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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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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막 5:25-34)

(막5:25-34) 열 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한 여자가 있어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뒤로 와서 그의 옷에 손을 대니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이에 그의 혈루 근원이 곧 마르매 병이 나은 줄을 몸에 깨달으니라.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무리 가운데서 돌이켜 말씀하시 되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시니 제자들이 여짜오되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게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 하되 예수께서 이 일 행한 여자를 보려고 둘러 보시니 여자가 제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짜온대 예수께서 가라사대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1. 한때 음악가의 꿈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베르디가 음악가로서 명성을 떨친 것은 오페라 <나부코(Nabucco)>부터였습니다. 

<나부코>는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을 이탈리아식으로 줄여서 부른 이름입니다. 베르디는 다음 작품 <왕국의 하루> 오페라의 완전한 실패로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무렵 부인과 아들의 연이은 죽음을 겪었습니다. 낙담한 베르디는 두문불출하고 있었는데, ‘라 스칼라’ 극장 주인 메렐리는 재능 있는 작곡가의 좌절을 그대로 둘 수가 없었습니다. 실의에 빠진 그에게 작곡 의욕이 솟을 만한 대본을 구했습니다. 메렐리는 <나부코>의 대본을 베르디의 책상 위에 슬그머니 두고 왔습니다. 

어느 날 베르디는 낯선 대본을 펼쳐 보다가 눈에 번쩍 띄는 구절을 발견했습니다. 전체 내용은 구약성경 열왕기하편에 나오는 것으로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게 잡혀간 유대인들이 포로생활의 압제에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살아가는 이야기였습니다. 고통과 환난 중에서도 선민(選民)의식과 신앙을 잃지 않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려는 그들의 강인한 결속력에 베르디 스스로 감동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베르디는 조국을 그리며 자유를 구가하는 대본 가사에 빠져들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멜로디를 붙여 나가게 되었던 것입니다. 특히 3막의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유대인들이 유프라테스강변에서 노역하면서 옛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부르는 합창곡으로 더욱 유명합니다. “날아라. 상념이여! 금빛 날개를 타고.?그리하여 산들바람이 불고 감미로운 향기가 넘실대는 조국의 초원과 언덕에 머물거라! 요단강 강변은 잘 있느냐, 인사하고 시온의 무너진?건물에도 인사하라. 아, 아름다운 조국이여, 빼앗긴 조국이여! 가슴 속에 사무치는 옛 추억이여!...예루살렘의 운명을 애절한?노래로 불러다오. 하나님이 네게 주신 노래는 고통받는 우리에게 용기를 불어넣으리라.” 

1842년 3월 9일 밀라노의 스칼라극장에서 초연된 <나부코>는 때마침 오스트리아의 압정 하에 있었던 밀라노 사람들에게 강렬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포로민 유대인들과 자신들을 같은 처지로 여기고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국가(國歌)처럼 불렀던 것입니다. 그 노래는 절망과 우수에 빠져 있던 이탈리아 국민들에게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습니다. 

<나부코>는 그 후 무려 67회나 연속 상연될 정도로 오페라 팬들을 열광시켰는데, 특히 제 3막에서 부르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은 단번에 이탈리아 국민들을 사로잡아 버렸습니다. <나부코>는 당시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고 있던 북이탈리아 국민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나아가 통일을 이룩하는 큰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습니다. 실패와 절망에 빠져 좌절하고 있던 베르디가 고난 받는 이스라엘 역사 속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주께서 우리를 사랑하여(O t'ispiri il Signore un concento) 굳건한 용기를 주리라.(Che ne infonda al patire virtu!)”는 ‘히브리 노예들의 합창’을 노래하며 일어서, 자신과 더불어 좌절에 빠진 이태리 국민에게 치유와 희망의 날개를 달아주었습니다. 


2. 오늘 본문은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아 절망에 빠진 한 여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옷자락에 손을 대어 치유되고 구원받은 이야기입니다. ‘혈루증’은 문둥병 다음으로 저주스러운 난치병으로, 이 병에 걸린 사람은 부정한 사람으로 취급받아 성전 출입이 금지되었습니다.(레15:19-27)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면 그 사람도 부정하게 되기 때문에 사람들과도 철저히 격리되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혈루병자는 신앙생활과 사회 활동으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이 여인이 무려 12년 동안이나 병고(病苦)를 겪으면서 당한 정신적, 신앙적 고통은 육체적 고통보다 더욱 더 처참(悽慘)했던 것을 뜻합니다. 

이를 본문 26절에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많은 의원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있던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중하여졌던 차에” 자신의 병을 고쳐보겠다고 명의(名醫)로 알려진 수많은 의사들을 찾아가 할 수 있는 치료를 다 받았습니다. 또한 좋은 약이라면 한약, 양약, 민간요법 등 가리지 아니하고 다 먹어보았습니다. 어느 구름에 비 올지 모른다는 심정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처방을 받느라 재산과 재물을 모두 허비하고 말았습니다. 

