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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이 싸움이 다하기까지 선봉에 서서! (민 3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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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싸움이 다하기까지 선봉에 서서! (민 32:1-27) 


1. 지금보다 더 열심히, 더 많이 …!

성도 여러분, 여러분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다가 다른 일을 더 추가해서 하라고 한다면, 부담이 되시겠죠? 또 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일을 하라고 하면, 정말 싫으시겠죠? 주일에 교회 오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그렇게 온 교회에서 목사로부터 ‘어디든 무엇이든 한 가지 정도는 봉사하라’고 강요하는 듯한 소리를 들을 때, 그 소리가 정말 듣기 싫지는 않으십니까? 거기다가 직장에서 기존 신우회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거나, 더 나아가 직장에서 성경공부 소그룹을 인도하고, 신우회가 없는 직장에서는 ‘신우회를 조직하라’고 한다면, 아마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일만해도 버겁고, 오늘에까지 오느라 이미 몸과 마음은 지쳐있는데, 무엇을 새로이 시작하며, 주일에 쉬지는 못할망정 교회에서 봉사까지 하는 것은 무리라는 생각, ‘직장 신우회 참여나 성경공부 소그룹을 맡으라’는 말은 고달픈 직장인들을 향해 ‘일찍 죽으라’는 소리와 같다고 여기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오늘 본문을 보시면, 이러한 요청을 무리라고 여기는 태도야 말로 자신과 다른 사람을 더 힘들게 만드는 것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주목하고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2. 야성(野性) 있는 성도

1) 쉽게, 편하게 살려는 사람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을 지나 모압 경계지역, 그러니까 요단강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약속의 땅 가나안의 입구인 여리고가 바라보이는 곳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출애굽 제2세대들에게 <가나안 오리엔테이션>을 실시했고,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승리하여 에돔을 제외한 요단 동편 지역을 거의 다 정복하는 등 가나안 입성을 앞두고 戰列을 가다듬고 있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때, 생각지 못했던 돌발적인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은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가 모세와 지도자들에게 요단 동편 땅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청한 일이었습니다(1~5). 

이 일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칫하면 그로 인해 이스라엘에 분열이 일어날 수 있었고, 그 이상의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가축 떼를 소유한 르우벤과 갓 지파는 요단 동편 땅이 탐이 났습니다. 왜냐하면 요단강의 동쪽은 넓은 평원에 넉넉한 목초지로 되어 있어 목축을 하기에는 더할 수 없이 적당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두 지파는 “아다롯과 디본과 야셀과 니므라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스밤과 느보와 브온(3)”, 즉 요단 동편 지역을 자신들에게 달라고 요청한 것이죠. 물론 다른 지파 역시 그 땅에 욕심을 내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大業에 몰두해 있었는지라, 그것을 밖으로 표출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같은 진영에 속하여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르우벤과 갓은 그 땅에 욕심을 내었는데, 아마 거기에는 르우벤 지파가 장손이라는 권위 의식이 작용했을 것이고, 또 곁에 있던 갓 지파가 부추겼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르우벤과 갓 지파의 대표들은 모세, 대제사장 엘르아살, 그리고 각 지파의 지도자들에게 요단 동편 땅을 요구하면서 말하기를 ‘자신들이 다른 지파들보다 더 많은 가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르우벤과 갓 자손의 요구에 대해 모세는 대단히 화를 내면서 책망했습니다(6~15). ➀ “너희 형제들은 싸우러 가거늘 너희는 여기 앉아 있고자 하느냐(6)?” 그들의 요청은 한 마디로 “여기가 좋으니 저희는 그대로 여기 머물면 안 될까요?”였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들의 원래 목적지는 어디입니까? 가나안입니다.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오래 전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에 따른 것이고, 또 그것 때문에 애굽에서 나와서 지난 40년 동안 광야에서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 원래의 목적지와 지난날의 고생을 다 외면한 채 중도에 포기하려고 한 것이죠. 

➁ 그들의 요구가 잘못된 이유는 그것만이 아닙니다. 그들의 요구는 ‘이스라엘 자손을 낙심하게 만들어서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주신 땅으로 건너갈 수 없게 하는 행동’이었습니다(7). 여기서 ‘낙심하게 한다’는 말은 ‘거부하다, 방해하다’는 뜻입니다. 즉 그들의 요구는 다른 형제들로 하여금 ‘가나안을 점령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본격적인 정복 사업은 사실 아직 시작도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요단 동편에 눌러앉아 버리겠다고 고집하면, 이스라엘 전체의 戰力은 약화될 것이 뻔하고, 다른 지파들 역시 어렵고 힘든 가나안 정복 전쟁을 회피하게 될 것이고, 어찌하든지 쉽고 편한 것을 택하여 적당히 자리 잡을 생각만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결국 가나안 정복 사업은 무산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 모세가 화를 낼만 하지 않습니까?

