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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눅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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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마 6:9-13, 눅 11:1-4)

   
우리가 읽은 두 복음서의 구절들은 우리가 암송하는 주기도문의 원형입니다.  두 복음서의 기도는 그 내용은 같은데 예수께서 기도를 가르쳐 주신 동기는 서로 다르게 나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산상설교 가운데 외식하는 자들의 기도와 대조하여 우리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말씀하신 것을 기록하였고, 누가는 세례 요한이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을 기록했습니다.  

주기도문 구절구절에 담긴 소중한 뜻은 앞으로 몇 시간에 걸쳐 자세하게 나누기로 하고 오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주신 주님의 의도와 기도하는 우리들의 자세에 대한 말씀을 나누기로 합니다.  

마태복음 6장을 보면, 유대인들의 경건생활 가운데 대표적인 세 가지 행위 구제와 기도와 금식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이 나옵니다.   먼저 자신들의 종교적 행위를 남에게 드러내 보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책망이 있습니다.   봐라, 나는 너희들과는 달리 이렇게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나는 너희들보다 의롭다는 우월감에 젖어 살던 유대인들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남을 멸시하고 자신을 높이는 종교적 행위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외식행위일 뿐이라고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곧이어 외식하지 않는 참 경건의 행위가 무엇인가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 중에 어떤 이들은 구제할 때 회당이나 거리에서 나팔을 불었습니다.   나팔을 불어 가난한 사람들을 모이게 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구제금을 전달하였습니다.   이런 외식행위를 보신 주님은 사람들에게 영광을 얻으려고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다고 하십니다.  너그러운 자선가라는 칭찬을 사람들에게 충분히 듣고 높힘 받았으니 계산은 끝났고 하늘에서는 더 이상 상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은밀히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참 구제가 됩니다.

금식하는 것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금식기간에 흉한 얼굴로 사람들 앞에 나타나고 슬픈 기색을 보였습니다.   이런 금식은 사람들 앞에 자기를 드러내고픈 것이지 정말 하나님께 내 영혼의 깊은 슬픔과 안타까운 심정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사람들 역시 다른 사람으로부터 금식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받았으니 하나님께서는 갚아주실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금식을 하려거든 평상시처럼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깨끗하게 씻어 금식하는 모습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하십니다.  이것이 은밀한 중에 계신 아버지께 보이는 방식이며 하나님께서 그 금식을 기쁘게 여기고 갚으십니다.

이런 원리를 따라 기도에 대하여 말씀하십니다.   유대인들은 하루 세 차례 정한 시간에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그 시간이 되면 일을 멈추고 기도하는데 길을 가다가 멈추고 기도하였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일부러 기도하는 시간에 맞추어 길거리로 나가 사람들이 많이 모인 회당이나 큰 길 사거리에 서서 기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람에게 보이려고 기도하기를 좋아한다’고 지적하십니다.   나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경건한 사람이라는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의도적으로 연출하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런 자들을 가리켜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내가 지금 기도하는 중이라 요란하게 광고하며 스스로 경건한 척 드러내지 말고 골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가운데 계신 아버지께 기도하라 하십니다.   골방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는 나만의 조용한 공간입니다.   또는 다른 사람에게 나는 기도하는 사람이요 하고 과시하지 않는 하나님과 나만의 비밀스런 조용한 만남의 자리이기도 합니다.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그 기도를 듣고 갚으십니다.  

그리고 기도할 때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 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중언부언은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은 말을 주문 외우듯 반복하여 말하는 이방인들의 기도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말을 많이 해야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신들의 이름이나 똑같은 말을 수 없이 반복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 엘리야와 기도 대결을 벌였던 바알 선지자들의 기도는 이방인들의 기도가 무엇인지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왕상18장).   

그들은 바알의 이름을 부르며 ‘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하고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를 기도하였습니다.  아침부터 정오까지 자기들의 신의 이름을 불렀지만 아무 응답이 없었습니다.   엘리야가 그들에게‘너희 신이 묵상하고 있는지 혹 잠간 나갔는지 혹 길을 걷고 있는지 아니면 잠이 들어서 깨워야 할 것인가 보다’ 조롱하자 마음이 그해진 바알 선지자들은 더 큰 소리로 바알을 부르며 칼과 창으로 자기 몸을 상처내면서 광란의 몸짓을 하였습니다.  그래야 신이 자기들의 기도를 들어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오늘날도 이런 생각으로 기도하는 이방종교인들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영국 TV 방송에서 티벳의 승려들과 신도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그들은 기도문을 적어넣은 ‘마니차’라는 원통형 도구를 돌리며 기도합니다.  법당 입구에 커다란 마니차들이 설치되어 사람들이 들어가면서 손으로 돌리기도 하고 손에 들고 다닐 수 있는 작은 휴대용 마니차를 돌리며 기도합니다.   마니차를 돌릴 때 ‘옴마니받메훔’이라는 진언을 계속 외우는데 마니차를 한 번 돌릴 때마다 기도문 한 번을 읽은 것으로 여깁니다.   신도들 중에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어 그런 방식으로 불경이나 기도문을 읽는 것으로 여긴다고 합니다.   마니차를 수 없이 돌리면 그만큼 기도를 많이 하는 것이라 여기는 그들의 기도 방식입니다.  

