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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소수의 힘 3 : 10대 2 (민 13:3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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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의 힘 3 : 10대 2 (민 13:30-33) 
 
 
❚같은 경험, 다른 보고

1590년 선조 23년 조선 조정은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정보를 듣고 동태를 파악하기 위해 통신사를 파견합니다. 그런데 이때 참 이상한 일이 일어납니다. 통신사로 파견된 정사 황윤길과 부사 김성일이 이듬해인 1591년 일본에 다녀와 조정에 상소를 올릴 때 전혀 상반된 보고를 한 것입니다. 정사 황윤길은 일본의 군사적인 움직임이 심상치 않고 특히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관상이 예사롭지 않으니 전쟁에 대비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부사 김성일은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나보니 그 생김새가 쥐새끼 같고 전쟁을 일으킬만한 위인으로 전혀 보이진 않는다고 보고한 것입니다. 그의 말을 들어볼까요? “소신은 전쟁의 조짐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는데 황윤길이 장황하게 아뢰어 인심이 동요되게 하니 사의에 매우 어긋납니다.” 두 사람의 보고를 들은 선조는 도대체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고민하다가 다른 조정대신들의 의견을 묻는데 아무래도 당시 집권세력인 동인의 일파였던 김성일의 말에 더 비중을 두게 되어 전쟁준비에 소홀하게 됩니다. 훗날 이 잘못된 판단이 임진왜란이라는 엄청난 비극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이 사건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남겨줍니까? 어떻게 똑같은 상황을 보고도 두 사람의 보고가 이렇게 다를 수 있나? 이유는 이렇습니다. 똑같은 것을 보았지만 한 사람은 상황을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었고 또 한 사람은 눈이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한 것입니다. 똑같이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만났지만 한 사람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있는 야욕을 보았고 또 한 사람은 그의 못난 외모만 보고 섣불리 판단해버린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 똑같은 사람을 보고도 어떤 눈을 가진 사람이냐에 따라 전혀 다른 보고를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참으로 엄청나게 달라지지요. 한 나라를, 한 민족을 망하게 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바란 광야에 진을 치고 코앞에 있는 가나안 땅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십니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한 사람씩 열두 명의 정탐꾼을 뽑아 가나안 땅을 정탐하게 하라!” 모세는 에브라임 지파의 여호수아와 유다 지파의 갈렙을 비롯해 열두 명의 정탐꾼을 뽑아 하나님의 명령대로 가나안 땅에 정탐을 보내지요. 그런데 사십 일 동안 정탐을 마치고 돌아온 열두 명의 정탐꾼은 전혀 상반된 보고를 합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한 마디로 이렇게 보고합니다. “우린 망했습니다.” 한 마디로 가나안 땅은 우리가 도저히 정복할 수 없는 땅이라는 것입니다. 

왜요? 우리가 갔던 가나안 땅은 과연 너무도 풍요로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인데 문제는 거기 사는 원주민들이 너무 크고 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사는 성읍도 너무 견고해서 도저히 점령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심지어 오늘 본문 33절을 보십시오. 뭐라고까지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라.” 그 엄청난 덩치의 가나안 사람들 앞에 서면 우리는 마치 메뚜기같이 초라하게 보이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유행가 가사가 있었지요. “그대 앞에만 서만 나는 왜 작아지는지....” 바로 그런 뜻입니다.

그런데 나머지 두 명인 여호수아와 갈렙은 전혀 다른 보고를 합니다. 먼저 오늘 본문 30절에 나온 유다 지파 갈렙의 보고를 들어볼까요? 함께 읽읍시다.

갈렙이 모세 앞에서 백성을 조용하게 하고 이르되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하나

치러 올라가자, 우리가 반드시 이긴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똑같이 정탐을 갔다 와서 열 명은 올라가면 틀림없이 진다고 보고하고 갈렙은 틀림없이 이긴다고 보고합니까? 또 열 명의 보고를 듣고 크게 실망하고 두려움에 떨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밤새 통곡하다가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할 때 여호수아와 갈렙은 뭐라고 말합니까? 14장 8~9절을 읽읍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다만 여호와를 거역하지는 말라 또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 그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목숨이라도 부지하기 위해 애굽으로 돌아가기로 이미 결심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백성들 앞에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옷을 찢으며 외칩니다. 이게 무슨 소리냐고,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고, 하나님이 분명히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는데 왜 두려워하냐고 말입니다. 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옛날 성경인 개역성경에는 “그들은 우리의 밥이라”고 했습니다. 

