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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재난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 (렘 2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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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난에 대한 신앙인의 태도 (렘 29:10-14)


지난 주 중국 칭하이성에서 강진이 발생하여 1천 480여명이 사망했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아이슬란드의 화산재로 유럽은 최악의 항공대란를 겪고 있습니다. 인류는 역사 속에서 수많은 재난을 겪어 왔습니다. 국어 사전에는 “재난”은 “뜻밖에 일어난 불행한 일”이라고 설명해 놓고 있습니다. 건설 교통부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재난이라 함은 국민의 생명, 신체 및 재산과 국가에 피해를 주거나 줄 수 있는 것으로 인적 재난, 자연재난, 국가 기반 재난을 말한다”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재난의 유형은 원인에 따라 세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는 자연 재난입니다. 태풍, 호우, 토네이도, 지진, 해일, 설해, 화산 폭발 등 천재지변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불가항력적인 재난입니다. 자연 법칙에 의해 일어납니다. 중력의 법칙과 공간과 물체의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관한 법칙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됨 없이 적용되기 때문에 이러한 법칙을 어기면 누구나 재난을 당하게 됩니다. 

둘째는 인위 재난입니다. 문명발달과 공업화에 따른 인공물에 의한 돌발적 사태를 맞는 재난입니다. 핵 방사능 사고, 위험물, 가스폭발 사고, 건물 붕괴, 화재 등과 같은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은 무지나 부주의에 의해 발생할 때가 많습니다. 

셋째는 사회 재난입니다. 현대 사회 구조 여건 등에 의해 사회 구성원간의 갈등으로 인간의 의도에 의해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전쟁, 핵무기 투하, 미국 LA 폭동, 오클라호마 연방 청사 폭발사건, 일본 동경 사린가스 살포사건, 대구 지하철 방화 사건 등입니다. 상호관계(相互關係)에 기인된 재난입니다. 정치, 종교, 국가와 국제적 관계의 갈등으로 인하여 발생되는 재난입니다. 

이런 재난을 당한 사람은 한 순간에 모든 것이 산산 조각이 나버립니다. 생명과 재산, 삶의 의지까지 빼앗겨 버립니다. 우리 나라는 천한함 사고로 연일 침울한 상태에 있습니다. 가족과 당사자들은 얼마나 고통을 받겠습니까? 순간적으로 당한 재난입니다. 신문에 보니까 한 유가족의 딸이 "하나님, 아빠 돌려주세요"라는 기도를 하는 내용이 실렸습니다. 아버지를 실종한 일곱살 딸의 기도입니다. 

지난 주일날 이 아이는 엄마 손을 꼭 잡고 교회에 가서 양손을 깍지 낀 채 열심히 기도했다고 합니다. 기도를 마친 뒤 헌금 봉투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하나님, 우리 아빠를 살려서 보내주세요"라고 적었답니다. 어머니와 할머니가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하자 "할머니, 먹어야 돼. 아프면 안 돼"라고 달랬다고 합니다. 

며칠 전 어머니가 딸을 목욕시키면서 용기를 내 "아빠가 못 올 것 같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나도 알아. 그런데 난 아빠가 올 것 같아."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재난 앞에 예수 믿는 사람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태풍이 부는데 믿는 사람의 집만 건너뛰지 않습니다. 배가 침몰하는데 예수 믿는 사람만 하늘로 솟아 오르지 않습니다. 항공기가 추락하는데 믿는 사람만 살아남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는 우리는 재난에 대하여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하겠습니까?

1. 재난을 당할 때 상황만 보고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희망을 가져야 합니다(11).

재난을 당하면 재난을 당한 당사자들은 세 단계로 반응한다고 합니다. 첫단계는 충격 반응단계입니다. 대개 제정신이 나간 양 멍해지는 상태에 처하는 것입니다. 재난생존자의 약 10-20%만이 재난의 충격 속에서도 냉정이 행동할 수 있다고 합니다. 70%는 당황해서 어쩔 줄 모르고, 나머지 10%는 완전히 제 정신이 아니어서 심한 공포나 불안에 사로잡히거나 공황상태에 빠지고 또는 분노에 사로잡히고 소리를 질러댄다고 합니다. 