당시 부자가 아니면 의사를 찾아 갈 수 없었던 시대였기 때문에 이 여인의 가정은 어느 정도 부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재산을 치료비로 다 써버리고 빈털터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숱한 치료를 다 받았지만 좋아지기는커녕 오히려 지병이 더 악화되어 고통만 가중되었습니다. 육체적 고통만이 아니라 심리적 고통이 말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자신의 병은 불치병이라는 것, 그래서 당대의 어떠한 의술로도 안된다는 것, 치료비로 전 재산을 다 날렸고 남은 것은 악화되어 날로 고통이 더욱 심해지는 지병, 참으로 인간적인 모든 수고가 허사로 돌아갔다는 절망 가운데 이 여인 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절망과 고통, 그리고 그로인한 고독에 몸서리치는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여인에게 한 조각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3년 가뭄으로 고통당할 때에 엘리야가 무릎 사이에 얼굴을 넣고 일곱 번 기도 끝에 손바닥만한 작은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 보이듯(왕상18:41-46) 한 조각 구름이 피어올랐습니다. 어둠 속에 한 줄기 빛이 비추이듯 눈이 번쩍 뜨이는 너무나 좋은 ‘소문’,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더 이상 쓸 돈도 없지만 인생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이 여인에게 ‘예수의 소문’은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그 혈루증의 여인은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큰 광풍에 예수의 제자들이 탄 배가 침몰 위기에 빠졌을 때, 바람을 잔잔케 하시고 바다를 고요하게 하셨던 ‘예수 그리스도의 소문’(막4:35-41), 거라사 지방에 더러운 귀신이 들려 사람들이 고랑과 쇠사슬로 매어놓았지만 번번이 쇠사슬을 끊고 고랑을 깨뜨려 아무도 그를 제어할 수 없게 된 사람에게서 귀신을 쫓아내 고치신 ‘예수의 소문’(막5:1-20), 다시 배를 타시고 맞은편으로 건너가시어 회당장 야이로의 죽어가는 딸을 고쳐주신 ‘예수의 소문’(막5:21-24) 등을 듣게 것입니다. 

이러한 소문에 큰 무리가 예수를 따라가며 에워싸 밀치고(막5:24) 있는데 이 혈루병 여인도 ‘예수의 소문’을 듣고 그 무리에 끼어들었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뒤로 가서 어떻게 해서라도 그의 옷에 손을 대고자 했습니다. 예수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것이라는 믿음이 강하게 생긴 것입니다. 삶과 존재의 기반이 송두리째 상실된 인간 최악의 한계 상황에서, 더 이상 자기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을 때 ‘예수의 소문’을 듣고 비로소 진정한 구원자 예수를 찾게 된 것입니다. 

왜 이 지경이 다 되기 전에 ‘예수의 소문’을 듣지 않았겠습니까? ‘예수의 소문’을 들었지만, 그 때는 ‘예수’보다 ‘명의’(名醫)와 ‘명약’(名藥)에 더 신뢰가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는 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가까이하며 기대했던 명의와 명약에 전 재산을 날리고, 병은 오히려 더욱 악화되어 인간적인 노력과 수단방법의 한계에 부딪쳤습니다. 이제는 절망 속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마저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 지경이 되고 나서야 그 혈루증 여인은 ‘예수의 소문’이 이제는 자신의 삶에 그야말로 ‘구세주’로 나타난 것입니다. 이러한 그 여인의 애절한 마음,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그 여인의 심정이 이렇게 나타났습니다. 

(막5:28)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 함일러라. 

“함일러라.” 는 표현은 ‘그의 옷에 손만 대어도 나을 수 있다.’ 는 사실을 마음속으로 거듭거듭 되뇌이고 또 되뇌이며 예수께 가까이 다가가고 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그녀는 오직 예수만이 자신의 문제를 해결해 주실 구원자이심이라는 강한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직접 만져주시거나 안수하여 주시지 않고, 자기가 만지기만 하여도, 그것도 예수님의 옷에 대기만 해도 병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믿음, 이 믿음의 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옷자락을 붙잡고자 한 것입니다. 

