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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위대한 삶의 순례(19) : 비아 돌로로사 길의 부탁 (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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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9) : 비아 돌로로사 길의 부탁 (눅 23:26-28)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걸어가던 마지막 길을 우리는 ‘십자가의 길’(Via Crucis)혹은 ‘비아 돌로로사’(Via Dolorosa), ‘슬픔의 길’이라고 부릅니다. 성경적으로 정확하게 고증되는 것은 아니지만 교회 전승은 이 길에서 대체로 14개의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예루살렘으로 가서 이 길을 걸어보면 순례자들의 묵상을 위한 14개 처소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380년 성녀 실비아라는 사람이 처음으로 이 길을 걸었고 12-14세기에 성지 순례를 위해 예루살렘을 찾은 순례자들에 의해 이 길을 걷는 것이 순례 여정의 하이라이트로 보편화되었고, 16세기에 이르러 14개 처소(station)가 확정되면서 교회나 수도원내에도 십자가의 길 14개 처소를 설치하여 영적 묵상의 방편으로 삼게 되었습니다.

제1처는 빌라도의 법정이 있던 안토니오의 요새, 지금의 아랍 알오마리아 학교로서 여기서 예수께서 십자가 사형언도를 받으신 것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제2처는 현재의 프란치스칸 수도원 내부의 ‘유죄 판결 예배당’(Church of the Condemnation)과 ‘채찍질 예배당’(Church of Flagellation)이 위치하는 곳으로 여기서 예수께서 채찍질 당하시고 십자가를 지신 것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이 곳에서 나오는 입구에 ‘이 사람을 보라’(Ecco Homo)는 아치가 있습니다. 제3처는 비아 돌로로사 출발 지점에서 150m 지점에 작은 기도실이 있는데 입구 문지방에 III-station이란 표기가 있습니다. 여기가 예수께서 처음 십자가를 지시고 넘어지신 곳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제4처는 1881년에 세워진 아르메니아 교회 기도실 입구 문지방위에 예수께서 그 어머니 <마리아와의 만남>의 장면을 조각해 놓은 곳입니다. 제5처는 구레네 시몬이 예수님을 도와 십자가를 지심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카톨릭 교회가 이 지점에 교회를 건립한 곳입니다. 제6처는 교회 전승에 의해 베로니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한 여인이 예수님의 땀 흘리시는 얼굴을 씻어드림을 기념하기 위해 1895년 비잔틴 수도원을 여기에 세웁니다. 제7처는 예수님 시대 예루살렘 서쪽 문이 있던 곳으로 카톨릭 학교와 교회로 사용되고 있는 곳인데 예수님이 이 길에서 두 번째 넘어지신 것을 기념하는 곳입니다. 제8처는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일어났던 곳으로 예수께서 자신을 따르며 울던 예루살렘 여인들을 위로하시던 곳입니다. 지금은 희랍 정교회 돌 벽에 라틴어로 ‘승리’를 뜻하는 NIKA라는 단어가 이 지점에 새겨져 있습니다. 제9처는 골고다 언덕 정상을 50m 정도 남겨둔 지점으로 예수께서 여기서 세 번째 넘어지신 곳으로 콥틱 교회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제10처부터 14처까지의 기념처소는 모두 콘스탄틴 대제의 모친 헬레나가 326년에 건립한 현재의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re) 내부에 자리 잡고 있는데 예수께서 옷 벗기심(10), 못 박히심(11), 돌아가심(12), 십자가에서 그 시신을 내리심(13),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장사지내심(14)의 사건을 차례로 기념하도록 그 처소들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사건은 제5처 구레네 시몬으로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한 사건에서부터 그 증언이 시작됩니다. 26절입니다.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그리고 그 다음 아마도 제6처의 사건과 제7처의 사건이 잇달아 일어났을 것입니다. 여인 베로니카가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땀을 비오듯 흘리시는 예수님의 얼굴을 손수건으로 닦아 드리는 사건과 예수님이 두 번째 넘어지신 일입니다. 이 때쯤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적지 않은 무리가 형성되었고 그들 중에서 안타까운 심정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며 눈물을 적시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27절을 보십시오.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바로 그때였습니다. 예수께서 일어나 그들을 바라보시며 믿기지 않을 놀라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28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우리의 신앙이 어느 정도 성장하면 우리는 인생의 길에서 우리 위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겠다는 고백도 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의 고백을 받으시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실 말씀은 무엇이겠습니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오늘은 마침 어린이 주일입니다. 이 주일 예수님을 이 강단에 초청한다면 주님은 무슨 설교를 하셨을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틀림없이 오늘의 본문으로 설교하셨을 것입니다.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는 말씀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우리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할까요?

1. 다가오는 고난의 시대 때문입니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최대의 불행이 자녀를 얻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본문에 이어지는 눅23:29에서 예수께서는 자녀를 잉태하지 못함이 오히려 복이 되는 때가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일까요? 고난의 시대가 오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우리는 보통 인류의 문화사적 발전이 보다 나은 내일을 약속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외형적으로 본 보다 편리한 세상이라는 측면에서는 사실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가치관의 측면에서 보자면 내일이 보다 나은 세상이 되리란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적어도 성경의 예언에 의하면 내일은 더 혼란하고 더 어두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그것을 신학에서는 종말론적 재앙의 때라고 말합니다. 성경에서는 40년을 한 세대라고 말합니다. 40년 전 자녀를 양육하던 어제의 부모와 40년 후 오늘의 부모의 걱정이 얼마만큼 달라졌는가를 생각해 보십시오.