일본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직후 피해자들은 아무말없이 긴 열올 지어 시를 걸어 빠져 나갔다고 합니다. 마치 로봇트처럼 옴직였다고 합니다. 폭발의 중심지역에 있던 피폭자들은 좀 달랐는데 귀가 멀고 눈이 멀고 신체가 찢어진 피해자는 남여노소를 막론하고 하나같이 도망치려고 혼신의 노력올 쏟았다고 합니다. 둘째는 반동반응단계입니다. 일단 위험에서 벗어난 생존자들은 살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 이들은 킥킥 웃기도 하고 흐느끼기도 하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한답니다. 환각과 망상에 사로잡히기도 한다고 합니다. 세 번째는 회상반응단계입니다. 긴장해 있고 안절부절해 있습니다. 재난에 대한 무서운 생각이 자꾸 떠오릅니다. 재난에 집착해서 계속 재난에 대해서 이야기 하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재난을 당한 당자자나 가족들이 회상의 단계에서 벗어나 재난을 극복하고 정상적인 삶을 살면 좋은데 그렇지 못하고 잃은 것에 집착하여 우울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약물을 남용하게 됩니다. 재난의 원인을 자신에게 돌립니다. 자신의 죄 때문이라고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잘못된 과정의 근거를 자신에게 돌립니다. 어린 아이같으면 '내가 아빠 말을 너무 안 들어서 아빠가 죽은 거야, 엄마 말을 안 들으면 엄마도 죽올 지 도 몰라’, 비현실적 기대를 가지는 것입니다 ‘내가 착하게 행동하고 공부를 열심히 하고 뭐든지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아빠를 살려 보내줄 거야’, 부정확한 귀인에 사로잡힙니다. ‘엄마가 저런 얼굴로 내게 웃지도 않는 건 나 때문에 아빠가 돌아가셔서 내게 화가 나서 그런 거야’ 등으로 생각을 합니다. 

재난을 당하면 신앙 생활하던 사람들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면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회의를 가지게 됩니다. 재난을 당하면 신앙인들은 대부분 세 가지 질문을 던집니다. 첫째,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합니까? 둘째, 무엇 때문에 이런 고통을 당합니까? 셋째,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질문입니다. “왜, 무엇 때문에, 어디에”라는 질문입니다. 내가 이런 일을 당할 만한 잘못을 하지 않았는데 왜 이런 고통을 당하냐고 항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면 잘 살고 형통한다고 말씀했는데 왜 이런 고통스런 일을 당하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신정론적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런 질문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1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재난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하나님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을 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입니다.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기 원한다는 것입니다. 두 개의 비슷한 말을 겹쳐 씀으로써 그 내용을 강조하는 중언적 표현법입니다. 하나님은 너희가 바라던 미래, 대망하던 미래, 희망으로 가득 찬 미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재난 가운데 절망하지 말고 희망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주실 때 상황은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멸당하여 포로로 잡혀갔을 때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누가 포로로 잡아갔습니까?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입니다. 누구를 잡아갔습니까? 2절을 보십시오. 여고니야 왕 왕후, 궁중 내시, 고관, 기능공, 토공들 유능한 사람들은 잡아갔습니다. 유능한 유다 나라 백성 3,023명(렘52:28)을 1차로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전쟁에서 진다는 것은 심각한 재난입니다. 기업이 부도나고 질병에 걸리고, 자녀가 탈선하고 부부 관계가 원만치 못한 것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처절한 것입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죽습니다. 수없는 여인들이 홀로됩니다. 아이들이 고아가 됩니다. 이제까지 이룬 모든 것들이 파괴됩니다. 전쟁 포로로 사는 것은 차라리 죽는 만 못할 수 있습니다. 한해 두해가 아니고 70년입니다. 절망할 수밖에 없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희망을 주는 것입니다. 

