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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끝까지 견디라 (막 13: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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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견디라 (막 13:1-17)


어느 유머집에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제목은 “이 세상의 마지막 전쟁은요? ”입니다. 
계돈 떼어먹었다고 머리채 휘어잡고 싸우대요. 
교회서도 그러다가 교회가 박살나기도 했다는 소문도 있어요. 계는 무서워요.
우리 성도들은 성도들끼리 이익을 남기기 위한 계는 들지 말아야 해요.
세계 마지막 전쟁은 아마 계돈 전쟁일 거예요. 
성경 요한계시록에 나와 있다고 목사님도 말씀했거든요.
'아마게돈'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됩니까? 아마겟돈 마지막 전쟁의 날 이 세상의 마지막 때에 빗댄 이야기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런 말씀을 하십니다. 한국교회가 지금처럼 대교회 집중화가 계속되다 보면 유럽에서 이미 보여 왔던 것처럼 먼저 작은 교회가 문을 닫게 될 것이고 이윽고는 큰 교회도 성도들이 떠나버려 텅 빈 건물만 문화재로 남게 될 것이라고. 이에 대해 저는 그런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건 염려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그 전에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주님이 오실 날이 코앞에 다가와 있는 때입니다. 지난 2000여 년간 계속해서 종말을 이야기해 왔지만 아직도 종말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의 죗값을 대신 치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 돌아가시면서 이미 세상의 종말은 시작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너희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 세상 종말이 오리라고 하신 그 말씀이 이루어질 날이 모든 징조를 통해서 보이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이 주고 있는 교훈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먼저 마지막 때를 기억하여야 합니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지나간 역사를 통해서 교훈을 받을 수 있어야 합니다. 노아의 홍수 때 이 땅에 죄악이 만연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건 소돔과 고모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은 그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지않은 그런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입니다. 착한 사람이 잘 되고 못된 사람이 못된다고 하는 이야기는 그냥 동화 속에나 나오는 이야기가 되었습니다. 

그저 남 등쳐먹는 사람이 더 화려하게 잘 먹고 잘 사는 경우를 우리는 주위에서 흔하게 봅니다. 더 큰 문제는 포장 문화의 발달입니다. 뭐 물건을 잘 포장한다는 그런 뜻이 아니라 겉으로 보이는 것을 화려하게 꾸미는 것을 말합니다. 속빈 강정이라는 말도 있지만 요즘은 속도 얼마나 화려한지 모릅니다. 집만 해도 더 세련되게 더 화려하게 더 첨단 기능을 갖춘 집들이 지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허리가 휘어질망정 이왕이면 큰 집을 장만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인즉슨 명절에 가족이 함께 모이려면 큰 집이 있어야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핑계에 불과하고 결국은 자기 과시입니다. 그러다 보니 과자 하나만 해도 포장이 얼마나 번지르르한지 모릅니다. 그건 우리네 용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네야 별로 꾸미지를 않지만 가꾸는 사람들보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요즘 여인네들 무슨 화장품이 자그마치 몇 가지인지 모릅니다. 그거 기능이나 다 알고 준비해 놓고 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제대로 화장 한 번 하려면 몇 시간도 족히 걸리지 않나요? 

어쨌든 화장발로도 안 되면 그때는 다 뜯어고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보다 더 문제는 향락 문화입니다. 그리고 그 향락 문화의 선봉에 목욕문화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의 첨단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 한국의 찜질방입니다. 그런데 찜질방이라고 하는 것이 장난이 아니지 않습니까? 저 영통에 대형 찜질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이름이 천국 사우나였습니다. 그런데 그만 천국이 부도가 났습니다. 아니 세상에 천국이 다 부도가 납니다. 그런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우리가 들어갈 천국은 결코 부도가 없으니 염려마시기 바랍니다. 

