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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마음의 쉼을 원하십니까? (마 11:2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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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쉼을 원하십니까? (마 11:25-30) 
 
  
2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26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27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30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제가 중학생 때 외운 시 한편이 있습니다. 김용호 시인의 ‘싹’이란 시입니다. 

이상은 
아름다운 꽃다발을 
가득 실은
쌍두마차였습니다.

현실은
갈가리 찢겨진
두 날개의
장송의 만가였습니다.

아!
내 청춘은
이 두 바위틈에 난
고민의 싹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년들의 고민을 잘 표현한 시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인생을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1. 인생은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범죄한 하와에게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고 하셨고, 아담에게는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는 형벌을 내리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형벌대로 인생은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라고 한 말씀도 사실입니다. 

인생은 한 마디로 ‘수고하는 자들’입니다. 남자도 여자도 어른도 아이도 입버릇처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피곤하다’는 말입니다. 한 어른이 어느 날 아파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유치원 가방을 든 두 여자 아이를 만났습니다. 한 아이가 자기 친구더러 ‘아, 피곤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조금 어이가 없어서 그 어른이 물었습니다. ‘뭐가 그리 피곤하니?’ 그랬더니 “아저씨, 유치원 갔다 와서 피아노 치러 가고, 미술 학원에 가고, 영어 학원에 가고, 무용학원에 가는데 어떻게 안 피곤해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아이에게 “응, 그래? 굉장히 피곤하겠구나!”라고 말하는 사이 어린 소녀는 엘리베이터에서 바삐 내렸습니다. 짐작하건대 그 아이는 집에서 제 부모가 늘 입버릇처럼 ‘아 피곤해’ 하는 말을 듣고 배운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현대인은 수고하며 피곤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직장은 노사 때문에, 학원은 분규 때문에, 정치는 당리당략 때문에, 세계는 대립과 갈등 때문에, 그리고 개인은 영혼의 평화를 찾지 못한 아픔 때문에 피곤합니다. 그래서 전 1: 8절에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은 사람이 말로 다 말할 수 없나니”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인생들에게 쌓여가는 것은 ‘스트레스’뿐입니다. ‘스트레스’라는 말은 현대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말 중의 하나입니다. 현대 의학에 있어서 이 ‘스트레스’가 원인이 되어서 발생한 ‘신경성’자가 붙은 병명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개개인의 질병을 볼 때 많은 병들의 80-90%는 심인성 즉, 마음으로 오고 또 악화되기도 한다고 합니다. 즉 모든 병의 근원이 사고로 인한 질병이 아닌 다음에는 거의가 ‘스트레스’에 의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이 ‘스트레스’는 고혈압, 신경통 같은 소위 현대병이요 성인병의 제일 큰 원인이 된다고 합니다. 사실 ‘스트레스’를 받으면 면역이 저하된다는 것도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어떻든 인간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수고의 짐을 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혹자는 율법을 지켜야만 온전한 구원에 이르는 줄 알고, 부지런히 율법적인 생활을 하므로 피곤합니다. 또한 혹자는 세상의 안락과 명예와 이익을 얻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줄로 믿고서, 이 일에 날마다 수고스럽습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게 될까? 어떤 방법으로 힘써야 더 큰 명예를 차지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쉴 날이 없습니다.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피곤한 일이라도, 아무리 위험한 일이라도, 아무리 악한 일이라 할지라도 덤벼드는 것이 어리석은 인간의 생리요 모습입니다. 그래서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항상 피곤한 인생입니다. 

2. 인생은 무거운 짐을 진 자들입니다.

기독교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종교에서 인생의 무거운 짐에 대하여 인정을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인생을 ‘고해’라고 부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무덤 속에서는 안식이 있을지 모르지만, 무덤 곁에는 안식이 없다.”고 했습니다. 죽어 무덤에 묻힌 인생도 아니고, 그렇다고 살아있는 인생도 아닌 그러한 인생의 고뇌를 말했습니다. 신학자 폴 틸릭은 인간에게 있는 세 가지 불안을 말하였습니다. 존재의 불안, 양심의 불안, 죽음의 불안이 그것입니다. 인간은 장래에 대한 불안과, 지난날에 대한 끝없는 후회의 짐으로 마음이 가벼울 날이 거의 없습니다. 

때로는 힘겨운 질병의 짐을 지고 전전긍긍해야 하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죽음에 대한 공포를 떨쳐 버릴 수 없습니다. 자신의 신분에 걸 맞는 모습을 갖추기 위해 날이면 날마다 살얼음을 걷듯이 조심 조심의 길을 가야하며, 억울한 일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 분노와 슬픔의 짐에 마음은 편한 날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들은 언제나 가난을 벗어나야 한다는 강박감으로 억척같은 마음의 짐을 지고, 젊은이들은 성공에 대한 야망으로 몸과 마음을 쉼 없이 혹사시킵니다. 인생이 짐이고 일생이 모두가 짐입니다.

