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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를 따르는 자는? (마 16:2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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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를 따르는 자는? (마 16:24-27)


미국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세상에 공짜 점심 식사는 없다.”이 말은 모든 것에는 대가가 지불된다는 경제 원칙을 설명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어디에 가든지 적용됩니다. 무료 급식소의 공짜 식사도 먹는 사람 입장에서 무료일 뿐, 그 음식의 값은 다른 누군가에 의해 지불된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종종 값없이 얻은 구원이라는 표현을 씁니다. 이 말은 분명히 진리입니다. 구원을 얻기 위해 우리가 지불할 수 있는 대가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단지 그 구원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자신의 생명으로 대가를 치르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우리는 대가 지불 없이 구원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해 구원은 공짜가 아닙니다. 구원의 비용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이었습니다. 

구원을 위해 우리가 지불할 대가는 없습니다. 단, 구원받은 성도가 예수님을 따라가는 제자의 삶에 있어서 우리는 분명히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쓰시고 하나님이 충만하게 역사하시는 교회는 우리가 누릴 수 있도록 저절로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사랑과 기쁨과 기적과 은혜와 생명이 넘치는 삶, 가정, 교회공동체가 그냥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무슨 온갖 서비스와 혜택을 받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교회에 가면 물론 돌봄과 배려가 있습니다. 상처받은 분들은 위로를 받고, 아픈 분들이 치유를 얻습니다. 낙심한 분들에게 소망을 심어 줍니다. 그러나 인간은 태어나서 평생 엄마 젖만 먹고 보살핌만 받는 것이 아닙니다. 성장하여 어른이 되어 책임과 사명을 감당할 수 있게 되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신앙생활 역시 위로와 돌봄만 받던 상태로부터 성장하여“예수님을 따라가는 삶”을 감당하는 영적 어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본문 24절에 말씀하시기를“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 바로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一. 내가 먼저 대가를 지불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면 우리 가정이 하나님의 복된 가정이 되고, 어떻게 하면 은혜와 사랑과 능력이 넘치는 교회가 되겠습니까? 바로 나부터 대가를 지불할 때 변화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본문 24절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다시 말해“네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가장 먼저 십자가를 지고 가신 분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앞장서서 자기 목숨을 대가로 지불하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본을 따라 제자들도 다 자기 십자가를 지고 대가를 지불하며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했습니다. 

“대통령만 바뀌면 나라가 잘 될 텐데”“저 인간이 제대로 해야 우리 집안이 잘 될 텐데”“저 사람이 일을 저렇게 하니까 우리 부서에 변화가 없지”다 남들이 잘못해서 일이 잘 안된다고 착각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정작 먼저 변하고 먼저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사람은“나 자신”입니다. 여기 모인 우리 중에 서는 목사인 제가 먼저 날마다 변화 받고 더욱 헌신하며 대가를 지불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그 일을 위해 부족하지만 저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먼저 깨달은 사람으로서 저는 여러 분께 권고합니다. 남을 탓하지 말고 남의 책임을 말하기 전에 여러분 각자 먼저“나부터”대가를 지불하고 나부터 책임을 지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남이 하기 전에, 남에게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앞장서서 엎드려 섬기고 일하는 종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듣는 모든 성도들이 다“내가 먼저 앞장서서”자기 십자가를 먼저 지고 먼저 대가를 지불하는 제자들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二. 대가를 지불하는 삶은 어떠한 것입니까?

십자가를 지고 따라가는 삶, 즉 대가를 지불하는 삶이란 어떻게 살아가는 삶입니까? 

1. 자기를 부인하는 살입니다.

본문 24절에 말씀하시기를“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말은 서로 다르지만 의미는 같습니다. 우리가 대가를 치르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부인해야 합니다. 이기주의, 개인주의를 버리고‘나’를 내세우고 주장하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나 자신을 버리는 것이 곧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나를 부인한다는 것은 곧“나 자신이 지고 갈 십자가”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불신 남편이, 아내가, 가족이 내가 질 십자가이다. 말을 잘 듣지 않고 어려움만 주는 저 문제아가 내 십자가야.’시어머니가, 며느리가 십자가야”우리는 종종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인생을 들여다보면 그 사람들이 십자가가 아니라 내 자신이 십자가임을 깨닫게 됩니다. 인생 속에 그와 같은 남편, 아내, 자녀, 기타 가족, 친구, 이웃, 직장 동료, 교우들과 어려움이 있는 진짜 이유는. 정말 변해야 되고 훈련 받아야 하는 이가 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나 자신”이기 때문입니다.“내가 저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십자가로 알고 지고 간다.”이러한 생각은 교만한 생각입니다. 

