시기에 따라 행하십니다. 그 이유는, 그는 아버지와 일체(一體), 하나이시기 때문입니다. 

(요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 하신대 

이처럼 예수께서는 혈육보다는 오직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를 따라,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 그 뜻에 따라 행동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혈육의 형제자매들이 이러한 예수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은 그들이 30년 동안 함께 살아온 형제들일지라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그가 자신들과 달리 성령으로 잉태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요7:5) 이는 그 형제들이라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예수님의 혈육의 가족들은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아니하고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리며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행1:4-5)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약속하신 성령은 구약성경 요엘서 2:28-32에서 예언하신 것을 말합니다.

(욜2:28-32)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 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 내가 이적을 하늘과 땅에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 기둥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어두워지고 달이 핏빛 같이 변하려니와 누구든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니 이는 나 여호와의 말대로 시온산과 예루살렘에서 피할 자가 있을 것임이요 남은 자 중에 나 여호와의 부름을 받을 자가 있을 것임이니라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하실 일은 무엇보다 구원의 복음의 비밀을 깨닫게 하는 것이요 또한 능력있게 복음을 전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성령을 기다라고 하신 것입니다. 

“(행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고 하신 말씀을 이루어가시기 위해서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말씀하신 “몇 날이 못되어” 즉 열흘 만에 요엘서에서 예언하신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약속하신대로 성령이 강림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약속하신 성령 강림을 기다리며 전혀 기도에 힘썼던 무리들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모친과 그 형제들이 함께 있었습니다. 

(행1:14)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예수의 아우들은 야고보, 요셉, 유다, 시몬(마 13:55;막 6:3) 등인데 그들은 한때 예수를 믿지 않았지만 이렇게 예수의 부활 이후 약속하신 성령 강림을 통해 진정한 ‘예수의 제자들’이 되었습니다. 참된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된 것입니다. 그 중에 야고보는 가장 두드러진 인물로서(12:17;15:13 이하),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감독이자(행 15:13) 야고보서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유다는 유다서의 저자입니다. 

예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 이후, 그리고 성령 강림을 통해 이들 예수의 가족들 모두가 믿음이 온전하여져 ‘하나님의 거룩한 가족’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신앙은 혈통 관계로 발생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믿음과 성령은 하나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믿는 자에게 값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인 성령을 통해서 온전한 믿음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엡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하나님의 뜻과 말씀이 가정에 중심이 되고, 진리의 성령으로 거듭나는 가족들이 되셔서 영육간에 영원히 거룩한 하나님의 가족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예수의 거룩한 가정이 되어 자녀들이 땅에서 부강하며, 부요와 재물이 풍성하고, 그리고 어떠한 불길한 소식도 두려워하거나 흔들리지 않고 영원히 기억되는 의로운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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