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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인간의 약함과 강함 (롬 8: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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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약함과 강함 (롬 8:26-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인간은 참 나약함의 존재입니다. 언뜻 보면 인간은 강하고 약고 지혜롭게 생겼지만 무지하고 나약한 존재입니다. 히틀러가 얼마나 강한 사람입니까. 그런데 그는 애인 앞에서 어린아이 같았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도 강한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분도 집에 가면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놀았다고 합니다. 나폴레옹도 강한 황제였습니다. 그런데 그도 애인 조세핀 앞에서 어리광을 부렸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실제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사64:8). 사람은 조금만 과로해도 병이 발생하고 몸속에서 조그만 암 조각이 발생하면 속수무책으로 쓰러집니다. 배가 고파도 참지를 못합니다. 

에서를 보면 배가 조금 고프다고 다 팔아먹었습니다. 조금만 힘들어도 곧 포기해 버리고 외로우면 못살겠다고 야단이고 조금 손해를 보면 고소하고 형제관계도 포기하고 부부관계도 포기하려고 합니다. 살기가 힘들면 자기가 낳은 자식들도 내다 버리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지 못하고 자살해 죽어버립니다. 전직대통령도 도지사도 군수도 큰 회사 사장도 모두 그랬습니다. 성경은 인간을 질그릇 같은 존재라고 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인간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아이티에 지진이 일어나서 인간들이 무참하게 죽었습니다. 아이슬란드 나라에 화산이 발발하자 그 화산재가 구라파 전체를 뒤엎어 모든 비행기들이 올 스톱되었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놀다가 발이 묶여 모두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습니다. 

중국에서는 7도 수준의 지진이 3년 동안 3번 발생하였는데 이번에도 2천여 명이 깔려 죽었습니다. 군함이 잠시 후 폭발할 것인데도 누구도 모르고 잠자려다 모두 수장되는 사고를 당하였습니다. 인간은 한치 앞도 모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도하라고 했는데 안하고 있습니다. 26-27절을 보면 “인간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기도할 줄도 모르지만 기도하기도 힘들어 합니다. 화투하는 데는 밤을 새워도 노래방에서는 밤새도록 지칠 줄 모르고 노래를 부르지만 기도하라면 1시간만 하면 다 나가떨어집니다. 예수님이 피땀 흘려 기도하는 절박한 시간에도 제자들은 잠을 잤습니다.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한치 앞도 모르고 살다가 온갖 재앙들을 다 만납니다. 그런 재앙이 언제까지나 남의 나라에서만 발생하라는 법이 있습니까. 언젠가 앞으로 우리나라에서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언젠가는 내 운명에도 나타날 것입니다. 그런데도 오늘 우리는 기도하지 않고 살아갑니다. 

그 뿐 아니고 현재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놓고 해석할 능력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조금 좋은 일이 있으면 마냥 좋아합니다. 그리고 조금 궂은 일이 있으면 우울해하고 불평하고 불안해합니다. 모두 소화불량에 걸려 소화제가 있어야 살 수 있습니다. 밤에는 신경안정제가 있어야 잠을 잘 수 있습니다. 인간은 그렇게 나약한 존재입니다. 

로빈슨 크루스가 탐험대를 이끌고 탐험 길에 올랐다 배가 좌초되었습니다. 물건을 다 바다에 던졌습니다. 마침내 배가 뒤집혀 다 죽고 자긴 혼자 살아 무인도에 안착하였습니다. 그는 땅에 입을 맞추며 나만 살려주심을 감사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가고 겨울이 오면서 월동준비를 하다가 겨우 지어놓은 움막에 불똥이 튀어 다 태웠습니다. 막연하고 억울하고 한심스러워 울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당신 마음대로 하라”고 외치고는 다리를 뻗고 울다 지쳐 잠을 자고 있는데 뱃고동 소리가 들려 놀라 깨어보니 큰 배가 무인도를 향하여 오고 있습니다. 너무 반가워 선장을 붙들고 “내가 여기 있는 것을 어떻게 알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내가 당신을 어떻게 알겠소, 무인도에서 불이 나서 찾아왔지”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내 집이 불타는 것만 보입니다. 내 집이 불타야 내가 무인도에서 구원받는다는 사실은 꿈에도 생각을 못합니다. 그러니 인간의 눈에 저 너머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을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태생적으로 원망과 불평하는 존재입니다. 

현재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해석하고 분별할 능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한치 앞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약한 존재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왜 이 세상을 자신 있게 살아가는 것일까요. 거기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 해답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기에 몇 가지 배경이 나옵니다. 