➂ 모세가 화를 내면서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을 책망한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행동이 40년 전 “가데스바네아 반역 사건”과 같았기 때문입니다(8절 이하). 왜 그렇습니까? 출애굽 직후, 가데스바네아에서 가나안 땅을 점탕하라고 보냈던 열 두 정탐꾼 중 열 명의 보고는 全 이스라엘로 낙심하고 절망하게 하여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게 만들었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약속을 믿지 못하는 결과를 낳아, 결국 ‘모세가 아닌 다른 지도자를 세워 애굽으로 다시 돌아가자’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이스라엘에 대해 얼마나 진노하셨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데스바네아의 불신과 반역 때문에 38년 동안 광야를 ‘돌고, 돌고, 다시 또 돌다가’ 죽어갔습니다. 걷다보면 지난 번 그 자리, 또 걷다보면 할아버지를 묻었던 곳, 다시 돌면 아버지를 묻었던 곳 …. 이것이 가데스바네아 사건의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광야 40년이 이제 막 끝났는데, 끝나자마자 또 다시 그와 같은 상황을 갓 자손과 르우벤 자손이 벌이고 있었으니, 어찌 모세가 화를 내지 않겠습니까? “보라, 너희는 너희의 조상의 대를 이어 일어난 죄인의 무리로서 이스라엘을 향하신 여호와의 노를 더욱 심하게 하는도다. 

너희가 만일 돌이켜 여호와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다시 이 백성을 광야에 버리시리니 그리하면 너희가 이 모든 백성을 멸망시키리라(14,15).” 지금 르우벤과 갓 자손의 모습은 바로 가데스바네아 열 정탐꾼의 죄요, 그들의 부추김을 받아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서 밤새 울다가 결국 하나님과 약속의 땅에서 “뒤돌아”를 한 그 부모 세대 사람들과 똑 같은 죄를 범하는 행동이라고 모세는 책망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누구나 쉽고 편하게 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르우벤과 갓 자손이 가졌던 그 욕망은 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습니다. 

➊ 그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들은 성도의 삶은 한 곳에 머물러 정착하는 것이 아님을 잊었습니다. 지난 광야 생활이 너무 힘들고 지쳐서 이제는 어디든 맘에 드는 곳만 있으면 그대로 주저앉고 싶은 욕망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변화산상에서 변모하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의 만남을 본 베드로가 “여기가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와 엘리아를 위하여, 하나는 저희를 위하여 …”라고 했을 때, 즉각적으로 들려온 성부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이었습니까? “너희는 예수의 말만 들어라.”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그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오늘도 많은 성도들이 ‘여기가 좋습니다.’ ‘편한 곳이 좋습니다.’ ‘제가 만족할 수 있으니 이 정도면 되었습니다.’ ‘일이 많아지고 복잡해지는 것은 원치 않습니다.’ 라고 하면서 그대로 안주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성도는 안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성도는 나아가는 사람들, 최종 목적지인 천국에 이를 때까지 前進, 또 前進하는 사람인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➋ 르우벤과 갓 자손의 요구와 행동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문제는 이스라엘이 가나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은 단순히 땅을 차지하고 기업을 분배하기 위함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넓은 땅을 차지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하나님은 애굽 땅을 차지하도록 해 주었을 것입니다. 굳이 가나안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미디안과 모압 땅을 교두보로 하여 요단 동편 땅을 차지하게 해 주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그곳이 약속의 땅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획과 목적이 실현되어야 할 곳이기 때문에, 그리고 죄악으로 가득 찬 가나안 족속을 몰아내고 거기에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거룩한 싸움이고, 영적인 싸움이었습니다. 르우벤과 갓 자손들은 이러한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도 르우벤과 갓 자손의 오류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이 땅에서의 삶이 단순히 먹고 살기 위한 것, 자녀들 공부시키고 가족들 부양하기 위한 것, 번듯한 집 하나와 약간의 재산을 마련하기 위한 것, 노후 대책을 위한 것, … 등 그 정도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도의 삶은 그 이상입니다. 지난 주간, 저는 서울에서 한 직장인을 만나 직장 생활의 고충과 그리스도인으로서 직장 안에서 버텨내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들었습니다. 