기독교인들 중 어떤 이들은 방언으로 기도하고 싶은 욕심으로 억지로 방언을 하려고 ‘할렐루야’ 또는‘라라라라’같는 의미 없는 단어를 끊임없이 반복 또 반복합니다.   이것도 이방인들의 기도와 다를 바 없습니다.    기도는 똑같은 말을 많이 반복하거나 오래 그리고 길게 하여 나의 화려한 말솜씨로 하나님을 설득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잠자고 계시는 하나님을 깨우거나 외출하신 하나님을 돌아오시도록 소리쳐 부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 사정을 잘 모르고 계실 것이니 내가 많은 말로 혹은 길게 기도해야 나를 이해하시고 응답하실 것이라는 생각으로 기도하지 맙시다.   

기도는 다른 사람이 들으라고 말솜씨 자랑하거나 내가 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예배나 기도회에 모인 사람을 대표하여 드리는 기도는 거기 참여한 모든 사람들이 듣고 함께 공감하며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때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으시지만 함께 모인 사람들도 듣습니다.   그런 대표기도 말고 개인기도는 하나님과 나만의 만남을 위한 조용한 공간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말씀하신 골방 기도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두 사람의 기도 장면이 나옵니다.   이 비유를 보면 외식하는 사람의 기도와 응답 받는 기도가 어떤 기도인지 금방 이해할 수 있습니다.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간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었고 하나는 세리였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기를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자신의 의를 자랑하는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습니다.   예수께서 이 비유의 결론으로 ‘세리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 함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신을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셨습니다.  

자기를 높이려는 의도에서 드리는 바리새인의 기도는 외식하는 기도의 대표적 모델입니다.   더구나 다른 사람을 지목하여 나는 저 사람처럼 죄를 짓지 아니하였습니다 하는 기도는 감히 거룩하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하찮은 의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교만한 기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이처럼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긍휼을 구하는 겸손한 기도이며, 상한 마음으로 솔직하게 내려놓는 기도입니다.

외식하는 사람들의 치명적인 실수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여 나를 높이려는 교만한 태도입니다.  나는 기도하고 금식하고 구제하는데 저 세리같은 사람은 나처럼 경건하지 못하고 죄를 짓는다는 멸시와 비판의 태도입니다.   하나님이 들으시는 기도는 나를 드러내고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을 고백하는 낮은 자의 기도입니다.   남을 비판하고 비난하는 기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의 약함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의 영혼을 위한 진심어린 기도를 기쁘게 받으십니다. 

그러므로 외식하는 자들이나 이방인들의 기도를 본받지 말라고 하십니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신다고 하셨습니다.  외식하는 자들과 이방인들처럼 누구에게 잘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고 은밀한 가운데 계신 아버지께서 듣고 계시니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라’ 하시며 기도의 모델을 제시하셨습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 이름하여 주기도문입니다.  이 간단한 기도 속에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기도의 대상으로부터 시작하여 우리가 무엇을 구하여야 할 것인지 그 기본적인 요소들이 확실하게 요약되어 있습니다.   

두번째로, 누가복음에 나오는 주기도문을 살펴봅니다.  누가는 예수님의 기도를 자주 언급합니다.   예수님은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셨을 뿐 아니라 스스로 기도하시는 분이셨습니다.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곧 광야로 나가 40일간 금식하며 기도하심으로 공생애를 준비하셨습니다(눅4장).   예수님의 소문이 온 지방에 펴져나가 사람들이 병고침을 받고 말씀을 들으려 몰려올 때 물러나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주님이셨습니다(눅5:15, 16).   

오병이어의 이적을 보이신 후에 곧 따로 기도하시는 모습이 나옵니다(눅9:18).  사람들이 예수님의 능력에 매료되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뜻을 아셨지만 군중들의 환호와 치솟는 인기에 흔들림이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들을 떠나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심으로 아버지 하나님과의 교제를 소중히 여기셨습니다.  그리고 하루는 제자들을 데리고 기도하러 산에 올라가셨다가 기도하시는 중에 홀연히 변화되어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십자가 죽음에 대하여 대화를 나누시기도 하셨습니다(눅9장).   

주기도문과 관계된 누가복음 11장을 보면,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니 제자 중 한 사람이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처럼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하고 요청하였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하시며 기도의 내용을 말씀하셨고(눅11:2-4), 곧이어 기도할 때 응답의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것도 말씀하셨습니다(눅11:5-13).   