1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70년이 차면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칼 야스퍼스는 그의 비극론에서 기독교에는 비극이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왜냐하면 부활이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재난은 있지만 비극은 없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일어난 사건보다 그 사건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재난보다 재난을 대하는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절망은 인생을 죽이는 악성 종양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개인뿐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파괴하는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이 절망은 육체만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병들게 하여 죽게 만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절망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우리는 죽어도 살아납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벧전 1:3)"

어떤 재난에 처한다하여도 우리는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한 그 약속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소망은 기대와 이루어짐이 합하여 된 것입니다. 기대만 있으면 그것은 공허한 것입니다. 반드시 이루어 져야 소망입니다. 70년은 개인마다 다 다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것은 반드시 이루어졌습니다. 지금 그들은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징계를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징계는 그들에게 죽이려고 내리는 재앙이 아니라 그들을 훈련시켜 더 성숙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기 위한 은혜의 수단일 뿐입니다. 아이들이 잘 못할 때 아버지가 징계를 합니다. 그런데 받아들이는 아이의 태도에 따라 그의 인생이 달라집니다. 재난도 하나님의 허용적 통치의 수단 속에 들어 있습니다. 재난을 통해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것입니다. 

모세를 보십시오. 민족을 구원하려다고 살인자가 되어 하루아침에 왕실의 영광을 잃어버리고 광야의 목동이 되었습니다. 개인적인 뜻하지 않는 재난입니다. 하루아침에 부귀 영화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80세에 다시 일어섰습니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야곱을 보십시오. 자신들의 모습을 보면 다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환경을 보고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소망을 갖고 일어섰습니다. 

오늘 예언을 하는 예레미야는 어떻습니까? 예레미야 애가 3장을 보세요. 얼마나 절망적인 상황입니까? 
4절을 보세요. 살과 가죽이 쇠하고 뼈가 꺾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8절 보니까 아무리 부르 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14절 보니까 백성들이 조롱합니다. 
17절 보니까 평강이 사라졌습니다. 
18절 보니까 소망도 끊어졌다고 했습니다. 
20절 보니까 낙심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상황에서 예레미야가 절망하고 자살합니까? 아닙니다. 20절 보세요. 중심에 회상한즉 오히려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22절 보세요. 누구를 보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을 보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던지 환경과 자신, 자신의 능력을 보면서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 소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소망은 죽은 소망이 아닙니다. 산 소망입니다. 하늘에 있는 소망입니다(골1:5). 영생의 소망입니다.(딛1:2) 영광의 소망(골1:27), 의의 소망(갈5:5), 부끄럽지 않는 소망(롬5:5), 복스러운 소망(딛2:13), 좋은 소망(살후2:18)입니다.


2. 재난을 당할 때 상황만 보고 불안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11).

뜻하지 않은 재난을 당하면 불안할 수밖에 없습니다. 재난은 평안을 산산이 조각내어 버립니다. 지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하는 재난은 사회 재난입니다. 대표적인 특징이 사회질서가 다 붕괴되어 버린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불안해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왜 불안해합니까?

심리학자들은 (1)위협받고 있을 때(범죄, 전쟁, 실패, 거절) (2)갈등을 격을 때( 둘 이상의 선택 앞에서) (3)두려움이 밀려올 때(병, 죽음) (4)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라고 말합니다. 

재난은 이 모든 것을 한꺼번에 가 가지고 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 모든 상황을 다 겪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런데 그 때 우리 하나님께서 불안해하는 백성들을 향하여 말씀합니다. 재난 가운데 있는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평안이라는 것입니다. 재난 가운데 있지만 평안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5절에서 8절까지 말씀을 보십시오. 다섯 가지를 말씀합니다. 평소와 같이 정상적인 직장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상처했다고 낙심하지 말고 아내를 맞이하고 정상적인 가정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자식을 잃었다고 불안해하지 말고 자식을 낳고 살라는 것입니다. 재난을 가져다 준 바벨론 나라를 위해 원수 시하지 말고 그들이 잘되기를 위해 오히려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평안을 흔드는 거짓 교훈에 미혹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께서 역사의 통치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입니다. 재난을 당하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버렸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불안해합니다. 불안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주면서 평안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70년 후면 꼭 돌아오게 하겠다는 것입니다.(10,14) 

