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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위대한 삶의 순례(18) : 사마리아 수가 (요 4: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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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삶의 순례(18) : 사마리아 수가 (요 4:1-10)


기독교 역사에는 ''신의 존재 증명''을 시도한 소위 여러 변증 철학자들이 있어왔습니다. 그들의 변증 논리 중에는 <존재론적인 증명>(Ontological argument)이란 것이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논증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신의 관념이 도대체 어디에서 유래했는가? 라는 것입니다. 

가장 원시적인 고대의 부족 문화에서 현대에 이르기 까지 신의 관념이 존재하지 않았던 문화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신이 부재한다면 도대체 이런 신 관념이 어디에서 왔느냐는 것입니다. 관념을 통해서 실재에 도달하고자 한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철학자들은 또한 욕구를 통해서 실재를 증명하고자 했습니다. 쉽게 말하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배고픔의 욕구나 갈망은 먹을 것을 전제로 한다는 것입니다. 먹을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먹고 싶은 욕구가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성욕을 또한 생각해 보십시오. 성적 갈망은 욕구의 대상인 이성의 존재를 전제하지 않습니까?(아름다운 여성들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남성들의 눈이 돌아가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같은 맥락에서 우리는 목마름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목마름은 목마름의 대상을 전제하지 않습니까? 목마름을 해갈할 마실 것, 생수가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평생을 살아가며 여러 목마름을 갖고 삽니다. 

오늘 우리는 이런 목마름으로 어느 날 사마리아 땅 수가 성에서 우물가를 찾았던 한 여인을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지리적으로 이스라엘을 크게 나눌 때 북방의 갈릴리, 중앙의 사마리아, 남방의 유다지방으로 구별합니다만, 이스라엘이 남북으로 분단되어 있을 때에 북방 이스라엘의 수도가 또한 사마리아였습니다. 사마리아는 지방이기도 하고 도시이기도 합니다. 

예루살렘에서 북으로 가면 74km지점, 세겜 북쪽 13km지점에 오늘날 세바스티아(Sebastia)로 불리우는 산악 지역이 과거의 사마리아 도시입니다. 세겜(현지명 나블러스, Nablus)은 예루살렘 북쪽 63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이 성읍을 중심으로 축복의 산으로 불리운 그리심 산, 그리고 저주의 산인 에발산이 위치하였고 이 성읍 근방에는 많은 샘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수가성은 바로 이 근방(아스갈,Askar)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날 교회 전승(4c 비잔틴 교회 유적)을 따라 야곱의 우물이 있던 곳에 ‘기념 교회’(희랍 정교회)가 세워져 있습니다. 바로 이 우물에 낮 열두시에 목마른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온 것입니다. 이 여인을 통해 학습해야 할 레슨, 목마른 인생들이 생수를 마시는 비밀은 무엇일까요? 

1.육신적으로 목마름을 해갈할 길은 없음을 인지해야 합니다. 

본문의 주인공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과의 대화에서 예수께서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14절)라고 하시자, 그러면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라고 말합니다. 

당시 이 지대의 우물의 깊이는 150m에 달했고 그래서 160m는 되는 로프를 사용해야 물을 길어 올리는 고단한 노동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생각한 물은 여전히 우물속의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깨달아야 했던 진실은 그런 물, 육신을 적시는 물로는 아니 그녀가 쉽게 생수를 얻는 방도를 발견한다 해도 그 방법으로는 영혼의 목마름의 문제를 영원히 해결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아니 이 여인이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면서 해결하고자 시도한 이 여인의 실존적인 정신적 목마름은 육신적인 방법으로는 결코 해결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이 여인은 이 진실을 대면해야 했던 것입니다.

최근 <열린다 성경>을 기술한 이스라엘 류모세 선교사는 이 여인이 결코 우리가 상상한 창녀와 같은 여인은 아니었다고 주장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남편이 죽은 후, 소위 당시 이스라엘에 존재한 <수혼법>(신25:5-10)에 따라 그녀를 죽은 남편의 형제나 친족들이 아내로 삼아 후사를 잇는 책임을 져야 했으나 아마도 그 형제들이 줄줄이 세상을 떠난 그런 상황의 여인이 아니었을까를 추정합니다. 

그랬더라도 이 불행한 여인의 정신적 고독과 방황은 상상 이상의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남편을 다섯이나 잡아먹은 여자’라고 소문난 이 여인, 그래서 자기 동네에서 ‘재수 없는 여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이 여인의 마음의 상처를 이해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녀는 철저하게 소외된 인간이었고 마을 사람들에게 기피 대상 제1호였을 것입니다. 

무엇으로 이 여인이 위로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 여인이 깨닫고 직면했어야 할 진실은 아무것으로도 그 누구도 아니 그 무엇도 이 여인의 목마름을 해갈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13절)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인간적 절망이야 말로 신적 희망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인간적이고 육신적인 노력에 인생 반전의 희망을 거는 이유는 정직하게 절망해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인간적인 절망의 터널을 통과한 사람에게만 들리는 희망의 소식입니다.


2.영적 생수의 유일한 근원되신 구세주를 믿어야 합니다.

그러면 복음은 무엇입니까? 예수께서 목마르지 않는 생수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물은 육신적인 물이 아닌 영적인 물, 곧 영원한 생명입니다. 

4:14의 말씀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왜 영생을 생수에 비교했을까요? 물은 사치품이 아니라 필수품입니다. 물을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죽습니다. 그렇게 인생에게는 영생의 샘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영생의 생수는 예수님만 주실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당시의 유대인들이 피하던 사마리아 길을 일부러 통과하신 이유도 이 영생의 생수가 필요했던 이 목마른 여인을 만나주시기 위한 선한 목자의 배려이셨던 것입니다. 

