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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말씀을 버린 죄 (삼상 15: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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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을 버린 죄 (삼상 15:1-35) 
 
 
15장은 사울이 하나님께 버림 받게 된 결정적인 이유를 말해줍니다. 이와 더불어 본문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1-3절은 긍휼 없이 심판하시는 하나님을 증언합니다.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먹는 아이와 우양과 약대와 나귀를 죽이라”(3)는 말씀은 여러모로 사람들에게 걸림이 되어 왔습니다. 초대 교회사를 보면 마르시온 같은 이단자는 이런 내용 때문에 구약의 하나님은 유대인만 사랑하는 편협하고 무자비한 신이며, 신약에 나타난 사랑의 하나님과는 다르다고 주장했지요. 그 후의 역사에서도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이럴 수는 없다’며 이런 하나님을 배척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분명하게 이 명령이 “여호와의 말씀”이며 철저히 순종해야 할 말씀이라 증언합니다(1).

하나님 백성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을 믿는다는 점에서 자기가 원하는 신을 만들어 섬기는 우상숭배자들과 구별됩니다. 마음에 드는 말씀만 짜깁기하듯 만든 신이라면 성경의 하나님을 닮은 우상일 뿐이지요. 성경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때는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육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증언합니다(창 6:7). 그러면서도 그분의 “심판하시는 것이 참되시고 의로우시도다”고 증언합니다(계 16:7). “여호와는 자비롭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가 풍부”(시 103:8)신 동시에 작정하신 심판을 긍휼 없이 시행하심을 증언함으로써 그분의 말씀을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게 하지요.

외국인 여행자들을 이유 없이 죽이고 여자들을 납치하고 아이들을 노예로 팔아먹는 패거리들이 있었습니다. 이런 일에 앞장서서 능숙히 행하는 자는 지도자가 되고, 여자들은 그런 남자에 매료되는 집단이 여러분의 집 주위에 있다면 어떤 생각이 들까요? 국가가 나서서 신속히 일망타진해야 한다고 생각하겠지요. 아말렉 족속이 바로 그런 일들을 했습니다. 에서의 후손들로 유목 민족이었던 그들은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올 때에”(2) 대열의 뒤로 쳐진 연약한 자들을 쳤지요(신 25:17-19).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하나님의 나라에 침범하여 하나님 백성을 약탈했던 자들로서 하나님을 대적하고 훼방하는 사단 세력의 모형이요 그림자였습니다.

물론 여호와께서는 악인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고 돌이켜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겔 18:23, 33:11). 하지만 악인의 멸망을 최후의 심판까지 유보하기만 하시지는 않습니다. 때로는 소돔 고모라의 경우처럼 역사 중에 그분의 심판을 집행하셔서 후세에 경건치 아니할 자들에게 본을 삼게도 하십니다(벧후 2:6).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이미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고 맹세하셨습니다(출 17:14, 16). 이제 그 말씀을 성취할 자로 사울을 선택하셨지요. 사울은 하나님 나라를 훼방하고 그분의 백성을 대적하는 세력들에 대한 긍휼 없는 진멸을 대행함으로써 여호와의 공의를 드러내야 할 사명을 받았습니다.

구약의 전쟁은 하나님 백성의 ‘영적 전쟁’에 대한 그림자입니다. 그래서 신약은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엡 6:12)고 가르치지요. 예수님 이후 그림자가 아닌 원형의 하나님 나라는 폭력과 무력이 아니라 오직 복음 전파를 통해서만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도 오직 말씀으로 사단을 대항하셨습니다. 그분의 제자들은 폭력이나 무력적인 수단을 사용해서 반대 집단에 대항한 일이 없지요. 다른 종교인들을 무찔러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으로 폭력과 무력을 정당화하는 것은 결코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는 점도 본문에서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본문이 하나님에 대해 상충되는 듯이 증언하는 문제를 생각해봅시다. 11절에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라고 하셨습니다. 29절에서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존자는 거짓이나 변개함이 없으시니 그는 사람이 아니시므로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라 증언합니다. 35절에서는 다시 “여호와께서는 사울로 이스라엘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고 증언합니다. 세 구절에서 사용된 2번의 ‘후회’와 1번의 ‘변개’는 ‘태도나 마음을 바꾸다’라는 의미를 가진 동일한 히브리어 ‘나함’(!j'n:)이라는 단어에서 나왔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서 후회 하시지만 변개치 않으시는 분이라는 증언은 모순일까요?