혈루증이라는 부정한 질병으로 다른 사람과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이었지만, 치유받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과 믿음으로 자신의 병을 감추고 예수의 ‘뒤로’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가만히 대는 행위 역시 율법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를 부정하게 만드는 것입니다.(레 15:19-27) 그

래서 궁여지책으로 ‘뒤로’ 다가가서 아무도 모르게 옷자락을 살짝 ‘터치’(touch)만 하려던 것인데, 옷에 손을 대는 그 순간 ‘혈루의 근원이 곧 말라버렸습니다.’ 그 여인은 자기 스스로 병이 나은 것을 직접 느끼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인의 믿음대로 혈루병이 즉각 치료되었습니다. 예수께 치유를 간청한 적도 없고, 예수께 자신의 믿음을 밝힌 적도 없는 이 여인에게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실로 12년 동안 한시도 그녀의 몸에서 출혈(出血)과 고통이 떠나지 않은 그 지독한 병상(病狀)이 완전히 치유된 것입니다. “혈루의 근원이 마르다.” 는 표현은 일시적으로 출혈이 멈춘 것이 아니라 완벽하게 치료된 것을 말합니다. 이로써 그녀는 12년 동안 자신을 고통스럽게 만들었던 몸과 마음, 그리고 그 영혼의 모든 고통이 한꺼번에 해결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이 여인의 숨겨진 믿음, 마음속 깊이 감추어진 믿음도 기적을 일으킬 수가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예수께서는 이미 이 여인의 모든 행보(行步)를 익히 알고 계셨습니다. 삶의 막다른 골목에서 소리없이 절규하며 자신을 찾아오는 그 여인의 눈물겨운 소원과 남몰래 다가오는 믿음의 행로(行路)를 그 소란한 가운데서도 조용히 기다리며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생의 말과 행동, 마음과 생각, 그리고 그 인격을 모두 아시며 세밀히 감찰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예수께서는 인생의 남모르는 아픔과 슬픔, 그리고 그의 애절한 소원과 그에 따른 모든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아니하시고 잠잠히 보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베푸신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5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식사를 마치자 제자들을 재촉하여 배를 타고 먼저 건너편으로 가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들을 설득하셔서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고 예수께서는 혼자 산에 올라가 밤늦도록 기도하셨습니다. 한편 제자들이 탄 배는 이미 바다 멀리까지 나갔는데, 거세게 휘몰아치는 바람과 파도에 몹시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가 새벽 4시쯤이었는데,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거센 풍랑에 시달리고 있는 제자들을 향해 오셨습니다. 물 위로 걸어오시는 모습에 제자들이 겁에 질려 ‘유령이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 얼른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 마라.”고 말씀하시므로 그들을 안심시켰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배에 오르시자 풍랑이 그쳤습니다. 이러한 모습에 제자들이 예수께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며 경배했습니다. 예수께서 왜 급히 물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셨습니까? 제자들이 소리쳐 예수님을 불렀습니까? 이미 그들이 탄 배는 육안으로 전혀 볼 수 없는 4km밖 갈릴리 바다 먼 곳에서 있었기 때문에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습니다.(요6:19)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이 나중에 ‘진실로 주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고 고백한 것처럼, 하나님의 아들로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보내신 후 산에 올라가 기도하시는 중에도 한시도 제자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놓치지 않으시고 지켜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광풍노도에 시달리던 그 자초지종을 예수님의 사랑의 눈초리는 떠나지 않으시고 항상 함께 하고 계셨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 물 위로 걸어 가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시련에 부딪칠 때도 예수께서는 지켜보고 계시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마14:22-33)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을 잊으시겠습니까? 예수께서 어찌 제자들에게 무관심하시겠습니까? 성도 여러분, 예수께서는 여러분의 고난에 결코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다윗 왕은 이러한 하나님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시139:1-6)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족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전후를 두르시며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그 부정한 여인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익히 알고 계셨지만 그 여인의 숨겨진 믿음을 보시고 그 믿음을 받아들이신 것입니다.


3. 그러나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며 돌아보셨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아주 조용히, 살짝 옷 끝에 손만 대었는데도 그 사실을 아시고 돌아보시며 하시는 말씀에 아마도 그 여인은 당황했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에게서 치유의 능력이 나간 사실과 누가 자신의 옷에 손을 댄 사실을 이미 다 아시고 그렇게 물으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그 능력이 자기에게서 나간 줄을 곧 스스로 아시고’ 라는 말씀은 그 치유의 기적이 자신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 여인은 모든 것을 은밀히, 조용히 심지어 예수마저 모르게 해결하고자 했었지만, 또한 예수께 치유를 간구한 것은 아니었지만 친히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셔서 치유의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물으신 것은 그 여인의 감추어진 믿음을 사람들 앞에 공개하여, 병든 몸이 치유된 것만이 아니라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영육간에 온전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였습니다. 혈루병이라는 부정한 불치병으로 인해 육체적인 고통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당한 정신적인 고통까지도 한꺼번에 완전히 치유코자 하신 말씀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혼잡하고, 또 사람들이 밀고 밀치는 상황에서 누가 옷에 손을 대었는지 어떻게 알겠느냐,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댄 사람이 어디 한 두 사람이겠느냐며 볼멘소리로 ‘군중이 이렇게 밀어닥치는 것을 보시면서 누가 만졌느냐고 물으십니까?’ 하고 반문했습니다. 이 사실은 혈루증을 치유한 사실이 예수와 환자 자신밖에 모른다는 사실, 제자들은 그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을 모르고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그 치유받은 그 여인은 즉각 예수께서 자신을 두고 하신 말씀인 것을 알고 두려워 떨며 예수님 앞에 와서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습니다. 그 여인이 두려워 떨게 된 것은 아마도 자신의 병이 종교적으로 부정한 것이고 따라서 죄인 취급받는 신분이기 때문에 군중들 틈에 끼어들었다는 것을 공개하는 것이 두려웠을 것입니다. 