성령의 도움 

그것은 성령의 도움입니다. 26절을 보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는 이같이 든든한 빽이 있습니다. 우리들이 연약할 때 성령은 우리의 배후에서 든든하게 받쳐 주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성령의 사역은 우리를 도우시는 사역입니다. 언제 도우시는가 하면 “우리들이 연약할 때”입니다. 성령은 우리들이 강할 때는 거들떠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강하고 고집스러운 사람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아주 진흙같이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하십니다. 그런 사람을 하나님은 마음대로 그릇을 만들어 사용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뿐이 아닙니다. 사람도 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강한 아내, 강한 남편, 강한 친구, 강한 이웃은 사람들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찔러도 피한방울 나오지 않게 생긴 야무진 아내는 피곤합니다. 잘생기고 빈틈없는 남자들을 아내들이 피곤해 합니다. 아이들도, 어른도 부드러운 사람을 좋아합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강한 이미지를 주려 애써왔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부드러운 이미지를 심으려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아파트 이름도 지금까지는 현대, 삼성, 엘지라는 강한 이미지를 심었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래미안, 자이, 더 샾, 칸타빌 등 부드러운 이름을 사용합니다. 차 이름도 로얄, 그랜저 시대는 지나고 소나타, 프레스토, 포르테라는 음악부음표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소화제도 가스 활명수가 아니고 아진탈 포르테라는 음악 부표를 사용합니다. 저도 넥타이를 요즘 계속 단순한 색상을 착용하고 있습니다. 인상이 너무 강하고 날카롭게 보이는 이미지 때문에 부드럽게 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에서보다 야곱을 좋아하신 이유가 있습니다. 에서는 뻣뻣했습니다. 에서는 눈물도 회개도 뉘우침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매력이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야곱은 실수도 하고 욕심도 있었지만 곧 바로 눈물을 흘리고 회개하고 뉘우치고 곧 바로잡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장점입니다. 부모는 뻣뻣한 자식보다 가끔 실수하지만 곧 잘못을 뉘우치고 눈물을 흘리고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따뜻한 가슴을 가진 자식을 사랑하는 법입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요구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벽을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완벽한 성자가 되기를 원하지도 않으십니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신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연약하기 때문에 성령이 오셨고 우리를 도우시려고 오신 것입니다. 오늘도 이 성령께서 여러분 곁에서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계신 줄 믿으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성령께 전폭적으로 의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도는 그래서 강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든든한 빽 성령의 배경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중보 

성령은 우리들이 마땅히 빌 바를 모를 때 대신 중보의 기도를 하십니다. 26절을 보면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일 뿐 아니고 우리의 무지를 깨우치시는 영이시기도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해야 할 때 모르고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때 성령은 나를 위하여 대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도하신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성령의 사역입니다. 마치 아이들이 철없이 살아갈 때 부모가 알아서 염려하시듯이 말입니다. 

우리에게 이 중보의 성령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모릅니다. 그리고 내 배후에 이런 중보의 기도자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든든한 힘이고 빽이 되는지 모릅니다. 우리들이 연약하고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전쟁사에 나오는 사례입니다. 강원도에 펀지볼(punch bowl)이라는 곳에서 6•25때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적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습니다. 그때 아군 병사 하나가 진지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그래도 누구도 내려가 끌어올리지 못하였습니다. 

그때 어느 병사 하나가 계속 시계를 보다가 어느 순간 뛰어 내려가 부상당한 병사를 엎고 올라왔습니다. 전투가 종료된 후에 왜 시계를 보았느냐고 물으니 “어머니가 기도하는 시간되기를 기다렸다”고 대답하였다는 것입니다. 놀라운 용기입니다. 내 배후에서 중보 하는 기도의 힘이 이렇게 강한 힘을 동반시킵니다. 우리는 우리의 배후에 이 하나님의 성령과 천사들의 도우심이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거기서 힘이 발생합니다. 

한 남자가 길을 가는데 갑자기 “멈춰” 하는 소리가 있어 순간 멈추자 앞 언덕에서 돌이 떨어져 내렸습니다. 하마터면 죽을 뻔 했습니다. 얼마나 다행입니까. 또 길을 가는데 갑자기 “멈춰”하는 소리에 멈추니 앞으로 자동차가 획 지나갔습니다. 순간 아찔했습니다. 그래서 외쳤습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냐” 그랬더니 “나는 당신을 보호하는 천사”라고 대답합니다. 이쯤 되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이 사람이 그 소리를 듣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했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도대체 내가 결혼할 때 어디 처박혀 있었는가.”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였을 것입니다. 저는 전도사 때 몸이 약했습니다. 가장 힘든 것이 새벽기도였습니다. 전도사이니 몸이 아파도 새벽기도는 나가야 했습니다. 나가면 엎드려 졸기 일쑤였습니다. 어느 날인가 너무 힘들어 기도하기를 “제발 절 좀 도와주세요, 너무 힘들어요”하고 기도하고 엎드려 잠이 들었습니다. 깨고 보니까 아침 10시였습니다. 