‘실적을 쌓아라.’ ‘우리 회사는 실적으로 회사에 기여하는 사람을 원한다. 그러지 못한 인간들은 당장 나가라!’ 이런 노골적인 분위기에서 선후배와 경쟁해야하고, 또 승진 시험을 쳐야하고, 상사들 눈에 들기 위하여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비공식적인 접촉과 접대를 해야 하고, 또 고객들을 유치하기 위하여 술자리 접대와 골프 접대 등으로 주말을 다 보내야 하고 …. 그러는 동안에 어느새 중년을 넘긴 부인은 각종 부인병을 비롯하여 심각한 병에 들어서 집안 분위기는 엉망이고, 잘 자라 줄줄 알았던 자식들은 아빠 탓 엄마 탓하면서 제 마음대로 살고 …. 그래서 그 분은 말하기를 “사는 것이 힘들다. 

크리스천으로서 직장에서 버티기는 더더욱 힘들다. 이 직장에서 나오면 앞으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살지?”라고 했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불쌍했습니다. 그리고 그분처럼 사는 성도 여러분들이 정말 존경스러워졌습니다. 그렇지만 여러분! 아무리 여러분이 힘들게 이 세상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전부가 아님을 아셔야 합니다. 직장인의 애환을 몰라주는 목사의 말이라고 여기지 마십시오. 성도는 세상에서와 직장에서 거룩한 싸움을 싸워야 하는 영적인 군사들입니다. 그런데 그 군사가 자신이 군사라는 의식과 당면한 전투에 대한 생각은 전혀 없이 ‘그냥 이대로 살게 해 주세요. 우리 형편에 맞게 적당하게 살겠습니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바로 르우벤과 갓 자손의 죄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싸움의 선봉에 서야 하는 사람들 

16절부터 18절에는 이러한 모세의 질책에 가책을 받은 르우벤과 갓 지파가 제시한 협상안이 나옵니다. ‘➊ 저희의 제안을 허락만 해주신다면 이 땅에 부녀자들과 아이들을 위하여 성읍을 건축하고, 가축 떼를 위하여 우리를 지은 뒤, 저희 모든 장정들은 다른 지파 사람들과 동행하겠습니다. ➋ 그리고 단순한 동행이 아니라 백성의 先頭에 서겠습니다. ➌ 그래서 이스라엘 전 지파가 자기 기업을 다 차지하기까지 싸우겠습니다. ➍ 그리고 전쟁이 다 끝나면 거기서 단 한 평의 땅도 요구하지 않고 그대로 이 땅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의 이러한 대답을 들은 모세는 20절부터 23절에서 그들의 제안을 승낙했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 앞에서 약속을 했으므로, 만일 모든 이스라엘 지파보다 더 용감하게 싸우지 않는다든지, 정복 전쟁이 끝나기 전에 돌아간다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징계를 내리시리라’고 경고했습니다. 그러면서 두 지파의 의무를 다시 한 번 상기시켰습니다. ‘이스라엘의 先鋒에 서서 싸우라!’ ‘이 전쟁이 끝나기까지 가족들에게로 돌아올 수 없다.’ 그러고 나서 모세는 “제사장 엘르아살과 눈의 아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각 지파 지도자들에게” 이 사실을 확인시키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부분에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르우벤과 갓 사람들의 변화입니다. 그들이 결단하고 선언한 것은 ‘이 전쟁이 끝나기까지 헌신하겠다’는 것이고, ‘전투의 선봉에 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先鋒隊가 얼마나 위험한 지 아십니까? 옛날 전투에서 선봉에 서는 보병 소대와 그 소대장인 소위는 가장 먼저 죽었습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군에서는 적군의 총알이 “쏘위 쏘위”라고 날아와 소대장만 죽였다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또한 先鋒隊가 위험하다는 것은 우리 역사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6·25 한국전쟁> 당시, 낙동강까지 밀린 우리 군은 마지막 도시인 부산까지 함락되려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군은 북한군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낙동강 전선을 잘 지켜냈고, 그런 상황에서 맥아더 장군은 아주 위험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인천상륙작전을 결단한 것입니다.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거라고 했던 이 작전이 성공하여, 9월 18일에 인천을 점령하고, 10일 후인 28일에 서울을 되찾았습니다. 