시지프스의 신화란 것이 있습니다. 죽기 싫어서 신들을 속이고 오래 살아남았다가 지옥으로 간 시지프스는 죽어서도 벌을 받게 됩니다. 즉 커다란 바윗돌을 등에 지고 산꼭대기로 올려놓는 벌입니다.(동영상-시지프스의 신화) 죽을힘을 다하여 산꼭대기로 돌을 올려놓으면 돌은 그 무게 때문에 다시 산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그러면 시지프스는 또 다시 그 바윗돌을 산꼭대기로 올려놓아야 합니다. 또 굴러 떨어집니다. 또 올려놓습니다. 그 일을 영원토록 반복해야 합니다. 이것이 그의 숙명입니다. 우리 인간도 어쩌면 그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죄 짐보다 더 무거운 짐이 없습니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죄 짐을 지고 허덕이다 결국은 영원한 지옥 형벌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비참한 존재인 것이 사실입니다.

3. 주님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인생 자체가 모두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인생들인데, 도대체 그 누가 인생의 이 무거운 짐들을 해결해 줄 수 있단 말입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공자도 절대로 할 수 없고, 석가도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오직 무덤 속에 갇혀 있지 않고 사망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만이 이 말씀을 하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첫마디 말씀은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간절히 호소하는 말씀은 ‘오라’라는 한마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서도 우리를 향하여 ‘오라’하고 부르짖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수많은 간판의 네온사인들이, 백화점들이, 장사하는 사람들이, 병원들이, 변호사들이 모두들 우리를 향해서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그 음성의 뒤를 가만히 살펴보면 거기에는 언제나 어떤 조건이 뒤따릅니다. “오시오. 그러나 돈 없는 사람은 오지 마시오.”라는 조건이 따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라고 하시는 그 말씀은 세상의 음성과는 다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원자이며 영생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이 예수님께서 두루 다니시면서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살려달라고 애타게 부르짖는 심정으로 ‘오라’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기를 원하시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인간을 살려주실 그 분이 ‘오라!’고 우리를 향해 호소하고 계십니다. 신구약 성경 66권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하여 ‘오라’고 하시는 초청장입니다. “오호라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너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그리하면 너희 영혼이 살리라.”

두 번째 예수님의 말씀은 ‘다 내게로 오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오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도 다 오라고 부르짖는 곳이 많지만, 막상 가보면 일부만 갈 수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알게 모르게 우리를 우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인간을 위하여 모든 것을 이미 내어놓으신 예수님께서는 아무 조건도 내세우지 않으시고 ‘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원의 대상인 인간을 향하여 예수님은 좋다 나쁘다를 따지지를 않으십니다.

세 번째 예수님이 우리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이 내게는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초청에서 제외 당하게 됩니다. “내 영혼아,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기자”고 배를 두드리고 사는 어리석은 자들에게는, 이 구원의 초청이 적용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정신적인 수고와 마음의 무거운 짐, 육신의 무거운 짐에 짓눌려 있는 사람을 부르고 계십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부르시면서 단 한 가지 일로 근심하고 계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지고 있으면서도, 이 부르는 음성을 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쩌나하고 근심하십니다. 주님은 사람이 너무 많이 올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열려진 마음이 있는 곳에는 넓은 장소가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을 열기만 하면 그 안에 누구나 용납할 수 있는 넓은 장소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류를 구원하신 예수님이시기에, 전 인류를 품을 수 있는 넓은 장소가 그 예수님 안에 있습니다. 그 주님께서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의 의사들은 한사람의 환자 곁에만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병원에 입원해 보면 알지만 담당 의사를 만나기가 퍽이나 힘이 듭니다. 그러나 만병의 대의사이신 우리 주님은 환자라고는 단 한명밖에 없는 의사처럼 우리 각자를 대우해 주십니다. 다른 사람을 치료하기 위하여 내 곁을 떠나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환자 곁에, 그리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는 그분 곁에 언제나 머물러 있을 수가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나 담대 하라. 내가 세상을 이겼노라.”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하는 이 말씀을 믿고 주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이미 하늘의 힘을 얻고 사는 사람이며, 주님의 위로와 평안을 맛보고 사는 사람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멸시를 받는 자, 경멸당하는 자, 짐승만큼의 대우도 받지 못하는 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자를 부르고 계십니다. 육신의 병든 자도 다 오라고 부르십니다. 마음에 병든 자, 고통 속에 사는 것이 숙명이라고 생각하는 자, 자기의 불성실로 인하여 고민하는 자, 학대받고 천대받는 자, 선을 베풀었으나 악으로 보상받는 자, 모략과 이기심과 시기심의 제물이 된 자, 비겁하고 비열한 자들로부터 버림받은 자,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느끼는 자,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마음이 허전한 자, 없는 것 없이 차려놓고 살지만 왠지 모르게 텅 빈 곳이 많은 자들을 향해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고 주님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강하게 초청하고 계십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을 부르시되 “내게 오는 자는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더욱 풍성한 삶’을 주시겠다고 보장하십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복음입니다. 