그런데 다음날부터 새벽시간이면 밖에서 누군가 나를 불렀습니다. 정신없이 일어나 문을 열고 보면 아무도 없었습니다. 언제까지 그랬느냐 하면 몸의 병이 나았다고 진단받던 날까지 였습니다. 얼마나 신비한 일입니까. 그러니까 내 몸에 병이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성공한 목회자들을 보면 배후에는 이런 중보기도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최고의 후원자들입니다. 이런 중보기도가 없는 목회자들은 그만큼 힘들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누군가에게는 이와 같은 강한 힘을 부여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스펄전 목사는 런던 교회에서 목회할 때 한때는 성도가 만 명까지 출석하였습니다. 성령이 불타는 교회였습니다. 그의 전기를 보면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찾아와 왜 이 교회는 부흥하는가 하고 물을 때 사람들에게 “내가 발전소를 보여주겠다” 하고 아래층 방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기계는 없고 기도하는 성도들만 있습니다. 그러면서 말하기를 “이것이 나의 목회 비밀입니다, 이들이 나의 힘이며 우리교회의 발전소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기도를 하지 않는가 하면 비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비전이 무엇입니까. 자식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래서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모에게 그런 비전이 있으면 반드시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 장래가 걱정됩니다. 그것이 비전입니다. 그 비전이 있으면 기도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비전이 없는 것입니다. 비전은 지금 내 마음이 쏠리는 것, 쏠리는 대상, 쏠리는 분야 그것이 비전입니다. 

평소 여러분들은 주식에 관심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문의 주식 란에 눈길도 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주식을 삽니다. 그러면 다음날부터 매일 신문 주식 란을 살펴보게 됩니다. 그리고 남모르게 한숨을 쉬기도 하고 또 혼자 야릇하게 웃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비전이 그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비전은 관심입니다. 사람은 돈이 가는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돈이 있는 곳에, 돈을 숨겨놓은 곳에, 투자한 곳에 마음이 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천국에 비전을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하늘에 많이 쌓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최고의 관심대상은 누구겠습니까. 세상의 자녀들 즉 성도들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2장9절을 보면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소유된 백성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만큼 하나님 편에서 존귀한 존재들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천사들을 보내시고 성령을 보내셔서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할 때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것”(26)입니다. 이 이치를 가장 잘 깨달아 알았던 사람이 사도바울입니다. 그러니까 종횡무진 돌아다니며 전도하였습니다. 매를 맞아도 감사하였고 물에 빠져도 구해줄 줄 믿고 태연하였고 옥에 갇히면 찬송을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이 35절에서 39절 사이에서 그렇게 외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란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 하나님의 사랑의 줄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시편3편6절을 보면 다윗은 고백하기를 “천만인이 나를 둘러치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라”고 하였습니다. 이 맛을 알아야 신앙의 맛을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힘이고 능력이고 축복입니다. 이 이치를 모르면 신앙의 삶의 맛을 모르는 것입니다. 모르니까 비전도 없고 없기에 기도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삶에 온갖 근심과 걱정과 염려들로 가득 차게 되어 있습니다.      


선한 결과 

28절을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은 절대로 우리 편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특성은 “매사를 합력해서 유익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고난이나 어려움 그리고 실패들은 암담한 일이지만 그 결과는 반드시 선하게 끝내신다는 말입니다. 이 자신감이 믿음의 요소입니다. 

러시아 육군 장교였던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이 소련정권에 의해서 문서를 날조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재판을 받고 시베리아에 있는 정치수용소로 끌려가 11년 동안 옥중생활을 하였습니다. 그곳에서 11년 동안 죄수들의 참상을 생생하게 목격합니다. 그 참상은 상상을 초월했습니다. 심각한 고문이며 고통들을 목격하였습니다. 자신도 그 고통을 다 당하였습니다. 그는 그 와중에서 예수를 영접하게 되었고 그의 인생이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인생에 가장 큰 변화요 은혜였다고 회고했습니다. 자신이 그 수용소를 가지 않았더라면 예수를 만날 기회가 없었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석방된 후에 그는 “수용소 군도”라는 책을 써서 수용소의 실상을 생생하게 세상에 폭로하여 1970년도에 노벨상을 받습니다. 그때 그가 한마디 고백을 하였습니다. “감방이여 고맙소.” 우리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곳에 이 같은 결과가 나타남을 믿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는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임을 믿습니다. 

로마서8장28절은 제가 성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구절입니다. 저는 이 구절 속에 하나님의 우리를 향한 마음과 생각과 염려와 뜻과 격려가 다 들어 있다고 믿습니다. 오늘 우리들이 이 구절만 그대로 믿는다면 우리의 현재나 나의 미래나 나의 삶과 운명은 모두 주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확신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이정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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