이러한 생각의 결과는 원망과 불평 미움과 멸시로 나타나게 됩니다. 이러한 원망과 불평 미움과 멸시는 영혼의 암입니다. 애굽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지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원망과 불평 미움과 멸시가 습관화 되어 있었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의 꿈은 사라지고 하나님의 저주로 광야에서 다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저주받을 생각이 곧 타인에게 원인을 찾아 원망하고 불평하며 미워하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몇 해 전 한 종교단체에서“내 탓이요”라는 캠페인을 벌이며 “내 탓이요”라고 쓰인 스티커를 자동차에 붙이고 다녔습니다. 의도는 좋았는데 “내 탓이요”라는 스티커를 붙이는 자리가 뒤편 유리였습니다. 운전자 눈에 보이는 앞 유리였으면 좋았을 텐데 운전자 자신이 눈에는 보이지 않고 뒤편 차량 운전자의 눈에만 보였습니다. 결국은“내 탓이 아니라 당신 탓이라”는 의미가 되고 말았다는 신문 기사가 있었습니다. 

자신을 돌아보면 사람들과 힘들고 어렵기도 하고 애태웠던 모든 일들이 결국 제 자신이 다듬어지기 위해 주님이 허락하신 것임을 깨닫게 됩니다. 지고 갈 십자가는 바로 제 자신이었던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십자가로 여기는 일은 그만해야 합니다.“나야 말로 거친 십자가구나. 사람들이 나 때문에 힘들고 어려움이 많았겠구나!”이렇게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할 때 능히 십자가를 지고 대가를 지불하는 예수님의 길을 따라갈 수 있을 것입니다. 가족이 이러한 생각을 할 때 가정은 평안하게 됩니다. 교회의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생각을 할 때 교회 천국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2.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들은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함으로써 십자가 길의 대가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가치 있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재물도 가치가 있습니다. 인간다운 대접을 받는 데에는 명예도 가치가 있고, 권력도 가치가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선도 가치 있는 일입니다.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있습니다.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 본문 26절에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습니까? 천하의 모든 것을 주고도 얻을 수 없는 것이 생명입니다. 

우리 해군 천안함이 침몰된 후 배안에 갇혀 있을 장병들을 구출하고자 애쓰던 해군 UDT 고 한주호 준위가 생명을 잃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함께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의 주검 앞에 군 수뇌부를 비롯한 여야 정치인, 대통령까지 조문을 했습니다. 군대라는 곳은 본래 생명을 국가에 담보한 곳이기에 이런 저런 사고가 있기 미련입니다. 장병들이 희생했을 때마다 모두 그렇게 하지는 않습니다. 왜 고 한주호 준위에 대하여만 그렇게 했습니까? 왜 그를 영웅이라고 말합니까? 생명을 살리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며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의 어깨에 지워진 공동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것은 죽어가는 영혼을 살려내는 일입니다. 인류의 역사는 하나님께서 주관하십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인류 역사의 핵심은 오직 영혼 구원입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혼 구원을 위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님께서 강림하셨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복음을 전하던 요한을 제외한 모든 제자들은 순교했습니다. 영혼 구원을 위해 성령님의 감동을 따라 세계만방에 복음을 전하고자 수많은 주의 중들이 땀과 눈물과 피를 흘렸고, 지금도 흘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 거룩한 역사를 이루시고자 복음을 전하는 나라마다 축복하셔서 부강한 나라가 되게 하셨습니다. 영국이 그렇고, 미국이 그렇고, 오늘날 대한민국이 그렇습니다. 이처럼 역사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성경이 있고,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있습니다. 이것은“역사의 연구”의 저자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인용하지 않아도 우리들의 눈으로도 확인 가능한 현재의 역사입니다. 