4절에 “사마리아를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는 말씀 속에는 이 지역을 통과할 이유가 있었던 것을 암시하는 대목입니다. 보통의 유대인들은 혼혈인들이었던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혈통적 편견으로 그들을 상대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유다에서 북쪽 갈릴리로 갈 때에도 직진하기보다 해변길이나 요단 길을 우회하여 다녔던 것입니다.(그것은 지금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길을 가셨습니다. 거기 그 분이 만나야 할 영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한 잃어버린 양을 찾으심을 설교로만 하신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실천에 옮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 편에서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는 그 분이 누구인가를 참으로 알아야만 했었습니다. 그분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다시 10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선물과 또 네게 물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라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으리라.” 그래서 예수께서는 인내로 대화를 이끄시며 그가 누구인가를 그녀에게 계시하십니다. 처음에 그녀가 생각한 분은 그냥 사마리아인들에게 편견을 가진 유대인 남자 중 하나였습니다. 

그래서 9절에서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라고 묻습니다. 그러나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는 자기에게 그녀가 지금까지 갖지 못한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분으로 생각이 바뀝니다. 

그래서 4:15에서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말합니다. 그녀는 아직 그가 제공할 물의 정체는 몰랐지만 여하튼 더 이상 자신과 상관없는 유대인 남자가 아닌 무엇인가 중요한 것을 제공할 수 있는 분으로 생각이 발전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금 더 대화가 진행되면서 그녀는 그를 선지자라고 고백합니다. 

4:19입니다.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자기에게 남편 다섯이 있었던 과거를 지적하는 것을 보고 놀란 것입니다. 그러나 이 대화의 절정에서 마침내 이 여인의 뇌리에 중요한 생각이 하나 스칩니다. 혹시 이 분이 메시아(그리스도)가 아니실까? 라는 생각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제 더 이상 숨기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4:26은 이 대화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것입니다. “내가 그로라!” 예수를 마침내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이제 비로소이 목마른 여인이 예수를 자기에게 필요한 생수를 제공할 구세주로 받아드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이 때가 바로 영생의 선물을 받는 구원의 순간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의 영적 여행이 여기에서 머무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3.성령을 통한 생수의 강을 구하고 사모해야 합니다. 

우리가 목마름을 온전하게 해갈하기 위해서는 물을 마시기만 하는 상태이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의 존재가 생수 속에 잠길 필요가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요한10:10에서 예수님은“내가 온 것은 내 양이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 분은 우리가 영생 곧 구원을 받아 지옥만 면하는 삶이 아닌 그 이상의 삶, 곧 풍성한 생명을 누리는 삶을 주고 싶어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삶이 어떻게 가능한가는 그 해답을 초막절 절기의 마지막 날 요한7:37-38절의 말씀을 가르치실 때까지 미루어 두셨습니다. 이제 그 해답을 같이 읽어 보실까요.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 나리라” 이 약속을 보십시오. 한 모금의 생수로 갈한 목을 간신히 적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 배(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이 터져 나오리라는 것입니다. 

실제로 초막절 절기가 진행되는 일주일 내내 제사장들은 가까운 실로암 못에서(기흔샘-실로암 못까지 약 500M에 달하는 소위 히스기야 터널에는 지금도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물을 길어다 제단에 부었는데 마지막 제7일은 ‘호산나 라바’라는 기도문을 바치고 찬양과 함께 모든 길어온 물을 다 부어버리면 제단 전체가 적시어지고 제단은 마치 강을 이루게 됩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이런 초막절 절기의 절정의 그림을 연상하시면서 이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질문은 남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실제로 이렇게 생수의 강을 체험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 대답은 요한7:37-38에 이어지는 39절의 말씀입니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르켜 말씀하신 것이라.(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음으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이 약속의 실현이 바로 오순절 성령 강림이었던 것입니다.

이 날 이 때가 바로 예수께서 목마른 사마리아 여인에게 약속하신 바가 온전하게 성취되는 순간이었던 것입니다. 요한4:14을 다시 읽어 보십시오.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그렇습니다. 그날 예수의 제자들은 자신들의 존재 안에서 생명이 솟구치는 행복을 경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 날 예루살렘 제단에 생수가 부어지듯 성령을 사모하는 모든 주의 제자들에게 거룩한 영이 부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에 내가 또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 줄 것이며”(요엘2:29)라는 요엘 선지자의 약속이 이루어 진 것입니다. 그들의 배에서 문자 그대로 그들은 생수의 강을 체험하게 된 것입니다. 

그들은 더 이상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수가성의 우물가로 갈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재물의 우물이나 쾌락의 우물에서 혹은 권력의 우물에서 행복을 구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들은 예수님만으로 그리고 예수님의 영이신 성령만으로 행복했고 만족했습니다. 그들에게 남은 과업은 이 행복을 나누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가정으로 일터로 거리로 나가 그들의 이웃들에게 이 놀라운 소식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도행전의 부흥이었습니다. 이 부흥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이 부흥의 영을 사모하지 않으십니까? 이 부흥이 오기 전 이미 사마리아 여인은 작은 부흥을 수가성에서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요한4:39을 읽겠습니다. “여자의 말이 내가 행한 모든 것을 그가 내게 말하였다 증언함으로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이제 이 목말랐던 여인이 만난 주님이 오늘을 사는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고. 지금 오십시오. 예수를 만나십시오. 성령을 사모하십시오. 생수의 강이 임할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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