예수님의 오라는 초청을 받고 주님께 나와서 열심히 회개의 기도를 드리고 죄의 짐을 다 내려놓았다가 갈 때는 다시 싸가지고 가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지 모릅니다. 그리곤 다음에 와서 또 회개를 합니다. 용서받은 똑같은 죄를 가지고 와서 반복하여 회개를 합니다. 불신앙이 따로 없습니다. 죄 용서함에 대한 확신이 없는 것 그것이 불신앙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중심으로 죄를 회개하고 믿는 이들은 이미 죄 사함을 받았습니다. 죄의 짐은 이미 벗겨졌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약속을 믿고 과거의 모든 죄의 짐은 벗어 놓으시기 바랍니다. “죄악 벗은 우리 영혼이 기뻐 뛰며 주를 보겠네.”하며 기뻐 뛰며 찬송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무거운 죄 짐을 내려놓고, 용서 받고 구원 받고 그래서 마음의 쉼을 얻는 일은, 배움이나 노력으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됩니다. 그런데 우리가 마음의 평안과 쉼을 얻기 위해서 꼭 배워야 할 것이 또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는 일입니다. 주님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신 후,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무거운 죄 짐, 죄 문제는 우리가 주님께로 와서 다 해결을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마음의 참 평안과 쉼을 누려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안식과 쉼이 없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 때문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인간관계의 갈등은 우리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해서 비롯되는 것임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하셨습니다.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라고 하셨습니다. 즉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야 우리 마음이 쉼을 얻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저는 종종 그리스도인이 교회 학교에서 예수 선생님께 배워야 할 필수과목이 있는데, 그것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예수 믿은 지 십년이 되고 이십년이 되어도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우지 못하면 그는 영적인 지진아라고 했습니다. 

온유란 무엇을 의미할까요?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온유를 무력함 내지 무저항을 의미하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습니다. 온유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온유란 우리 성도가 하나님께 길들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가르침을 잘 듣고, 배우며, 순복하고, 의지하며,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가 성령의 가르치심과 연단을 받아 온유하게 되면 될수록, 삶의 짐은 더욱더 가벼워지고 쉬워지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음에 참 평안과 안식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배워야 합니다. 실로 그분은 하나님의 본체이시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이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진정 그분의 겸손을 배울 때, 사람이나 환경에 의해 흔들리지 않는 참 평안을 지속적으로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의 진정한 행복과 축복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쉼을 얻는 것이 진정한 행복이고 축복일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이 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주경가 깁슨은 “주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신다는 뜻이기보다는 주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 되신다는 뜻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우리의 안식이요 우리의 영원한 쉼터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어떤 공원이나 놀이터가 우리의 쉼터인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그 넓고 큰 품이 우리의 쉼터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영원히 그리고 참된 쉼을 얻으려면 인생의 쉼터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 품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찬송 작가 쿠싱은 

♪주 날개 밑 내가 편안히 쉬네. 밤 깊고 비바람 불어쳐도 
아버지께서 날 지키시리니, 거기서 편안히 쉬리로다.
주 날개 밑 나의 피난처 되니 거기서 쉬기를 원하노라.
세상이 나를 못 위로해 주나, 거기서 평화를 누리리라.
주 날개 밑 참된 기쁨이 있네. 고달픈 세상 길 가는 동안 
나 거기 숨어 돌보심을 받고, 영원한 안식을 얻으리라.♪고 노래했습니다. 

고달픈 인생길을 걷다가 쉴 곳이 있습니다. 지치고 쓰러졌을 때 찾아가 쉴 곳이 있습니다. 패배와 절망의 골짜기를 지나 찾아갈 쉼터가 있습니다. 그곳은 바로 예수님의 넓은 가슴입니다. 그 주님의 품에서 돌보심을 받고 영혼의 안식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온유와 겸손을 배워서, 모든 인간관계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안과 쉼을 누리게 되시기를, 평강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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