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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눈물의 양식 (시 80:4-5, 계 2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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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의 양식 (시 80:4-5, 계 21:3-4)


사람이 언제부터 눈물을 흘리는지 아십니까? 뱃속의 태아가 3개월이 되면 손금이 형성된다고 합니다. 그리고 태아가 눈물을 흘리기 시작합니다. ‘인체의 신비’라는 데서 본 이야기입니다. 이 글에 의하면 5월에 태어나는 아이들은 다른 달에 태어나는 아이들에 비해 몸무게가 200그램 더 무겁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면 눈동자가 45%까지 확장되지만,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면 점점 더 눈동자가 작아집니다. 남자는 여자보다 딸꾹질을 더 많이 한다고 합니다. 인간은 참 일찍 눈물을 흘리기 시작하고 눈물의 의미도 많습니다. 

눈물의 의미는 한국인에게는 깊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를 봐도 눈물이 좀 나야 시원하기도 하고 재미도 있습니다. 시집살이라는 말을 떠올리면 눈물부터 나던 때가 있었습니다. 
“눈물 서 말 흘리지 않고서는 음식 맛을 못 낸다”는 말까지 있습니다. ‘눈물주머니’라는 게 있습니다. 시집가는 전날 밤에 친정어머니가 딸에게 딸의 속 고쟁이 허리춤에 눈물주머니를 채워주는 옛 관습이 있었습니다. 참 슬픈 역사 이야기입니다. 옛날 어머니들은 음식의 간을 맞출 때에 눈물 맛에 간을 맞추었다고 합니다. 체내의 염분과 같게 해야 음식이 맛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눈물 속에는 병균을 죽이는 ‘라이소팀’이란 성분이 있습니다. 이것과는 달리 인간의 감정농도에 따라서 분비량, 분비 농도가 달라지는 ‘로이시닌케팔린’ 성분이 있습니다. 양파 설때나 마늘을 찧을 때 나는 눈물에는 이 성분이 없고, 고통이나 기쁨이나 감정의 눈물에만 있는 성분입니다. 

안질로 고생하던 왕이 있었습니다. 눈이 아팠지만 백약이 효능이 없었습니다. 어느 날 한 사람이 찾아와 왕의 눈병을 고치겠노라고 나섰습니다. 왕은 그를 따라 궁궐 밖으로 나가서 백성들이 사는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왕은 생각했던 것보다 백성들의 삶이 비참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구슬픈 통곡소리가 나서 찾아가보니 쓰러져가는 오막살이 단칸방에 누더기를 걸친 시체 옆에 어린 자식 셋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런 처참한 모습을 본 왕도 눈물이 나서 통곡을 하였습니다. 얼마 후 진정한 왕은 깜짝 놀랐습니다. 눈의 통증이 없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눈물은 많은 것을 의미하며, 또 많은 것을 고칩니다. 

탈무드에는 “너희 남편들! 아내를 울리지 말라. 하나님은 네 아내의 눈물방울을 세시느니라”라는 말이 있습니다. 눈물은 언제나 많은 말을 합니다. 여러분, 대통령의 눈물을 보셨습니까? 지난 월요일 대통령이 ‘천안함 사태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던 날에 이 대통령은 “낱낱이 밝혀내 단호하게 대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대통령이 희생 장병 한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부르다가 눈물을 흘렸습니다. 국군통수권자로서 비통함을 보여주었고, 결연함을 보여주는 눈물이었습니다. 아마 그 장면을 보고 함께 눈시울을 붉힌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눈에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왜 이렇게 눈물 흘릴 일이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눈물의 양식을 먹어야 할 때가 많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눈물의 양식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성경적 해답을 보기를 바랍니다. 


첫째, 눈물의 양식은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4절에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백성의 기도에 대하여 어느 때까지 노하시리이까”라고 합니다. 백성들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가 크십니다. 기도를 기뻐하시는 하나님이 왜 기도에 대하여 진노하시나요? 죄를 지은 사람이 아무리 기도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기도를 기뻐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진노하십니다. 

‘노’란 히브리어로 ‘아솬’이란 말인데 이 말은 ‘연기를 내다’는 뜻입니다. 즉 ‘분노하다’의 의미입니다. 여러분, 만화를 보면 화났다는 것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아십니까? 머리 위에 연기를 그립니다. 머리끝에서 연기가 나면 화가 났다는 뜻입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로 상징하였습니다. 시편 78:21에는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듣고 노하셨으며 야곱에게 불 같이 노하셨고 또한 이스라엘에게 진노가 불타올랐으니”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시편 78:22에는 해답이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지 아니하며 그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한 때문이로다”. 하나님께서 가장 진노하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다른 우상을 섬기게 되고, 하나님의 구원을 의지하지 않으면 세상을 의지하게 됩니다. 

