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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열린 마음, 열린 문 (히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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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마음, 열린 문 (히 13:1-6)


[계속하여 서로 사랑하십시오. 나그네 대접하기를 게을리하지 마십시오. 어떤 이들은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하였습니다.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도 몸이 있으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하십시오. 모두 혼인을 귀하게 여겨야 하고, 잠자리를 더럽히지 말아야 합니다. 음란한 자와 간음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에 얽매어 살지 말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하십시오. 주께서는 “내가 너를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겠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담대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주께서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을 대랴?”]

• 문을 열다

믿음과 행함은 하나인가, 둘인가? 야고보는 아주 분명하게 말합니다.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도 행함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믿음이 그를 구원할 수 있겠습니까?”(약2:14)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일한다”(갈5:6)고 했습니다. 살아있는 신앙(living faith)이란 고백하는 신앙을 구체적인 삶으로 번역해가는 과정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그런 모범적인 신앙의 인물들을 11장에서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히브리서 11장을 ‘믿음 장’이라고 부릅니다. 12장에서는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13장에서는 우리의 신앙이 일상 속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가운데서 영적인 친교를 다루는 앞부분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나누려고 합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기독교인의 삶의 대전제를 한 마디로 요약합니다. “서로 사랑하기를 계속하십시오.”(1) 이 말은 진부해 보이지만 신앙 공동체 구성의 핵심 원리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좀 더 친절하게 설명합니다. “형제의 사랑으로 서로 다정하게 대하며,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십시오.”(롬12:10) ‘다정하게 대하기’, ‘서로 먼저 존경하기’. 우리가 이 원리를 꼭 붙잡고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만, 타고난 죄인인 우리에게는 결코 쉽지 않은 요청입니다. 앞의 것은 어떻게 해보겠는데, 뒤의 것은 참 쉽지 않습니다. 

교회 전통이 가르치는 일곱 가지 죄의 뿌리 가운데 하나인 ‘인색’은 물질적인 차원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잘 주는 사람도 남을 인정하는 데는 인색한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크게 보는 마음의 습성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존경할 줄 아는 사람은 못난 자아로부터 어느 정도 해방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히브리서는 우리가 실천해야 할 사랑의 내용으로 나그네 대접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의 어떤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1세기 중반 이후에 예수를 믿기 위해서는 위험을 무릅써야 했습니다. 기독교로 개종한 유대인들은 회당 공동체에서 쫓겨나기도 했습니다. 박해를 피해 익숙한 삶의 터전을 떠나는 이들이 늘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유랑하는 설교자들도 많았습니다. 사도들은 각지에 흩어진 신앙 공동체에 그런 이들을 잘 맞아들이고 보살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낯선 이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이고, 정성을 다하여 대접하기 위해서는 안일한 일상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일까요? 히브리서 저자는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사람들에게 세 천사를 맞아들여 지극정성으로 대접했던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를 떠올리게 했을 겁니다. 우리가 안일한 일상을 깨고 우리 삶에 맞아들인 이들은 하나님의 메신저이거나 복의 통로가 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우리 마음은 그리고 우리 집 대문은 닫혀 있기 일쑤입니다. 주님은 뽕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고 어서 내려오라면서 “오늘은 내가 네 집에서 묵어야 하겠다.”(눅19:5b) 말씀하셨습니다. 늘 평범하게 보던 구절인데 오늘은 각별하게 다가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의 이런 요구에 응하고 계십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교회나 다른 경배의 장소에 모셔두기를 좋아합니다. 

마음이 내키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그곳을 찾아가서 만나 뵐 수 있으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집에 모시는 것은 좀 꺼립니다. 주님을 ‘집’에 모시면 그는 우리를 변화시키고, 우리의 삶의 방식을 변화시킬 것이기 때문입니다. 옛 사람들은 나그네는 신이 보낸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심지어 당신이 가장 연약한 자의 모습으로 우리 가운데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낯선 이들을 위해 삶의 한 부분을 열어놓을 때 우리는 하늘의 빛도 또한 맞아들이게 됩니다.

• 사랑의 흔적

히브리서 저자는 또한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되, 여러분도 함께 갇혀 있는 심정으로 생각”(3)하라고 말합니다. 물론 여기서도 갇혀 있는 사람들은 일차적으로는 신앙 때문에 갇힌 이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면 안됐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그런 일을 겪지 않게 된 것에 안도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그런 어려움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특별히 사랑하시기 때문이라고 믿는 이들도 있습니다. 정말 그런 것일까요? 믿음이야 자유지만 자칫하면 하나님의 뜻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쉽습니다. 믿음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이들의 현실을 일깨우면서 저자는 이렇게 권합니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학대받는 사람들을 생각해 주십시오.”(3b)