문제는 그 모든 화려함의 극치를 자랑하는 모든 것들이 어느 날 다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한 평생 땀 흘려 모은 재산들이라고 해도 마지막 날에는 휴지 조각만도 못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아니 그 전이라고 해도 죽음이 우리 앞에 찾아오는 날 우리가 자랑하던 그 모든 것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입니까? 
성전 안에서 사람들을 가르치던 예수님께서 해가 저물어가니 성전에서 나와 베다니를 향해 나가십니다. 그 때 뒤를 따르던 제자 가운데 하나가 뚱딴지 같이 묻습니다. “선생님이여 보소서 이 돌들이 어떠하며 이 건물들이 어떠하니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가 이 큰 건물들을 보느냐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 
당시 예루살렘 성전은 헤롯왕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짓기 시작한 성전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완전히 지어진 것이 아닙니다. 계속해서 짓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화려함이 얼마나 대단한지 성전을 온통 금칠을 했습니다. 성전 뜰도 확장을 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고고학자들이 그 터를 발굴하면서 감탄할 정도로 그렇게 성전을 아주 대단하게 지었습니다. 이건 모든 유대인들의 긍지요 자랑입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무너뜨려질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무리 화려하다고 해도 아무리 보기 좋은 것이라고 해도 결국에는 다 무너뜨려질 것입니다. 아무리 화려한 꽃도 이윽고는 시드는 법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영화라고 하는 것은 그냥 시드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의도적으로 무너뜨려버릴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니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체질과 같이 불살라질 것이라고 했습니다. 마치 용광로 속에 던져진 원석처럼 그렇게 다 녹아버리고 말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들에 우리가 너무 매달리지 않아야 합니다. 결코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겠지만 그게 다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질 것이 아닌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위해서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마지막 때에 일어날 일들이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조용히 묻되 “우리에게 이르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이 모든 일이 이루어지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

이에 대해서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먼저는 미혹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하는 많은 유혹들이 있습니다. 아니 아주 교회 다니는 사람들만 목표로 삼고 덤벼드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할 수만 있으면 믿는 자들을 넘어뜨리려고 하는 그들이 계교가 얼마나 놀라운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시험에 들지 않게 말씀 안에 깨어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른 것을 바로 분별하지 못하면 그냥 속아 넘어갑니다. 목줄을 붙잡히고 맙니다. 그건 어느 순간에 그렇게 되고 맙니다. 사기꾼이 나 사기꾼이라고 써놓고 덤벼듭디까? 

그래도 무언가 믿을 만하니까 거기에 속아 넘어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앞에서 계를 이야기했지만 왜 계가 깨집니까? 그건 처음부터 아주 작정을 하고 시작을 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계라고 하는 것이 결국은 사금융입니다. 그런데 계돈을 모아서 무슨 사업을 하는 것도 아니고 무슨 이익을 창출하는 것도 아닌데 어디서 수익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푼돈을 모아서 목돈으로 만들어서 쓰임새 있게 하자는 것인데 그렇다면 차라리 은행에 적금을 드는 것이 낫습니다. 

그러면 미리 타먹을 수가 없지 않냐고요? 그래 미리 타먹으니까 어떻게 됩니까? 나중에는 공돈 나가는 것 같으니 결국에는 계를 깨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니까 계라고 하는 것은 어느 단계에 가면 깨지게 마련입니다. 그건 다단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은 여러 사람 것 뜯어서 한 두 사람에게 몰아주는 것인데 그 한 두 사람이 누구냐 앞서서 다단계를 이끌어가는 그들입니다. 결국 그들이 여러 사람들을 울리고 자기 배를 채우는 것입니다. 문제는 이런 물질적인 것만이 아닌 우리 영혼을 도둑질하려고 하는 무리들이 너무도 많다는 것입니다. 

둘째로는 계속되는 재난들입니다.
마지막 때에는 이 세상에 많은 재난들이 있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곳곳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도 알다시피 지금 연속적으로 지진의 소식이 계속해서 들려지고 있습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민족 간의 전쟁 종파 간의 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요즘은 테러라는 말로 더 알려져 있습니다만 자살 폭탄 테러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9.11 테러는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끼칩니다. 

그런데 그게 남의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며칠 전 천안함 침몰 사건이 그러한 테러가 아닙니까? 앞으로 더하면 더 했지 못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옛날 6.25때는 피난이라도 갔지만 이제는 갈 데도 없습니다. 아니 갈 수도 없고요. 그래서 이런 재난이 없기를 위해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성도들에게 가해지는 핍박입니다.