똑같은 가나안 원주민들을 보고 열 명은 그들은 거인이고 우리는 그들 앞에 서면 메뚜기 같다고 말하고, 두 명은 “너희들 우리 밥이야”라고 말합니다. 과연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까? 두 통신사가 서로 다른 보고를 했을 때 선조 임금은 다른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는데 만약 모세도 사람들의 의견을 물어 민주적으로 국민투표를 했다면 백성들은 틀림없이 10명 쪽의 손을 들어주었을 것입니다. 왜요? 이미 엄청난 두려움과 좌절이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민주주의는 다수결의 원칙을 따릅니다. 10명 대 2명이면 벌써 이긴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생각해 봅니다. 도대체 왜 똑같이 정탐을 하고도 이렇게 다른 보고를 한 것일까? 왜 10대 2로 첨예하게 나뉘어서 정 반대의 보고를 한 것일까? 여기에는 세 가지 원인이 있음을 성경에서 발견하게 됩니다.

❚다수와 소수의 차이

첫째 원인은 뭘까요. 따라 하세요. “부정적인 다수와 긍정적인 소수!” 바로 이겁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부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안 된다고 생각하니 포기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눈, 어떤 시각(視覺)을 갖느냐가 중요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눈앞에 있으면 뭐합니까? 이건 좋은 게 아니다, 나쁜 거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눈으로 보고 시작하면 안 되는 일, 안 좋은 상황만 보입니다. 오늘 열 명은 “안 된다”는 눈을 가지고 가나안을 정탐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메뚜기 눈을 가지고 가나안 사람을 보니 더 크고 강하게 보이고 나는 상대적으로 더 왜소하고 초라해 보이는 것입니다.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된다”는 생각을 가지고 정탐을 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이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했다. 반드시 이 땅을 정복하게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정탐을 하니 아무리 견고한 가나안 성읍도, 아무리 덩치가 큰 가나안 원주민도 다 내 밥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무리 다수라고 해도 부정적인 눈, 안 된다는 시각을 가진 사람은 정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리 소수라도 된다는, 할 수 있다는 시각을 가진 사람은 정말 무엇이든 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왜 못해요? 물론 나는 못 합니다. 내가 무슨 힘이 있고 능력이 있습니까? 지금 내 처지를 보면 너무 한심하고 약하고 짝이 없습니다. 정말 메뚜기 같은 인생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사 41:10)

이 하나님의 약속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진정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다면 우린 반드시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긍정적인 눈을 가진 사람의 힘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안 된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안 되고, 된다고 하는 사람은 정말 됩니다. 할렐루야! 여러분 모두도 긍정적인 시각을 갖기 바랍니다. 교회를 향해서도, 가정을 향해서도 항상 안 되는 것만 보지 마시고 되는 것을 찾으십시오. “우리 교회도 할 수 있다, 우리 가정도 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제발 좀 좋은 면, 긍정적인 면을 먼저 보십시오. 

“저 사람은 저래서 안 돼, 저게 마음에 안 들어” 이렇게 보기 시작하면 정말 그 사람 사랑 못합니다. 하지만 그 사람의 긍정적인 면과 좋은 면을 먼저 보시면 그 사람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일단 사랑하기 시작하면 모든 게 좋아 보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도 힘을 내서 일어섭니다. 그래서 이런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 삽니다, 교회가 삽니다, 다른 사람을 살리고 일으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긍적적인 눈을 가진 사람을 찾아 쓰기 원하십니다. 여러분이 바로 그런 사람이 되기 바랍니다.