우리나라도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를 시작으로 수많은 주의 종들이 이 땅위의 죽어가는 영혼들을 건져내기 위해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피를 흘렸습니다. 이 거룩한 피의 거름위에 한국교회가 부흥되었고, 급속도로 발전된 세계 속의 대한민국이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마냥 누리기만 하면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바라시는 뜻이 아닙니다. 이젠 우리가 복음증거의 십자가를 져야할 차례입니다. 이것이 교회존재의 의미입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사명입니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디도서 1장 3절에 말씀하시기를“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하셨습니다. 죽어가는 영혼이 구원을 받는 길은 전도 외에는 다른 대책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디모데후서 4장 1절~2절에 말씀하시기를“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 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하셨습니다.“엄히 명하노니”란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영혼구원은 만왕의 왕 되신 하나님의 엄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힘써서 영혼구원을 위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부끄러움을 당해도 전해야 합니다. 친지와 이웃의 영혼구원을 위하는 일이라면 사비를 털어 물밥을 사면서라도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무엇보다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많은 사랑과 기도 가운데 유럽성지 순례를 은혜롭게 다녀왔습니다. 귀국길에 아이슬란드 화산 폭발로 예정된 날짜에 도착하지는 못했지만 무사히 돌아올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존 웨슬레, 마틴 루터의, 존 칼빈, 네로의 박해로 참수당한 바울사도의 유적지, 네로로부터 시작된 200연녀간의 박해를 피해 지하 동굴에 숨어 믿음을 지켰던 카타콤도 깊은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보다도 가슴 뭉클한 감동을 주었던 것은 암흑의 나라 조선 땅에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가 1866년 9월 5일 대동강에서 우리나라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가 된 로버트 저메인 토마스 선교사였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성장한 영국 웨일즈 지방의 조용한 시골교회인 하노버처치를 다녀왔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는 14살 때 세계최고의 명문대학인 옥스퍼드 대학에 장학생으로 합격한 수재였다고 합니다. 나이가 너무 어려 입학이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는 언어 능력도 뛰어나서 중국에 선교사로 올 무렵 8개 국어를 구사했다고 합니다. 중국에 와서 중국어와 한국어를 배워서 통역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10개 국어를 한 사람입니다. 토마스 목사는 24세인 1863년 5월 29일에 캐롤라인 고드프리와 결혼을 했습니다. 

결혼 후 두 달도 되지 않는 7월 21일에 런던 선교회 소속으로 아내와 함께 중국 선교길에 올라 그해 12월에 상해에 도착했습니다. 중국에 온지 약3개월 후인 1864년 3월 24일에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 후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영국 고향의 친정아버지는 금지옥옆 같은 딸이 이국에서 외롭게 죽어간 소식을 들은 충격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아내가 죽어갈 때 토마스 목사는 중국 내륙 지역인 한커우에 가서 선교를 하고 있었으므로 아내의 죽음조차 지켜보지 못했습니다. 그는 이 엄청난 슬픔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또 다른 선교 사명의 십자가인 조선 선교 열정을 불태웠습니다. 1865년 9월 4일 조선 땅 백령도에 와서 성경을 나눠주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1년 뒤인 1866년 8월 9일에 다시 조선 땅에 복음을 전하고자 미국 상선 제너널셔먼 호에 승선을 했습니다. 제너널셔먼 호는 백령도를 거쳐 8월 17일에 대동강에 도착했습니다. 

대동강에 도착한지 18일 만인 9월 5일에 제너널셔먼 호는 대원군의 명령에 의해 공격을 받아 불타고 말았습니다. 토마스 목사는 불타는 배에서 성경을 강가로 던지며 예수! 예수! 예수! 를 외쳤다고 합니다. 마지막 한권의 성경을 가슴에 안고 강가로 뛰어나온 토마스 목사는, 자기의 목을 칠 관군 앞에서 기도한 후 예수 믿으라는 말과 함께 성경을 전한 후 27세 젊은 나이에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를 죽인 사람은 박춘권이란 사람이었습니다. 