지금은 옛날처럼 죽음에 넘겨지는 일은 없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음보다도 더한 고통이 그러한 박해가 우리들에게 가해지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의 샘물 교회의 아프간 봉사단에게 가해졌던 납치 테러의 결과 교회와 성도들에게 가해진 유무형 핍박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건 어떤 의미에서는 시작에 불과합니다. 가면 갈수록 믿는 사람들에 대한 세상의 유무형 핍박이 갈수록 더해질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들이 성도들을 핍박한다기보다 우리가 지혜롭지 못하게 처신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성도로서의 우리 본질을 잊어버리고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냥 보아서는 누가 성도인지 아닌지 구분도 되지를 않습니다. 아니 그렇게 살아가야 하는 줄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솔직합시다. 정말 하나님의 사람답게 그렇게 살지 않으면 작은 핍박에도 우리는 넘어지고 말 것입니다. 왜요? 하나님이 돕지 않으면 우리 스스로는 감당할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라면 결코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잠시는 힘든 것 같아도 거기에 승리의 비결이 있기 때문입니다. 최후의 승자가 누구인지 분명하게 밝혀져 있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하신 약속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준행함으로 형통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끝까지 견뎌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한 달 동안 아주 특별한 실험을 했습니다. 
마을의 일정한 구획이 있는 각 집에 매일 만원씩 아무런 조건 없이 매일 나누워 준 다음 그 결과를 관찰해 보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날, 집집마다 들러서 만원씩 놓고 나오는 그를 보고 사람들이 제정신으로 하는 행동인지 의아해하면서도 멈칫멈칫 나와서 그 돈을 집어 갔습니다.
둘째 날도 거의 비슷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셋째 날, 넷째 날이 되자. 그 동네는 만원씩을 선물로 주고 가는 사람의 이야기로 떠들썩했습니다. 신기하기도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주 쯤 되었을 때 동네 사람들은 현관 입구에 까지나와 돈을 나눠주는 사람이 오는 쪽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언제쯤 올 것인가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소문은 이웃마을까지 퍼졌습니다.
세 번째 주 쯤 되자 이 마을 사람들은 더 이상 그 이상한 사람이 와서 돈을 주는 것을 신기해하거나 고맙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네 번째 주쯤이 되었을 때는 매일 만원씩 돈을 받는 것이 마치 세끼 밥을 먹고 세수하고 출근하는 것 같은 일상사가 되어버렸습니다.

드디어 실험기간이 끝나는 한 달의 맨 마지막 날 그 실험을 계획했던 사람은 평소와는 달리 그 마을 사람들에게 돈을 나눠주지 않고 그냥 그 골목을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이상한 반응들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기저기서 투덜대고 화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돈은 어디 있습니까?” 
“오늘은 왜 내 돈 만원을 안 줍니까?”라고 따져 묻기 까지 했습니다. 
마을사람들이 매일 만원을 받는 일은 어느새 당연한 권리처럼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매일 공짜로 만원을 받는 것처럼 
공기가 있어 숨을 쉴 수 있는 것도, 
물을 마실 수 있는 것도, 
흙이 있어 딛고 설 수 있는 것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직장에 처음 입사했을 때는 적은 보수도 낮은 직책도, 부족한 근무환경도 개의치 않고 고마움을 느끼지만, 점점 시간이 지나면서 받는 것이 익숙해지고, 고마운 것들이 당연한 것이 되고, 더 잘 해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불만들이 쌓이게 됩니다.

부모님만 찾던 아이도 성장하면 부모님의 사랑을 당연시하거나 귀찮게 여기다가, 결국 돌아가신 후에야 그 사랑이 얼마나 감사했는지 느끼고 후회하곤 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가진 것에 대해서 시간이 지날수록 감사함을 느끼지 못 하는 것은 웬일일까요? 
모든 것이 늘 곁에 그렇게 있으리라는 착각, 당연히 내가 가져야하는 권리라는 착각 때문입니다.
우리는 태어날 때 계약서를 쓰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내 심장이 70년 동안 아무 탈 없이 뛰어 주리라는 보장은 아무 곳에도 없습니다.
우리의 생명은 우리가 대가를 지불하고 구입한 물건이 아닙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몸조차도 온전히 내 것이라고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내가 가진 것 내가 누리는 모든 것에 대해 항상 감사하는 맘을 가져야합니다.
감사하는 풍요로운 마음이 인생을 더욱 풍요롭게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끝까지 견디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첫 사랑을 잘 간직하고 첫 사랑의 때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주는 사랑이 아닌 받는 사랑에 익숙해져서 그렇게 요구합니다. 당연히 내가 생각한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선이라는 것입니다. 한데 정말 그렇습니까? 아니요. 본래의 주고도 또 주고 싶은 그 마음으로 돌아가십시오. 나를 요구하는 것이 아닌 작은 일에도 감격하고 고마워하고 그래서 더 감사하는 그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사랑이 우리로 하여금 끝까지 견딜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정말 견디기 힘든 것은 우리를 향한 세상의 핍박이 아닙니다. 핍박은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형편이 어려운 것 그것도 좀 살기가 힘들다 뿐이지 그렇게 견디기 어려운 것만도 아닙니다. 몸이 불편한 것 역시 몸이 불편한 것뿐이지 그것이 특별히 우리를 더 힘들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장 우리로 하여금 힘들게 하는 것은 바로 가장 가까운 내 가족 내 이웃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요즘은 핵가족 시대를 넘어서서 이제는 일인 가구 시대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예전처럼 결혼에 목을 매지 않습니다. 별로 서두르지도 않습니다. 능력만 되면 혼자 사는 것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니 조금만 마음에 안 들고 형편이 안 맞고 뭐 어쩌고저쩌고 하는 이유로 갈라서는 사람들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장 가까운 사람 가장 사랑했던 사람들이 오히려 내게 칼을 들이대는 경우가 늘어만 가고 있습니다. 내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 내 뒤통수를 치는 경우가 있던가요? 혹간 있을지 몰라도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뒤통수를 친다는 말은 배신당했다는 뜻이 아닙니까? 