그러니 불안에 떨지 말고 그 기간 동안 비록 환경이 열악하고 고통스럽지만 그곳에서 아들 딸 낳고 평안히 살라는 것입니다(5-7). 남은 것으로 얼마든지 하나님 안에서 회복될 수 있습니다. 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어떤 재난 속에서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고 믿으면 평안한 마음을 가지고 살 수가 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확실한 미래를 보면서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아브라함을 보십시오. 소돔 고모라의 연합군을 가신들을 이끌고 가서 치고 두려워 떨고 있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무슨 말씀을 해 주고 있습니까?

창세기 15장 1절을 보십시오. "아브람아 두려워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하나님이 방패이십시다.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십니다. 다 준비해 놓으시지 않았습니까? 잃은 것 집착하며 어떻게 살까 불안해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다 살길이 있습니다. "빌립보서 4장 19절에서는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고 말씀하십니다.

재난 가운데 나를 도와주는 사람 아무도 없다고 불안해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41장 10절을 통하여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고 말씀합니다. 
미래를 미리 예단하며 불안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두려워하는 제자들을 향하여 요한복음 16장 33절에서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우리 하나님 얼마든지 재난의 가운데 있어도 우리를 회복시켜 주십니다. 
작가 오혜령씨에 관한 글을 읽어 보았습니다. 목사님 사모님이 되어 평화의 집에서 무의탁 노인들을 섬기시는 분입니다. 관상 대동맥 경련증이란 희귀병으로 매일 한 번꼴로 호흡과 맥박이 멎는 가사상태에 빠진다고 했습니다. 14가지 병을 달고 살았답니다.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한 후 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희곡 `성야'로 등단 작가와 연극배우, 방송인 등의 화려한 직업을 가졌던 그분에게 인생의 전환점은 78년 3월 26일이었다고 합니다. 평소 자주 아팠지만 감기몸살 정도로 알고 병이 깊어지는 것을 자각하지 못했는데 병원에서 위암과 임파선 암이란 청천벽력과 같은 진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의사는 3개월을 넘기기 힘들겠다고 말했답니다. "하나님 안에서 진리를 추구해 온 제게 왜 매를 드십니까.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 말씀해주십시오. 이 고통 중에 말씀해 주시지 않으면 전 당신을 믿지 못하겠나이다" 통증은 24시간 동안 단말마로 다가왔다고 합니다. 너무 고통스러워 차라리 죽고 싶었다고 합니다. 물만 먹어도 토하고 혈변을 보는 고통은 계속됐습니다. 

그때 1주일마다 병실에 꽃을 보내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디자이너 박항치씨였답니다. 그날도 `희망을 버리지 말라'는 메모와 함께 백합 50송이를 보내왔답니다. 눈을 꼭 감고 꽃에 얼굴을 묻고 30여분을 그대로 있었는데 어디선가 그녀의 목덜미를 낚아채는 강한 손길을 느껴졌고 순간 방바닥에 나동그라졌답니다. 하나님께서 고통의 현장에까지 찾아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동안 살아계신 하나님께 도전해온 죄에 대하여 회개하였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을 확신하였습니다. 지난날의 죄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습니다. 며칠 동안 화선지에 붓글씨로 죄를 회개했습니다. 육체적인 암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정신적인 암이 치료받지 못하면 구원이 없다는 절실함으로 죄를 적었답니다. 

며칠 동안 수십 개의 양초가 녹아내릴 때까지 전인생을 회개하며 기도했답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난 어느 날이었답니다. 그날도 기도와 찬양을 하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답니다. 온몸의 오한이 덮쳐왔답니다. 추워서 이불깃을 잡아당기는데 겨드랑이에 잡히던 임파선 암 덩어리가 만져지지 않았습니다. 어깨에 복숭아씨만 하던 멍울도 사라져버렸습니다. 또 복수로 차올랐던 배는 꺼져 있었습니다. 그녀는 완전히 치유 받았습니다. 그 후 목회자와 결혼 하여 평화의 집에서 그동안 91명의 노인들을 돌보고 있다는 간증을 읽었습니다. 