둘째 원인은, 따라 하세요. “불순종하는 다수와 순종하는 소수!” 즉 열 명의 정탐꾼은 불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순종하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자기 눈과 판단을 더 의지합니다. 분명히 하나님이 이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고 약속하셨는데 그 약속에 아멘으로 순종하지 않고 자기 눈을 더 믿고, 자기 판단을 더 의지해 보고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이미 주신 하나님의 약속보다 열 명의 정탐꾼의 보고를 더 믿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망하지요. 반면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입니다. 올라가라, 내가 그 땅을 너희에게 주겠다 하신 하나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똑똑한 사람, 잘 난 사람 쓰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비천한 목동인 다윗보다 잘난 사울 왕을 택하셨을 것입니다. 서자인 솔로몬보다 잘생기고 똑똑한 압살롬을 택하셨겠지요. 

만약 그랬다면 지금도 공부 많이 한 사람, 잘 사는 사람,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만 골라 쓰실 텐데 그런 기준이라면 저나 여러분 다 쓰임 받기 힘듭니다. 그런데 참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잘 난 사람보다, 똑똑한 사람보다 순종하는 사람을 더 좋아하고 그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왜요? 잘 난 사람, 똑똑한 사람은 하나님 능력보다 자기 능력과 판단을 더 따르거든요.

사람이 제아무리 똑똑하고 잘나봐야 얼마나 잘났겠습니까? 분명한 한계가 있는데 거기 의지하면 실패하게 되어 있지요. 하지만 좀 못나고 부족해도 순종하는 사람은 어떻습니까? “예, 믿습니다” 하고 하나님 뜻대로만 움직이니 하나님의 능력을 그대로 전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역사가 일어나지요. 똑똑한 노새가 있었습니다. 이 노새는 주인이 소금을 운반하게 하면 냇물에 뒹굴어 소금을 물에 녹게 한 후 짐을 가볍게 해서 운반하곤 했습니다. 잔머리를 쓴 것이지요. 

어느 날 주인이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노새에게 솜을 실어가게 합니다. 노새는 이번에도 머리를 써서 냇물에 뒹구는데 이게 웬일입니까? 짐이 가벼워지기는커녕 솜이 물에 불어서 몇 배 무거워지고 혼쭐이 난 노새는 그제야 못된 버릇을 고치게 되었답니다. 잔머리 쓰지 마세요. 내 생각대로 판단하지 마세요. 그저 우직하게, 시키는 대로 복종하면 복을 받습니다. 우리에게 그 일을 시킨 주인의 뜻대로 하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노새가 똑똑해봐야 얼마나 똑똑하겠으며 사람이 잘 나봐야 얼마나 잘 났겠습니까? 우리가 알량한 제 능력, 판단 의지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만 의지하여 순종할 때, 이런 사람 몇 명만 있으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마지막 세 번째 원인은, 따라 하세요. “비전이 없는 다수와 비전이 있는 소수!” 즉 열 명의 정탐꾼은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었고,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은 비전을 가진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비전은 소망입니다. 비전은 미래를 내다보고 꿈을 꾸는 능력입니다. 꿈도 소망도 없는 사람은 끝입니다. 지금은 우리가 약하지만, 지금은 비록 내가 별 볼 일 없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장차 나에게, 우리에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기대하고 꿈꾸는 사람은 정말 그 꿈이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이 비전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들어가 그곳을 정복하고 거기에 나라를 세우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벅찬 미래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근시안적으로 눈앞에 있는 적의 덩치와 힘만 보고 벌벌 떨며 두려워 물러선 것입니다. 이렇게 살면 무슨 미래가 있고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하나님도 이런 사람에게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약하고 부족해도, 지금은 힘이 들어도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한 반드시 창대한 미래를 열어주신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실제 그런 일이 일어납니다.

개구리 두 마리가 우유 통에 빠졌다지요. 아무리 애를 써도 도저히 못 빠져나가겠더랍니다. 그래서 한 마리는 포기하고 그대로 빠져 죽었지만 다른 한 마리는 발버둥이라도 쳐보자, 뭔가 살 길이 있을 거다 싶어 열심히 허우적댔더니 우유를 계속 저어주는 효과가 일어나 버터로 변해 굳어지고 결국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답니다. 이 개구리, 비전이 있는 개구리입니다. 지금 우리 처지가 진짜 메뚜기 같고 개구리 같더라도 비전 없는 메뚜기, 개구리는 그저 밟혀 죽을까봐 무서워 도망만 다니는 반면 메뚜기, 개구리라도 비전이 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벅찬 미래를 바라본다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비전을 이루어 주실 줄 믿습니다. 열 명의 정탐꾼은 밟혀 죽을까봐 도망 다니는 메뚜기였고, 여호수아와 갈렙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미래를 바라보며 열심히 발버둥친 사람들이라는 차이뿐인데 결과는 엄청나게 달라집니다.