이런 사랑을 실천한 인물이 있습니다. 에바브로디도라고도 알려지고 에바브라라고도 알려진 인물입니다. 에바브라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에베소 감옥에 갇혀 있던 바울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보낸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 임무를 마치고도 에베소에 남아 바울을 도왔습니다. 병약한 바울을 차마 홀로 버려둘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잘못이 없었지만 바울을 돕기 위해 기꺼이 자청하여 감옥에 들어갔습니다. 로마의 형법은 그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에바브로에게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사랑의 빚을 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그를 가리켜 “내 형제요, 동역자요 전우요 여러분의 사신이요 내가 쓸 것을 공급한 일꾼”이라고 일컫습니다. 또 “그는 그리스도의 일로 거의 죽을 뻔하였고, 나를 위해서 여러분이 다하지 못한 봉사를 채우려고 자기 목숨을 아끼지 않은 사람”(빌2:25, 30)이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도 이런 사람 하나쯤 있다면 우리가 헛되이 산 것은 아닐 겁니다.

우리는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애쓰다가 감옥생활을 한 이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따뜻한 방에서 편안한 잠을 청할 때 그 어머니들은 그럴 수 없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들은 불기 없는 감옥에서 냉기와 싸우고 있을 아들딸들을 생각하며 온기 없는 방에서 겨울을 나곤 했습니다. 그들은 아들딸들과 몸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관념적일 때가 많습니다. 사랑의 언어는 풍부하지만, 사랑의 실천은 빈약합니다. 

“여러분도 몸이 있는 사람이니…”. 이 구절이 아프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을 위대한 대제사장으로 소개하면서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4:15)라고 말합니다. 새번역은 주님의 마음을 ‘동정’이라는 밋밋한 단어로 번역했지만 개역판 성경은 ‘체휼’이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단어는 ‘몸 체體’에 ‘근심하다, 보살피다’는 뜻의 ‘휼恤’이 결합된 단어입니다. 휼 자는 심방변(忄)에 피 혈(血) 자가 합쳐서 형성된 말로 마음과 육체가 함께 아우르고 있습니다. 사랑이란 마음의 움직임이기도 하지만, 몸의 반응이기도 합니다. 나나 내 가족이 아니라 해도 누군가 고통 받는 사람들을 보면 몸으로 그 고통을 함께 느끼는 이들이 있습니다. 엔도 슈사꾸의 <사해의 호반>이라는 책에는 예수님과 빌라도의 문답이 나옵니다. 

“그러면 너는 저 의원들의 말대로 민중을 선동했는가?”
“나는 다만, 한 사람 한 사람의 슬픈 인생을 가로질러 그들을 사랑하려고 했을 뿐이오.”
“황제는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고 말했는가?”
“황제보다도, 예루살렘보다도, 로마보다도 오래오래 계속되는 것이 있다고 말한 것이오.”
“무엇이 로마보다 오래오래 지속되느냐?”
“그 사람들의 인생에 내가 가 닿은 흔적이오. 내가 한 사람 한 사람의 인생을 가로질러 남겨놓은 흔적, 그것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한 것이오.”(<<사해의 호반>>, 청노루, 1988, 185-6쪽)

예수님은 우리 몸과 마음에 사랑의 흔적을 새겨놓으셨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은 다 내려놓고 살더라도 이 사랑의 빚은 가슴에 품고 살아야 합니다. 그 사랑을 갚는 길은 지금 고통받는 이들 곁에 머물면서, 그들의 살 권리를 되찾아주는 것입니다.

• 바람을 따라 가는 사람들

히브리서 저자는 이어서 ‘혼인을 귀히 여기라’면서 잠자리를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하는 일이라고 엄중하게 말합니다. 이것은 대학의 팔조목 가운데 ‘수신修身’과 ‘제가齊家’에 해당하는 말일 겁니다. 학자들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가 무엇인지에 대해 연구했습니다. 프로이트는 그것을 쾌락에의 의지라 했고, 니체나 아들러는 권력에의 의지라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삶을 활기차게 하는 동력일 수 있습니다. 이런 욕망을 적절히 통제하며 살 때는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과도하게 집착할 때, 그래서 그 속에 빠질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쾌락에 빠진 이들은 자기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도구화합니다. 권력을 과하게 탐하는 이들은 항상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런 이들이 있는 곳에서 인간관계는 어그러지고, 공동체는 무너지고 맙니다. 