재난을 당하면 불안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난보다 더 중요하신 분은 그 상황을 만드시는 우리 하나님입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특권입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요 16:33)"(찬양)


3. 재난을 당할 때 상황만 보고 포기하지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12-14).

믿지 않는 사람에게 재난은 형벌입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에게 재난은 결코 형벌이 아닙니다. 징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재난을 통해 징계하는 이유는 크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는 죄를 회개시키기 위해 징계하는 것입니다. 이 때는 징계로 재난을 당하면 속히 회개하고 생각과 행위를 하나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은 죄로 인한 재앙이 있습니다. 재난은 인간의 반역에 대한 하나님의 제동 활동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 때 홍수의 재난을 당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지진과 화산으로 인하여 유황불의 재난을 당합니다. 죄 때문입니다. 다윗이 바셋바와 간음하여 낳은 아이들이 죽습니다. 죄 때문입니다. 죄에는 원죄와 자범죄가 있지만 이런 신학적인 죄 말고도 법적인 죄, 사회적인 죄, 심리적인 죄 등 다양한 죄가 재난을 불러 옵니다. 이때는 최선의 길이 회개입니다. 재난을 보면서 인류는 하나님께 나아가 회개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범죄하여 나라가 망하는 재난을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뭐라 말씀하십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온 마음으로 하나님을 구하고 찾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멀리하고 이방신을 섬겼던 것을 회개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는 잘못을 깨닫고 뉘우치고 돌아서는 것입니다. 지, 정, 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재난으로부터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재난 가운데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회개하면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둘째는 훈련시키기 위한 재난입니다. 재난이 꼭 인과응보적 수단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해할 수 없고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의 주권적 뜻에 따라 하나님의 사람을 훈련시키기 위해 재난의 용광로에 집어넣습니다. 재난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을 전적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게 만듭니다. 욥과 같은 경우입니다.

성경은 욥에 대하여 “순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욥 1:1)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욥이 당한 재난은 원인이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친구들은 인과응보의 관점에서 욥을 정죄하며 네가 무슨 잘못을 했기 때문에 이런 재난을 당한다고 다그칩니다. 

그런데 욥은 그 재난의 과정을 통과하면서 참으로 위대한 신앙 고백을 합니다.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베드로 사도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 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내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벧전1:7)"라고 말씀합니다. 

셋째는 속량적 재난입니다. 과거의 결과가 아니라 미래의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 일어나는 재난입니다. 다니엘과 세친구가 풀무불에서 당한 재난이나 스데반의 순교와 같은 재난입니다. 재난을 통해 특별한 목적 즉 하나님의 구원사적 은총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어느 날 예수님의 제자들이 날 때부터 맹인 된 사람을 보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랍비여 이 사람이 맹인으로 난 것이 누구의 죄로 인함이니이까 자기니이까 그의 부모니이까(요9:2)” 그 때 예수님 말씀하십니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요9:3)” 나사로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 주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요11:40). 

그러므로 우리는 재난 가운데 어떤 경우에서도 포기하기 말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합니다. 1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재난 가운데 우리를 외면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재난이라는 나팔을 통해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내게 나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포기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자신을 도와주는 사람이 없고 자기는 이제 아무런 능력이 없고 일어설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라고 스스로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유다의 포로된 사람들도 그럴 수 있습니다. 저들은 성전에 가서 예배도 드릴 수 없고, 기도할 수도 없고, 속죄받을 수도 없고 이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그러는 것입니다. 사실 포로된 사람들은 몰라서 그렇지 남아 있는 사람들보다 행복한 사람들입니다. 16절 이하를 보세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어떻습니까? 얼마나 비참합니까? 칼과 기근 그것으로 끝나는 것 아닙니다. 염병을 줍니다. 저주와 놀림거리가 되게 합니다. 왜요? 19절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도 듣지 않으니까입니다. 