기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계속적인 분노를 품으신 까닭이 무엇입니까? 사람들이 입으로만 기도하고 하나님께 만족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5:8에는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고, 구원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합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우리에게는 눈물의 양식이 되는 것입니다. 

히말라야 훈자마을은 산골 오지인데 장수촌입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100세는 예사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네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합니다. 둘째는 반석에서 나오는 물을 마십니다. 셋째는 이곳의 사람들은 걸어 다니는데 도로가 모두 비포장도로라고 합니다. 넷째는 이곳 사람들은 온유한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의 은혜인데 과다한 욕심이 하나님의 진노를 부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양식을 빼앗아 가십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진노의 포도주”라는 말이 자주 나옵니다. 범죄한 인간은 진노의 포도주를 마십니다. “진노의 양식”을 먹습니다. 

지난 주간 저의 친구 목사님이 성지순례를 갔다가 핀란드의 헬싱키에서 한국에 오지 못하고 한 주간을 교인들과 함께 붙잡혀 있다 왔습니다. 아이슬란드의 화산폭발로 화산재 때문에 비행기가 뜨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천재지변에 의해 비행기가 결항될 경우에는 항공사에서 책임도 안집니다. 그래서 한국인들 가운데는 비행장에서 노숙하고, 돈이 떨어져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에 왔던 유럽인들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고생들 많이 하였습니다. 이런 세계적인 재앙들이 왜 일어나는 것일까요? 

세계적인 재앙은 점점 심각할 것입니다. 이전에 보지 못했던 화산폭발, 지진, 홍수, 눈사태 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큰 대자(大)가 많아져가고 있습니다. 그래서 대폭발, 대지진, 대홍수, 폭설이라고 합니다. 왜 그렇게 불러요? 하나님의 진노 때문입니다. 

시편 18:7에는 “이에 땅이 진동하고 산들의 터도 요동하였으니 그의 진노로 말미암음이로다”라고 합 
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세상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신 세상입니다. 그런데 이 좋은 지구를 이렇게 망쳐놨으니 하나님이 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천안함 유족들의 눈물을 보세요. 지금도 끊이지 않는 세계 도처의 지진을 보세요. 전쟁의 포화 속에서 상처를 입고 가족을 잃은 이들을 보세요. 화산 폭발로 집을 잃고 상처를 가진 자들을 보세요. 세계도 처의 이 눈물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의 대가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죄의 대가입니다. 

찬송가의 가사를 보세요. “이방이 떠들고 나라들 모여서 진동하나 우리 주 목소리 한 번만 발하면 천하에 모든 것 망하겠네”. 하나님이 한번 진노하시면 천하의 모든 것이 다 망합니다. 선지자들의 말을 들으세요. “너희는 돌아오라”고 합니다. 주께로 돌아오면 눈에 눈물을 씻기십니다. 눈물 양식을 안 먹을 것입니다. 


둘째, 죄를 범한 백성에게 눈물은 양식이 되었습니다. 

5절에는 말씀합니다. “주께서 그들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 “눈물의 양식을 먹이시며”라고 합니다. 눈물의 양식을 하나님이 먹이신다는 말입니다. ‘눈물의 양식’은 히브리어로 ‘레헴 디므아’인데 이 말은 구약 성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 말입니다. 

죄를 범한 인류에게 땀이 양식이 되고, 눈물이 양식이 되고, 피가 양식이 되었습니다. 죄를 범한 인간에게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창세기 3:17에는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범하였을 때 죄의 결과는 땅이 가시와 엉겅퀴를 내고, 땀을 흘려야 먹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12:13에는 “무리가 밀을 심어도 가시를 거두며 수고하여도 소득이 없은즉 그 소산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수치를 당하리니 이는 여호와의 분노로 말미암음이니라”고 합니다. 소산을 얻지 못하고 수치를 당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분노 때문입니다. 우리 말에 ‘하늘이 노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날 기우제를 드릴 때 “하늘이여 노하셨습니까?”라고 했습니다. 비가 안 와도 하늘이 노하였다고 생각했고, 비가 많이 와도 하늘이 노하였다고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였습니까? 평소에 하늘에 무언가 잘못을 많이 했고, 죄를 많이 지었기 때문에 하늘이 노하였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어르신들이 출연하여 삶을 이야기하며 퀴즈를 하였습니다. 어느 할아버지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아내는 남편의 무엇을 먹고 삽니까?” 할아버지는 심각한 표정으로 “등골 먹고 살재”라고 대답하였습니다. 할아버지 설명이 등골 빠지게 일해서 먹여 살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내는 등골을 먹고 산답니다. 등골 빠지고 먹으면 다행인데 등골이 빠져도 못 먹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인간의 역사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눈물을 양식처럼 먹게 하신다는 비유적 표현은 하나님께서 심한 고난을 당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죄를 범한 인류에게는 고난이 양식과 음료처럼 백성들 생활의 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더구나 “많은 눈물을 마시게 하셨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죄를 지은 인간에게는 고난의 연속으로 살게 하셨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눈물 마를 날이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말에는 고추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라고 했습니다. 최근에는 꼬리를 문 연예인의 자살로 자살한 연예인과 가까운 사람들은 눈물이 마를날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고통의 연속입니다. 문자 그대로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픔은 계속됩니다. 