그해 10월 1일에는 ‘북위 38도선’까지 진격했고, 10월 19일에는 평양까지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대로 치고 올라가 압록강까지 진격했습니다. 그때 우리 군과 UN군은 통일과 종전의 꿈에 부풀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중국이 이 전쟁에 불법으로 개입했습니다. 당시 중공군의 1차 선봉대는 6만 명이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이 6만 명의 사명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싸워 이기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군과 UN 군이 자신들로 인하여 전투에 질리도록, 싸우다가 지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 의도대로 우리 군과 UN 군은 총탄과 포탄이 다 떨어지도록 총을 쏘고 포를 쏘았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꾸역꾸역 밀려왔습니다. 그 전투의 생존자의 증언을 들어보면, ‘아무리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격을 해도 중공군은 계속 몰려왔으며, 나중에는 그들의 시체를 쌓아놓고 벽을 만들어 싸우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 선봉에 선다는 것은 이런 의미입니다. 즉 르우벤 자손과 갓 자손이 처음에는 가나안 정복 전쟁의 의미, 거룩한 싸움의 사명, 다른 형제들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이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선봉에 서서 죽을 각오까지 하면서 끝까지 함께 하겠다고 결단한 것이 놀라운 변화라는 것이죠. 오늘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모습도 바로 이것입니다. 

지난 주간, 한 직장인을 만나 그의 哀歡을 들으면서, 여러분들이 대견스럽고, 존경스러워졌습니다. 아니, 여러분이 불쌍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분을 위로해야 되겠다, 여러분에게 더 이상의 요구는 하지 말아야겠다, 그리고 교회 와서 예배 시간에 조는 분이 있다면 더 깊은 잠에 들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뭐라고 말합니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는 주일날 교회 와서 더 강해져야 하고, 더 단단해져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교회의 훈련과 봉사와 섬김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것이 여러분이 더 “쎄지는 길”이기 때문이죠. 아버지의 집에서 강해지지 않으면 어떻게 세상에서 강하게 살겠습니까?

3) 野性 있는 强한 그리스도인 

지난 구정 연휴, 어느 텔레비전에서 <돼지 젖을 먹는 호랑이>와 <어미 호랑이와 돼지 새끼>라는 특집 다큐멘터리를 방영했습니다. 사실 호랑이 새끼가 어미 돼지의 젖을 먹으면서 자란다는 태국 방콕 남부의 <타이거 쥬>라는 동물원 이야기는 오래 전부터 알려진 것이었습니다. 동물원 측에 의하면, 새끼를 갓 낳은 어미 호랑이가 조류 독감에 오염된 닭을 먹고 죽자, 마침 새끼를 낳은 돼지의 젖을 호랑이 새끼들이 먹도록 시도했는데, 다행히 호랑이 새끼들이 돼지 젖을 먹고 잘 자란 것이 그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것은 돼지 젖을 먹고 자란 호랑이가 어미가 된 경우, 그 어미 호랑이에게 돼지 새끼들이 다가가 젖을 빨면 신기하게도 거부하거나 잡아먹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육사는 호랑이에게 있어서 새끼 돼지는 한 끼 식사에 불과한데도, 돼지 젖을 먹고 자란 호랑이는 온순해져서 단 한 번도 새끼 돼지를 해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호랑이가 호랑이의 본성을 잃은 것이 왠지 씁쓸하지 않습니까? 

어느 분은 이것을 들어 “호랑이와 돼지가 함께 동거하는 것은 야성의 상실”이라고 했습니다. 호랑이가 자신의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이죠. 하나님은 야생 동물을 만드셔서 산과 들에서 제 본성대로 살도록 하셨습니다. 그 야생 동물 가운데 호랑이를 ‘百獸의 王’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야성을 가진 동물들 가운데 최고라는 말이죠. 그런데 그 호랑이가 야성을 버리고 돼지와 한 울타리 안에 있으면서 돼지의 젖을 빨고, 돼지가 호랑이의 젖을 빨기도 하는 것은 호랑이가 호랑이이기를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야성을 잃은 호랑이의 모습은 바로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이고, 또 혹시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아닙니까? 신앙의 야성이 없어져 갑니다. 지성은 많아져 똑똑해져가고, 개성은 다양하여 분방해져 가는데, 정작 중요한 야성은 잃어가고 있습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야성이 없다는 말은 약해 빠져서 싸울 힘을 잃었다는 말이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의 싸움에서, 사탄과의 영적인 싸움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며, 또한 한국교회 전체가 힘을 잃어가고 있다는 말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을 기억하십니까? 그들은 거룩한 야성으로 충만했습니다. 가둬진 공간에서 맹수의 밥이 되어 죽어가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고, 원형 경기장에서 화형을 당해 불에 타 죽어가면서도 주님을 찬양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야성이었습니다. 한국교회 초창기 역시 마찬가지 아니었습니까? 日帝와 싸우면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는데, 그때만큼 한국 교회가 건강하고 또 부흥한 적이 없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러분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야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먼저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적이 누구이며 그가 지금 어떤 작전으로 전투를 벌이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비록 십자가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을지라도, 사탄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들을 讒訴하고 있습니다(욥1:6~12;2:1~7;계12:10). 사탄은 여전히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이며(엡6:12;단10:20), 지금도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습니다(벧전5:8).” 그리고 성도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고후4:4), 유혹하고(고후2:11), 속이며(고후11:14), 그들의 마음에 시기와 질투와 미움이 가득하게 하고 있습니다(행5:3). 