사무엘서를 시작하면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2:30)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통치 원칙중 하나입니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실지라도 원칙 없이 그때그때 기분 내키는 대로 통치하시는 전제 군주가 아닙니다. 이사야는 “주는 기사를 옛적의 정하신 뜻대로 성실함과 진실함으로 행하셨음”을 찬송했습니다(사 25:1). 그런데 원칙을 거짓 없이 성실하게 실행하시려면, 당신님을 존중하던 자가 멸시할 때에 마음이나 태도로 바꾸셔야만 합니다. 이를 두고 성경은 인간의 행동을 빗대어 하나님께서 후회하셨다고 표현합니다. 신인동형적 표현이지요.

사울이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다시금 하나님의 뜻을 성취할 자로 선택을 받았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였습니다.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사울로 “왕을 삼으셨은즉 이제 왕은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소서”라고 다시 주어진 이 기회에 꼭 순종하도록 신신당부했지요(1). 사울은 즉시 21만 명의 군사를 소집했고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사울이 어떻게 승리했는지 보다 그가 순종 여부에 관심을 둡니다.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하니라”(9). 이 일에 대해 하나님과 사울은 서로 상반된 평가를 합니다.

하나님은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11)이라고 평가 하셨습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우기보다 “자기를 위하여 기념비”(12) 세우는데 관심을 두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의 기회에 순종함으로 그분의 심판의 준엄함을 드러내기보다 승리와 획득물에 의미를 두었지요. 무엇을 더 가치 있게 여겼는지가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가치관 때문에, 여리고성을 진멸하도록 명령 받았을 때 아름다운 외투와 금덩이를 착복했던 아간과 같은 죄를 범했음에도 불구하고(수 7:21), 사울은 불순종했다는 의식을 전혀 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13)라고 평가하지요.

불순종하고서도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의 고질적인 문제입니다. 사울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을” 남겼다고 변명했지요(15). 제사하기 위함이라면 아각은 왜 남겼을까요? 사무엘이 보기에는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하고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여호와의 악하게 여기시는 것을 행”했을 뿐입니다(19). 하지만 사울 자신은 “실로 여호와의 목소리를 청종”(20)하였으며, “다만 백성이 …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 제사하려고” 가장 좋은 것을 남겼을 뿐이라고 책임을 슬쩍 백성에게로 떠넘깁니다(21). 죄를 깨닫지 못할 뿐만 아니라 지적해줘도 변명하고 탓하는 것이 습관화 되고 있는 모습입니다.

제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남긴 것이 사울의 진심이라 할지라도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보다 현실적인 실용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니까요. 본문의 불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에 자기 생각을 덧붙인 형태입니다. 자기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권위 있는 최종 판단자로 여겨서 발생한 불순종이지요. 하나님을 자신의 왕으로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증상입니다. 사울은 두 번씩이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19, 21)이라고 부릅니다. 사울에게 여호와는 ‘나의 하나님’ ‘나의 왕’이 아니었습니다. 뭔가 거리감이 느껴지고 적당한 섬김으로 만족하지 않으시는 대단히 까다로운 존재였겠지요.

사무엘은 사울의 변명을 막으면서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사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22-23)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왕이심을 거부하는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자기 생각을 더 따른다는 것은 자기를 우상화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왕이라면 당연히 버려질 수밖에 없지요.

사울은 비로소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여호와의 명령보다 그들의 말을 청종했다고 시인하며 회개의 태도를 취합니다(24-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무엘은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 왕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음이니이다”(26),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28)고 연거푸 선언했지요. 그 까닭은 30절을 볼 때 여전히 사울이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여전히 “내 백성의 장로들의 앞과 이스라엘의 앞에서 나를 높이”는 일에 일차적인 관심이 있지요. 다윗처럼 범죄 속에서 죄를 철저히 깨달아 인생의 전환점으로 삼지를 못했습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마 6:33)라는 관점, 즉 사울이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그분과의 바른 관계성’을 추구하며 살았는지의 관점에서 평가하면 거의 0점짜리 왕입니다. 말씀을 버렸기에 자신의 존재 이유나 하나님께서 왕의 자리에 두신 까닭은 도무지 생각하지 않고, 왕권 확립에 몰두하며 살았습니다. 사실 불순종은 다윗 같은 인물도 합니다. 불순종했다는 사실보다도 불순종을 반복하면서도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못하게 하는, 말씀을 버린 그의 마음 중심이 더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16장에서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당신님께 합한 자를 찾으십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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