40년 전 우리는 자녀들에게 <학교에선 선생님에게 맞을짓 하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오늘은<선생이 때리거든 핸드폰에 찍어 오라>고 가르칩니다. 40년전 부모들은 <어른이 묻거든 공손히 대답하라>고 가르쳤지만, 오늘의 부모들은 <수상한 어른의 말은 절대로 믿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40년 전 부모들은 <힘들어하는 친구들을 잘 도우라>고 했지만, 오늘 우리는 <친구 도울 시간 있으면 네 공부나 제대로 하라>고 가르칩니다. 40년 전 부모들은 <혼전 이성교제를 삼가라>고 가르쳤지만 오늘의 부모들은 <혼전 임신을 조심하라>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40년 전 부모들은 <널 나은 조국을 잊지 말라>고 가르쳤지만 오늘은 부모들은 <조국이 밥 먹여 주는 것 아니다. 여기서 돈 못벌 바엔 이민이나 가라>고 가르칩니다. 

가치관의 해체는 포스트 모던 세상의 보편적 징후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런 종말론적 가치관의 타락의 원인을 계12:12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땅과 바다는 화 있을진져 이는 마귀가 자기의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줄을 알므로 크게 분 내어 너희에게 내려갔음이라” 앞으로의 세상이 훨씬 더 힘들고 어려운 세상임을 안다면 이런 고난의 세상에 살게 될 우리 자녀들을 위해 부모 된 우리가 울어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2. 불신앙으로 말미암은 심판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께서 예루살렘의 여인들에게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신 더 중요한 이유는 불신앙의 사람들에게 다가올 심판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의 30절은 그런 다가올 심판의 두려움을 묘사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이런 심판의 예언은 문자 그대로 실현되었습니다. 회개를 거절하고 메시아를 믿지 못한 이스라엘은 결국 AD70년 문자 그대로 예루살렘 성전산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을 맞게 되었고 유대 광야 사해 서쪽의 맛사다로 피신했던 남은 자들도 AD72년 결국은 로마의 공략 앞에 그 산이 무너져 내리는 비극을 맞습니다. 

눅19:41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미 이런 심판에 직면한 예루살렘의 운명을 보시며 우셨다고 기록합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이어지는 눅19:44을 보십시오.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심판)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이미 눈물을 흘리신 분이시기에 그는 이제 예루살렘의 부모들에게 이제는 당신들이 당신의 자녀들을 위해 울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적 심판의 가장 중요한 기준은 믿음입니다. 그 날 심판의 날엔 성공도 성취도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구주로 믿었느냐가 중요할 뿐입니다. 

요한3:17-18을 기억하십니까?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18)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 

오늘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가 성공하고 출세하는 만큼, 그들의 영혼의 구원이나 믿음의 성숙에 관심이 있으십니까? 아니라면 이제 우셔야 합니다. 그들이 결국 직면할 메시아를 불신하고 거절한 대가로 직면할 영원한 심판을 인하여 우셔야 합니다.

3. 눈물이 가져올 새 날의 희망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단순한 슬픔의 표출이 아닌 기도였습니다. 히5:7을 보십시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능히 죽음에서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건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렇습니다. 그분의 눈물은 그분의 기도였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눈물은 마침내 인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자녀들을 위한 부모의 눈물이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구원의 희망인 것을 믿으셔야 합니다. 모니카는 그의 아들 어거스틴이 방황하는 중에도 기도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녀가 존경한 성직자의 말이 그녀를 살린 것입니다. “눈물로 기도하는 자녀는 결코 망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녀는 믿었습니다. 어거스틴은 마침내 주께로 돌아왔고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일군이 되었습니다.

자녀에게 열심히 핸드폰은 하면서도 기도는 못하는 부모들이 많습니다. 핸드폰보다 기도가 좋은 이유를 아십니까? 

“핸드폰은 잘해야 한 달간 통화료가 무료이지만 기도는 한번 가입하면 평생 무료입니다./핸드폰은 거리나 장소에 따라 통화가 어려운 지역이 있지만 기도는 어디서나 통화가 가능합니다./핸드폰은 한 사람만 사용할 수 있지만 기도는 한번에 많은 사람이 함께 통화가 가능합니다./핸드폰의 침묵은 오해를 살수 있지만, 기도할 때는 침묵하는 마음까지 상대방이 헤아려 알아주십니다./핸드폰의 업그레이드는 사람들의 시선을 끌지만. 기도의 업그레이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핸드폰은 받는 사람이 폰을 꺼버리면 통화가 불가능하지만, 기도의 대상은 부재중이거나 폰을 끄시는 법이 없으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참으로 기도하는 삶을 사느냐는 것입니다. 그렇게 아끼시는 자녀를 위해 중보자로 살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 하루중 얼마나 중보의 기도를 드리고 계십니까?

크리스쳔 자녀교육의 명저 <너희 자녀를 위해 울라>의 저자 오인숙은 그 책의 맺음말에서 이 땅의 믿음의 부모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합니다. 

“이제 크리스쳔 부모들은 자신과 자신의 자녀들을 위해 울 때가 되었다. 가정이 무너져 가고 아이들의 마음이 황폐해져 거리를 떠돌고 있다. 일부라 할지라도 초등학교 아이들조차도 담배를 피우고 거침없이 욕설을 하는가하면 음란물과 인터넷 중독에 빠져 들어가고 있는 무서운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들의 자녀속에 깊이 파고드는 물질문명의 소산들을 외면하기에는 그 탁류가 너무나 거세다. 이 시대는 부모들의 눈물을 필요로 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우리 아이들에게 달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지막 슬픔의 길을 걸어 가시면서도 이 부탁을 남기신 것입니다. “너희와 너희 자녀을 위해 울라“고. 여러분의 자녀들의 새 날을 포기하지 않으셨다면 엎드리십시오. 우십시오. 기도하십시오. 지금이야 말로 당신의 자녀를 위해 눈물을 흘리실 때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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