그건 나와 아주 가까운 사이라는 말입니다. 조금만 마음에 안 들면 막 퍼부어댑니다. 그러다가 하는 말이 우리 헤어져 그럽니다. 아무리 그렇지 자식을 죽는데 내어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하십니까? 가장 쉬운 이야기로 낙태가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낙태가 왜 그토록 사회 문제가 됩니까? 그건 살인이라는 말입니다. 뱃속의 아이가 3개월이 되면 10주가 되면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다 갖추고 있습니다. 

그건 이미 한 생명입니다. 그런데 그런 태아를 지운다고요? 그건 쉬운 말로 살인입니다. 그런데 그런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치우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도 낙태를 허용해야 한다고요? 물론 원치 않는 임신도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아무리 무어라고 해도 그건 살인입니다. 또 하나 겉으로는 그냥 간이고 쓸개고 할 것 없이 다 빼서 줄 것처럼 하면서 뒤에 가서 뒷담화하는 사람들이 또 얼마나 많습니까? 결국 뭐에요? 그게 다 사람을 죽이는 일이 아닙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실망할 일은 없습니다. 그런 세상에 더 이상 우리가 미련을 두지 않으면 됩니다. 아니 그런 사람마저도 하나님의 사랑으로 녹이면 됩니다. 그래서 끝까지 견디라고 하는 것입니다. 내 사랑으로 하려니 지치죠. 따라서 내 사랑으로가 아닌 주님이 주시는 주님의 사랑으로 사랑하십시오.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사랑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 생각대로 사랑하는 것이 아닌 내 안에 계신 주님이 주시는 감동대로 사랑을 실천하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는 사랑이요 베푸는 사랑입니다.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까지 이렇게 베풀고 나누는 사랑의 사람으로 끝까지 견디고 이기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복음이 먼저 만국에 전파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주님을 증거하는 소금이 되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우리를 모함한다고 해서 거기에 대해서 변명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물론 억울하겠죠. 그러나 모든 것을 밝히 말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너희를 끌어다가 넘겨 줄 때에 무슨 말을 할까 미리 염려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 때에 너희에게 주시는 그 말을 하라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요 성령이시니라”고 하신 말씀대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면 됩니다. 

때로는 나는 이렇고 저래서 안 된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의 장점을 이용하실 것입니다. 키 큰 사람을 키 작은 사람보다 운동선수에 더 많이 사용하실 것입니다. 건강한 사람을 그렇지 못한 사람들보다 더 귀하게 쓰실 것입니다. IQ가 높은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 비해 성공할 확률이 높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점이 불행거리와 위험요소가 될 수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합니다. 다윗에게 반란을 일으킨 압살롬의 죽음도 결국 그의 수려한 용모와 자랑스러운 긴 머리카락 때문이었습니다. 삼손의 실패도 결국 그 힘 때문이었습니다. 겸손하게 여기지 않으면 장점만큼 큰 단점도 없습니다. 장점은 겸손할 때에만 장점이지, 때로는 엄청난 단점일 수 있다는 사실도 알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고쳐 쓰는 즐거움을 아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히려 우리의 약점에 있습니다. 겸손한 병든 사람을 고쳐서 쓰십니다. 겸손한 지혜 없는 사람에게 지혜를 주셔서 사용하십니다. 

겸손한 실패자를 재기시켜서 사용하십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겠습니까? 그냥 솔직하면 됩니다. 누가 뭐라고 하면 맞다 나는 그런 부족함이 있다고 인정하면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감사하십시오. 이런 나도 사용하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 변함없는 주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살게 하옵소서. 그러면 내가 그렇게 바뀝니다. 아니 하나님이 나를 바꾸어 주시죠. 그래서 핍박이 변해서 오히려 영광이 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찬양이 되게 만드실 것입니다. 이 귀한 은혜를 깨닫고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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