❚이런 일꾼을 뽑읍시다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결국 열 명의 정탐꾼을 따른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서운 저주를 받아 정탐을 한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쳐서 40년 동안이나 광야를 방황하게 됩니다. 이 때 잘 선택했으면 바로 가나안에 들어갈 것을 40년이나 헤매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이 잘못된 선택을 한 사람들 가운데 20세가 넘은 장정은 여호수아와 갈렙 단 두 사람만 빼고 그 40년 광야생활에 다 광야에서 죽고 맙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입니다.

보십시오. 순간의 선택이 얼마나 엄청난 결과를 가져옵니까? 누구 말을 듣냐에 따라 한 나라, 한 민족, 한 가정의 미래가 송두리째 바뀝니다. 잘못 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계속 헤매고 방황하다가 결국 약속의 땅으로 못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교회의 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 후에 공동의회를 소집해 항존직을 선출하게 됩니다. 

오늘 다섯 명의 장로님과 안수집사 열 명, 권사 스무 명을 뽑게 됩니다. 전체 성도 수에 비하면 소수지만 앞으로 우리 교회를 이끌어가게 될 지도자들입니다. 오늘 가나안 땅에 정탐하러 간 열두 명의 정탐꾼도 각 지파를 대표하는 지도자급 인물들(13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도자들 잘 못 만나 그들 말 들었다가 온 민족이 망하고 만 것입니다. 헤매고 방황하다 약속의 땅, 약속된 미래에 들어가 보지도 못하고 죽고 맙니다. 그러니 이 소수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합니까?

보세요. 첫째, 부정적인 눈을 가진 지도자 만나면 교회 어렵습니다. 하지만 긍정적인 눈을 가진 지도자 뽑으면 교회가 삽니다. 둘째, 불순종하는 지도자 만나면 교회는 약속의 땅에 못 들어갑니다. 하지만 하나님께만 순종하는 지도자 뽑으면 교회가 하나님의 약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 뜻 아닌 내 뜻 내 생각 따르면 안 됩니다. 심지어 하나님 외에 어떤 사람의 뜻도 따르지 말아야 합니다. 

14장 10절에 보니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를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에 안 든다고 돌로 쳐 죽이려고 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맞아 죽어도 절대 그들 뜻 안 따르고 오직 하나님의 뜻에만 순종합니다. 지도자는 이래야 합니다. 당장 돌에 맞아 죽어도, 목에 칼이 들어와도 오직 주님 뜻만 따르겠다고 하는 사람 말입니다. 셋째, 비전 없는 지도자 만나면 우리 교회 희망이 없습니다. 하지만 비전을 가진 지도자 뽑으면 우리 교회 정말 희망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도 그런 지도자를 뽑을 수 있기 바랍니다. 절대 나 아는 사람, 나와 친한 사람이라고 뽑지 마시고, 나한테 잘 해주는 사람이라고 뽑지 마십시오. 우리 구역이라고 뽑고 우리 부서라고 뽑지 마십시오. 투표용지에 기표하기 전에 잠시 기도하고 이 사람이 정말 우리 교회를 앞으로 약속의 땅으로 이끌어갈 사람인가?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쓰실만한 사람인가 묻고 확신이 오면 쓰십시오.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선거입니다. 

오늘 우리가 어떤 지도자를 뽑아 세우냐에 따라 우리 교회의 미래가 결정될 것입니다. 실컷 헤매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교회가 될지, 정말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 하나님이 쓰시는 교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교회가 될 지가 여기 달려 있습니다. 아울러 오늘 선출된 사람들은 절대 인간적인 능력이나 판단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약속만 바라보며 순종하는 정말 여호수아와 갈렙 같은 지도자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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