지금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이슈 가운데 하나는 어느 건설회사와 검사들의 부적절한 거래입니다. 법을 집행하도록 세움을 입은 이들이 자기들의 지위를 이용해 사욕을 채웠다는 사실이 놀랍고, 그것이 관행적으로 용인되어왔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뇌물 공여는 물론이고, 향응에 성상납까지 있었다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까지 오른 이들이 이 지경이 된 까닭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뭔가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 곧 정신의 빈곤함 때문일 겁니다. 전도서의 기자는 말합니다. “만물이 다 지쳐 있음을 사람이 말로 다 나타낼 수 없다. 눈은 보아도 만족하지 않으며 귀는 들어도 차지 않는다.”(전1:8) 욕망을 붙좇으며 사는 것은 바람을 따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기독교인으로 산다는 것은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 또 닦아 주님께 바친다는 뜻일 겁니다. 사람에게는 세속적인 욕망과 더불어 거룩함의 욕망도 있습니다. 어느 쪽이 강할까요? 물론 세속적인 욕망입니다. 사람 속에는 욕망에 이끌리는 강한 자성磁性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욕망에 속절없이 이끌리는 육체교 신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그 욕망을 거스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우리를 지배하려 드는 욕망을 향해 ‘no’라고 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리스어 ‘askesis’는 우리말로 ‘수덕’ ‘훈련’ ‘고행’으로 번역될 수 있는 말입니다. 수도자들은 금식과 기도와 고행을 통해 자기 속에 내적인 힘을 길렀습니다. 욕망에 굴복하는 이들은 언제나 더 큰 자극을 원하고 새로운 자극을 원합니다. 그는 영원히 행복을 누릴 수 없습니다. 진실한 사랑이 아닌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의 내면에서는 신성한 불꽃이 꺼지고 맙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귀히 여기고, 진심으로 아껴줄 때 우리는 내적 공허로부터 해방됩니다.

• 돈 중심의 삶 청산

또한 성도는 돈을 사랑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사랑의 대상으로 변하는 순간 우리 삶은 황폐해지기 시작합니다. 돈이 있으면 좋지요. 선한 뜻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일을 하지 못할 때도 많습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뜻이 없고, 뜻이 있는 사람은 돈이 없다”는 말이 절로 나올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돈의 능력을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습니다. 저를 찾아오는 신학생들 가운데는 큰일을 하려면 교회가 커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묻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 질문을 받을 때마다 저는 화가 납니다. 

그래서 다소 거칠게 말합니다. 하나님의 일은 뜻으로 하는 것이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일을 하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인 것은 200 데나리온 어치의 빵이 아니라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습니다. 거기에 사랑이 담기고 하나님의 뜻이 더해지자 사랑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규모에 집착하는 것은 불신앙일 뿐입니다. 돈의 신화에서 해방된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도우시는 분이시니, 내게는 두려움이 없다. 누가 감히 내게 손댈 수 있으랴?”(6b)

뜻이 바로 서면, 주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고, 결과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롭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의 실패는 실패가 아닙니다. 돈의 신화에서 해방된 사람은 우정에 바탕을 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우정이란 너를 향해 마음을 열고, 너를 내 삶속에 기꺼이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우정이 만들어내는 친밀함과 따뜻함이야말로 이 냉혹한 세상을 이겨낼 힘이 됩니다. 

며칠 전 홍승우 화백이 신문에 그리는 8컷짜리 만화 <비빔툰>을 보았습니다. 엄마가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을 앉혀놓고 말합니다. “순탄한 대화를 이끌어 내는 말 하나가 있는데, ‘그러게 말야’란 말이 있지. 상대가 불만에 가득 찼거나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길 바랄 때 해주는 이 말은 ‘나는 너의 편’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어서 상대의 마음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지.” 그러면서 예를 듭니다. 아이가 엄마에게 “걔 진짜 짜증나-!” 할 때 “그러게 말야”라고 하면, 아이는 표정이 밝아지며 “이해해주어 고마워 엄마” 할 거라는 겁니다. 

엄마는 딸에게 마무리를 하듯 “그 말을 잘 사용하면 넌 여러 사람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거야”라고 말합니다. 다음날 아이는 학교에서 얼굴을 감싸 쥐고 탄식을 하는 친구를 봅니다. “난 공부도, 취미도, 운동도 잘 하는 게 아무것도 없어!” 그러자 아이는 친구의 어깨를 손을 얹으며 공감한다는 듯이 말합니다. “그러게 말야.” 친구의 얼굴이 더 붉어집니다. 민망함과 당혹스러움을 안고 집에 돌아온 딸이 엄마에게 따지듯이 말합니다. “‘그렇지 않아’라는 말도 ‘나는 너의 편’이라는 뜻이 된다는 거, 엄마는 알고 있었어?”(한겨레신문, 2010년 4월 21일)

잘 분별해서 사용하면 ‘그러게 말야’, ‘그렇지 않아’라는 말만으로도 우리는 우정의 공간을 창조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세상을 지배하는 것이 돈이 아님을, 우정에 바탕을 둔 삶이 가능함을 증거해야 합니다. 교회는 환대와 사랑과 우정이 자라는 묘판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는 이 세상이 가치 있다고 여기는 것보다 더 소중한 무엇이 있음을 끝없이 상기시켜야 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고, 또 문을 열 때 새로운 세상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 꿈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전령들이 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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