최근에는 구제역이 다시 확산되고 있습니다. 축산농가에서는 20년, 30년 애써 길러놓은 소와 돼지를 생매장하고 있습니다. 며칠 전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빈 축사 앞에서 허탈하게 서서 흘리는 농부의 눈물을 보니 참 마음이 아팠습니다. 인간이 아무리 수고해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인간의 수고가 허사라는 것을 겸손하게 알아야 합니다. 

인간은 왜 이렇게 울어야 합니까? 인간이 뿌려놓은 죄의 씨앗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질서를 벗어난 인간은 스스로 눈물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질병, 홍수, 한발, 기근,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진노의 대가입니다. 그래서 눈물이 마르지 않습니다. 

예레미야 3:48에는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라고 합니다. 시편 119:136에는 “저들이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 같이 흐르나이다”라고 합니다.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는 이유는 백성의 파멸 때문입니다. 
주의 법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땅에서 눈물은 우리의 일상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으면 눈물은 양식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눈물 젖은 빵’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를 보세요. ‘눈물에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서 어찌 인생을 논할 수 있니 쓰라린 사연 하나 가슴에 없으면서 어찌 인생을 안다 하겠니...먹어봤나 눈물빵 눈물 젖은 빵’. 쓰라린 사연이 하나만 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눈물이 마를 날이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시는 모습을 보려고 대제사장의 집에 들어갔습니다. 그 집에서 작은 여종이 ‘이 사람도 예수의 제자다’라는 말을 듣고 두려워서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였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세 번씩이나 부인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닭이 울기 전에 나를 부인하리라’는 말씀을 기억하고 대제사장의 집에서 뛰쳐나와 통곡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회개의 눈물입니다. 베드로의 눈물은 죄로 말미암은 눈물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그 일 이후로 베드로는 닭이 우는 소리만 들으면 하면 울었다고 합니다. 닭이 울면 베드로도 울었습니다. 자신의 죄가 눈물바다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베드로가 흘린 눈물의 연못은 나중에 다른 사람들이 주님을 실망시킨 것을 깨달을 때마다 계속 불어나 바다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죄는 결국 인간 스스로가 눈물바다에 살고, 눈물 양식을 먹게 합니다. 아담의 죄로 모든 인류는 죄와 더불어 살게 되고 인간의 죄는 인간에게 눈물의 양식을 먹게 하고,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한 것입니다. 


결론 

켄 가이어의 이야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숲 근처에 태평스런 소녀가 있었습니다. 이 소녀는 노는 것을 좋아하고, 탐험을 즐기고, 먼 곳으로 모험여행을 떠나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숲 속에서 길을 잃었습니다. 불안해지기 시작한 아버지는 소녀를 찾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점 밤이 깊어지면서 샅샅이 숲을 수색하였습니다. 소녀는 길마다 따라 가보았지만 길이 없었습니다. 나무에 긁혀 살갗에 상처가 나고 넘어져 무릎이 까졌습니다. 눈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내려 얼굴에는 눈물 자국이 뚜렷했습니다. 그러다 소녀는 공터 커다란 바위 위에 웅크리고 잠을 잤습니다. 

아버지는 사람들을 풀어 소녀를 찾았습니다. 소녀를 찾던 사람들은 다 돌아가 버리고 말았지만 아버지는 그럴 수가 없어 밤새 숲 속을 뒤졌습니다. 새벽녘에 첫 빛줄기가 비칠 때에 아버지는 바위 위에 있는 딸을 발견하였습니다. 아버지는 딸의 이름을 부르며 뛰어갑니다. 소녀는 아빠가 부르는 소리에 놀라 잠이 깨어 아빠를 끌어안으며 말합니다. “아빠, 드디어 아빠 찾았어요”. 

아버지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찾으면 눈물이 멈춥니다. 눈물의 양식은 아버지를 찾아야, 아버지께 돌아와야 먹지 않습니다. 

시편 56:8에는 “나의 눈물을 주의 병에 담으소서”라는 시편 기자의 간구가 있습니다. 눈물이 하나님께 기억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평안이 있고, 강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에 가면 다시는 눈물이 없습니다. 그 때가지는 눈물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의 양식을 먹을 것입니다. 우리의 눈물을 주님이 기억하셔야 눈물 양식을 먹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실 것입니다. 주님을 의지하고 주님께서 내 눈물을 기억해 주시기를 바라며, 눈물 없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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