박춘권은 집에 돌아와서 가족들에게 말하기를“내가 오늘 서양 사람을 죽였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있다. 내가 그를 찌르려고 할 때 그는 두 손을 마주잡고 무슨 말을 한 후에 웃으면서 책 한권을 내밀며 받으라고 권하였다. 결국 그를 죽이기는 했지만 그 책을 받지 않을 수가 없어서 가지고 왔다.”라고 했습니다. 
그때 토마스 선교사로부터 성경을 받은 사람을 채포하라는 관령이 내렸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경을 불태우거나 강가에 버렸다고 합니다. 당시 영문주사였던 박영식이란 사람은 대동강가에 버려진 성경을 수집하여 종이가 귀한 때에 그 성경을 벽지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제네널셔먼호가 불탈 때 최치량이란 11세 소년이 토마스 선교사가 던진 성경 세권을 받았습니다. 훗날 장성한 최치량이 성경을 벽지로 바른 박영식의 집을 사서 여관으로 사용을 했습니다. 그때 미국장로교 선교사인 마포삼열 목사(Samuel A. Moffet, 1864~1939)가 그 여관에 투숙하게 되었습니다. 마포삼열 선교사의 일행의 전도를 받은 최치량은 평양 최초의 교인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고, 그 집이 훗날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 이름은 널다리 교회였으며 이 교회가 장대현 교회로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박영식은 그 교회 영수가 되었고, 토마스를 죽인 박충권은 훗날 장대현 교회의 장로가 되었습니다. 40년 후인 1907년도에 장대현 교회에서 성령의 강력한 역사가 임하였고, 이로 인해 한국교회가 크게 부흥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교회의 부흥만 아니라 미국이 제너널셔먼호 사건에 진상을 조사하고 손해 배상을 요구함과 함께 조선과의 통상관계를 수립하고자 했습니다. 마침내 청나라의 중재로 1882년 고종 19년에 조미 통상수호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2장 24절에 말씀하신“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5만여 교회에 1000만이 넘는 성도로 크게 부흥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은 2만 명이 넘는 선교사들이 세계 곳곳에 나가서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토마스 선교사가 걸어간 십자가의 희생이 얼마나 귀하고 보람된 길입니까? 

三. 대가를 지불함의 결과는 무엇입니까?

이렇게 대가를 지불하며 십자가를 진 결과는 무엇이겠습니까? 본문 27절에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갚으 신다”는 말을 영어성경에는“Reward”즉“상을 주다.”입니다. 각 성도가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온 그 여정에 대해 주님께서 상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절에는“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목숨을 잃으면, 즉 모든 것을 헌신하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살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짊어진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뿐만 아니라 영원한 상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길은 결코 후회함이 없을, 최종 영광을 누리게 될 가치 있는 길입니다. 

하나님은 하셨습니다.“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비취리라.”(다니엘 12:3)

또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마태복음 10:29~30) 

뿐만 아니라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면 내 마음에 평안이 찾아옵니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면 가정이 행복해집니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면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모두의 사랑과 인정을 받게 됩니다. 
나를 부인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면 내 심령은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하게 됩니다.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내가 감당해야할 십자가는 어디에나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주님의 교회에서 져야할 십자가, 가정에서 져야할 십자가, 사회에서 져야할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본문 24절에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하셨습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자기를 부인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가장 못된 원수는 그 누구가 아니라 내속에 있는 나만 위하려는 강한 이기심입니다. 이것이 나를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나를 패망으로 이끌고 가려는 사탄이 주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가정의 불화를 불러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향한 불평과 원망으로 내 영혼을 황폐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밀쳐 내게 됩니다. 

하덕규씨의 가시나무 노랫말을 인용하겠습니다. 음미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의 쉴 곳 없네.
내속엔 헛된 바램들로 당신의 편할 곳 없네

내속엔 내가 어쩔 수 없는 어둠
당신의 쉴 자리를 뺏고

내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메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의 쉴 곳 없네. <하덕규>

이기심은 내속에 있는 몹쓸 가시나무라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가치 있는 일에 헌신하는 것입니다. 가장 가치 있는 일에 대해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을 바꾸겠느냐.”(마태복음 16:24)라고 하셨습니다. 영혼을 살려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것이 그 무엇보다 소중한 일이며, 그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영혼 구원에 우리 모두가 최선을 다하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었듯, 우리에게도 십자가 뒤에는 영광이 있습니다. 자기의 십자가 기꺼이 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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