또는 자신이 지금 받은 치유의 은혜를 예수로부터 훔쳐 낸 것 같은 심령으로 두려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보다 예수님의 옷을 살짝 만지기만 했음에도 죽을 때까지 고치지 못할 것으로 알았던 12년 불치병이 한 순간에 치유되는 예수님의 능력과 권능 앞에 두려운 마음으로 그 앞에 엎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 는 말씀으로 축복하셨습니다. 

그 여인은 나이를 볼 때 예수께서 ‘딸’이라고 부르실 정도로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딸아” 이렇게 부르신 것은 그녀를 지으신 하나님 아버지로써 부르신 것입니다. 이미 그 여인의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자녀로 받으신 것입니다. 이제 부정한 여인이 아니라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여인을 향하여 친히 이렇게 부르신 곳은 복음서 가운데 본문이 유일합니다. 예수께서는 그녀가 예수의 옷자락을 만졌기 때문에 치유의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지닌 “믿음” 때문에 완전히 치유된 것임을 깨우치셨습니다. 여기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란 말씀은 그 여인이 믿음으로 이미 구원받았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와 같이 수많은 군중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그 여인의 구원을 선포하심으로 더 이상 부정한 병자가 아니며, 죄인이 아님을 선언하셨습니다. 아울러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소외당했던 사회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음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예수께서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고 말씀하신 것은 그 여인에게 완전한 치유와 회복을 허락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이 여인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니며 또한 부정한 여인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광야를 사흘이나 걸었지만 마실 물을 얻지 못했다가 마라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마라에서 물을 찾긴 찾았지만 도저히 마실 수 없는 쓴물이었습니다. 이때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한 나무를 가리키시며 그 쓴물에 던지라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나무를 쓴물에 던지니 그 물이 달아졌습니다. 

(출 15: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비록 나무 자체에 물을 맑게 하는 어떤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 할지라도, 그 효력이 갈증에 목이 탄 200만 이스라엘 백성을 충족히 먹게끔 하기에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따라서 여기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는 쓴물을 달게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부정한 것을 정결케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 병든 것을 건강하게 치유하는 하나님의 능력,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을 말합니다. 

마라에서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한 나무’는 영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사람마다, 아니 믿음으로 그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해도 혈루병 여인처럼 인생의 쓴물이 단물로 변화되는 은혜를 받게 됩니다. ‘한 나무’는 달마다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한 하나님 나라의 “생명나무”입니다. 

(계22:1-2) 또 저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서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 나무가 있어 열 두가지 실과를 맺히되 달마다 그 실과를 맺히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소성하기 위하여 있더라. 

엘리사 선지자가 여리고 성에 머물러 있을 때였습니다. 몇몇 여리고 사람들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렇게 어려운 간청을 합니다. ‘선생님도 보시는 바와 같이 이 성읍의 터는 아름다우나 물이 좋지 못하므로 농산물이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이에 엘리사는 새 그릇에 소금을 가득 담아 오게 한 다음 그것을 가지고 물 근원으로 나아가서 소금을 그 가운데 던지며, “여호와의 말씀이 내가 이 물을 고쳤으니 이로 좇아 다시는 죽음이나 토산이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을지니라.” 말하자 그 물이 엘리사의 말대로 좋은 물이 되어 지금까지도 맑고 깨끗합니다.

(왕하2:19-22) ‘소금’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생명의 ‘언약’을 의미합니다.
(대하13: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것이 아니냐

‘소금’이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물이 좋지 못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인생들에게, 열매를 맺기도 전에 떨어지고 마는 인생들에게 다시는 죽음이나 익지 못하고 떨어짐이 없는 인생으로 축복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예수께서 “(마9:12)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고 말씀하신 것처럼 예수님은 실로 모든 질병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실 뿐만 아니라, 죽음에 이르게 하는 죄의 문제,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까지 깨끗이 치유하시고 해결해 주시는 진정한 우리의 치료자, ‘여호와 라파’이십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 소망과 믿음을 가지고 예수께 가까이 하는 신앙생활로 삶의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해결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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