사탄의 수하들인 타락한 천사들, 즉 더럽고 악한 영인 귀신들도 여전히 성도의 주변과 생각과 마음과 관계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마12:43~45). 그 구체적인 활동은 마치 밀렵꾼들이 야생동물을 잡기위해 올무나 덫을 쳐놓듯이, 성도들의 삶의 길목에 다양한 올무와 덫을 쳐놓는 것입니다. 재물이란 덫, 권력이라는 덫, 명예라는 덫, 그리고 가장 기본적인 인간의 욕망이나 쾌락과 관련된 덫, 또 때로는 시기, 질투, 험담, 이간질, 허영심이란 올무를 쳐놓습니다. 영적인 분별력과 신앙의 야성이 없으면 여지없이 이런 덫이나 올무에 걸려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적을 알고 적의 술수를 파악하여 이 싸움에서 반드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➊ 먼저 주일은 聖守를 뛰어넘어 死守하시기 바랍니다. 사탄의 우선적인 攻略은 여러분이 예배를 소홀히 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든지 예배를 드리지 못하도록 온갖 그럴듯한 핑계를 만들어 줍니다. 처음에는 약하게, 아주 합당한 핑계를 댈 수 있도록, 그리고 빠져도 된다고 생각하는 새벽기도회부터! 그러다가 수요예배 빠지고, 주일밤예배 빠지고, 결국 주일낮예배까지 빠지게 만듭니다. 

➋ 두 번째는 교회와 지도자들과 다른 성도들에 대해 불만을 갖게 하고 불평하게 만듭니다. 목사가 어떻고, 장로가 어떻고, 권사가 어떻고, 아무개가 어떻고, … . 그러다가 교회로부터 등을 돌리게 되지요. 이 모든 것이 사탄의 전략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여러분의 전쟁 당사자인 사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람이 사탄의 주공격 대상이 되는지 아십니까? 현재에 만족하는 사람, 안일하게 사는 성도, 자신의 삶이 영적 전쟁인 것을 잊어버린 성도, 거룩한 사명을 까먹은 성도가 사탄의 우선 공격 대상이라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싸우자, 이기자!

말씀을 맺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3절에서 38절에 보면 “세상이 감당할 수 없었던 믿음의 영웅들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신앙의 야성으로 충만하여 세상의 그 어떤 유혹에도 넘어지지 않았습니다. 명예, 돈, 권세, 혹은 그 어떤 쾌락으로도 그들의 마음을 살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죽을지언정, 주님과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모습이 신앙의 야성으로 가득 찬 모습이지요. 

그런데 혹시 여러분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 아니라 “세상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닙니까? 믿음의 야성이 있어야 환란과 핍박을 이길 수 있습니다. 야성이 있어야 사명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야성이 있어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야성이 있어야 천국을 침노하는 자가 되고, 언약과 약속을 쟁취하고, 축복의 고지에 오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야성이 있는 성도는 주일날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이 자신을 피곤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더 강하게 만드는 것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대로 봉사와 헌신과 훈련을 통하여 더 강하게 되어 한 주간의 삶에서 승리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더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부터 여러분의 모습이 변화된 르우벤과 갓 지파 사람들처럼 믿음의 싸움의 최선봉에 서시기 바랍니다. 오늘부터 뜨거운 믿음, 살아있는 믿음, 불붙는 야성을 회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을 향한 불타는 사랑을 회복하십시오! 주일성수와 예배에 목숨을 거십시오! 봉사와 헌신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의 직장에서 일터 사도로 살아 직장을 복음화하십시오! 그러지 않고 현실에 머문다면, 여러분은 가데스바네아 반역 사건의 주동자와 같이 될 것이고, 그런 여러분으로 인하여 사랑하는 사람들과 주변 사람들과 하나님의 백성들까지 실패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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