누가복음 18장에는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가르치셨고, 앞에서 말씀드린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를 비유로 말씀하셨습니다.   22장을 보면, 예수께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으로 가시는데 이 기도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될 정도로 온 몸과 마음을 다해 힘쓰고 애써 아버지께 드리는 간구였습니다.   공생애를 처음 시작하실 때 40일 금식기도로 준비하신 주님은 마지막 십자가의 길을 향해 나아가실 때도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심으로 내 뜻이 아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 하시며 마지막 순간까지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는 것으로 절정에 이릅니다.   그리고 숨을 거두시는 순간 ‘아버지여 내 영혼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23:46) 하시고 운명하심으로 육신으로 세상에 오셔서 아버지께 드린 주님의 모든 기도는 하나님께‘아멘’이 되었습니다.   이 시간 소개해 드린 내용 외에도 누가복음에는 기도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곳곳에 숨겨져 있으며 (눅22:33 시몬의 믿음을 위하여, 눅24:30 엠마오의 제자들 위해), 누가복음에 나오지 않는 많은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 나옵니다.    

이처럼 기도의 주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하신 지침이 주기도문입니다.  예수님을 따라다니며 수 많은 기적을 체험했고 예수님의 삶을 목격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기도하시는 주님의 신비스런 모습에 감동이 된 제자가 나도 예수님처럼 기도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올랐을 것입니다.   능력있는 기도, 사람 앞에 드러내지 않고 한적한 장소에서 조용한 시간에 기도하시는 주님의 기도를 본 받고 싶은 제자에게 ‘이렇게 기도하라’하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주님이 가르쳐주신 기도의 본이 우리의 기도가 되기 바랍니다.   

누가복음을 비롯하여 다른 복음서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기도를 유심히 살펴보면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 하는 내용들이 잘 드러납니다.   주님의 기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였고,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람들 곧 구원하실 당신의 백성들을 위한 간구였습니다.   나와 아버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위한 기도였고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예수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명을 마지막까지 완수할 수 있도록 아버지께서 힘주시기를 구한 것입니다.  자신의 편리함이나 부요함 혹은 세상의 영화를 구하지 않으셨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한 없이 연약한 우리들은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그 답이 금방 나옵니다.   주님의 기도를 통해 배우고 또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으로 살기 바랍니다.    

주기도문을 설교하는 첫 시간에 우르과이의 한 성당 벽에 기록되었다고 알려진 유명한 기도문을 소개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이 기도문이 주는 메시지가 참으로 충격적이고 우리를 부끄럽게 하며 깊이 생각하도록 합니다.   짧은 글이지만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가식적이고 이기적인 기도인가 구구절절 정확하게 지적하고 강하게 고발하고 있습니다.   너무나 잘 알려져 이미 아는 분들이 많이 있겠지만 다시 한 번 이 글을 듣고 우리가 드리는 주기도문은 과연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였을까 생각하는 기회가 되기 바랍니다.  

우르과이 성당 벽의 기도문

"하늘에 계신" 이라 하지 말라.  세상 일에만 빠져 있으면서 
"우리"라고 하지 말라.  너 혼자만 생각하며 살아가면서 
"아버지여" 하지 말라.  (하나님의)아들, 딸로써 살지 않으면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지 말라.  (하나님 이름보다 언제나)자기 이름을 빛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나라이 임하옵시며" 하지 말라.  (하나님 나라보다는) 물질 만능의 나라를 원하면서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지 말라.  (언제나) 내 뜻대로 되기를 위해 기도하면서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하지 말라.   가난한 이들을 본체만체 하면서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하지 말라.  누군가에게 아직도 앙심을 품고 있으면서 
"우리를 시험에 들게하지 마옵시고" 하지 말라.  (언제나) 죄 지을 기회를 찾아다니면서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하지 말라.  악을 보면서 아무런 양심의 소리를 듣지 못하면서 
"아멘" 하지 말라.  주님의 기도를 진정 나의 기도로 바치지 않으면서...  

예배나 모임의 마지막에 주기도문 암송하는 것을 폐회를 알리는 신호 정도로 생각하지는 않았는지요?    습관적으로 암송하며 예배 의식의 한 부분으로 여기고 거기 담긴 뜻을 깊이 묵상할 틈도 없이 총알같이 빠른 속도로 암송하고 ‘아멘’ 해버린 적은 없는지요?    다음 시간에 계속하여 주기도문에 관한 말씀을 나누기로 합니다.   어떤 모임이나 개인기도 시간에 이 기도문을 암송할 때 주님이 우리에게 가르쳐주시고 싶으셨던 기도의 본질을 잃지 않고 그 뜻을 따라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들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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