그들에 비하면 양호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재난을 당하면 나만큼 더 절망적인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며 쉽게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고난이 닥쳐올 때는 그것은 우리에게 기도하라는 또 다른 하나님 마음의 표현입니다. 어려운 문제가 닥치지 않아보십시오. 사람들은 기도하지 않습니다. 문제가 없으면 사람들은 나태해 집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시는데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하시길 원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징계를 긍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저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기를 마치 아비가 그 기뻐하는 아들을 징계함같이 하시느니라 (잠 3:12)" 잘못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징계가 없다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방치한 것이고 유기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징계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희는 잠시 자기의 뜻대로 우리를 징계하였거니와 오직 하나님은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느니라 (히 12:10)"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해방시킬 것을 예언해 놓고 결국 그들의 기도를 통하여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연변 과학기술대학 건축과 교수로 일을 하시는 권길중 박사에 대한 글을 읽었습니다. 그분은 조형 미술을 하는 분이었습니다. 미국으로 이민 가 열심히 공부하여 세계 100대 조형건축가로 선정이 될 정도로 아주 탁월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참 인생을 즐기고 있던 젊은 나이에 그는 그만 식도암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최악의 상태까지 갔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습니다. 코로 호스를 끼워 가지고 겨우 죽 같은 것을 간신히 넘기는 정도였습니다. 

의사들도 이제는 살 소망이 없다고 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가정에서는 장례식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죽음의 손아귀가 계속 자기 목을 바짝 바짝 조여 매는 것을 느끼면서 그는 갑자기 이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한 생을 살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살았다고 한 것이 무엇인가? 내가 과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데 그는 자기 인생을 아무리 이리저리 뜯어보아도 양심상 자기가 하나님의 영광 위해서 한 생을 살았노라고 대답할 수 없었습니다. 그저 교회 다니는 정도였다고 합니다. 병상에 누워서 '이제 어떻게 하나? 하나님 앞에 가 섰을 때 어떻게 대답할까?'하고 고민하며 답답해하고 있던 어느 날 가족 중 한 사람이 연변 과학기술대학의 김진경 총장의 설교 테이프를 들어 보라고 주었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삶이 무엇인지 압니까? 복음을 모르는 사람에게 복음을 음으로 양으로, 직접 간접으로 전하는 삶을 구심점에 두고 인생을 설계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생은 정말 그렇게 살고 있습니까? 만약에 여러분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살고 싶으면, 연변 과학기술대학으로 오십시오. 거기에 오면 중국의 젊은이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장래를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수 있도록 여러분은 썩는 밀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는 눈물 흘리며 기도했답니다. '하나님, 내가 진작 이것을 알았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러나 지금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몸이 되고 말았습니다. 주님,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기도하는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차갑고 메말라 있던 손이 갑자기 따뜻해지기 시작하는 것이었습니다. '참 이상하다!' 설교를 다 듣고 그날 저녁을 넘겼는데, 갑자기 음식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앉혀 달라고 하고는 호스도 빼고 죽을 먹었다고 합니다. 

며칠 후에는 의사들도 보고 깜짝 놀랄 정도로 몸이 많이 회복이 되었습니다. 케이스 스터디를 해야 될 만큼 너무나 기가 막히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한 달 이상의 시간이 지나면서 드디어 걸어다닐 수 있을 정도로 몸이 회복되었습니다. 완전히 딴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연변으로 갔답니다. '나도 이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내 몸을 던져 보자. 나의 전공 분야를 살려서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데 내 남은 인생을 살아보자. 하나님이 그것을 위해 나를 살려 두셨으니까 그렇게 살아보자.'하고는 거기에 달려 와서 드디어 연변 과학기술대학 건축과 교수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 말씀합니다. "이로 인하여 무릇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타서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저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기도는 능력입니다. 기도는 환경을 변화시킵니다. 
재난 속에서 상황을 보며 절망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보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재난 속에서 환경을 바라보며 불안하지 말고 하나님의 마음을 바라보며 평안을 누려야 합니다. 
재난 속에서 환경을 보고 포기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여야 합니다. 다 함께 11절을 큰 소리로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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